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歷 史 旅 行 1/陵&園&墓

栗谷李珥家族墓

 

(申師任堂)

 

 

申師任堂은 江原道 江陵 胎生으로 그의 生家 烏竹軒은 지금도 保存되고 있다. 本名은 신인선이었다. 아버지는 신명화(申命和)라는 이름의 선비였고, 어머니는 龍仁 李氏 집안의 선비인 李思溫의 딸이었다. 스스로 사임당(師任堂)이라는 호를 지었는데, 周나라의 기틀을 닦은 文王 어머니 태임(太任)에서 따왔다고 傳한다.그 외에 인임당(姻姙堂) 또는 임사제(姙師齊)라는 호도 가졌다고 한다. 1522년 德修 李氏의 李元壽(李元秀)와 結婚하여 江陵에서 서울로 移徙했으며 4남 3녀를 두었다. 栗谷 李珥는 申師任堂의 셋째 아들이다. 그는 뛰어난 畵家로서 7살 때 世宗 時代의 畵家 安堅의 그림을 본따서 그림을 그렸고, 肅宗, 宋時烈 등 여러 知識人들이 그가 그린 그림에 發文을 쓸 程度였다. 書藝家이자 詩人이기도 한 그는 '어머니가 그리워'(思親)등의 한시(漢詩)를 여러 편 지었다. 別世 당시 그녀의 나이는 48세였다.  詩·글씨·그림에 모두 뛰어났으며 이이(李珥)의 어머니로 士大夫 婦女에게 要求되는 德行과 才能을 兼備한 賢母良妻로 稱頌된다. 本官은 平山. 아버지는 기묘명현(己卯名賢)의 한 사람인 명화(名和), 어머니는 龍仁李氏로 사온(思溫)의 딸이다. 李珥는〈行狀記〉를 지어 師任堂의 藝術的 才能, 優雅한 天稟, 純孝한 性品 등을 記錄했다. 師任堂은 周나라 文王의 어머니인 태임(太任)을 본받는다는 뜻의 堂號이며, 이밖에 시임당(媤任堂)·임사재(妊思齊)라고도 했다. 江陵 外家에서 자랐으며, 19세에 德修李氏 원수(元秀)와 婚姻했다.

 

 

 

신사임당

(申師任堂)

 

여견문

(如見門)

 

묘비명

(墓碑名)

 

通政大夫平昌郡守德水李公諱景臨墓

淑夫人谷山盧氏祔

 

 

신사임당묘

(辛師任堂墓)

 

朝鮮時代에 뛰어난 女流 書畵家이며 栗谷 李珥 어머니인 申師任堂의 墓로 男便 李元壽와 合葬墓로 造成되어 있다. 師任堂은 堂號로서 그 뜻은 당시 最高의 女性像인 中國 周나라 文王의 어머니인 胎姙을 본받는다는 것이다. 申師任堂은 外家인 江陵 北平村에서 태어나 자랐으며 7세에 이미 안견의 그림을 스스로 본보기를 삼아 배웠다고 한다. 그림뿐만아니라 글씨도 잘썼으며 한시 역시 자지었다. 師任堂은 儒學의 대가 李珥를 길러낸 훌륭한 어머니로서 男便을 잘 輔弼한 아내로서 그리고 敎養과 學文을 갖춘 藝術家로서 朝鮮時代 代表的인 女性으로 平家받고 있다. 墓域은 封墳앞 中央에 墓碑와 上席 香爐石이 일렬로 놓여 있으며 左右로 文人石이 세워져 있다.

