본문 바로가기

歷 史 旅 行 2

(299)
內延山寶鏡寺 내연산보경사(內延山寶鏡寺)  天王門·一周門 등이 있다. 重要文化財로는 圓眞國師碑 (寶物 제252호)와 寶鏡사부도(寶物 제430호)가 있으며, 이밖에 11기의 浮屠가 있다. 大韓佛敎曹溪宗 제11敎區의 本社인 佛國寺의 末寺이다. 四溟大師의 金堂記文에 의하면 西域僧 摩謄과 法蘭이 中國에 가져온 八面鏡을 第子인 日照禪師가 黃海를 건너 解東 땅에 가져와 宗南山 아래에 있는 연못 속에 묻고 메운 다음 절을 지어 寶鏡寺라고 했다 한다. 745년(景德王 4)에는 哲敏이 重創하고, 1214년에는 圓眞國師가 僧房 4동과 正門 등을 重收했다. 1677년에는 道仁이 重創을 始作하여 三尊佛像과 靈山殿의 後佛幀畵를 製作했다. 1725년(英祖 1)에는 性熙와 寬信이 冥府殿을 移建했다. 現存 당우로는 大雄殿· 大寂光殿 ·靈山殿·八相..
花山龍珠寺 용주사(龍珠寺)  龍珠寺는 朝鮮正祖 14년 (1710) 燒失된 갈양사(葛陽寺)옛터에 사도세자(思悼世子)의 陵인 현륭원(顯隆園)에 冥福을 빌어주는 능사(陵寺)로 세운절이다.  曹溪宗의 절로 京畿道 華城市 松山洞 花山에 位置해 있다. 國寶 120호로 指定된 鐘 이 位置해 있다.  이 절은 統一 新羅 時期인 854년에 지어졌고, 元來 이름은 适養寺였다. 高麗 때인 10세기에 擴張되었다. 朝鮮 때에 親아버지인 思悼世子 를 기리기 위해서  正祖의 命으로 18세기에 다시 지어졌다. 本來 龍珠寺는 新羅 文聖王 16년(854년)에 創建된 渴養寺로써 淸淨하고 이름 높은 道場이었으나 丙子胡亂 때 燒失된후 廢寺되었다가 朝鮮時代 제22대 임금인 정조(正祖)가 아버지 思悼世子의 陵을 花山으로 옮기면서 절을 다시 일으켜 願刹로 ..
寧越 (立石.韓半島地形) 영월선돌(寧越立石)   北쪽으로 滿洲땅은 물론 漢江 流域까지 支配하였던 高句麗는 寶藏王 27 年(668 年)에 羅唐 聯合軍과의 戰鬪에서 敗하면서 亡하고 漢江 流域은 新羅의 땅이 되었다. 新羅가 漢江 上流인 東江 流域까지 支配하게 된 것는 6 세기 中般 眞興王 때 부터이다. 東江을 끼고있는 寧越 平昌 정선은 新羅의 三國統一이 完成된 景德王 때 9주 5소경의 하나인 명주군에 束하게 되면서 地名 또한 新羅式으로 大部分 바뀌게 되었다. 東江 周邊의 마을인 수며(水), 갈며(葛), 하며(下) 등은 모두 이 때 생겨난 地名이다. 935년 新羅의 敬順王이 新羅 땅을 高麗에 넘기면서 千年을 넘게 이어 온 三國時代가 막을 내렸다.      선돌(立石) 선돌은 그대로 奇巖과 怪石이 서있는 돌이란 뜻이다. 거대한 塔 模樣으..
國立中央博物館 국립중앙박물관 (國立中央博物館)靑瓷와 粉靑沙器香 文化의 擴散과 함께 發展한 龍泉靑磁 東아시아에 佛敎가 傳來되면서 香 文化도 함께 發展 하였고 이러한 文化는 陶瓷文化의 擴散으로 이어졌다. 香 은 점차 宗敎的인 意味를 벗어나 個人的인 審美의 目的으로도 使用되었으며 室內에 香을 피워 周邊을 淸潔하게 하거나 香을 個人的으로 携帶하기도 하였다. 日本에서는 寺院이나 家庭에서도 香爐.촛대.花甁을 셋트로 粧飾하여 陳列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文化의 定着과 더불어 龍泉靑磁의 需要도 크게 擴大 되었다.  大型 器腫으로 變化한 龍泉靑磁 元代 새로운 支配者의 登場은 龍泉靑磁에도 影響을 주었다. Mongol人이나 이슬람인들은 큰 그릇에 飮食을 담아 먹었고 이에따라 큰 그릇의 龍泉靑磁가 만들어졌다. 이러한 大型 機種의 그릇은 아시..
