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歷 史 旅 行 3/書 院

紹修書阮

(紹修書阮)

 

 

우리나라에서는 最初로 임금이 이름을 지어 내린 賜額書院이자 私學機關이다. 朝鮮 中宗 37年(1542)에 풍기郡守 주세붕이 安珦을 祭祀하기 위해 祠堂을 세웠다가, 中宗 38년(1543)에 儒生들을 敎育하면서 백운동書院이라 하였다. 明宗 5年(1550)에는 풍기郡守 이황의 요청에 의해 ‘紹修書阮’이라 賜額을 받고 나라의 公認과 支援을 받게 되었다. 中宗 39년(1544)에 安軸과 安輔를 祭祀지냈고, 仁祖 11年(1633)에는 주세붕을 더하여 祭祀지냈다. 書院의 建物은 비교적 自由롭게 配置되었는데, 一般的인 書院의 배치가 完成되기 以前인 初期의 書院이기 때문인 듯하다. 正門으로 들어서면 강당인 明倫堂이 있고, 學生들이 머물며 工夫하는 일신재와 直方齊가 連續으로 있다. 書院의 日般 配置가 강당 左右에 對稱으로 東·西在를 두는 것인데 비해, 紹修 書阮은 懸板의 이름으로서 區分하였다. 祠堂은 明倫堂의 西北쪽에 따로 쌓은 담장 안에 있다. 書院이 있던 자리에는 원래 統一新羅時代의 절인  宿水寺가 있었는데, 그 遺跡으로 幢竿支柱와 礎石 등이 남아있다. 紹修 書阮은 朝鮮時代 後期에 大院君이 書院을 撤廢할 때 살아남은 47개 書院 중의 하나이며, 지금도 每年 봄·가을에 祭祀를 지낸다.

 

 

 

명종대왕어필

(明宗大王御筆)

(도 유형문화재 제330호)

 

 

朝鮮 明宗 (1545 ~ 1567넌 재위) 明宗은 中宗의 둘째아들로 仁宗의 아우이다. 中宗이 죽고 仁宗이 卽位 하였으나 在位 8 개월만에 죽자  당시 12살 이었던 明宗이 즉위 하였는데 나이가 어려 어머니 文定王后가 代理하여 國政을 遂行 하였다.

 

 

숙수사지당간지주

(宿水寺址幢竿支柱)

(보물 제59호)

 

統一新羅時代 作品 절에서 石造支柱 가운데 기둥을 높이 세워 깃발을 걸었던 곳.

 

 

직방제

(直方齊)

 

書院의 院長과 敎授가 기거하던 執務室 이다.

 

 

문성공묘

(文成公廟)

 

 회헌 안항선생의 僞幣를 모신곳으로 後에 安軸와 安輔 주세붕을 함께 모시고 매년 陰曆 3월. 9월 初丁日에 祭享하고있다 祠堂 懸板 글씨는  明使 朱之番의 글씨임.  담장에는 宿水寺址木塔 痕跡이 남아있다.

 

 

장서각

(臧書閣)

 

오늘날 大學의 圖書館으로 임금이 직접 하사하신 御題  內寫本을 비롯 많은 章書를 保管 하던곳이다. 書冊은 左右支線의 禮를 따라 으뜸자리에 둔다고 스승의 宿所 右側에 세워져 있다.

 

 

전사청

(典祀廳)

 

典祀廳은 奉香什器(祭事用그릇)등을 保管해 두던 곳이며 春.秋 祭享 때마다 執事들이 祭物을 마련하던곳이다.

 

 

영정각

(影幀閣)

 

 影幀을 모신閣

 

 

회헌영정

(晦軒影幀)

 

國寶 제111호. 비단 바탕에 채색. 세로 37cm, 가로 29cm. 紹修書阮 所藏. 이 影幀은 畵面의 위쪽에 있는 안향의 아들인 于器가 쓴 題贊을 통해 製作背景을 알 수 있다. 찬문에 의하면, 안향이 죽은 지 12년이 지난 1318년에 충숙왕이 學敎를 세운 안향의 功을 認定하여 그를 文廟에 配享하기 위해 王命으로 形象을 그리게 했는데, 이때 흥주수(興州守) 최림(崔琳)이 그것을 模寫하여 흥주 鄕校에 奉安했다고 한다. 그뒤 1542년(中宗 37) 白雲洞書院(뒤에 紹修書阮이 됨)으로 옮겨져 奉安되었다. 畵面이 거의 上下로 나뉘어 上段部에는 제찬이 있고, 下段部에는 畵像이 그려져 있는데 人物은 半身像으로 낮은 平頂巾을 쓰고 紅袍를 입고 있다. 얼굴은 붉은 선으로 윤곽선을 그리고 耳目口鼻는 鉤勒法으로 表現했으며 옷주름은 음영의 표시 없이 간략한 線으로 處理했다. 全般的으로 畵幅이 낡았지만 이지적인 學者의 風貌를 잘 表現했으며 現存 作品이 거의 없는 高麗時代의 肖像畵를 理解하는 데 重要한 資料이다.

