千年古都慶州
불국사
(佛國寺)
慶州 吐含山에 자리잡은 佛國寺는 新羅 景德王 10년(751)에 당시 宰相이었던 金大城이 짓기 시작하여, 惠恭王 10년(774)에 完成하였다. 以後 朝鮮 宣祖 26년(1593)에 倭의 侵入으로 大部分의 建物이 불타버렸다. 以後 極樂殿, 紫霞門, 帆影樓 등의 一部 建物만이 그 命脈을 이어오다가 1969년에서 1973년에 걸친 發掘助事 뒤 復元을 하여 現在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境內에는 統一新羅 時代에 만들어진 多寶塔과, 釋迦塔으로 불리는 3층 石塔, 紫霞門으로 오르는 淸雲·白雲橋, 極樂殿으로 오르는 蓮花·七寶橋가 國寶로 指定, 保存되어 있다. 이러한 文化財는 당시 新羅 사람들의 돌을 다루는 훌륭한 솜씨를 엿볼 수 있게 해준다. 아울러 毘盧殿에 모신 金銅毘盧遮那佛座像과 極樂殿에 모신 金銅阿彌陀如來座像을 비롯한 多數의 文化遺産도 당시의 燦爛했던 佛敎文化를 되새기게 한다. 이러한 價値를 認定받아 1995년 12월에 石窟庵과 함께 世界文化遺産에 登錄되었다.
일주문
(一柱門)
일주문(一柱門)은 寺刹로 들어가는 첫 번째 關門이다. 元來 지붕을 가진 一般的인 建築物이라고 하면 四方에 네 개의 기둥을 두어 지붕의 하중을 支撑해야 하는 것이 常識이다. 하지만 一柱門은 한 줄로 나란한 두개의 기둥만으로 지붕을 支撑하며 서 있는 建築物이다. 一柱門이란 名稱은 바로 이런 建築的인 特徵에서 붙여지게 된 것이다. 佛敎에서는 이러한 모습에 비추어 일심(一心)이라는 意味를 附與한다. 즉 神性한 寺刹에 들어서기 傳에 흐트러진 마음을 하나로 모아 眞理의 世界로 向하라는 象徵的인 意味가 담겨 있는 것이다. 一柱門의 境地는 아직 무언가를 깨달았다고는 할 수 없는 位置이다. 다만 斷乎한 決心과 實踐 意志를 보이면서 求道者로서의 길을 始作하는 段階일 뿐이다. 그러나 分明한 것은 一柱門을 基準으로 衆生이 사는 世上인 세간(世間), 그리고 속계(俗界)와 生死 煩惱에서 解脫한 깨달음의 世界인 출세간(出世間), 즉 진계(眞界)로 나누어진다는 것이다.
천왕문
(天王門)
金剛門을 통해 깨뜨릴 수 없는 佛法의 世界를 지나면 천왕문(天王門)을 만난다. 앞면 5칸, 옆면 2칸의 맞배지붕 建物로 앞면 3칸에는 판문(板門)을 달아 出入하도록 하였고 양쪽의 끝 칸에는 門이 아니라 작은 판창(板窓)을 달았다. 대개 寺刹의 金剛門은 앞면 3칸 程度의 規模인데, 이처럼 5칸을 마련하고 양옆에 판창을 댄 法住寺의 境遇는 매우 특이한 境遇로, 國內의 天王門 중 規模가 가장 크다. 現在 忠淸北道有形文化財 제46호로 指定되어 있다. 안에는 四天王償을 봉안하였는데, 東쪽 世界를 官狀하는 지국천왕(持國天王)은 손에 琵琶를 들고 人間 感情의 기쁨의 世界를 總括한다. 西쪽 世界를 官狀하는 광목천왕(廣目天王)은 龍과 如意珠를 들고서 노여움의 感情을 主觀하고, 南쪽 世界를 官杖하는 증장천왕(增長天王)은 칼을 들고 사랑의 感情을 主管하며, 끝으로 北쪽 世界를 다스리는 다문천왕(多聞天王)은 塔 또는 큰 깃대를 들고 즐거움의 感情을 主管한다.이처럼 人間事를 官杖하고 있는 四天王은 착한 일과 惡한 일을 適切한 時期에 判斷하여 그에 따른 賞과 罰을 내린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天王門에 들어서는 사람들은 두려운 마음으로 最大의 恭敬을 올리곤 한다.
