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歷 史 旅 行 1/陵&園&墓

尹瓘將軍墓

(尹瓘將軍墓)

 

 

高麗 睿宗때 女眞征伐에 큰功을 세운 윤관 (尹瓘  ? ~ 1111)의 묘이다. 尹瓘은 파평 (坡平) 尹氏로 高麗 文宗 때에 科擧에 及第하여 여러官職을 거쳤다. 肅宗 9년 (1104) 勢力이 커진 女眞族을 征伐하라는 王命을 받고 싸웠으나 高麗軍은 女眞의 强한 騎兵을 당할수가 없었다. 特殊部隊인 別武班을 새로이 編成하여 睿宗 (1107) 別武班을 이끌고 咸鏡道 쪽으로 進擊하여 女眞族을 北方으로 몰아내고 東北地方 일대에 9城을 쌓았다. 그후 女眞이 永遠히 背反하지 않고 朝貢을 바친다는 條件으로 城을 돌려받기를 懇請하여 高麗도 東北쪽의 女眞討伐에만 國力을 기울일수 없어 9성 일대의 땅을 다시 女眞에게 돌려주었다.

 

 

 

 

高麗北쪽 變更의 女眞族은 初期에 高麗를 父母의 나라로 섬기며 朝貢을 바치다가 거란이 衰退하던 12세기 初에는 高麗를 强力히 威脅할程度로 그 勢力을 키웠다. 高麗는 肅宗,睿宗때에 尹瓘등으로 하여금 女眞을 征伐케 하였으나 크게 成功하지 못하였다. 勢力을 더욱키운 女眞은 滿洲一帶를 帳幄하여 國號를 금이라하더니 곧이어 거란을 滅亡시키고 宋까지 양쯔강 以南으로 밀어내리며 中國大陸을 帳幄 하였다. 게다가 금은 過去自身들이 朝貢하던 高麗에 대해 거꾸로 君臣의 禮를 要求하였고 高麗는 論難끝에 李資謙의 現實論을 따라 금의 要求를 받아드렸다. 두나라는 금이 몽골에 滅亡하기까지 平和를 維持하였다.

 

 

북관유적도첩

(北關遺跡圖帖)

 

朝鮮後期에 製作된 북관유적도첩 (北關遺跡圖帖)에 들어있는 척경입비도 이다. 이 그림은 高麗 睿宗에 尹瓘과 오연총이 지금의 咸鏡道 一帶에 女眞族을 征伐한뒤 吉州,공협진등 9城을 쌓고 선춘령에 高麗地境 이라고 새긴 碑를 세워 境界를 삼은일을 그린 것이다.

 

 

여충사

(麗忠祠)

 

文肅公尹瓘將軍墓域 (國家史蹟 第323號)

 

 

윤관장군묘

(尹瓘將軍墓)

 

高麗 中期의 文臣인 尹瓘(?∼1111)의 무덤이다. 그는 高麗 文宗(在位 1046∼1083) 때 文科에 合格하였고, 肅宗 9년(1104)에 ‘동북면행영병마도통(東北面行營兵馬都統)’이 되어 國境을 侵入한 女眞과 싸웠으나 敗 하였다. 그 後 女眞征伐을 위해 別武班을 編成해 睿宗 2년(1107)에 女眞을 征伐한 후 9성을 쌓았다. 尹瓘의 무덤은 어디에 있는지 明確히 알 수 없었으나, 朝鮮 英祖 23년(1747) 後孫들이 지금의 자리임을 主張하여 英祖 40년(1764)에 公印되었다. 尹瓘 將軍墓 周邊에는 後代에 세워진 碑石과 石燈이 있다. 位牌는 睿宗의 祠堂에 함께 모셔졌고, 高麗 太祖와 忠義功臣을 모신 崇義殿에서 함께 背向되었다.

 

 

尹侍中轎子塚                                                                         尹侍中戰馬塚

 

文肅公尹瓘將軍神道碑                   文肅公尹瓘大元帥事蹟碑

 

 

윤관장군묘

(尹瓘將軍墓)

 

高麗 中期의 文臣인 尹瓘(?∼1111)의 무덤이다. 그는 高麗 文宗(在位 1046∼1083) 때 文科에 合格하였고, 肅宗 9년(1104)에 ‘동북면행영병마도통(東北面行營兵馬都統)’이 되어 國境을 侵入한 女眞과 싸웠으나 敗 하였다. 그 後 女眞征伐을 위해 別武班을 編成해 睿宗 2년(1107)에 女眞을 征伐한 후 9성을 쌓았다. 尹瓘의 무덤은 어디에 있는지 明確히 알 수 없었으나, 朝鮮 英祖 23년(1747) 後孫들이 지금의 자리임을 主張하여 英祖 40년(1764)에 公印되었다. 尹瓘 將軍墓 周邊에는 後代에 세워진 碑石과 石燈이 있다. 位牌는 睿宗의 祠堂에 함께 모셔졌고, 高麗 太祖와 忠義功臣을 모신 崇義殿에서 함께 背向되었다.

 

 

윤 관

(尹瓘)

 

윤관(尹瓘, 1040년 ~ 1111년 陰曆 5월 8일)은 高麗 中期의 文臣.軍人이다. 肅宗.睿宗 때 女眞族 討伐에 出征하였다. 肅宗 때에는 女眞族 討伐에 失敗, 江華會談을 하고 되돌아왔으나  1107년(睿宗 2년)에 特殊 部隊 別武班을 이끌고 女眞 征伐軍의 원수(元帥)가 되어 副元帥 오연총(吳延寵)과 17만 大軍을 거느리고 女眞族을 討伐한 뒤, 北方에 9성을 쌓고, 女眞族이 再侵略 하자 이를 鎭壓하고 1108년(睿宗 3년) 改選하였다. 本官은 把平, 자는 동현(同玄), 詩號는 문경(文敬)이다. 女眞族을 몰아내고 北進政策을 完遂한 功으로 榮平(把平)백에 奉해져 後孫들이 本官을 파평으로 하였다. 把平尹氏 尹氏의 始祖 윤신달(尹莘達)의 5世孫이며, 아버지  윤집형(尹執衡)은 검교소부소감을 지냈다. 아들은  윤언이고, 忠惠王의 장인 윤계종은 尹瓘의 7代孫이었다.

 

 

묘비명

(墓碑名)

 

高麗守太保門下侍中鈴平佰文肅尹公諱瓘之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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