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歷 史 旅 行 3/書 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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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공간
紫雲書院 자운서원 (紫雲書院) 紫雲書院은 1615년 (光海君7년)에 朝鮮中期의 大學者인 栗谷 李珥 先生의 學文과 德行을 追慕하기 위해 地方儒林들에 의해 創建 되었다. 1650년(孝宗1년)에 紫雲이라 賜額을 받았으며 그 뒤 1713년 (肅宗39년)에 그의 後學인 沙溪 金長生 과 玄石 朴世采 두 분을 追加로 配享해 先賢配享 地方敎育의 役割을 擔當하였다. 그러나 朝鮮後期 1868년 (高宗 5년) 大院君의 書院撤廢令으로 毁撤되어 빈 터에 廟庭碑만 남아있다가 1970년 儒林들의 기금과 國家支援을 받아 復元하였고 境內 周邊을 淨化 하였다. 先须大其志 以聖人爲準則 一毫不及聖人 則吾事末了 먼저 그 뜻을 크게 가져야 한다 성인을 본보기로 삼아서 조금이라도 성인에 미치지 못하면 나의 일이 끝나지 않은 것이다. 율곡기념관 (栗谷記念..
陶山書院 도산서원 (陶山書院) 史蹟 제170호. 1574년(先祖 7) 地方儒林의 發議로 陶山書堂의 뒤편에 創建하여 李滉의 位牌를 모셨다. 1575년 先祖로부터 韓石峰이 쓴 '陶山"의 賜額을 받았다. 嶺南儒林의 精神的 지주 役割을 했으며, 興宣大院君의 書院撤廢 당시에도 毁撤되지 않고 存續한 47개 書院 중의 하나였다. 1969~70년 政府의 古蹟保存政策에 따라 聖域化 對象으로 指定되어 大大的인 保守를 했다. 境內의 建物로는 李滉과 弟子 趙穆의 位牌가 奉安되어 있는 (尙德祠:보물 제211호), 書院의 講堂인 典敎堂 (보물 제210호), 享禮 때 祭需를 두던 典祠廳, 儒生들이 거처하던 東齋· 西齋, 藏書를 보관하던 光明室. 藏板閣, 李滉이 第子들을 가르치던 陶山書堂, 第子들이 居處하면서 工夫하던 隴雲精舍 등이 있다. ..
屛山書院 병산서원 (屛山書院) 西厓 柳成龍의 學文과 業績을 기리기 위한 곳으로, 安東에서 西南쪽으로 洛東江 上流가 굽이치는 곳에 花山을 등지고 자리하고 있다. 柳成龍은 道學·글씨·文章·德行으로 이름을 날렸을 뿐만 아니라, 壬辰倭亂 때에도 城郭 收縮·火氣製作을 비롯하여 軍備擴充에 힘써 많은 功을 세운 人物이다. 原來 風岳書堂으로 豊山 柳氏의 敎育機關 이었는데, 柳成龍이 先祖 5년(1572)에 이곳으로 옮겼다. 그 후 光海君 6년(1614)에 尊德祠를 세워 그의 僞幣를 모시고, 1629년에 그의 셋째 아들 유진의 僞幣를 추가로 모셨다. 哲宗 14년(1863)에는 임금으로부터 ‘屛山’이라는 이름을 받아 書院이 되었다. 書院내 建物로는 僞幣를 모신 尊德祠와 강당인 入敎堂, 遺物을 保管하는 藏板閣, 寄宿舍였던 東·書齋, ..
紹修書阮 소수서원 (紹修書阮) 우리나라에서는 最初로 임금이 이름을 지어 내린 賜額書院이자 私學機關이다. 朝鮮 中宗 37年(1542)에 풍기郡守 주세붕이 安珦을 祭祀하기 위해 祠堂을 세웠다가, 中宗 38년(1543)에 儒生들을 敎育하면서 백운동書院이라 하였다. 明宗 5年(1550)에는 풍기郡守 이황의 요청에 의해 ‘紹修書阮’이라 賜額을 받고 나라의 公認과 支援을 받게 되었다. 中宗 39년(1544)에 安軸과 安輔를 祭祀지냈고, 仁祖 11年(1633)에는 주세붕을 더하여 祭祀지냈다. 書院의 建物은 비교적 自由롭게 配置되었는데, 一般的인 書院의 배치가 完成되기 以前인 初期의 書院이기 때문인 듯하다. 正門으로 들어서면 강당인 明倫堂이 있고, 學生들이 머물며 工夫하는 일신재와 直方齊가 連續으로 있다. 書院의 日般 配置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