청운교 백운교
(靑雲橋) (白雲橋)
위로는 紫霞門으로 連結되어 釋迦牟尼 부처님이 모셔진 大雄殿으로 通한다. 이 階段은 2단으로 構成되어 있는데, 아래에 있는 것은 靑雲橋로 길이 6.3m에 17계단으로 構成되어 있으며, 위에 있는 것은 白雲橋로 길이 5.4m에 16階段으로 되어 있다. 靑雲橋의 아래 부분은 무지개 모습의 虹霓門으로 粧飾되어 있다. 이들 階段은 부처님이 계신 道理川을 意味하며, 33이라는 숫자는 欲界 제2천인 33천을 象徵하는 것이라 한다.
연화교 칠보교
(蓮花橋) (七寶橋)
蓮花橋와 七寶橋는 大雄殿 西쪽에 位置한 極樂殿 領域을 오르는 石造階段으로,國寶 제22호로 指定되어 있다. 보통 蓮花七寶橋라고 부르기도 한다. 樣式은 靑雲橋. 白雲橋와 같으나 規模면에서 다소 차이가 있는데,蓮花橋는 높이 230㎝, 폭 148㎝이고, 七寶橋는 높이 406㎝, 폭 116㎝이다. 階段에 연꽃잎이 새겨져 있는 部分을 蓮花橋라 하고, 七寶橋는 金 · 銀 · 유리 · 水亭 · 山弧 · 마노 · 浩博의 일곱 가지 寶石의 다리라는 데서 그 이름이 由來한다. 이들 階段은 安陽門으로 連結되고, 門을 들어서면 阿彌陀부처님의 極樂世界인 極樂殿 領域에 이르게 된다.
당간지주
(幢竿支柱)
統一新羅時代부터 寺刹 앞에 設置했던 建築物로서 그 周邊地域이 寺刹이라는 神性한 領域을 標示하는 役割을 하였다. 돌로 만드는 것이 普通이지만 鐵·金銅·나무로도 만든다. 2개의 기둥을 60~100㎝ 間隔으로 양쪽에 세우고 마주보는 안쪽 면에 간(杆)을 設置하기 위한 간구(杆溝)나 간공(杆孔)을 두고 아래에는 간대(竿臺)나 基壇部를 設置했다. 간구는 반드시 안쪽 上段에 있으며 그 아래의 간공은 구멍수가 日程하지 않다. 이러한 시원(始源) 形式은 時代에 따른 變化가 없으며, 각면에 粧飾된 紋樣과 地主의 치석수법(治石手法)만이 時代的 特徵을 보일 뿐이다.
금동비로자나불좌상
(金銅毘盧疵那佛座像)
法華經에 의하면 世上에는 많은 부처님이 계시지만 , 釋迦牟尼 부처님이 가장 根本되시는 부처님이라고 한다. 寺刹에서 釋迦牟尼 부처님을 모신 곳을 大雄殿 이라고 한다. 釋迦牟尼 부처님의 왼쪽에는 彌勒菩薩님, 오른쪽에는 製靴喝羅菩薩님이 서 있다. 이를 夾侍菩薩이라고 한다. 부처님과 양쪽의 夾侍 菩薩을 함께 모신 것을 三尊佛이라고 한다. 彌勒菩薩 좌측에는 迦葉尊者(선을 制守 받은 弟子)를 모셨고, 갈라보살 우측에는 阿難尊者를 모셨다. 釋迦牟尼부처님의 모습은 왼손을 무릎 위에 놓고 오른 손을 내려서 땅을 가리키는 '降魔燭知人'을 取하고 계시다.
