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歷 史 旅 行 2/宗敎施設 (寺)

花山龍珠寺

(龍珠寺)

 

 

龍珠寺는 朝鮮正祖 14년 (1710) 燒失된 갈양사(葛陽寺)옛터에 사도세자(思悼世子)의 陵인 현륭원(顯隆園)에 冥福을 빌어주는 능사(陵寺)로 세운절이다.  曹溪宗의 절로 京畿道 華城市 松山洞 花山에 位置해 있다. 國寶 120호로 指定된 鐘 이 位置해 있다.  이 절은 統一 新羅 時期인 854년에 지어졌고, 元來 이름은 适養寺였다. 高麗 때인 10세기에 擴張되었다. 朝鮮 때에 親아버지인 思悼世子 를 기리기 위해서  正祖의 命으로 18세기에 다시 지어졌다. 本來 龍珠寺는 新羅 文聖王 16년(854년)에 創建된 渴養寺로써 淸淨하고 이름 높은 道場이었으나 丙子胡亂 때 燒失된후 廢寺되었다가 朝鮮時代 제22대 임금인 정조(正祖)가 아버지 思悼世子의 陵을 花山으로 옮기면서 절을 다시 일으켜 願刹로 삼았습니다. 28세의 젊은 나이에 父王에 의해 뒤주에 갇힌 채 8일만에 숨을 거둔 思悼世子의 靈魂이 九天을 맴도는 것 같아 괴로워 하던 正祖는 寶鏡스님으로부터 부모은중경(父母恩重經)說法을 듣게되고 이에 크게 感動, 父親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절을 세울 것을 決心하면서 京畿道 揚州 配奉山에 있던 父親의 墓를 天下第一의 복지(福地)라 하는 이곳 花山으로 옮겨와 顯陵園(뒤에 隆陵으로 昇格)이라 하고, 寶鏡스님을 八道圖華主로 삼아 이곳에 절을 지어 顯陵園의 능사(陵寺)로서 非命에 숨진 아버지 思悼世子의 陵을 守護하고 그의 冥福을 빌게 하였습니다. 

 

 

용주사

(龍珠寺)

 

佛敎가 政治的 社會的으로 抑壓을 당하고 있던 당시에 國家的 關心을 기울여 세웠다는 점에서 歷史的인 큰 意味를 가지고 있습니다. 落成式날 저녁에 正祖가 꿈을 꾸었는데 龍이 如意珠를 물고 昇天했다 하여 절 이름을 龍珠寺라 불렀고 그리하여 龍珠寺는 孝心의 本刹로서 佛心과 孝心이 한데 어우러지게 되었습니다. 全國 5규정소(糾正所:僧侶의 生活을 監督하는 곳) 중의 하나가 되어 僧風을 規定했으며, 팔로도승원(八路都僧院)을 두어 全國의 寺刹을 統制했습니다. 

 

용주사

(龍珠寺)

 

龍이 꽃구름속에 서리었다가 如意珠를 얻어 造花를 부리더니

절門에 이르러 善을 본받아 부처님 아래에서 衆生을 提導한다.

 

이 內容은 正祖가 落成式 전날 밤 龍 이 如意珠를 물고 昇天하는 꿈을 꾼 후 절 이름을 龍珠寺라고 하였다는 연기와 상통합니다. 三門 앞에는 화마(火魔)를 물리친다는 石造 解胎像 두 마리가 버티고 서있으며, 簡潔하고 굵게 처리한 彫刻技法이 解學的으로 나타나 우리 民族의 餘裕있는 情緖를 象徵하는 듯합니다  또한 일찍이 31본산의 하나였으며 現在는 水源, 龍仁, 安養 등 京畿道 南部地域에 分布하고 있는 80여개의 末寺, 庵子를 거느리고 있습니다. 現在 절의 信徒는 약 7천여 世代에 달하며 定期, 比定期的으로 많은 法會가 이루어지고 또 法會를 통해 敎化 活動을 行하고 있습니다. 龍珠寺는 이와 같은 修行者들이 모여 面壁參禪하면서 眞理를 찾고 한편으로는 多樣한 大衆布敎 活動을 통해 부처님의 智慧를 傳하며, 또한 正祖의 뜻을 받들어 孝行敎育院을 設立, 運營을 통해 佛者敎育을 書院으로 一般人도 누구든지 쉽게 共感할 수 있는 孝行敎育으로 佛敎信行館과 人性敎育을 社會로 回向하고자 勞力하고 있습니다.