雲吉山水鐘寺 운길산수종사(雲吉山水鐘寺)  北漢江과 南漢江이 만나는 이곳 雲吉山 水鐘寺는 멀리 新羅時代부터 내려오는 옛 伽藍이다. 高麗太祖 王建이 상서로운 氣運을 좇아 이곳에 이르러 구리鐘을 얻음으로써 부처님의 헤랑을 東海高麗를 建國했다는 傳說이 傳해지는 곳이기도 하다. 世宗 21년에 이르러 世宗의 여섯째아들 錦城大君이 貞懿翁主의 浮屠를 세우고 金製 9층탑 수정舍利函에다  靑瓷항아리를 담아 浮屠안에 모셨다. 1458년 世祖가 두물머리에서  머물다 새벽에 鐘이 울려 올라와 보니 그 鐘소리는 다름아닌 바위굴속에서 물이떨어지는 소리였다 世祖는 굴속에서 18 羅漢을 發見하고 孔德을 쌓았으며 八道傍白에 重創을 名하였다. 道場은 이러힌 緣由에 의해 雲吉山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1459년에 水鐘寺塔을 建立하였다.  운길산수종사..
吐含山佛國寺 千年古都慶州불국사(佛國寺)  慶州 吐含山에 자리잡은 佛國寺는 新羅 景德王 10년(751)에 당시 宰相이었던 金大城이 짓기 시작하여, 惠恭王 10년(774)에 完成하였다. 以後 朝鮮 宣祖 26년(1593)에 倭의 侵入으로 大部分의 建物이 불타버렸다. 以後 極樂殿, 紫霞門, 帆影樓 등의 一部 建物만이 그 命脈을 이어오다가 1969년에서 1973년에 걸친 發掘助事 뒤 復元을 하여 現在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境內에는 統一新羅 時代에 만들어진 多寶塔과, 釋迦塔으로 불리는 3층 石塔, 紫霞門으로 오르는 淸雲·白雲橋, 極樂殿으로 오르는 蓮花·七寶橋가 國寶로 指定, 保存되어 있다. 이러한 文化財는 당시 新羅 사람들의 돌을 다루는 훌륭한 솜씨를 엿볼 수 있게 해준다. 아울러 毘盧殿에 모신 金銅毘盧遮那佛座像과 極樂殿에..
慶州 (瞻星臺.鷄林.石氷庫.鮑石亭.東宮과月址) 千年古都慶州訪門대릉원(大陵苑) 대릉원(大陵苑) 慶州市內를 멀리서 바라볼때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집들 사이로 우뚝우뚝 솟아있는 巨大한 古墳들이다 지금부터 千年도 넘는 時節에 살았던 옛 사람들과 오늘을 사는 사람들의 터전이 한테 어울려 있기에 時間과 空間을  超越한 神祕感이 더 진하게 느껴진다. 특히 慶州의 古墳들이 平地에 자리잡고 있는것은  당시의  다른 地域들에 견주어서도 특이한 점이라 하겠다. 南t山의 北쪽에서부터 國立慶州博物館 자리와 半月城을 거쳐 황오동,노동동,노서동,으로 이어지는 平地에는 古墳들이 集中的으로 모여있다. 그 가운데 약 12萬 5,400 坪의 平地에 23개의 陵이 솟아있는 황남동 大陵苑 은 古墳郡의 規模로는 慶州에서 가장 큰陵 이다. 천마총(天馬塚)  天馬塚은 新羅時代의 代表的인 돌무..
雪岳山百潭寺 설악산 (百潭寺)  1988년 5월 28일자로 傳統寺刹 제24호로 指定된 百潭寺는 寶物 제 1182호(1993. 11.1)로 指定된  木造阿彌陀佛坐像 伏藏遺物을 所藏하고 있다. 1928년 百潭寺의 復舊가  끝난당시 助事한바에 의하면  사보(寺寶)로 現場遺物로 定해지는 미타불상(彌陀佛像)  3위(位)와  소종(小鐘) 1좌(坐) 가 있고 仁祖의 下賜品인 七層玉塔 이 있었다,  寶物로 指定된 木造阿彌陀佛은 英祖 24년 (1748년)에 造成된  아미타목불좌상(阿彌陀木佛坐像)으로 18세기 前半期의 佛像 가운데 秀作으로 平價되고 있다. 이외 伏藏遺物로는 불상신조성회향발원문(佛像新造成回向發願文) 1매 타라니서입회향발원문(陀羅尼書入回向發願文) 1매 황참의 다리연화방거 한글發願文 1매 자식점지 한글發願文 1 매와 만자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