무설전
(無說殿)
경론(經論)을강설(講說)하는 講堂 말로서 經論을 講說하는 곳임에도 무설(無說)이라고 한 것은 眞理의 本質과 佛敎의 깊은 뜻이 言語手段으로써 도달할수 없는 언어도단(言語道斷)의 瓊脂임을 表現한것이다. 670년경 의상대사(義湘大師)가 이곳에서 最初로 講義를 하였다. 창건(創建)以後 여러차례 重建,重修를 거쳐 1973년 復元하였다. 建築樣式은 朝鮮後期에 속한다.
관음전
(觀音殿)
觀世音菩薩의 功德이 주원융통(周圓融通)하다는 意味에서 원통전(圓通殿)이라고도 한다. 이 안에는 觀世音菩薩을 홀로 모시거나, 양류觀音이나 해수관음(海水觀音) 또는 千手觀音 등을 모시기도 한다. 觀音像은 대개 왼손에 연꽃이나 甘露甁을 들고 앉아 있는 모습이다. 우리나라에서는 慈悲의 火神인 觀世音菩薩에 대한 信仰이 成 하였기 때문에 거의 모든 寺刹에 觀音殿이 있다
비로전
(毘盧殿)
비로자나불(毘盧疵那佛)을 모신法堂 國寶 제26호인 금동비로자나불좌상(金銅毘盧疵那佛座像 8세기 中葉의作品)이 모셔져있다. 751년에 建立되었다. 그 後 여러차례의 重修 .重建을 거쳐 1973년 創建 당시의 基壇과 礎石 위에 重建하였다. 建築樣式은 朝鮮後期에 束한다
사리탑
(舍利塔)
舍利塔은 佛國寺 講壇 뒤쪽에 있으며 外形이 石燈과 비슷한데 불국사적기(佛國寺事蹟記)에 광학부도(光學浮屠)라고 記錄된 것이바로 이것이라고 推定된다. 네모난 地臺石에는 창모양의 안상(眼象)을 彫刻하고 그안에 꽃을 彫刻 하엿다. 8각형의 하대석(下臺石)에 큼직한 연꽃 8잎을 構成하고 장고 模樣의 중대석(中臺石)에는 구름紋樣을 彫刻하였다. 上隊石은 아랫면에 9잎의 연꽃을 彫刻하여 안에 원형을 그리고 윗면에는 연밥을 彫刻하였다, 원통형 塔身에는 粧飾이있는 기둥을세워 네부분으로 나누었다. 각면에는 얕게 彫刻된 佛像을 모시는 감실(龕室)을 만들어 윗쪽에 帳幕을 드리우고 그안에 불(佛)보살(菩薩)신장(神將)을 彫刻 하였다. 기와지붕을 본뜬 지붕돌 아랫면에는 연꽃을 彫刻하였다. 윗부분 꼭대기의 머리粧飾은 없어졌다. 統一新羅時代의 八角堂형에서 벗어난 특이한 形態를 보여 주는것으로 高麗初期의 作品으로 推定된다. 이 舍利塔은 1905년 日本으로 옮겨졌다가 1933년 다시回收되어 다시세워진 것이다.
나한전
(羅漢殿)
십육 나한(羅漢), 또는 오백 나한(羅漢)을 모신 집
탑을쌓는공덕
(塔 功德)
新羅時代에는 塔이 마치 기러기떼가 날아가듯 서라벌 곳곳에 즐비해 있었다는 記錄이 있읍니다. 그것은 法華經 에서 어린아이가 장난으로 모래탑을 쌓더라도 한량없이 福樂을 받아 부처가된다. 라고하였읍니다. 그래서 우리나라는 예적부터 돌로작은 塔을 만들어서 自身의 所願을 祈願하는 風習이 생겼읍니다. 이러한 理由로 佛國寺 羅漢殿에는 많은 參拜客들이 생겼읍니다. 이러한 理由로 佛國寺 羅漢殿에는 많은 參拜客들이 自然的으로 하나 둘씩 돌塔을 쌓아서 所望을 祈願하는 소탑지(小塔誌)가 形成되었읍니다 옹기종기 모여 있는 돌塔이 잘保存될수 있도록 小塔地를 造成하여 누구라도 塔을 쌓는 功德으로 所願이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석가탑
(釋迦塔)
釋迦塔은 國寶 제21호로 指定된 三國時代의 石塔으로 佛國寺 大雄殿 앞의 다른 石塔인 多寶塔과는 달리당시의 傳統的인 石塔樣式을 취하고 있다. 塔의 元來 이름은 ‘석가여래상주설법탑(釋迦如來常住設法塔)’으로, ‘釋迦塔’이라고 줄여서 부른다. 釋迦牟尼 부처님과 부처님의 敎化를 象徵하는 塔으로 높이는 8m 20㎝이고 751년에 세워졌다. 또한 釋迦塔은 以前에 세워진 感恩寺址三層石塔의 形態를 이어받은 우리나라 3층 石塔의 全形이라고 할 수 있다. 塔의 周圍에 配置되어 있는 여덟 개의 연꽃과 回廊은 이 곳이 聖域임을 나타낸다.塔 안에서 發見된 世界 最初의 木板 印刷物인 無垢淨光大陀羅尼經 등 70 여점의 文化財는 一括해서 國寶 제 126호로 指定되어 있다.