 

홍살문

(紅-門)

 

洪살門은 王室의 능(陵).원(園).묘(墓). 宮殿 官衙 등의 正面으로 들어가는 入口에 붉은 칠을 한두개의 기둥을  세우고 기둥을 連結한 보에 붉은살을 쭉박은 形態로 세워 경의(敬意)를 표하는 곳이라는 意味를 가진 門이다. 다른 寺刹과 달리 龍珠寺에 홍살문이 있었던 理由는 正祖大王께서 思悼世子의 冥福을 빌기 위하여 龍珠寺를 創建하고 호성전(護聖殿)을 建立하여 思悼世子의 僞幣를 모셨기 때문이다. 記錄에 의하면 龍珠寺에서는 思悼世子와 경의왕후(敬懿皇后:惠慶宮洪氏),正祖大王과 효의왕후(孝懿皇后)의 僞幣를 모시고 一年에 여섯번의 祭를 모셔왔다 한다. 2008년(戊子年) 6월 24일 오늘 100년 만에 思悼世子 제 246주기 祭享을 모시면서 홍살문을 復元하고 呼聲殿의 懸板을 除幕하는것은 효찰대본산 용주사 창건당시 모습을 회복하여 우리나라 효문화를 선양하는 한편 정조대왕께서 돌아가신 아버지 사도세자에게 못다한 혼정신성(昏定晨省)의 孝를 死後에라도 實踐하고자 하였던 뜻을 繼承하고자 함이다.  

 

삼 문

(三門)

 

절의 첫 入口인 一周門을 지나면 다른 寺刹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形態의 三門을 맞게 됩니다. 마치 兩班집 大家 같기도 한 이 建物은 左右에 崒행랑을 지닌 맞배지붕 樣式으로 思悼世子 顯隆園의 재궁(齋宮)으로 지어진 절이기 때문에 이러한 建築樣式을 지닌 것 같습니다. 東西의 옆문과 中央의 大門에 各各 門이 나 있어 三門이라 부르며 正面 도리 위에는 日帝强占期에 活動한 죽농(竹濃) 안순환(安淳煥)의 글씨로 '龍珠寺'라는 懸板이 자리하는데 부드러우면서도 힘있는 글씨가 印象的이며 오른쪽 옆문에는 '中央禪院'의 懸板이 세로로 걸려있습니다. 三門의 네 기둥은 上段部는 木材이고 下段部는 石材의 礎石인데 유난히 높고 큰 편입니다. 네 기둥에는 '龍珠寺佛'의 네 자를 각각 첫 글자로 한 시구가 柱聯으로 걸려있는데 역시 安淳煥의 글씨입니다.

 

용주사효행박물관

(龍株寺孝行博物館)

 

어제화산용주사봉불기복게

(御製花山龍株寺奉佛祈福偈)

 

1796년 正祖가 龍珠寺 부처님을 받들고 福을 祈願하기 위하여 직접 지어서 쓴 記事體의 繼承 이다.

 

용주사대웅보전삼세불탱화

(龍株寺大雄寶殿三世佛撑畵)

 

龍珠寺 創建당시 에 그려진 釋迦牟尼佛 阿彌陀佛 藥師佛의三尊佛撑畵 이다. 人物表現에 陰影法을 使用한것이 특이하며 當代 最高의 金弘道와 專門的인 花勝들이 그린것으로 傳 해진다.

