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歷 史 旅 行 1/陵&園&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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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園).묘(墓) 회 묘 (懷 墓)   폐비 윤씨(廢妃 尹氏, ?~ 1482년)는 가난한 兩班집안의 딸인 尹氏는 집안이 窮乏해지자 宮에 들어가 빼어난 美貌로 1473년 淑儀에 奉해졌고 元妃 恭惠王后 韓氏가 僧下하자 王妃로 冊奉되었다. 廢黜되었으므로 詩號가 없다. 本官은  함안(咸安)이다. 成宗과의 葛藤으로 有名하며, 그로 인해 廢庶人 後 사사 (1482년)되었다. 燕山君 때 잠시 王后의 綽號가 追崇되었으나 中宗反正 以後 다시 削除된다.  무덤은 京畿道 高陽市 德陽區 원신동 원신동 西三陵 내에 位置한 희묘(懷墓)이다. 燕山君 때 잠시 王妃의 예에 따라 陵으로 改葬되었기 때문에 比較的 華櫚한 外官을 갖추고 있다.  회 묘懷墓 廢妃 尹氏(1455 ~ 1482)는 윤기견의 딸로 1473년 (成宗 4년)에 ..
七 宮 칠 궁 (七 宮) 七宮은 朝鮮時代에 王을 낳은 일곱 妃嬪들의 神位를 모신 祠堂인 儲慶宮, 大嬪宮, 毓祥宮, 延祜宮, 宣禧宮, 景祐宮, 德安宮이 있는 곳이다. 七宮 자리에는 元來 毓祥宮만 있었다. 毓祥宮은 英祖가 生母인 淑嬪 崔氏를 기리기 위하여 卽位 直後 세운 淑嬪廟 를 英祖 29 년 (1753)에 昇格해서 부르게된 이름이다. 都城 안에는 毓祥宮외에도 이러한 祠堂이 여럿 있었다. 高宗 때와 純宗때 이러한 祠堂들을 이곳에 옮기고 1929 년에 마지막으로 德安宮을 옮기면서 七宮이라 부르게 되었다. 七宮에는 일곱神位가 모셔 있지만 毓祥宮과 延祜宮, 宣禧宮과 景祐宮 神位가 각각 한 祠堂안에 모셔져 있어서 祠堂 建物은 다섯이다. 現在 七宮에 있는 冷泉亭, 齋室, 典祀廳, 香大廳, 祭器庫, 守僕房, 冷泉등은 모두 ..
栗谷李珥家族墓 신사임당 (申師任堂) 申師任堂은 江原道 江陵 胎生으로 그의 生家 烏竹軒은 지금도 保存되고 있다. 本名은 신인선이었다. 아버지는 신명화(申命和)라는 이름의 선비였고, 어머니는 龍仁 李氏 집안의 선비인 李思溫의 딸이었다. 스스로 사임당(師任堂)이라는 호를 지었는데, 周나라의 기틀을 닦은 文王 어머니 태임(太任)에서 따왔다고 傳한다.그 외에 인임당(姻姙堂) 또는 임사제(姙師齊)라는 호도 가졌다고 한다. 1522년 德修 李氏의 李元壽(李元秀)와 結婚하여 江陵에서 서울로 移徙했으며 4남 3녀를 두었다. 栗谷 李珥는 申師任堂의 셋째 아들이다. 그는 뛰어난 畵家로서 7살 때 世宗 時代의 畵家 安堅의 그림을 본따서 그림을 그렸고, 肅宗, 宋時烈 등 여러 知識人들이 그가 그린 그림에 發文을 쓸 程度였다. 書藝家이자 詩人..
尹瓘將軍墓 윤관장군묘 (尹瓘將軍墓) 高麗 睿宗때 女眞征伐에 큰功을 세운 윤관 (尹瓘 ? ~ 1111)의 묘이다. 尹瓘은 파평 (坡平) 尹氏로 高麗 文宗 때에 科擧에 及第하여 여러官職을 거쳤다. 肅宗 9년 (1104) 勢力이 커진 女眞族을 征伐하라는 王命을 받고 싸웠으나 高麗軍은 女眞의 强한 騎兵을 당할수가 없었다. 特殊部隊인 別武班을 새로이 編成하여 睿宗 (1107) 別武班을 이끌고 咸鏡道 쪽으로 進擊하여 女眞族을 北方으로 몰아내고 東北地方 일대에 9城을 쌓았다. 그후 女眞이 永遠히 背反하지 않고 朝貢을 바친다는 條件으로 城을 돌려받기를 懇請하여 高麗도 東北쪽의 女眞討伐에만 國力을 기울일수 없어 9성 일대의 땅을 다시 女眞에게 돌려주었다. 高麗北쪽 變更의 女眞族은 初期에 高麗를 父母의 나라로 섬기며 朝貢을 바치다가..
