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歷 史 旅 行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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吐含山佛國寺 千年古都慶州 불국사 (佛國寺) 慶州 吐含山에 자리잡은 佛國寺는 新羅 景德王 10년(751)에 당시 宰相이었던 金大城이 짓기 시작하여, 惠恭王 10년(774)에 完成하였다. 以後 朝鮮 宣祖 26년(1593)에 倭의 侵入으로 大部分의 建物이 불타버렸다. 以後 極樂殿, 紫霞門, 帆影樓 등의 一部 建物만이 그 命脈을 이어오다가 1969년에서 1973년에 걸친 發掘助事 뒤 復元을 하여 現在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境內에는 統一新羅 時代에 만들어진 多寶塔과, 釋迦塔으로 불리는 3층 石塔, 紫霞門으로 오르는 淸雲·白雲橋, 極樂殿으로 오르는 蓮花·七寶橋가 國寶로 指定, 保存되어 있다. 이러한 文化財는 당시 新羅 사람들의 돌을 다루는 훌륭한 솜씨를 엿볼 수 있게 해준다. 아울러 毘盧殿에 모신 金銅毘盧遮那佛座像과 極樂殿..
慶州 (瞻星臺.鷄林.石氷庫.鮑石亭.東宮과月址) 千年古都慶州訪門 대릉원 (大陵苑) 대릉원 (大陵苑) 慶州市內를 멀리서 바라볼때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집들 사이로 우뚝우뚝 솟아있는 巨大한 古墳들이다 지금부터 千年도 넘는 時節에 살았던 옛 사람들과 오늘을 사는 사람들의 터전이 한테 어울려 있기에 時間과 空間을 超越한 神祕感이 더 진하게 느껴진다. 특히 慶州의 古墳들이 平地에 자리잡고 있는것은 당시의 다른 地域들에 견주어서도 특이한 점이라 하겠다. 南t山의 北쪽에서부터 國立慶州博物館 자리와 半月城을 거쳐 황오동,노동동,노서동,으로 이어지는 平地에는 古墳들이 集中的으로 모여있다. 그 가운데 약 12萬 5,400 坪의 平地에 23개의 陵이 솟아있는 황남동 大陵苑 은 古墳郡의 規模로는 慶州에서 가장 큰陵 이다. 천마총 (天馬塚) 天馬塚은 新羅時代의 代表的인 돌무..
雪岳山百潭寺 설악산 (百潭寺) 1988년 5월 28일자로 傳統寺刹 제24호로 指定된 百潭寺는 寶物 제 1182호(1993. 11.1)로 指定된 木造阿彌陀佛坐像 伏藏遺物을 所藏하고 있다. 1928년 百潭寺의 復舊가 끝난당시 助事한바에 의하면 사보(寺寶)로 現場遺物로 定해지는 미타불상(彌陀佛像) 3위(位)와 소종(小鐘) 1좌(坐) 가 있고 仁祖의 下賜品인 七層玉塔 이 있었다, 寶物로 指定된 木造阿彌陀佛은 英祖 24년 (1748년)에 造成된 아미타목불좌상(阿彌陀木佛坐像)으로 18세기 前半期의 佛像 가운데 秀作으로 平價되고 있다. 이외 伏藏遺物로는 불상신조성회향발원문(佛像新造成回向發願文) 1매 타라니서입회향발원문(陀羅尼書入回向發願文) 1매 황참의 다리연화방거 한글發願文 1매 자식점지 한글發願文 1 매와 만자소화문황단삼회장적..
洪城 (卍海韓龍雲生家) 만해 한용운 (卍海韓龍雲) 공약삼장 (公約三章) 今日 吾人의 此擧는 正義 人道 生存 尊榮을 爲하는 民族的 要求이니, 오직 自由的 精神을 發揮할 것이고, 決코 倍他的 感精으로 適大하지 말라 最後의 一人까지 最後의 一刻까지 民族의 正當한 意思를 快히 發表하라. 一切의 行動은 가장 秩序를 尊重하여, 吾人의 主長과 態度를 어디까지던지 光明正大하게 하라. 한용운의생가 (韓龍雲生家) 卍海 韓龍雲은 忠淸南道 洪城郡 결성면 성곡리 481番地 에서 한용준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만해 한용운 선생 생가지 성역화기 (卍海 韓龍雲 先生 生家址 聖域化記) 전대법륜 (轉大法輪) 眞理의 變化를 說明한 글 (서각) 님의침묵 (님의沈默)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丹楓나무 숲을 향하여 난..
