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歷 史 旅 行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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國立中央博物館 (高麗,朝鮮粉靑沙器) 국립중앙박물관(國立中央博物館) 분청사기(粉靑沙器)  분청사기(粉靑沙器) 또는 분청자기(粉靑磁器)는 분장청자(粉粧靑磁)의 약칭으로 사기(沙器), 혹은 일본인들이 미지마데(三島手:刷毛目)라고 부르는 자기류의 총칭으로  고유섭(高裕燮)씨가 처음 이름붙인 것이다. 이 분청사기는 청자기의 표면에 상감(象嵌), 박지(剝地), 백토분장(白土粉粧), 각화(刻畵), 철화(鐵畵) 등으로 장식한 것을 전부 포함하는데 편의상 상감분청계(象嵌粉靑系:인화분청, 감화분청)와 백토분청계(白土粉靑系:백토분청, 박지분청, 철화분청)로 구분된다.
國立中央博物館 (高麗靑瓷) 국립중앙박물관 (國立中央博物館)  고려청자 (高麗靑瓷)  高麗靑瓷는 고려문종(文宗) 前後에 송(宋)의 華南 浙江省 월주요(華南浙江省越州窯)의 影向을 받고 일어난 것으로서 그 變天은 靑瓷의 發生에서 衰退까지 각 其間을 3기, 300년으로 區分하는 것이 가장 他黨한 方法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時代 區分과 該當 기간 중의 靑瓷의 特色과는 密接한 聯關을 갖게 된다. 初期의 靑瓷는 매우 素朴한 데서 出發하여 漸次 技術이 熟練됨에 따라 예종(睿宗)· 인종(仁宗) 때에 이르러 이른바 비색청자시대(翡色靑磁時代)를 이루며 高麗靑瓷의 眞面目을 보이는 象嵌靑瓷를 낳는데 이는 純全히 高麗人의 創意力에 의한 것이다. 이러한 象嵌靑瓷가 다시 동철기(銅鐵器)에 접목(接木)되어 은동상감기(銀銅象嵌器)를 낳고 高麗 末期..
國立中央博物館 (新安海底遺物龍天靑瓷) 국립중앙박물관(國立中央博物館) 의문의함선 신안선은 어떻게 발굴되었을까?(新安海底遺物龍天靑瓷) 1975년 어느날 한 漁夫가 우연히 新安 바다 밑에서 靑瓷花甁을 끌어 올렸다. 이를 계기로 新安船은 650 여년간의 깊은잠 에서 깨어나게 되었다. 1976년부터 1984년까지 11차례 進行된 水中發掘  期間동안 바닷속에서 끌어올린 全體 遺物은 陶瓷器類 金屬 石製品등 3 萬여점 銅錢 28톤 자단목 1,999여본 船體편 720여점등 方臺한 量에 이른다. 향문화용천청자 東아시아에 佛敎가 傳來되면서 향 文化도 함께 發展하였고 이러한 文化는 陶瓷文化의 擴散을 이어졌다. 向은 점차 宗敎的인 意味를 벗어나 個人的인 심미의 目的으로도 使用되었으며 室內에 向을 피워 周邊을 淸潔하게 하거나 向을 個人的으로 携帶 하기도 하였다. 日..
海美 (邑城) 해미읍성(海美邑城)  이 城 은 高麗末 부터 많은 被害를 준 倭寇를 效果的으로 防禦어하기 위하여 德山에 있던 忠淸兵馬節度使營을 海美로 옮기기로 하면서 1417년 (朝鮮太宗 17)부터 1421년 (世宗 3년)까지 築城, 忠淸道의 全軍을 指揮하던 兵馬節度使營城 이다. 1652년 (孝宗 3년)까지 230여년간 兵馬節度使營 의 技能을 하였으며 菁州로 옮겨간후 海美 縣監 이 이 城에 옮겨와 兼營將이 되면서 海美邑城이 되었다. 湖西左營으로 1895년 行政區域 改編때까지 243 年間 내포地方 12개 郡縣의 軍權을 指揮했던 곳이다. 낮은산과 平地를 移用하여 쌓은 平山城으로 城郭의 下段은 큰돌로 쌓고 위로 오를수록 작은돌을 使用하였는데 안쪽은 흙으로 채웠다. 진남문(鎭南門) 海美邑城의 正門으로 花崗巖 虹霓門 正面 3칸 ..
