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歷 史 旅 行 1/陵&園&墓

太宗武烈王陵

태종무열왕

(太宗武烈王陵)

 

 

新羅 태종무열왕(太宗武烈왕 在位 654 ~ 661)의 偉大한 業績을 기리기 위해 세운 것이다. 이 碑는 武烈王陵의 左側에 位置하고 잇다 現在 빗돌(碑身)은 없어지고 거북模樣의 받침돌(龜?)과 용을 새긴 머릿돌 만 남았다. 길이 333 cm  너비 254 cm  높이 86 cm  이며 거기에 彫刻된 돌 거북은 목을 높이 처들고 발을 기운차게 뻗으며 힘차게 앞으로 나가는 모습으로 新羅人의 進就的인 奇想을 잘 보여주고있다. 눞이가 110 cm 인 머릿돌 左右에는 여섯마리의 龍이 서로 세 마리씩 뒤엉켜 如意珠를 몰고있는 모습이다. 앞면 中央에 武烈王의 둘째 아들 김인문(金仁問)이 쓴 태종무열왕지비(太宗武烈大王之碑)라는 글이 돋을새김되어 있어 비의 主人公을 밝혀 주고있다. 이 비는 表現이 事實的이고 生動感이 있어 우리나라 뿐만아니라 東洋權에서 가장 뒤어난 傑作이라 일컬어지는 作品이다.

 

 

 

태종무열왕

(太宗武烈王)

 

新羅  제29대 王으로서  成은 金, 이름은 春秋이다.  人品과  外交 手腕이  뛰어나  唐나라와 日本과의  外交에서  큰 成果를  거두었다. 654년  眞德 女王이  대를 이을 子息이 없이  世上을 떠나자  여러 臣下들의  錐臺를 받아  王位에 올랐다. 그는  法律을 制定하고, 官僚 制度를 整備하였으며,  軍事 組織 을  强化하는 등  本格的인 國家 體制를 確立하였다.  660년에는  唐나라와  聯合하 여  百濟를  滅亡시켜  新羅가  三國 統一을  할 수 있는 基盤을  磨鍊하다. 이듬해  高句麗를  征伐하고자  軍事를 일으켰으나 統一을  이루지 못하고 죽었다.

 

 

경순왕릉

(敬順王陵)

 

성은 김(金)씨. 이름은 부(傅). 文聖王의 6대손이며, 아버지는 이찬(伊飡) 효종(孝宗)이며, 어머니는 憲康王의 딸 계아태후(桂娥太后)이다. 큰아들은 마의태자(麻衣太子)이고 막내아들은 범공(梵空)이다. 9세기말 新羅는 國力이 弱해져서 地方豪族들이 獨者勢力을 形成하여 각 地方을 나누어 支配하고 있었다. 그 가운데 犬猿과 弓裔의 勢力이 가장 强盛하여 後三國의 成立을 보게 되었다. 新羅가 眞骨王族의 勸力 다툼에 휩싸여 慶尙道 一帶로 支配權이 縮小되었던 데 半楷, 甄萱과 弓裔는 全羅道 一帶와 中部地方에서 커다란 勢力을 形成했다. 927년 後百濟의 侵攻으로 경애왕(景哀王)이 죽은 뒤 甄萱에 의해 卽位했다. 在位 동안 國家의 技能이 完全히 痲痺되었으며 國土는 날로 줄어들고 民心은 高麗로 기울었다. 이에 군신회의(君臣會議)를 召集하여 高麗에 귀부(歸附)하기로 決定, 935년 김봉휴(金封休)를 시켜 高麗 太祖에게 降伏하는 國書를 傳했다. 그뒤 王建의 딸 낙랑공주(樂浪公主)를 아내로 맞고 정승(正承)에 奉해졌으며, 녹(祿) 1,000석을 받고 慶州를 식읍(食邑)으로 받아 慶州 事審官(事審官)에 任命되었다. 무덤은 長湍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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