綏吉園 수길원 (綏吉園) 綏吉園은 진종 (眞宗.추존)의 어머니 정빈 (靖嬪) 이씨 (李氏 1693 ~ 1720)이 墓所다. 眞宗은 朝鮮 21대 영조 (英祖)의 世子였으나 10세로 돌아가셨고 정조 (正祖) 卽位後 眞宗으로 推尊되었다. 靖嬪 李氏는 이준철 (李俊哲)의 딸로 英祖가 王位에 오르기 前에 後宮이되어 眞宗을 낳았다. 경종 (景宗) 卽位年 (1720) 28세로 돌아가셨으며 英祖때 嬪에 奉하여졌다 (1725) 七宮 안의 連呼宮에 僞幣가 모셔져 있다. 정빈이씨 (靖嬪李氏) 靖嬪 李氏는 英祖의 첫 번째 後宮으로 英祖의 原子 孝章世子의 어머니이다. 英祖가 卽位하기 前에 죽었으며, 李氏의 所生으로는 孝章世子와 和順翁主가 있다. 元來 昭媛의 品階이었으나 世子를 낳은 功勞로 英祖 1년 正賓으로 追增되었다. 正祖 2년(1..
昭寧園 소령원 (昭寧園) 昭寧園은 朝鮮 제21대 영조 (英祖)의 어머니 숙빈 (淑嬪) 최씨 (崔氏1670 ~ 1718)의 墓所다. 淑嬪 崔氏는 최효원 (崔孝元)의 딸로 제 19대 肅宗 (肅宗)의 後宮이다. 肅宗 20년 (1694)에 英祖를 낳았으며 肅宗 44년 (1718) 49세로 돌아가셨다. 孝心이 지극한 英祖는 어머니의 죽음을 哀痛해하며 妙所 東南쪽에 시묘막 (侍墓幕)을 짓고 친필비 (親筆碑)와 비각 (碑閣) 4곳을 세웠다. 묘비명 (墓碑名) 朝鮮國 和敬淑嬪昭寧園 묘비명 (墓碑名) 淑嬪海州崔氏昭寧墓 묘비명 (墓碑名) 有明朝鮮國後宮淑嬪首陽崔氏之墓 영 조 (英祖) 朝鮮의 제21대 王(在位 1724~1776). 蕩平政策을 施行하여 朋黨의 代笠을 緩和하였고 여러 차례 奢侈風潮 禁斷의 措置를 내렸다. 《農家集成》을 ..
尨村黃喜墓 방촌황희 (尨村黃喜) 高麗末.朝鮮 初期의 代表的인 政治家로 淸白吏의 表象이다. 初名은 수로 (壽老)호는 방촌(尨村)이며 本官은 장수(長水)이다. 1363년(恭愍王12)開城 가조리에서 出生하였는데 어머니 龍宮金氏가 그를 孕胎했던 열달동안 松嶽山 鎔巖瀑布에 물이흐르지 않다가 그가 태어나자 비로서 물이 쏟아져 내렸다고 한다. 1376년(우왕2)음직으로 복안궁녹사(福安宮錄事)가 되었다가 1383년 진사시(進士試)에 合格하고 1389년(昌王1)文科에 及第 이듬해 성균관학관(成均館學官)이 되었다. 高麗가 亡하자 杜門洞에 隱居했으나 朝鮮朝廷의 要請과 同僚들의 推薦으로 1394년 (太祖3)成均館學官 으로 세자우정자(世子右正字)를 兼任하고 그후 여러 職責을 맡았다. 農事의改良,禮法의 改定 천첩(賤妾)小生의 천역(賤役)免..
高麗恭讓王陵 고 릉 (高陵) 고려(高麗)의 마지막 王인 공양왕(恭讓王 1389 ~ 1392)과 王妃 순비(順妃)의 陵이다. 恭讓王은 재위 4년만에 高麗가 亡하면서 廢位되어 원주(原州)에 追放되어 공양군(恭讓君)으로 봉(封)하여졌고 삼척(三陟)에 옮겨져 그곳에서 태조(太祖)3년 春秋 50세로 世上을 떠났다. 그 뒤 太宗 16년 恭讓王 으로 추봉(追封)되어 봉릉(封陵)이라 하였다. 陵은 王과 王妃의 雙陵型式으로 되었고 陵앞의 碩茂로는 碑石 1좌씩과 석상(石床)이 놓였고 장명등(長明燈)이 1좌 양쪽에 石人이 2쌍 석호(石虎) 1필이 있다. 碑石은 奉陵 當初의 것으로보이며 王陵 中間에 조선 고종(朝鮮高宗)때 세운 것으로 보이는 고려공양왕고릉(高麗恭讓王高陵)이라는 碑가 서있다. 공양왕 (恭讓王) 이름은 요(瑤). 신종(神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