다보탑
(多寶塔)
多寶塔은 國寶 제20호로 指定된 統一新羅時代의 代表的인 石塔이다.釋迦牟尼 부처님의 說法을 贊嘆하는 多寶 부처님을 象徵하는 塔이다. ‘過去의 부처님’ 인 多寶부처님이 ‘現在의 부처님’인 釋迦牟尼 부처님께 說法할 때 옆에서 옳다고 證明한다는『法華經』의 內用을 눈으로 直接 볼 수 있게 釋迦塔 옆에 세웠다고 한다.여러 가지 巧說을 나타내고 있다. 높이 10m 40㎝로 大雄殿에 釋迦塔과 나란히 서 있다.建築 연도는751년로 알려져 있고 現在 남아있지 않은 木造建築 樣式을 하고 있는 것이 特徵이다. 多寶塔은 釋迦塔과 자주 比較되는데 釋迦塔이 典型的인 形態라면 多寶塔은 가장 個性的인 形態의 塔이라고 말할 수 있다.
대웅전
(大雄殿)
法華經에 의하면 世上에는 많은 부처님이 계시지만 , 釋迦牟尼 부처님이 가장 根本되시는 부처님이라고 한다. 寺刹에서 釋迦牟尼 부처님을 모신 곳을 大雄殿 이라고 한다. 釋迦牟尼 부처님의 왼쪽에는 彌勒菩薩님, 오른쪽에는 製靴喝羅菩薩님이 서 있다. 이를 夾侍菩薩이라고 한다. 부처님과 양쪽의 夾侍 菩薩을 함께 모신 것을 三尊佛이라고 한다. 彌勒菩薩 좌측에는 迦葉尊者(선을 制守 받은 弟子)를 모셨고, 갈라보살 우측에는 阿難尊者를 모셨다. 釋迦牟尼부처님의 모습은 왼손을 무릎 위에 놓고 오른 손을 내려서 땅을 가리키는 '降魔燭知人'을 取하고 계시다.
금동비로자나불좌상
(金銅毘盧疵那佛座像)
法華經에 의하면 世上에는 많은 부처님이 계시지만 , 釋迦牟尼 부처님이 가장 根本되시는 부처님이라고 한다. 寺刹에서 釋迦牟尼 부처님을 모신 곳을 大雄殿 이라고 한다. 釋迦牟尼 부처님의 왼쪽에는 彌勒菩薩님, 오른쪽에는 製靴喝羅菩薩님이 서 있다. 이를 夾侍菩薩이라고 한다. 부처님과 양쪽의 夾侍 菩薩을 함께 모신 것을 三尊佛이라고 한다. 彌勒菩薩 좌측에는 迦葉尊者(선을 制守 받은 弟子)를 모셨고, 갈라보살 우측에는 阿難尊者를 모셨다. 釋迦牟尼부처님의 모습은 왼손을 무릎 위에 놓고 오른 손을 내려서 땅을 가리키는 '降魔燭知人'을 取하고 계시다.
