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歷 史 旅 行 1/陵&園&墓

(17)
廣開土大王陵 광개토대왕릉 (廣開土大王陵) 高句麗 年代記에 따르면 廣開土大王 3년(394)8월경 花津浦 거북섬에 왕릉(壽陵)築造를 始作했으며 廣開土大王 18년 8월 花津浦의 首陵築造 現場을 大王이 直接 訪問하기도 했던것으로 記錄되 있다. 廣開土大王이 逝去한 이듬해인 長壽王 2년 (414) 9월 29일 花津浦 거북섬에 廣開土大王의 屍身을 安葬 하였다고 한다. 이곳에 廣開土大王능 守備隊가 王陵을 지키고 있었고 鷄林(新羅)의 軍事와 守備隊간 잦은 分爭이 잇엇던 것으로 記述하고 있다. 文咨明王 2년에 이곳에서 廣開土大王의 망계(望祭)를 지냈다는 記錄이 있다. 現在 있는 거북섬 城의 構造는 2중 構造로 되어 있는데 섬의 頂上部인 약 45 m 높이의 高地를 中心에 두고 海岸線 地形을 따라 花崗岩을 利用하여 石築으로 築造하고 城壁..
西三陵 (胎室.王子.王女.嬪.貴人墓) 서삼릉 (胎室.王子.王女墓. 嬪.貴人墓) 西三陵은 禧陵,孝陵,睿陵 기타 孝昌園,宜寧園,小鏡園,및後宮,大君,公主등 朝鮮王室의 家族 무덤으로 陵 周圍로 소나무숲이 싱그러움이 가득해 나들이를 즐기기에 좋다. 특히 競馬 敎育院과 引接해 있어 푸른草原 너머 한가롭게 풀을 뜯는 말들이 異國的인 風景을 演出한다. 胎室 이곳은 日帝强占期에 全國에 흩어져 있던 朝鮮王室의 胎室을 發掘하여 收拾한 遺物들이 한곳에 모아서 造成한 胎室군 이다. 胎室이란 胎를 묻은 石室을 말한다. 朝鮮時代에는 胎를 生命體의 根源이라 여겨 매우 貴重하게 保管하였으며, 특히 王室에서는 胎를 白瓷 항아리에 담아 全國 靈山에 묻었다. 이곳에는 烏石 碑群과 花崗石 碑群으로 나누어진다. 烏石碑群은 王과 皇帝. 皇太子의 胎室 (22기)이고 花崗石 碑群은 王..
昌嬪安氏墓 창빈안씨묘 (昌嬪安氏墓) 이곳은 朝鮮 11대 王인 中宗의 後宮이자 宣祖의 할머니인 昌嬪 安氏 墓이다. 元來는 1550년 (明宗5년) 3월 京畿道 長興里에 墓所를 만들었는데 이듬해 자리가 좋지 않다고 하여 이곳으로 옮겼다. 墓域의 封墳에는 孝石을 돌렸고 封墳뒤에는 谷裝을 設置 하였다. 神道碑를 비롯하여 墓標, 混石, 上石, 香爐石, 望柱石,文人石, 長明燈의 瑞物을 세웠다. 창빈안씨 (昌嬪安氏) 昌嬪安氏는 1507년 (中宗2년)에 아홉살 나이로 宮女가 되었다. 中宗의 寵愛를 입어 22세에 상궁(尙宮)이 되었고 31세에 숙원(淑媛) 이어 숙용(淑容)까지 品階가 올랐다. 그녀는 2남 1녀 를 낳았는데 둘째아들이 宣祖의 아버지인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이다. 德興大院君의 셋째 아들인 하성군(河城君)이 後孫이 없는 ..
百濟王陵苑 백제왕릉원 (百濟王陵苑) 백제왕릉원(百濟王陵苑)은 扶餘邑 陵山里에 位置한 陵山里 山의 중턱에 있는 무덤들로 古墳의 겉모습은 모두 元型奉 土墳이고,內府는 窟室 突放 무덤으로 百濟後記 寺婢時代의 墓祭를 살필수 있는 좋은資料와 王과 王族(百濟 26대 成王과 관련된 王陵), 그리고 上流層의 墳墓로 王과 王族(百濟 26대 成王과 관련된 王陵), 그리고 上流層의 墳墓로 推定된다고 합니다. 陵山里 山의 중턱에 있는 무덤들로 앞뒤 2줄로 3기씩있고 뒤쪽제일높은곳에 1기로 모두7기로 이루어져있다 古墳의 겉모습은 모두圓峯形 土墳이고 內部는 널길이 붙은 窟式突放무덤(橫穴式 石室墳)으로 뚜껑돌 아래는 모두 地下에 만들어 百濟後期의 寺婢時代의 墓祭를 살필수있는 좋은資料 로서 位置와 規模로보아 王과 王族,上流層의 墳墓로 推定된다..
