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歷 史 旅 行 3/書 院

紫雲書院

(紫雲書院)

 

 

紫雲書院은 1615년 (光海君7년)에 朝鮮中期의 大學者인 栗谷 李珥 先生의 學文과 德行을 追慕하기 위해 地方儒林들에 의해 創建 되었다. 1650년(孝宗1년)에 紫雲이라 賜額을 받았으며 그 뒤 1713년 (肅宗39년)에 그의 後學인 沙溪 金長生 과 玄石 朴世采 두 분을 追加로 配享해 先賢配享 地方敎育의 役割을 擔當하였다. 그러나 朝鮮後期 1868년 (高宗 5년) 大院君의 書院撤廢令으로 毁撤되어 빈 터에 廟庭碑만 남아있다가 1970년 儒林들의 기금과 國家支援을 받아 復元하였고 境內 周邊을 淨化 하였다.

 

 

 

先须大其志    以聖人爲準則  一毫不及聖人   則吾事末了

 

먼저 그 뜻을 크게 가져야 한다

성인을 본보기로 삼아서

조금이라도 성인에 미치지 못하면

나의 일이 끝나지 않은 것이다.

 

 

율곡기념관

(栗谷記念館)

 

栗谷 記念館은 1986년 建立된 八角亭 樣式의 建物로 地上 2層 地下 1層으로 되어 있는데 2009년 새롭게 丹粧하여 栗谷先生 關聯 資料展示 및 體驗空間으로 構成되어 있다. 1층에는 栗谷과 申師任堂의 書畵 遺品을 비롯해서 큰 누나인 매칭 (매칭)과 막내동생 이우 (이우 호는 옥산)의 作品등을 鑑賞할수 있는 digital gallery가 있다.

  

 

(栗谷李珥)

 

 

어린시절

 

栗谷은 어린시절에 非凡하여 3 세에 이미 말과 글을 배우기 始作하였다. 8 살때는 故鄕  坡州에 있는 花石亭에 올라가 가을 風景의 情趣를 아름다운 詩로 읊었으며 10살때는 江陵 鏡浦臺를 들러 長文의 (鏡浦臺賦)를 지었다. 

 

 

삶과죽음을깨닫다

 

栗谷이 16세가 되던해 어머니인 申師任堂이 世上을 떠났다. 栗谷은 3년 동안 侍墓살이를 하며 精誠을 다해 어머니를 모신것으로 有名하다. 이 무렵 그는 "사람은 왜 태어나며 왜 죽지 않으면 안되는가?" 에 自文하며 3年을 보냈다.

 

 

금강산입산

 

栗谷은 19살때 金剛山 摩訶衍으로 들어가 義巖 이라는 法名으로 佛敎修行을 하였다. 하지만 그는 佛敎에서도 自身이 原하는 眞理를 찿지못한채 1년만에 金剛山을 나오게된다. 오히려 儒敎에 聖人이 되는길이 있고 남을 위해 일하는 길이 있다는 것을 깨달은 그는 自警文(스스로를 境界하는글)을 지어 뜻을 세우고 覺悟를 새롭게 하였다.

 

 

아홉번장원급제하다

 

13세 進士 初試에 壯元及第하고 21세에는 漢城試에 及第하였으며 23세에는 (天道策 )으로 壯元及第 하였다. 1564년 李珥는 生員試와 式年文科에 모두壯元으로 及第 하였는데 이로써 그는 科擧에 총 9번 及第 하였다. 그리하여 그가 거리를 지나갈 때면 아이들까지 九度壯元公이 지나간다고 우러러 보았다.

 

 

상소를올리다

 

벼슬길에 어른 그는 政治社會에 參與하면서 가슴에 간직하고 있던 異常을 實現하기 始作하였다. 수 많은 上訴를 올려 임금에게 諫言하였는데 萬言封事가 代表的이다. 萬言封事의 경우 上訴를 읽은 先祖의 答辯에 上訴의 事緣을 살펴보니 임금과 百姓을 堯舜時代 처럼 만들겠다는 뜻을 斟酌할수 있다. 옛 사람도 여기에 더할수 없겠도다 이런 臣下가 있는데 어찌 나라가 다스려지지 않음을 걱정 하겠느냐 라고 할 정도다.

 

 

故鄕으로돌아가다.

 

성학집요

(聖學輯要)

 

栗谷이 40세 되던 해 9월 編纂해 王에게 올린 著述로 儒學의 가르침을 通해 올바른 사람이 되고 나아가 家庭,社會,國家를 便安하게 하는데 必要한것을 慳結하게 적은것이다.