극락전
(極樂澱)
아미타불(阿彌陀佛)을 모신 法堂,國寶 제27호인 금동아미타여래좌상(金銅阿彌如來坐像 . 8세기 中葉의 作品)이 모셔져 있다. 751년에 건립(建立)되었다. 그 후 여러차례 重建,重修를거쳐 1750년 創建當時의 기단(基檀)과 초석(礎石)위에 重建 하였다. 建築樣式은 朝鮮後期에 속한다.
법고
(法鼓)
극락전
(極樂澱)
아미타불(阿彌陀佛)을 모신 法堂,國寶 제27호인 금동아미타여래좌상(金銅阿彌如來坐像 . 8세기 中葉의 作品)이 모셔져 있다. 751년에 건립(建立)되었다. 그 후 여러차례 重建,重修를거쳐 1750년 創建當時의 기단(基檀)과 초석(礎石)위에 重建 하였다. 建築樣式은 朝鮮後期에 속한다.
나무로된돼지형상
極樂殿 정면 처마밑에 현판으로 가려져 눈에 확 띄지는 않지만 길이 50cm 가량의 나무로 된 돼지 形狀이 있었습니다.흰 이빨을 보니 멧돼지같기도 하구요. 아마 金色으로 칠해져 있어서 黃金돼지라고 하나 봅니다. 極樂殿은 壬辰倭亂 때 毁損됐다가 朝鮮後期 再建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어떤 理由에서 돼지像이 처마밑에 숨겨지게 됐는지는 正確히 確認되지 않고 있다고 하지만 두가지 說話가 있다고 하더군요. 佛國寺를 創建한 金大城이 吐含山에 자주 사냥을 다녔고, 곰을 사냥한 그날밤 꿈에 그 곰이 나타나 '나는 너를 해치지 않았는데 너는 왜 나를 죽였느냐'고 恒儀한 후 金大城은殺生을 삼가고 佛家에 入門했다고 하고, 따라서 金大城이 佛國寺를 創建하면서 다시는 殺生을 하지 않기로 盟誓하기 위해 몰래 처마밑에 돼지形象을 만들어숨겼다는 것.또 하나는 이 寺刹을 重修하던 장난끼 많은 스님이 내림마루나 추녀마루 밑에 龍이나 鳳凰을 만들어 넣는 대신懸板 뒤 처마밑에 몰래 이 돼지像을 만들어 숨겼다는 說話도 있다고 합니다. 이밖에도 慶州地域 鄕土 私學係의 한 人士는 "대개 寺刹을 지을 때 龍마루에 잡귀신을 쫓기 위해 돼지像을 얹기도 한다"고 하며, 따라서 이 돼지 形象이 고서 西遊記에 나오는 저팔계를 形象化한 것으로, 寺刹 내 잡鬼神을 물리치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것이지요.
벙영루
(泛影樓)
지금은 법고(法鼓)가 있으나 元來는 범종각(梵鐘閣)임 751년에 세워졌다. 여러차례 중수(重修)와 중건(重建)을 거쳐 1973년 佛國寺 복원(復元)때 옛 모습대로 다시 세웠다 기단(基壇)의 돌기둥은 수미산(須彌山)을 본뜬것이 特徵이다. 때문에 수미범종각(須彌梵鐘閣)이라고도 한다.
토함산설굴암
(吐含山石窟庵)
石窟庵은 新羅 景德王 10년(751)에 당시 宰相이었던 金大城이 創建을 始作하여 惠恭王 10년(774)에 完成하였으며, 建立 당시에는 石佛寺라고 불렀다. 景德王은 新羅 中期의 임금으로 그의 在位期間(742∼765) 동안 新羅의 佛敎藝術이 全盛期를 이루게 되는데, 石窟庵 외에도 佛國寺, 多寶塔, 釋迦塔, 皇龍寺鐘 등 많은 文化財들이 이때 만들어졌다. 吐含山 중턱에 白色의 花崗岩을 利用하여 人爲的으로 石窟을 만들고, 內部空間에 本尊佛인 釋迦如來佛像을 中心으로 그 周圍 壁面에 菩薩像 및 弟子像과 歷史上, 天王像 등 총 40구의 佛像을 彫刻했으나 지금은 38구만이 남아있다.