 

 

묘비명

(墓碑名)

 

贈宗政大夫議政府左贊成行司憲府監察德水李公諱元秀之墓

贈貞敬夫人師任堂平山申氏祔

 

 

묘비명

(墓碑名)

 

贈宗政大夫議政府左贊成行通德郞司憲府監察李公

贈貞敬夫人平山申氏合墓之墓

 

 

묘비명

(墓碑名)

 

成均生員將仕郞南部參奉竹谷德水李公諱?之墓

配恭人善山郭氏祔左

 

 

(栗谷李珥)

 

栗谷 李珥(1536∼1584) 先生은 어려서 어머니에게 學文을 배워 13세에 진사초시(進士初試)에 合格하고 명종(明宗) 19년(1564) 생원시(生員試),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모두 장원급제(壯元及第)한 후 황해도(黃海道) 관찰사(觀察使), 대사헌(大司憲) 등과 이조(吏曹)·형조(刑曹)·병조(兵曹)의 판서(判書)를 歷任하였다. 조선(朝鮮) 유학계(儒學界) 에 퇴계(退溪) 이황(李滉) 先生과 雙璧을 이루는 대학자(大學者)로서 기호학파(畿湖學派)를 形成했고 붕당(朋黨)의 조정(調停), 10만(十萬) 군대(軍隊)의 양병(養兵)을 주장하였으며 대동법(大同法), 사창(社倉)의 실시에 勞力하였다. 글씨, 그림에도 뛰어났으며 孝誠이 指極하였다.문묘(文廟)에 종사(從祀)되었고 선조(宣祖)의 묘정(廟庭)에 배향(配享)되었으며 파주(坡州)의 자운서원(紫雲書院), 강릉(江陵)의 송담서원(松潭書院) 등 20여개 書院에 제향(祭享)되고 있다. 烏竹軒은 江陵 유현(儒賢)인 최치운(崔致雲)(1390∼1440)의 창건(創建)으로 아들 응현(應賢)은 사위 이사온(李思溫)에게 물려주고 李思溫은 다시 그의 사위 신명화(申命和)(師任堂의 부친)에게,申命和는 그의 사위 권화(權和)에게 물려 주면서 그 후손(後孫)들이 管理하여 오던 중 1975년 烏竹軒 정화사업(淨化事業)으로 문성사(文成祠), 記念館 등이 建立되어 現在와 같은 面毛를 갖추고 先生의 偉業과 敎訓을 길이 추앙(追仰)하게 된 것이다. 

 

 

이이선생묘

(李珥先生墓)

 

朝鮮中期의 學者이며 政治家인 栗谷 李珥 (1536 ~ 1584)의 墓이다. 江陵 烏竹軒에서 태어나 坡州 栗谷里에서 成長한 李珥는 朝鮮時代 代表的인 性理學者일 뿐만아니라 十萬養兵說 大同法의 실시 사장의 設置등 政治 經濟 社會 前半에 걸쳐改革을 主張한 代表的인 政治改革가 였다. 著書로 同好問答 聖學輯要 擊蒙要訣 등이 있으며 大司憲을 비롯하여 大提學,戶曹,兵曹,吏曹判書 등의 官職을 歷任하였다. 李珥는 儒學에 있어서 退溪 李滉과 雙璧을 이루는 하자로서 李滉과 徐敬德의 理論을 折衝하여 一元論的 理氣二元論을 主張하였고 畿湖學派를 形成하여 後世의 學界에 强力한 影響을 끼쳤다. 世上을 떠난後 이곳 坡州 紫雲山 先山에 묻혔는데 墓域은 婦人 谷山 盧氏墓와 위아래로 造成되어있다. 封墳 正面에 上席과 오른쪽에 墓碑가 位置해 있으며 左右로 望柱石과 文人石을 세웠다.

 

 

묘비명

(墓碑名)

 

文成公栗谷李先生之墓

貞敬夫人谷山盧氏墓後左

 

 

묘비명

(墓碑名)

 

贈戶曺判書德水李公諱繼之

配 贈貞敬夫人淸風金氏之墓

 

 

묘비명

(墓碑名)

 

贈通政大夫戶曺參議德水李公諱齊之墓

 贈淑夫人光州鄭氏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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