河南市 (南漢山城) 남한산성(南漢山城)  南漢山城은 朝鮮時代 뿐 아니라 三國時代부터 天然의 要塞로 重要한 役割을 하던곳이다. 百濟의 始祖인 溫祖의 王城이었다는 記錄이 있고 羅唐戰爭이 한창이던 新羅文武王 12년 (672)에 漢山州에 쌓은 周章城이라는 記錄도 있다. 高麗時代에는 蒙古의 侵入을 擊退한곳 이기도 한곳이도 하고 日帝强占期엔 抗日運動의 據点이 되기도 한곳이다. 그러나 南漢山城은 주로 丙子胡亂으로 記憶 는곳이다. 朝鮮 仁祖 14년 (1636년)에 靑나라가 侵略해오자 王은 이곳으로 避身하여 抗戰하였으나 王子들이 避身해 있던 江華島가 陷落되고 敗色이 짙어지자 世子와 함께 城門을 열고 三田渡에 나가 恥辱的인 降伏을 한 場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작 南漢山城은 敗北를 알지 못하는 곳이다. 城의 外部는 급경사를 이루어 적의 接..
長芝山龍巖寺 장지산용암사(長芝山龍巖寺)  이 佛像은 天然岩盤을 몸체로 삼아 그 위에 목,머리,갓등을 따로 만들어 얹어놓은 2구 (軀)의 巨大한 佛像이다 왼쪽의 佛像은 원형의 갓을 쓰고있고 (圓笠佛)오른쪽의 佛像은 四角形의 갓을 쓰고 (方笠佛)있는데 傳하는 말에 따르면 각각 남상 (男像)과 여상 (女像)이라고 傳한다. 巨大한 自然石을 그대로 利用해 威壓感이 느껴지나 身體 각 부위의 彫刻 修法이 뛰어난 作品이다. 全體 높이가 17.4 m 로 우리나라 雙石佛立像中 最高의 規模이며 彫刻 修法에 있어 安東 磨崖石佛의 特徵을 잘보여주고 있다. 高麗 宣宗과 關聯한 기자전설 (祇子傳說)이 傳해지고 있어 지금도 傳說과 關聯하여 많은사람들의 발길이 끊어지지 않고 있다.  동자상과칠층석탑에관한 유래童子像七層石塔由來 口傳에 의하면 故 李..
切頭山 (天主敎聖地) 천주교성지(切頭山)  切頭山 殉敎記念館은 丙寅迫害(1866 年) 때 많은 敎友들이 殉敎한 切頭山에 1966 年 丙寅迫害 1 百 周年을 記念해 建築家 이희태의 設計로 建立 되었습니다. 우뚝 솟은 벼랑 위에 3 層으로 세워진 記念館의 접시 模樣 지붕은 옛 선비들의 갓을, 지붕 위에 세워져 있는 구멍난 수직의 壁은 殉敎者들의 목에 채워졌던 목칼을, 그리고 지붕 위에서 내려뜨려진 사슬은 足鎖를 象徵 합니다. 이곳에는 巡禮 聖堂과 殉敎 聖人 28위의 遺骸를 모신 地下 墓所, 그리고 韓國 敎會의 발자취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수많은 資料와 遺物들이 展示돼 있는展示館이 있습니다. 성 합(聖盒) 朝鮮 代牧區 제4대 敎區長 聖 베르뇌 主敎의 聖盒.  묘 표(墓表) 朝鮮時代에는 死刑된 者는 墓에 碑石을 쓸수 없었기 때문에 ..
國立中央博物館 (墓誌銘) 국립중앙박물관(國立中央博物館) 삶그리고죽음 묘지명(墓誌銘) 슬프다 서러운지고 아프다 서러운지고 평생을살며 좋은시절살다가 가엾은 그대가떠나니 이제는 조금도 좋은일이 없네  영조후궁영빈이씨묘지명(御製映嬪李氏白磁墓誌銘) 英祖 임금의 後宮 映嬪李氏의 墓誌이다. 後宮이란 왕의 正實 夫人인 王妃를 除外한 王의 女人 즉 王의 첩을 말한다. 映嬪에서 嬪 이란 後宮 가운데 가장 높은 品階人 政 1 品의 이름이다. 映嬪 李氏는 6살에 宮女가 되어 以後 英祖임금의 後宮으로 思悼世子를 비롯한 1남 6녀를 낳았으며 英祖임금으로 부터 매우깊은 사랑을 받았다. 자찬묘지명(自撰墓誌銘) 丁若鏞은 억울하게 流配生活을 하게 되었지만 오히려 學問에 힘써 業績을  남기는 등 부끄럼 없는 삶을 살았다. 묘지명 (墓誌銘)이란 죽은이에 대해 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