 

금동향로

(金銅香爐)

 

地方 有形文化財 제11호로서 높이 40㎝, 가로 29㎝, 세로 20㎝의 방형(方形) 中國제 香爐입니다. 향(香)은 보통 입냄새나 몸냄새를 除去하고 집안이나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場所의 갖가지 취기를 없애기 위해 使用됩니다. 佛敎에서는 이 香이 마음의 때까지도 씻어준다고 하여 法會나 意識 등에 使用되었습니다. 一般的인 香爐와는 달리 佛敎에서의 香爐는 佛菩薩에게 香을 供養할 때 쓰이는 것이며 2개의 촛대, 2개의 花甁과 함께 오구족(五具足)이라 하여 불구(佛具)의 으뜸으로 칩니다. 佛菩薩에게 香을 供養하기 위해 佛壇에 놓는 禮拜用 香爐에는 부처님께 올리는 發願文을 새기고 銀入絲·禪閣·岾閣· 등의 方法으로 製作年代·製作者·奉安寺刹名 등을 記錄하기도 합니다. 이와 같은 香爐는 佛菩薩에 대한 敬拜의 補助的인 役割 뿐만 아니라 香을 사름으로써 世俗의 모든 煩惱妄想을 사라지게 하고 淸淨한 法悅의 三昧境으로 沒入하게 한다는 重要한 意味를 지닙니다.

 

금동향로

(金銅香爐)

 

 이 金銅香爐는 朝鮮初期에 王室에서 使用되어 오던 것인데 正祖가 절을 思悼世子의 陵寢寺刹로 造成하면서 靑銅香爐와 함께 賀詞한 것입니다. 네 마리의 龍이 香爐를 떠받들고 있는 形態로 香爐의 몸체와 네 다리에는 金으로 當初무늬를 細工하여 붙임으로써 매우 華櫚해 보입니다. 香爐의 몸체 양쪽에는 역시 金으로 테를 두른 작은 손잡이가 있고, 香爐 뚜껑도 金으로 테를 두르고 다시 中央에 長方形의 테두리를 만들어 빗살무늬를 넣었습니다. 그리고 네귀퉁이에는 5엽의 金으로 된菊花무늬가 새겨져 있습니다. 正中央에는 꼭지가 純金으로 粧飾되어 있었다고 하나 現在는 上部가 떨어져 나가고 中間의 補柱形態를 한 손잡이 받침부분만이 남아있는데 四面에 純金粧飾이 있습니다. 그 아래에는 둥근 테두리 안에 8개의 꽃무늬가 粧飾되어있습니다. 全體的으로 香爐 몸체의 무늬는 金版을 세밀히 架工한 後에 붙여 놓은 것으로 보입니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創建 당시에는 호성전(護聖殿)이라 하여 思悼世子의 位牌를 奉安한 全閣이 있었는데, 바로 이 香爐가 位牌 앞에 安置되었던 것이라 生角됩니다.

 

석조해태상

(石造獬豸像)

 

三門 앞에는 화마(火魔)를 물리친다는 石造 懈怠像 두 마리가 버티고 서있으며, 簡潔하고 굵게 처리한 彫刻技法이 解學的으로 나타나 우리 民族의 餘裕있는 精書를 象徵하는 듯합니다.

 

천보루

(天保樓)

 