석굴암석굴도
(石窟庵石窟圖)
석굴암 석굴의 구조는 입구인 직사각형의 전실(前室)과 원형의 주실(主室)이 복도 역할을 하는 통로로 연결되어 있으며, 360여 개의 넓적한 돌로 원형 주실의 천장을 교묘하게 구축한 건축 기법은 세계에 유례가 없는 뛰어난 기술이다. 석굴암 석굴의 입구에 해당하는 전실에는 좌우로 4구(軀)씩 팔부신장상을 두고 있고, 통로 좌우 입구에는 금강역사상을 조각하였으며, 좁은 통로에는 좌우로 2구씩 동서남북 사방을 수호하는 사천왕상을 조각하였다. 원형의 주실 입구에는 좌우로 8각의 돌기둥을 세우고, 주실 안에는 본존불이 중심에서 약간 뒤쪽에 안치되어 있다. 주실의 벽면에는 입구에서부터 천부상 2구, 보살상 2구, 나한상 10구가 채워지고, 본존불 뒷면 둥근 벽에는 석굴 안에서 가장 정교하게 조각된 십일면관음보살상이 서 있다.
석굴암
(石窟庵)
감은사지
(感恩寺址)
감은사지(感恩寺址)에 있는 統一新羅時代 3층石塔 2기. 國寶 제112호. 높이 13.4m. 東西로 建立된 두 塔의 規模와 形式은 同一하며, 現存하는 石塔 중 거탑(巨塔)에 속한다. 基壇은 上下 二中으로 되어 있고 地帶石·重石·甲石은 12장의 石材로 이루어져 있으며, 下層基壇에는 3개, 上層 基壇에는 2개의 탱주(撑柱)를 세웠다. 塔身部의 1層은 우주(隅柱)와 면석(面石)을 다른 돌로, 2層은 각 面을 하나의 돌로, 3층은 全體를 하나의 돌로 만들었다. 屋蓋石은 比較的 넓고, 落水面 部分과 받침部分이 各各 4장의 돌로 되어 있으며, 相輪은 없어졌고 그것을 끼웠던 3.5m의 철간만이 남아 있다. 上下基壇과 塔身部에 宇宙와 撑柱를 表現한 것, 落水面이 경사를 이룬 것 등에서 경사, 層段을 이루고 있는 받침에서는 전조탑파양식(塼造塔婆樣式)의 痕跡이 보인다. 高仙寺址 3층 石塔과 함께 統一新羅 初期 3층石塔을 代表 한다.
감은사지3층석탑
(感恩寺址三層石塔)
感恩寺는 新羅 문무왕(文武王)이 三國을 統一한 뒤 倭寇의 侵掠을 막고자 이곳에 절을 세우기 시작하여 신문왕(神文王) 2년 (682)에 完城 된 절이다.感恩寺에는 죽어서도 龍이 되어 나라를 지키겠다는 文武王의 遺言에따라 東海의 대왕암(大王岩)에 葬事지낸뒤 龍이된 父王이 드나들수 있도록 금당(金堂) 밑에 특이한 構造로 된 空間이 만들어져 있다.
감은사지3층석탑
(感恩寺址三層石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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史蹟 제31호. 〈三國遺事〉에 문무왕(文武王)이 倭兵을 鎭壓하기 위해 歷史를 始作했으나 中道에 죽자 그의 아들 신문왕(神文王)이 卽位해 682년(神文王 2) 完成했으며, 金堂의 基壇 아래에 動向한 구멍을 두어 이곳으로 해룡(海龍)이 된 文武王이 들어와 서리도록 했고, 또 遺書에 따라 골(骨)을 埋葬한 곳이 절의 앞바다에 있는 대왕암(大王岩)이라고 記錄되어 있다. 절의 이름은 本來 나라를 지킨다는 意味에서 진국사(鎭國寺)였으나 神文王이 父王의 護國忠情에 感謝해 감은사(感恩寺)로 고쳐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