 

 

간찰

(簡札)

 

李珥가 大司諫에 任命되었으나 病으로 辭職하고 海州 石潭에 있을때인 1578년 5월 25일 親舊가 보내온 書信에 答 한것이다.

 

 

토지양여서

(土地讓與書)

 

朝鮮時代 (1579) 栗谷이 外祖母인 龍仁 李씨로부터 물려받은 土地를 姨從四寸인 권처균 에게서 讓與 한다는 證書로 오느날의 契約書나 覺書와 같은 文書 이다.

 

 

벼루

 

栗谷이 어린時節에 使用하던 벼루이다. 安東 고산석에 梅花나무를 纖細하게 彫刻하여 만들었다. (강원도유형문화재 10호)  

 

 

소현서원

(隱屛精舍)

 

黃海南道 碧城郡 石潭里에 있는 書院 이다. 이곳은 朝鮮 明宗.先祖때의 大學者인 栗谷先生이 43 세에 隱居하여 朱子를 追慕하는 한편 學者를 養成하기 위하여 세운곳이다. 1610년 (光海君2)에 紹賢이라는 賜額을 을 받았으며 興宣大院君의 書院撤廢令으로 1871년 (高宗8)毁損되었다가 1950년대 以後에 復元되었다. (現在北韓 寶物級文化財 第24호로 指定됨)

 

 

동호문답

(東湖問答)

 

栗谷이 34살 (1569 先祖2)되던해 9월 弘文館 敎理로 東湖讀書堂에서 賜暇讀書 하면서 지은것이다. 東湖問答은 새로 登極한 先祖에게 栗谷 自身의 政治家을 披瀝하는 性格도 아울러 가지고 있다. 栗谷은 이 著述에서 王道 政治를 回復할수 있는 經綸과 抱負를 명괘하게 論述했다. 主人과 손님이 問答을 주고받는 形式으로 著述된 東湖問答은 임금의 道理 臣下의道理 白性을 便安하게 해주는 方策등 총 11 項目을 論하고 있다. 

 

 

격몽요결

(擊蒙要訣)

 

栗谷이 42살때 海州 石潭에 있으면서 처음 學文의 길에 들어선 第子들에게 學文하는 方向을 가르쳐 주기위한 것으로 擊蒙은 몽매하여 따르지 않은자를 깨우치거나 懲罰한다는 뜻이다. 立志 革舊習 持身 讀書등 10장으로 構成되어 있는 擊蒙要訣은 栗谷의 敎育觀을 遺憾없이 發揮한 것으로 儒敎的 敎育槪論서라 할수 있다.

 

 

(申師任堂)

 

申師任堂은 江原道 江陵 胎生으로 그의 生家 烏竹軒은 지금도 保存되고 있다. 本名은 신인선이었다. 아버지는 申命和라는 이름의 先備였고, 어머니는 龍仁 李氏 집안의 先備인 이사온의 딸이었다. 스스로 師任堂이라는 호를 지었는데, 주나라의 기틀을 닦은 문왕의 어머니 太任에서 따왔다고 전한다.그 외에 姻姙堂 또는 姙師齊라는 호도 가졌다고 한다. 1522년 덕수 李씨의 李元秀와 結婚하여 江陵에서 서울로 移徙 했으며 4男 3女를 두었다. 栗谷 李珥는 申師任堂의 셋째 아들이다. 그는 뛰어난 畵家로서 7살 때 世宗 時代의 畵家 안견의 그림을 본따서 그림을 그렸고, 肅宗, 宋時烈 등 여러 知識人들이 그가 그린 그림에 訪問을 쓸 정도였다. 書藝家이자 詩人 이기도 한 그는 '어머니가 그리워'(思親)등의 한시(漢詩)를 여러 편 지었다. 別世 당시 그녀의 나이는 48세였다.  詩.·글씨·그림에 모두 뛰어났으며 李珥의 어머니로 士大夫 婦女에게 要求되는 德行과 才能을 兼備한 賢母良妻로 稱頌된다. 본관은 平山. 아버지는 己卯名賢의 한 사람인 名和, 어머니는 龍仁李氏로 思溫의 딸이다. 이이는 〈행장기〉를 지어 사임당의 藝術的 才能, 우아한 天品, 順孝한 性品 등을 記錄했다. 師任堂은 主나라 文王의 어머니인 太任을 본 받는다는 뜻의 堂號이며, 이밖에 媤任堂 ·妊思齊라고도 했다. 江陵 外家에서 자랐으며, 19세에 덕수李氏  元秀와 婚姻했다.

 

 

보호수

(保護水)

 

樹種은 느티나무 樹齡은 약 360년 정도이며 京畿道에서 指定 保護하고 있음.