三門을 지나 절 境內에 들어서면 한 눈에 大規模의 樓閣이 正面에 나타납니다. 京畿道 文化財資料 제36호인 天寶樓. 1790년 절의 創刊 당시 지어진 정면 5칸, 측면 3칸의 2층누각인데 도편수는 慶尙道 永川 은해사(銀海寺) 쾌성(快性)스님이 맡았고, 江原道 삼척영은사(靈隱寺)의 팔정(八定)스님이 丹靑을 하였습니다. 天寶樓의 아래층은 大雄寶殿으로 向하는 通路로써 여섯 개의 木造기둥아래 높다란 礎石이 建物을 받들고 있는데, 기둥을 받치는 礎石이라기 보다는 그 自體가 石造기둥과 같이 커다란 規模입니다. 代替로 寺院建築에서는 木造기둥을 使用하는 것이 常例이고 이러한 石造기둥은 주로 宮闕建築에서 使用됩니다. 절의 創建이 王室의 直接的인 後援 아래 이루어진 것임을 알게 해주는데, 大雄殿을 正面에 두고 오른쪽 壁面에는 別席으로 父母은中經을 한글로 새겨 절을 찾는 參拜客들에게 孝心을 불러 일으키게 합니다. 樓閣의 左右로는 7칸씩의 回廊이 맞닿아 있고 東쪽에 나유타실(那由陀寮), 西쪽에 만수리실(曼殊利室)이 回廊과 連結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構造는 創建당시 그대로의 모습인데 寺院建築이라기 보다는 마치 대갓집을 연상케 합니다. 나유타료와 만수리실은 모두 외정(外庭)으로 出入門이 나있고 또한 툇마루가 附屬되어 있습니다. 외정 쪽의 방들은 외사랑에 該當하고 내정 건너 안채가 위치하는 이러한 構造는 민가(民家)의 建物樣式 그대로입니다.

 

세존사리탑

(世尊舍利塔)

 

三門과 天保樓 사이에는 孝行博物館 앞의 5층石塔과 함께 또하나의 5층石塔이 우뚝 솟아 있습니다. 이 5층石塔이 傳하는 바에 따르면 1702년에 성정(性淨)스님이 부처님의 眞身 舍利 2과를 舍利甁에 담아 石塔에 安置 하였다고 합니다. 世尊舍利塔으로 부르는 높이 4m의 이 塔 은 典型的인 5층石塔의 形式을 갖추고 있는데, 1층의 基壇 위에 5층의 塔身과 屋蓋石을 차례로 올리고 相輪部에는 露盤·復發·洋畵·寶珠를 모두 갖추었습니다. 基壇의 免席과 塔身에는 우주(隅柱)가 模刻되었으며 基壇甲石 위에는 옥신고임으로 처리 되었습니다 . 屋蓋石은 처마 끝선에서 약간 反轉되었고, 屋蓋 받침은 3단씩입니다. 全體的인 屋蓋石의 體感은 比率이 작아서 3층을 넘어서야 비로소 줄어들고 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부처님의 眞是 舍利가 奉安되어 있는 舍利塔은 龍珠寺를 參拜하는 모든 佛者들의 信仰의 歸依處가 되고 있습니다.

 

범종각

(梵鐘閣)

 

龍머리는 鐘 頂上部의 보주(寶珠)를 물어서 두발로 鐘의 情想夫人 천판(天板)을 잡고 鐘 全體를 들어 올리는 듯한 形象을 하고 있습니다. 甬筒은 연주문(連珠紋)을 돌렸습니다. 여섯 단으로 區分을 하고 당초문(唐草紋)과 연꽃잎으로 粧飾하였습니다. 천판에는 아무 粧飾이 없고 上隊와 下隊의 무늬는 서로 다른 무늬를 하였습니다.

 

범 종

(梵鐘)

 

梵鍾은 寺院建物에서 쓰는 鐘 을 가리킵니다. 절에서 많은 사람을 모이게 하거나 모든 이 에게 때를 알려주는 것이었다가 그 소리가 神廟하여 禮佛儀式 등에 쓰이게 되었는데 梵鍾의 소리는 衆生의 마음속을 깊이 울려 어리석은 몸과 마음을 慈悲로운 부처님의 품으로 이끌게 합니다. 이 全閣안에 있는 梵鍾은 國寶 제120호로 指定되어 있습니다.