 

 

대성지성문선왕전좌도

(大成至聖文宣王殿座圖)

 

작자 미상. 1513년 작. 寶物 제485호. 비단 바탕에 채색. 세로 170㎝, 가로 65㎝. 朝鮮時代에는 書院에서도 孔子를 모셨으므로 孔子의 肖像畵나 殿座圖가 많이 그려졌다. 紹修 書阮에는 이 그림 이외에 또다른 殿座圖 한 폭이 傳하는데 高麗 忠烈王 때 安珦:1243~1306이 元나라에서 가져온 것이라고 한다. 畵面 上段에는 標題가 씌어진 붉은 扁額 과 畵記가 씌어진 감색 扁額이 걸리고, 大成殿 內部임을 시사하는 木造家口와 帳幕을 그려넣었다. 正面相의 孔子 左右에는 聖賢으로 推戴된 四聖公과 (十二哲人:그중 10명만 그려짐)이 配置되고, 단 아래에는 72 현인과 10명의 弟子가 消失點을 따라 좁아지는 左右代稱의 三角形 構圖로 配置되었다. 中央을 向한 칠분면으로 椅子에 앉아 있는 一律的인 形態의 인물 위에는 各各의 이름이 붉은 바탕에 金字로 씌어 있다. 重要度에 따라 크기를 달리한 三角形에 가까운 人物表現은 고식人物畵 形式을 維持하고 있으며, 부감법을 使用한 바닥表現이나 圖像에 치중한 나머지 硬直된 筆致는 記錄畵에서 흔히 보이는 樣相이다. 紹修書阮에 所藏되어 있다.

 

 

일영-대

(日影臺)

 

日影臺는  해시계로 알려져 있다 맑은날 웟부분 틈에 꼿은 막대기의 그림자가 아래돌에 드리워지는 것을 보고 時間을 알았다고 한다 自然石 주춧돌 위에 文子 도리석을 올려놓은 것으로 宿水寺의 遺跡이라는 說도 있다.

 

 

학구재

(學求齋)

 

儒學生들이 工夫하던 寄宿舍 자리로 學文의 숫자인 3을 象徵하여 세칸으로 꾸몄고 工夫 잘하라는 뜻으로 建物 立面이 漢子인 工 子形으로 지어져 있으며 스승의 그림자를 피해 뒷물림 하여 지었다 

 

 

지락재

(志樂齋)

 

儒學生들이 工夫하던 寄宿舍 자리로 學文의 숫자인 3을 象徵하여 세칸으로 꾸몄고 工夫 잘하라는 뜻으로 建物 立面이 漢子인 工 子形으로 지어져 있으며 스승의 그림자를 피해 뒷물림 하여 지었다.

 

 

탁정지

(濯貞池)

 

壬辰倭亂을 前後하여 겸암 류운용 先生이 풍기郡守로 在任할때 연못을 파고 대를 쌓았던 곳이다 .退溪 以前 부터 못은 遺存했던 것으로 보이며 훗날 창석 이준이 郡守로 赴任하여 다시판 記錄이 傳해옴.

 

 

입신양명

(立身揚名)

 

立身揚名 이란 社會에 進出하여 이름을 드높인다 는 뜻으로 옛 先備들에게 科擧試驗을 通한 官僚의 길은 修身齊家 後 治國平天下 즉 나라를 다스리고 天下를 얻는 일 이었다  立身揚名의 空間에서는 中央官職에 進出하여 多樣한 活動을 하였던 榮州先備의 모습을 살펴 볼수 있도록 하였다.

 

 

수신제가

(修身齊家)

 

修身齊家란 自身을 修養하고 집안을 올바르게 가꾼다는 뜻이다. 先備들은 우선 自己의 몸과 마음을 갈고 닦아 學文을 힘쓰며 日常의 生活倫理를 實踐하는일 곧 修身을 위해 仁.義.禮.知 를 工夫하고 바르게 實踐하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修身齊家의 公間에서는 自己修養을 위해 努力했던 榮州先備의 모습을 살펴볼수 있고 우리나라의 傳統的인 敎育方式도 體驗 할수 있도록 하였다.

 

 

거무구안

(居無求安)

 

居無求安 이란 사는데 있어 便安함을 追求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先備는 自然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自然과 더불어 風流를 즐기는것을 人格修養의 길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居無求安의 空間에서는 明想과 風流를 즐기면서 自身의 安慰를 우선하지 않고 現實의 잘잘못을 批判한 榮州先備의 굳은 氣槪를 엿볼수 있도록 하였다.

 

 

우도불우빈

(憂道不憂貧)

 

憂道不憂貧 이란 가난함 속에서도 바른삶을 重히 여긴다는 뜻이다. 비록 살림살이가 어렵더라도 잘사는것에 欲心이나서 선비의 道를 벗어나지  않았으며 곤공함으로 인해 가볍게 스스로의 品格을 잃지 않았다. 憂道不憂貧의 空間에서는 가난을 부끄러워 하지않고 淸貧한 삶을 살았던 先備들의 모습을 느낄수 있도록 하였다.

 

 

취한대

(聚寒垈)

 

退溪 李黃先生 名名 聚寒 이란 뜻은"푸른 延和山의 山기운과 맑은 竹溪의 시원한 불빛에 聚하여 詩를 짓고 風流를 즐긴다"는 뜻에서 松聚寒溪의 비취(聚) 자오 차가울 한(寒)자에서 따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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