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악산
(百潭寺)
1988년 5월 28일자로 傳統寺刹 제24호로 指定된 百潭寺는 寶物 제 1182호(1993. 11.1)로 指定된 木造阿彌陀佛坐像 伏藏遺物을 所藏하고 있다. 1928년 百潭寺의 復舊가 끝난당시 助事한바에 의하면 사보(寺寶)로 現場遺物로 定해지는 미타불상(彌陀佛像) 3위(位)와 소종(小鐘) 1좌(坐) 가 있고 仁祖의 下賜品인 七層玉塔 이 있었다, 寶物로 指定된 木造阿彌陀佛은 英祖 24년 (1748년)에 造成된 아미타목불좌상(阿彌陀木佛坐像)으로 18세기 前半期의 佛像 가운데 秀作으로 平價되고 있다. 이외 伏藏遺物로는 불상신조성회향발원문(佛像新造成回向發願文) 1매 타라니서입회향발원문(陀羅尼書入回向發願文) 1매 황참의 다리연화방거 한글發願文 1매 자식점지 한글發願文 1 매와 만자소화문황단삼회장적고리(卍字小花紋黃緞三回裝赤古里) 1 점 유리와 수정등의 破片 수 白點을 보자기에 싼 伏藏物 1괄이 保管되고 있어 當代의 腹式硏究에 貴重한 資料로 平價되고 있다. 現在 百潭寺에는 法堂,法華室,華嚴室,羅漢殿觀音殿 山神閣등 6개동이 旣存建物외에 萬海韓龍雲 先師의 文學思想과 佛敎 精神을 具現하기 위한 萬海 記念館,萬海敎育觀,萬海硏究官,萬海修練館,一周門,萬福殿,萬海圖書館,寮舍채,養老室,萬海堂,헌다실,積善堂,등 16개의 建物로 構成된 韓國의 代表的 古刹의 하나이다.
설악산심원사사적기
(雪嶽山尋源寺寺積記)
韓龍雲의 백담사사적기(百潭寺寺積記)에 의하면 서기 647년 新羅 제28 대 眞德女王 元年에 煮醬律師가 雪嶽山 항계리에 한계사로 創建하고 阿彌陀三尊佛을 造成, 奉安하였다 한게사로 創建後 775년 (英祖51년)까지 운훙사,심원사,선구사,영취사,로 바뀌다가 1457년(世祖3년)과 1783 (정조7년) 에 최붕과 운담이 百潭寺라 改稱하여 現在까지 傳하고 있다. 傳說에 의하면 百潭寺라는 寺刹의 이름은 雪嶽山 大靑峯에서 절까지 담(潭)이 백개가 있는 地点에 寺刹을 세운대에서 일컫게 되었다고 한다. 百潭寺는 內雪岳의 아주 깊은오지에 자리잡고 있어서 옛날에는 사람들이 좀처럼 찿기 힘든 修行處 였다 수많은 운수납자(雲水衲子)가 不遠千里하고 이곳을 찿아 百潭寺溪谷을 시원하게 흘러가는 맑은물에 客塵煩惱를 털어내고 雪岳靈峯의 푸른구름을 벗을삼아 出擊壯夫의 奇想을다듬던 先佛場이었다. 韓龍雲이 編纂한(百潭寺 寺積記)에 의하면 附屬庵子로서 維持만 남아있는 곳으로 동암,원명암,백련암, 등 8개 庵子가 있었다. 萬海 韓龍雲 (1879 - 1944) 先師는 1905년 이곳 百潭寺에서 머리를 깍고 入山修道하여 깨딸음을 얻어 조선불교유신론(朝鮮佛敎維新論)과 십현담주해(十玄談註解)를 執筆하고 (님의沈默)이라는 詩를 發表하는등 佛敎維新과 改革을 推進하였으며 日帝의 民族侵奪에 抗拒하여 民族獨立運動을 構想하였던 獨立運動의 遺跡地로 有名하다.
백담사
(白潭寺)
1775년(英祖 51)에 다시 불이 나자 최붕(最鵬)이 태현(太賢)·태수(太守)와 함께 重建하고, 심원사(尋源寺)라고 改稱했으나 1783년(正祖 7)에 다시 百潭寺로 還元했다. 1915년에 일어난 火災로 거의 모든 唐虞가 타버린 것을 당시 主旨였던 인공(印空)이 重建에 着手해 1921년에는 응향각 등 사무실 30여 칸을 새로이 짓고, 鐘과 북을 鑄造해 諾成法會를 열었다. 近代에 韓龍雲이 머물면서 〈님의 沈默〉, 〈불교유신론 佛敎維新論〉을 집필하는 등 萬海思想의 産室이 되었다. 6·25戰爭 때 불탄 것을 1957년 重建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88년 11월 23일 전두환 전(前)大統領 내외가 대(對) 國民謝過聲名發表 後 이 절에 隱居했다가 1990년 12월 30일에 延禧洞 私邸로 돌아가면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現存 당우로는 大雄寶殿·七星閣·선원(禪院)·요사채 등이 있고, 南쪽으로 150m 떨어진 곳에 觀音殿이 있다. 그밖에 煮醬의 遺物로 傳하는 阿彌陀象과 소종(小鐘), 인조(仁祖)의 下賜品인 옥탑(玉塔), 설담당(雪潭堂) 부도, 연포당(蓮浦堂) 부도 등이 있다.