 

만수리실

 

曼壽里室은 元來 선당(仙堂 또는 禪堂)이라고 하여 江原道 간성 건봉사(乾鳳寺) 운붕(雲朋)스님이 도편수를 맡았는데 지금은 남아 있지 않으나 이덕무가 쓴 曼壽里室의 柱聯이 당시 있었으니 그 글귀에 도솔궁속에서 큰 偈頌을 말하여 衆生을 制度하고, 般若臺位에서 참된 法을 연습하여 無量劫을 超脫하네 兜率宮中稟大偈 普濟衆生 般若臺上演眞詮 라고 하였습니다. 총면적 86평으로 여러 개의 작은 방으로 이루어져 客室로 使用합니다. 天寶樓의 2층에는 앞뒤로 난간을 둘렀고 翼工係 二翼工이 纖細합니다. 지붕은 겹처마에 팔작지붕인데 양끝의 처마가 날렵하게 보입니다.

 

대웅보전

(大雄寶殿)

 

龍珠寺의 伽藍構造에서 가장 中心되는 곳. 흔히 寺刹內에서 中心되는 부처님을 모신 建物을 大雄殿이라 부르는데 正確한 意味에서 보면 大雄殿은 釋迦牟尼佛을 奉安한 곳을 가리킵니다. 法華經에서 釋迦牟尼를 부를 때 '大英雄 釋迦牟尼'라하고 줄여서 '大雄'이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大雄殿은 釋迦牟尼佛이 계신 곳만을 指稱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龍珠寺는 '大英雄 釋迦牟尼佛을 모신 保配로운 全閣'이라는 뜻에서 大雄寶殿이라고 이름하였습니다. 大雄寶殿은 1790년 龍珠寺의 創建과 함께 지어진 遺緖깊은 建物인데, 보경당(寶鏡堂) 사일(獅馹)스님이 팔도도화주(八道都化主)를 맡아 大雄寶殿을 비롯한 145칸의 全閣을 함께 지었습니다. 또한 正祖의 命으로 實學者로서 博學多識하여 文章에 名聲을 떨쳤던 이덕무(李德懋, 1741~1793)가 龍珠寺의 여러 建物에 柱聯을 썼습니다. 大部分이 오랜 歲月을 겪으면서 글귀가 바뀌었고 大雄寶殿에도 創建시의 柱聯은 남아 있지 않습니다.

 

삼세불상

(三世佛像)

 

大雄寶殿내의 三世佛상은 釋迦牟尼佛, 藥師如來佛, 阿彌陀佛입니다. 釋迦佛을 主尊으로 東쪽에 藥師佛과 西쪽에 阿彌陀佛이 夾侍하는 三世佛로서 절의 創建과 함께 만들었는데 才質은 木造이고 높이 110㎝로 2006년에 開金하였습니다.  大雄殿의 닫집속에서 發見된 원문(願文)을 보면 佛像造成의 始末을 알 수 있는데, 佛像造成은 상계(商界)·설훈(雪訓)·계초(戒初)·봉현(奉玹) 등 20명의 스님이 참여하여 1790년 8월 16일 처음 始作하여 9월 30일에 完成하였습니다. 바로 다음 날인 10월1일에 나라안의 名僧을 招聘하여 點眼式을 擧行하였고, 또한 위의 記錄보다 後에 作成된 <본사제반서화조작등제인방함 寺諸般書畵造作等諸人芳啣)>에는 다음과 같이 더욱 詳細하게 敍述되어 있습니다. 書房阿彌陀佛은 全羅道 智異山 파근사(波根寺) 통정 봉현(奉絃)이 조성하고, 東方藥師如來는 江原道 干城 乾鳳寺 通情 상식(尙植),釋迦如來는 全羅道 井邑 內藏寺 通情 계초(戒初)가 각 造成하였다. 三世佛상은 이처럼 彫刻者가 다르기는 하나 全體的으로는 비슷한 雰圍氣를 지니고 있습니다만 釋迦如來와 阿彌陀佛은 商號가 네모졌고, 藥師佛은 둥근 形態를 지니고 있어 차이를 보이는데 각각 全羅道와 江原道 彫刻僧이라는 地域的 特性을 反映하는 것이라 生角됩니다