金庾信將軍墓 김유신 (金庾信) 金庾信은 금관가야(金官伽倻) 마지막王인 구형왕(仇衡王)의 증손(曾孫)으로 15세에 花郞이 되었으며 武藝와 智略이 뛰어나 나라에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앞장서서 指揮하였다. 신라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 7년 (660)에 羅唐 연합군(羅唐 聯合軍)이 結成 되었을때 新羅軍 總司令官이 되어 百濟를 倂合하였고 이어 문무왕(文武王) 8년(668)에는 高句麗를 倂合하였으며 韓半島 全體를 復屬시키려는 野心을 가지고 있던 唐나라 軍事도 물리쳤다. 文武王 때에는 태대각간(太大角干)이라는 관작(官嚼)을 받았고 뒷날 흥덕왕(興德王)때에는 흥무대왕(興武大王)으로 推捧되었다. 陵은 믿둘레가 50 m 지름이 18 높이는 5.3 m 인데 아래쪽에는 높이 1.2 m 의 십이지상(十二支神像)을 새긴 保護石이 둘러져 있다...
太宗武烈王陵 태종무열왕릉 (太宗武烈王陵) 新羅 태종무열왕(太宗武烈왕 在位 654 ~ 661)의 偉大한 業績을 기리기 위해 세운 것이다. 이 碑는 武烈王陵의 左側에 位置하고 잇다 現在 빗돌(碑身)은 없어지고 거북模樣의 받침돌(龜?)과 용을 새긴 머릿돌 만 남았다. 길이 333 cm 너비 254 cm 높이 86 cm 이며 거기에 彫刻된 돌 거북은 목을 높이 처들고 발을 기운차게 뻗으며 힘차게 앞으로 나가는 모습으로 新羅人의 進就的인 奇想을 잘 보여주고있다. 눞이가 110 cm 인 머릿돌 左右에는 여섯마리의 龍이 서로 세 마리씩 뒤엉켜 如意珠를 몰고있는 모습이다. 앞면 中央에 武烈王의 둘째 아들 김인문(金仁問)이 쓴 태종무열왕지비(太宗武烈大王之碑)라는 글이 돋을새김되어 있어 비의 主人公을 밝혀 주고있다. 이 비는 表現이 ..
慶州古墳郡(大陵苑) 대릉원 (大陵苑) 경주시내를 멀리서 바라볼때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집들사이로 우뚝우뚝 솟아있는 거대한 고분들이다 지금부터 천년도 넘는 시절에 살았던 옛 사람들과 오늘을 사는 사람들의 터전이 한테 어울려 있기에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신비감이 더 진하게 느껴진다. 특히 경주의 고분들이 평지에 자리잡고 있는것은 당시의 다른지역들에 견주어서도 특이한 점이라 하겠다. 남산의 북쪽에서부터 국립경주박물관 자리와 반월성을 거쳐 황오동,노동동,노서동,으로 이어지는 평지에는 고분들이 집중적으로 모여있다. 그 가운데 약 12만 5,400 평의 평지에 23개의 능이 솟아있는 황남동 대릉원은 고분군의 규모로는 경주에서 가장 큰능 이다. 대릉원 (大陵苑) 慶州市內를 멀리서 바라볼때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집들 사이로 우뚝우뚝 솟아..
聖雄李舜臣將軍墓 이순신 (李舜臣) 忠武公 李純信將軍은 1545년 4월 28일 서울에서 出生하셨으며 壬辰倭亂 때 三道水軍 統制使로서 거북선을 創製하여 옥포,당포,당항포, 閑山島 앞바다외 釜山,明朗,古今島 등 海戰에서 外船 數百척과 倭兵 數萬名을 무찔러 나라와 겨레를 求하셨다. 이 忠武公은 露梁海戰에서 敵軍을 椎擊중 敵의 榴彈에 맞아 54세를 一期로 1598년 12월 16일 南海 海上 觀音浦 에서 戰死 하였다. 將軍의 墓所는 처음 牙山郡 금성사에 모셨다가 16년후 인 光海君 (1614년) 에 이곳에 옮겨 모셨다. 李舜臣 將軍은 一平生 定義를 實踐함에 있어, 조금도 不意와 妥協하지 않는 올곧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武官으로서 항상 功과 事를 嚴格히 區分하였으며, 옳다고 생각되는 일에는 上官이나 權力者에게도 서슴없이 誤謬를 指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