금강문
(金剛門)
寺刹에 따라 천왕문(天王門)을 세우기도 하며, 어느 경우에는 金剛門과 天王門이 함께 세워지기도 하는데 이때에는 金剛門이 天王門 밖에 세워진다. 金剛門은 보통 앞면 3칸, 옆면 1칸의 직4각형 평면을 이룬 단층집으로 建築된다. 中央門은 앞뒤 모두 아무런 窓戶를 달지 않고 開放하며, 양 옆칸은 모두 壁體를 친다. 지붕은 맞배지붕이나 팔작지붕으로 꾸미고, 공포는 익공식(翼工式)이나 다포식(多包式)을 使用했다. 안에는 中央門만 사람이 通行할 수 있게 하고, 양 옆칸에는 中央 쪽으로 홍살을 세워 격리시키고, 그 안에 금강역사상(金剛力士像)을 세웠다. 이 문을 通過함으로써 寺刹 안에 들어오는 모든 악귀(惡鬼)가 除去되어 가람(伽藍)의 내부는 청정도량(靑淨道場)이 된다는 것이다.
극락보전
(極樂寶殿)
절의 紀元은 647년(眞德女王 1)에 자장(慈藏)이 創建한 한계사(寒溪寺)이다. 690년(神文王 10)에 火災로 燒失된 것을 719년(聖德王 18)에 再建했다. 785년(元聖王 1) 다시 불탄 것을 790년에 종연(宗演)·광학(廣學)·각조(覺照)·영희(靈熙)·법찰(法察)·설흡(雪洽) 등이 절터에서 30리 아래로 옮겨 운흥사(雲興寺)라고 했다. 984년(成宗 3)에 다시 火災로 燒失되자 987년에 동훈(洞薰)·준희(俊熙) 등이 雲興寺址의 北쪽 60리 되는 곳에 옮겨짓고 심원사(深源寺)라고 改稱했다. 1432년(世宗 14)에 또다시 불이 나자 의준(儀俊)·해섬(海暹)·취웅(翠雄)·신열(愼悅) 등이 옮겨 짓고 선구사(旋龜寺)라 改稱했다. 1443년 火災로 燒失되자 1447년 옛 터 서쪽 1리쯤 되는 곳에 절을 짓고 영취사(靈鷲寺)라고 했다. 1455년(世祖 1)에 다시 火災로 불타버리자 재익(載益)·재화(載和)·신열 등이 옛 터의 上流 20리 되는 곳에 重建하고 百潭寺라고 改名했다.
범종루
(梵鐘樓)
범종루(梵鐘樓)는 종고루(鍾鼓樓) 또는 종각(鐘閣)이라고도한다. 큰 梵鍾만 매달아 놓은 곳도 있지만 普通 佛殿사물 또는 法具사물[사법물]이라하여 梵鍾, 法鼓, 雲版, 木魚를 매달아 놓는다.
나한전
(羅漢殿)
釋迦牟尼를 주불(主佛)로 하여 左右에 釋迦牟尼의 弟子 가운데 아라한과(阿羅漢果)를 얻은 聖者들을 奉安한다. 500羅漢像을 모신 五百羅漢전과 16羅漢像을 모신 응진전(應眞殿)으로 區分된다. 우리나라에서는 五百羅漢이 衆生에게 福을 주고 所願을 成就해 준다고 믿어 많은 羅漢殿이 생기게 되었다. 慶尙北道 永川郡 거조암 영산전(靈山殿)의 500羅漢像과 淸道郡 雲門寺의 五百羅漢殿이 有名하다. 羅漢殿에 奉安된 現存 羅漢像은 거의 朝鮮時代 作品으로 다른 佛敎像들과는 달리 多樣한 姿勢를 취하고, 表情도 解學的이면서 人間的인 情趣를 자아내므로 親近感을 불러일으킨다.
산영각
(山靈閣)
산영각(山神閣)은 佛敎가 우리나라에 들어오면서 우리 固有의 民俗信仰을 包容하며 생긴 一種의 民俗信仰과 佛敎의 만남이라 할수있습니다.
한용운
(韓龍雲)
한용운(韓龍雲, 1879년 8월 29일 ~ 1944년 6월 29일)은 韓國의 詩人, 佛敎 僧侶이자 獨立運動家이다. 호는 만해(萬海)이다. 日帝에 대한 抵抗 精神으로 집도 朝鮮總督府 반대 方向인 北向으로 지었고, 食糧 配給도 拒否했다는 이야기는 매우 有名하다. 또한, 變節한 親日派 崔南善이 韓龍雲과 가까운 사이임을 가장 하자, 韓龍雲은‘崔南善이라는 사람은 (마음 속으로) 이미 葬禮를 치러서 당신은 모르는 사람입니다.’ 라고 했다고 한다. 전기로 고은의 《韓龍雲 평전》(1975)이 있으며, 외아들 한보국은 故鄕인 洪城에서 社會主義 運動을 하다가 韓國戰爭 때 越北했다. 韓國 近代詩社의 不朽의 業績인 〈님의 沈默〉을 펴냈고, 韓國 近代 佛敎係에서 革新的인 思想과 活動을 펼쳤으며, 3·1獨立宣言에 民族代表로 參加하는 등 日帝强占期의 革命的인 獨立運動에도 앞장섰다. 本官은 청주(淸州). 속명은 유천(裕天). 자는 정옥(貞玉). 용운은 法名이며 得道할 때의 계명은 봉완(奉玩), 法號는 萬海 江原道 麟蹄郡 北面 容貸理에 있는 외가평에서 百潭寺에 이르는 溪谷. 春天에서 少陽湖를 통해 麟蹄까지 連結되는 뱃길이 있으며, 洪川-麟蹄-圓通을 지나 容貸理를 通過하는 46번 國道가 包裝되어 있어 交通이 便利하다. 百潭寺에서 溪谷을 따라 500m 지점에 있는 白痰山莊은 100여 명을 受容할 수 있으며, 溪谷 入口에는 韓屋 民泊村들이 密集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