 

 

입지재

(立志齋)

 

紫雲書院의 동재 (東齋:儒生들이 起居하던 寄宿舍 東쪽 건물)이다. 1997년에 新築 하였으며 正面 3칸, 側面,1칸반 規模의 맞 배지붕 建物이다.

 

 

수양재

(修養齋)

 

紫雲書院의 서재 (東齋:儒生들이 起居하던 寄宿舍 東쪽 건물)이다. 1997년에 新築 하였으며 正面 3칸, 側面,1칸반 規模의 맞 배지붕 建物이다.

 

 

강인당

(講仁堂)

 

儒生들의 講學 場所로 지금의 學敎 敎室 役割을 했던 곳이다. 1997년에 新築하였으며 正面 5칸 側面 2칸 規模의 맞배지붕 建物이다.

 

 

자운서원묘정비

(紫雲書院廟庭碑)

 

紫雲書院廟庭碑는 栗谷先生의 德行을 追慕하고 紫雲書院의 建立內歷을 記錄한 花崗巖 碑로 1683년 (肅宗 9년)에 建立되었다. 碑文은 尤庵 宋時烈이 짓고 글씨는  谷雲 金壽增이 隸書體로 썼다. 머릿글은 金壽恒이 썼다. 京畿道 有形文化財 77호 

 

 

(栗谷李珥)

 

 栗谷 李珥(1536∼1584)先生은 어려서 어머니에게 學文을 배워 13세에 進士初試에 合格하고 明宗 19년(1564) 生員試, 式年文科에 모두 壯元及第한 후 黃海道 觀察使, 大司憲 등과 吏曹·刑曹·兵曹의 判書를 歷任하였다. 朝鮮 儒學界 에 退溪 李滉 先生과 雙璧을 이루는 大學者로서 畿湖學派를 形成했고 朋黨의 調停, 十萬  軍隊의 養兵을 主張하였으며 大同法, 社倉의 실시에 努力하였다. 글씨, 그림에도 뛰어났으며 孝誠이 指極하였다.文廟에 從祀되었고 宣祖의 廟庭에 配享되었으며 坡州의 紫雲書院, 江陵의 松潭書院 등 20여개 書院에 祭享되고 있다. 烏竹軒은 江陵 儒賢인 崔致雲(1390∼1440)의 創建으로 아들 應賢은 사위 李思溫에게 물려주고 李思溫은 다시 그의 사위 申命和(사임당의 부친)에게,申命和는 그의 사위 權和에게 물려 주면서 그 後孫들이 관리하여 오던 중 1975년 烏竹軒 淨化事業으로 文成祠, 記念館 등이 建立되어 現在와 같은 面貌를 갖추고 先生의 偉業과 敎訓을 길이 追仰하게 된 것이다.

 

 

문성사

(文成祠)

 

位牌 (죽은사람을 모시는 나무패)를 모시고 祭祀를 지내는 祠堂 建物로 中央에 栗谷 李珥 先生을 오른쪽에 沙溪 金長生 先生. 왼쪽에는 玄石 朴世采 先生의 位牌를 모시고 있다. 興宣大院君의 書院 撤廢令으로 헐어진 후 1968년 3월 儒林이 國家支援을 받아 重建 하였다.

 

 

망료위

(望燎位)

 

祭享을 지내고 난뒤 祝文 (祭祀 課程에서 神命에게 올리는 글)을 태우는 곳이다  望瘞位 라고도 한다.

 

 

관세위

(盥洗位)

 

獻官 (祭祀 課程에서 술을 올리는 사람)이 祠堂에 들어가 祭享意識을 行하기 前에 손을 씻는 곳이다. 普通 祠堂 東쪽 階段 옆에 設置한다.

 

 

이이선생신도비

(李珥先生神道碑)

 

坡州市 鄕土遺跡 제 6호로 높이 223 cm 폭 109 cm 두께 39 cm 規模의 大理石 碑石으로  앞뒷면에 栗谷 李珥 先生의 一代記가 記錄되어있다. 1631년 (仁祖9)4월에 建立되었고 李恒福 碑文을 짓고 申翊聖이  썻으며 篆額은 金尙容이 썻다. 

 

 

 

先須大其志, 以聖人爲準則, 一毫不及聖人, 則吾事未了.

 

먼저그뜻을크게가져야한다. 성인을 본보기로 삼아서.

조금이라도 성인에 미치지 못하면. 나의일이 끝나지 않은 것이다.

 

 

'歷 史 旅 行 3 > 書 院' 카테고리의 다른 글

빈공간  (0) 2012.10.27
陶山書院  (0) 2010.08.07
屛山書院  (0) 2010.08.06
紹修書阮  (0) 2009.06.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