 

용주사범종각

(龍珠寺梵鍾閣)

 

國寶 제120호. 높이 144㎝, 입지름 87㎝. 몸체 두 곳에 있는 銘文에 의하면 854년(文聖王 16)에 鑄造되었다고 하나 이 銘文은 後代에 새겨진 것이다. 鐘의 頂上에는 용뉴(龍鈕)와 음통(音筒)이 있는데, 陰通의 表面은 聯珠무늬를 돌려서 6단으로 나누고 그 사이에 蓮板과 唐草무늬를 粧飾했다. 상대(上帶)에는 半圓形의 文樣을 中心으로 聯珠무늬와 여의두무늬[如意頭紋]가 粧飾된 紋樣帶를 돌렸다.

 

시방칠등각

(時方七燈閣)

 

大雄寶殿과 千佛殿 사이에 位置하는 全閣으로 七星, 山神, 毒性이 撑畵로 奉安되어 있습니다. 이 세 信仰은 佛敎를 信仰하는 世界 어느 곳에서도 불 수 없는 독특한 韓國的 佛敎信仰으로 우리는 三國時代에 佛敎를 受容하면서 佛敎以前의 在來 土着信仰을 背脊하지 않고 造化롭게 受容 發展시켜 나갔습니다. 이들 在來信仰이 佛敎와 溶合되면서 北斗七星을 信仰하는 七星神仰과 스승없이 혼자서 깨우침을 얻는 獨聖信仰, 그리고 山神信仰이 韓國佛敎의 한 特性을 이루게 됐던 것입니다.

 

호성전

(護聖殿)

 

正祖大王께서는 一般的인 祭祀 만으로는 不足하다고 생각하였던 듯 顯隆園 옆에 思悼世子의 冥福을 빌기 위한 願刹로 龍珠寺를 創建하고, 大雄寶殿 옆에 아버지 思悼世子의 祭閣으로 呼聲殿을 建立하였다. 呼聲殿은 팔작지붕의 宮闕形式으로 지어진 全閣으로서 思悼世子의 位牌를 모셔두고 每日 새벽, 한낮, 해질녘, 초저녁, 한밤중, 자정 以後 등 여섯 번의 재를 올렸다.  以後 呼聲殿에는 正祖大王, 敬懿皇后(惠慶宮 洪氏), 孝懿王后 金氏(正祖의 王妃)를 차례로 모시게 되는데 이때마다 49재(靈山齋)를 베풀 것은 물론 俗節齋와 氣神齋를 올려 極樂往生을 發源하였다. 呼聲殿은 龍珠寺 創建의 直接的인 原人이 되었으나 1950년 韓國戰爭으로 인해 破壞된 후 一般 맞배지붕으로 重建되었다.

 

법고각

(法鼓閣)

 

大雄寶殿 왼쪽에 위치하는 단칸 3평의 아담한 建物로 內部에 북이 所長되어 있습니다. 法鼓는 홍고(弘鼓)라고도 하며 普通 북이라고 합니다. 북은 禮佛과 意識에 쓰이는 사물(四物)의 하나로서 짐승世界의 衆生들을 위하여 소리를 냅니다. 또한 북소리가 널리 퍼져나가는 것처럼 부처님의 가르침이 널리 퍼져 모든 이 에게 참다운 이치를 傳 한다는 意味를 갖습니다. 북은 朝夕禮佛에 쓰이므로 대개 史勿과 함께 保管되나 龍珠寺에는 大雄寶殿을 中心으로 左右에 法鼓閣과 梵鍾閣이 마주보고 서있습니다. 이는 부처님을 中心으로 地獄衆生을 위한 梵鍾, 畜生을 위한 북, 물고기를 위한 天寶樓의 목어, 그리고 하늘의 鳥類를 위한 萬壽璃室의 雲版이 함께 어우러져 온갖 衆生을 智慧의 世界로 人道함을 意味합니다. 그래서인지 龍珠寺에는 늘 各種 새가 끊이지 않고 날아듭니다. 