扶餘 (扶蘇山城) 부여부소산성 (扶餘扶蘇山城) 白馬江 南쪽 扶蘇山을 감싸고 쌓은 山城으로 泗沘時代의 都城 이다.『三國史記』「百濟本記」에는 泗沘城· 所扶理城으로 記錄되어 있으나, 城이 位置한 山의 이름을 따서 扶蘇山城이라 부른다. 熊津(지금의 公州)에서 泗沘(지금의 扶餘)로 首道를 옮기던 時期인 百濟 成王 16년(538)에 王宮을 守護하기 위하여 쌓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東城王 22년(500)경에 이미 山 頂上을 둘러쌓은 테뫼 식 山城이 있던 것을 武王 6년(605)경에 지금의 모습으로 完成한 것으로 짐작되어 百濟 城郭 發達史를 보여주는데 城郭의 形式은 山봉우리를 重心으로 빙 둘러싼 테뫼식과 다시 그 주위를 감싸게 쌓은 포곡식이 混合된 複合式 山城이다. 東·西·南門 터가 남아 있으며, 北門터에는 金江으로 向하는 낮은 곳..
秋月山普提庵 남해보리암 (南海菩提庵) 菩提庵은 누가 언제 세웠는지 알 수 없다. 朝鮮 肅宗 20년(1694)에 쓴 『菩提庵重修記』에 따르면 普照國師가 세운 뒤 丁酉再亂으로 불탄 것을 宣祖 40년(1607)에 僧侶 新撰이 고쳐 지었고, 孝宗 1년(1650) 스님들이 힘을 모아 다시 지었다고 한다. 菩提庵이라고도 하는 이 庵子는 1983년 住持 성묵스님이 現 法堂을 復元하였다. 法堂은 앞면 5칸·옆면 2칸 규모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인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粧飾하여 만든 공포는 새 부리 模樣으로 粧飾한 익공 樣式으로 꾸몄다. 이곳은 壬辰倭亂 때 充壯公 金德齡 將軍의 婦人 흥양 李氏가 殉節한 곳이기도 한데 壬辰倭亂 당시 흥양 李氏는 倭賊에게 쫓기자, 絶壁에서 몸을 던져 殉節하였다. ..
三神山雙磎寺 삼신산쌍계사 (三神山雙磎寺) 新羅 聖德王 23년(724) 義湘의 弟子 삼법이 創建하였고 이 후 文聖王 2년(840) 眞鑑禪師가 重創하여 大伽藍을 이루었으며 정강왕 때 쌍계사라는 이름을 얻었다. 仁祖 10년(1632) 벽암스님에 의해 重建된 이래 오늘에 이르고 있다. 첫 關門인 一周門을 지나면 金剛門 天王門 八榮樓 大雄殿 三成閣이 축을 이루며 차려로 配置되어 있다. 산비탈을 이용한 낮은 층단이 繼續되고 中間中間에 다른 建物들이 非對稱的으로 들어서 있다. 八榮樓 앞 에는 雙磎寺 9층石塔이 있고 大雄殿의 왼편에는 冥府殿이 位置한다. 대비 삼법 두 화상이 당나라에서 육조 스님의 정상을 모시고 와서 '지리산 곡설리 갈화처에 봉안하라'는 꿈의 계시를 받고 범의 인도를 받아 이곳에 절을 지어 조사를 奉安하였다 한다...
泰華山光德寺 태화산광덕사 (泰華山光德寺) 大韓佛敎 曹溪宗 제6敎區 本寺인 마곡사(麻谷寺)의 末寺이다. 麻谷寺는 그 산너머 南쪽에 자리한다. 652년(眞德女王 6) 자장(慈藏)이 唐나라에서 가져온 불치(佛齒) 1과와 사리 10과, 금은자(金銀字) 《華嚴經》 《法華經》 《은중경(恩重經)》 각 2부 등을 僧侶 진산(珍山)에게 주어 새 도량(道場)을 연 것이 그 始作이라고 한다. 1464년(世祖 10) 世祖가 이 곳에 擧動하였을 때 한계회(韓繼禧)에게 命하여 전지(傳旨)를 써 내렸는데, 위전(位田)를 바치고 각종 요역(徭役)을 免除한다는 內用이었다. 그 뒤 28방(房)에 附屬庵子가 약 89개, 9개의금당(金堂), 80칸의 만장각(萬藏閣), 3층으로 된 천불전(千佛殿)은 佛敎徒의 구경거리가 될 程度로 繁昌하여, 京畿 ·忠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