 

지장전

(地藏殿)

 

저승世界를 象徵하는 寺刹의 建物을 冥府殿이라 합니다. 그 內部에 저승의 審判官인 시왕(十王)을 奉安하고 있어서 十王殿이라 하기도 하고 地藏菩薩을 主佛로 모신다고 해서 地藏殿으로 부르기도 합니다. 龍珠寺에는 地藏殿이라고 이름하여 地藏菩薩 十王, 判官 등을 奉安하고 있습니다. 一般的으로 地藏殿에는 地藏菩薩을 中心으로 左右夾侍에 도명존자(道明尊者)와 무독귀왕(無毒鬼王)을 모시고 그 左右에 冥府十王을 모시며 각 十王 앞에는 童子像을 安置합니다.

 

당간지주

(幢竿支柱)

 

統一新羅時代부터 寺刹 앞에 設置했던 建築物로서 그 周邊地域이 寺刹이라는 神聖한 靈域을 標示하는 役割을 하였다. 돌로 만드는 것이 普通이지만 鐵·金銅·나무로도 만든다. 2개의 기둥을 60~100㎝ 間隔으로 양쪽에 세우고 마주보는 안쪽 면에 간(杆)을 設置하기 위한 간구(杆溝)나 간공(杆孔)을 두고 아래에는 간대(竿臺)나 基壇部를 設置했다. 干求는 반드시 안쪽 上段에 있으며 그 아래의 肝空은 구멍수가 一定하지 않다. 이러한 시원(始源) 形式은 時代에 따른 變化가 없으며, 각면에 粧飾된 紋樣과 地主의 치석수법(治石手法)만이 時代的 特徵을 보일 뿐이다.

 

나유타료

 

나유타료는 平安道 妙香山 보현사(普賢事) 의섭(儀涉)스님이 도편수를 맡았고 創建 당시에는 승당(僧堂)이라고 불렸으며 한편 이덕무가 여러 建物의 柱聯을 지었는데 지금은 모두가 바뀌었으나 나유타료의 글귀만은 創建 당시의 그대로를 間直하고 있습니다. 부처가 알지못한 곳에 바로 이르렀어도 다만 이는 科程일 뿐이니 다시 父母未生典의 한구절로 도는 試驗해보세.  直 佛祖不知處 祇是半塗且向父母未生煎 試道一句  총면적 86평으로 現在 大衆會義때 使用하는 큰 방 스님들의 요사채로 쓰여지고 있습니다. 큰 방 內部의 中央에는 용상방(龍像榜)이 걸려 있는데, 龍像榜은 결제(結制)나 큰 佛舍가 있을 때 覺者의 所任을 定하고 그 職責과 該當者를 明示하여 잘 보이는 곳에 붙여놓는 방입니다. 內容을 보니 조실(祖室) 고(故) 전강대종사(田岡大宗師), 원장(院長) 송담대선사(松潭大禪師), 선덕(禪德) 노학대선사(老鶴大禪師)를 비롯한 30개의 職名과 스님이름이 적혀있어 中央禪院을 中心으로 한 扁提임을 알 수 있습니다. 특이한 것은 이미 故人이 된 殿講大禪師가 조실로 올라 있다는 점인데. 이는 禪院長인 송담先師께서 당신生存까지는 先師를 항상 조실로 모신다는 書院을 세웠던 까닭이라하니 참으로 本받을 만한 精誠이라 하겠습니다.

 

죽농안순환

(竹濃安淳煥)

 

 안순환(安淳煥)의 글씨로 '龍珠寺'라는 懸板이 자리하는데 부드러우면서도 힘있는 글씨가 印象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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