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歷 史 旅 行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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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南美文化院 중남미문화원(中南美文化院)  博物館 에는 中南美의 代表的 文化人 마야,아즈텍,잉카 遺物들이 古代에서 現代까지 多樣하게 展示되어있고 美術館에는 中南美를 代表하는 作家들의 多樣한 그림과 彫刻들이 展示되어 있읍니다. 또한 文化員 彫刻公園을 비롯한 野外에는 中南美 12개국 등의 現代 彫刻家들의 作品이 展示되어 있어 中南美의 多樣하고 아름다운 모습을 經驗 할수 있읍니다. 아즈텍의달력 아즈텍 사람들은 지금의 멕시코 地域에서 살았으며 여러 神중에서 太陽神을 가장 믿었읍니다. 太陽神은 宇宙에서 自身의 길을 가기위해 늘 鬪爭한다고 생각 했으며 太陽神의 戰鬪를 自身들의 戰鬪와 批敎하여 스스로를 太陽儀武士 라고 生角 했읍니다. 太陽神이 問題없이 宇宙를 지나다닐수 있게 하기 위해 아주텍 사람들은  人間의 心臟을 財物로 바쳤읍..
西大門刑務所歷史館 서대문형무소역사관(西大門刑務所歷史館)  우리民族은 日帝에 의한 强制占領이라는 아품을 間直하고 있읍니다.  그 時期는 民族의 自尊心을 毁損당하고 民族 스스로의 發展이 中斷하는 苦痛의 歷史였읍니다. 그러나 우리 에겐 歷史的 現實에 屈服하거나 妥協하지 않는 民族獨立을 向한 鬪爭의 歷史가 있으며 그로 말미암아 지금 우리가 存在하는 것입니다. 여기 西大門刑務所歷史觀은 바로 그러한 歷史의 繼承을 위한 배움터로 마련되었읍니다. 未來를 責任질 靑少年들은  물론 온 國民들이 殉國先烈들의 뜻을 기리고 부끄러운 지난날의 歷史를 克服하기 위한 愛國愛族의 뜻을 배우는 歷史의 산 敎育場 이다. 獨立門은 1963년 1월 21일에 史蹟 제32호로 指定되었다. 元來는 現在의 位置에서 東南쪽으로 약 70m 떨어진 獨立門 네거리 中間地点..
蘭皐金炳淵文學館 난고김병연문학관(蘭皐金炳淵文學館)  허름한 삿갓을 쓰고 朝鮮八道 坊坊曲曲을 돌아다니면서 당시 兩班 貴族들의 부폐상과 罪惡相 非人道性을 風姿한 放浪詩人 本名은  김병연(金炳淵) 호는 난고(蘭皐)이다. 5세때 洪景來難으로 三族이 滅하는 처지에 놓이자 종 이었던 金性洙가 九死一生으로 그를 救出 黃海道 穀産에서 키웠다. 金삿갓은 20세가 되기도전에 天才的인 才能을 보여 白日場에서 壯元이 되었으나 祖父를 욕하였다는  罪責感에 22세부터 放浪을 試作하여 40여년 간 떠돌이 生活을 하면서 읆은 그의 詩는  全國的으로 널리 퍼졌다. 人道主義的인 感情과 平民思想에  基礎하여 支配層에 대해서 강한 反抗精神을 나타낸 그의 詩는 庶民들에게 爆發的인 사랑을 받았다. 1863년 3월 29일 全羅道 和順郡 同腹面 구암리에서  57..
明成皇后記念館 명성황후기념관(明成皇后記念館) 明成皇后 記念館은 歪曲된 歷史를 바로세워 올바른 歷史觀을 定立하고자 建立된 記念館이다. 520 ㎡  의 展示室에는 明成皇后의 親筆과  서가집 高宗의 影幀등을 비롯한 關聯資料들이 展示되어있다. 고종(高宗) 이름은 희(熙), 아명은 명복(命福), 初名은 재황(載晃), 초자는 명부(明夫), 자는 성림(聖臨), 호는 성헌(誠軒)·주연(珠淵). 아버지는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하응(昰應)이며, 어머니는 府大夫人 閔氏이다. 비(妃)는 여성부원군(驪城府院君) 민치록(閔致祿)의 딸 명성황후(明成皇后)이다. 1863년 哲宗이 아들이 없이 죽자 安東金氏와 反目하던 趙大妃에 의해 王位에 올랐다. 그러나 12세의 어린 나이였기에 卽位 後 10년간은 아버지인 大院君이 攝政했다. 1865년 景福宮의..
朝鮮王陵展示館 조선왕릉전시관(朝鮮王陵展示館)   500년 이상 이어진 한王朝의 王陵들이 거의 毁損없이 온전히 남아있는 예는 世界的으로 朝鮮王陵이 唯一 합니다. 朝鮮王陵 展示館에서는 國葬節次와 朝鮮王陵에 담긴 歷史와文化 山稜祭禮를 포함한 王陵의 管理 그리고 展示館이 位置한 泰陵과 江陵의 이야기를 鑑賞하실수 있읍니다. 朝鮮王陵은 UNESCO 世界遺産으로 指定되어 그놀라운 學術的, 文化的 價値를 世界的으로 認定받았읍니다. 본 展示館에서는 500여년의 歷史를 고스란히 간직한 朝鮮王陵의 이야기를 함께하시기 바랍니다.  글: 문화제청  정조국장도감의궤(正祖國葬都監儀軌) 1800년 6얼 28일 정조가 승하한후 국장과정을 기록한 의궤이다, 의궤는 반차도를 비롯하여 국장에 쓰인 가마류,부장품등 각종 기물을 그린 채색 도설이 상세히 실..
李陸史文學館 이육사문학관(李陸史文學館)   陸史 의 社會活動은 民族解放 鬪爭으로 始作 되었고 그의 文學 活動  그 後에 이루어졌다. 1930 년대에 접어들면서 陸史  는 母國語 를 부려서 쓰느 詩人으로 登場했다. 그의  詩는 처음 事物과 世界를 어두운 色調로 노래 하면서 自身의 목소리를 바닥에 깔았다. 이와 竝行하여 隨筆, 文藝批評, 社會批評에도 손을 댔다. 陸史는 1930년 日帝의 無斷 總督政治가 極盛을 떨때 文學 活動 에 나선 民族詩人 이다. 이 무렵 日本은 滿洲國 侵略後 우리 民族 의 固有한 姓名을 日本式으로 고치라는 창씨 改名令과 朝鮮語 使用을 禁止하는 國語常用令을 公布했다. 칠흑같이 어둡고 긴 밤과 같은 時代에 陸史는 民族鬪爭의 方策을 摸索하며 나라와 겨례에 대한 忠情을 보였다. 陸史의 詩와 文學 은 出發에..
陶山書院 도산서원(陶山書院)  史蹟 제170호. 1574년(先祖 7) 地方儒林의 發議로 陶山書堂의 뒤편에 創建하여 李滉의 位牌를 모셨다. 1575년 先祖로부터 韓石峰이 쓴 '陶山"의 賜額을 받았다. 嶺南儒林의 精神的 지주 役割을 했으며, 興宣大院君의 書院撤廢 당시에도 毁撤되지 않고 存續한 47개 書院 중의 하나였다. 1969~70년 政府의 古蹟保存政策에 따라 聖域化 對象으로 指定되어 大大的인 保守를 했다. 境內의 建物로는 李滉과 弟子 趙穆의 位牌가 奉安되어 있는 (尙德祠:보물 제211호), 書院의 講堂인 典敎堂 (보물 제210호), 享禮 때 祭需를 두던 典祠廳, 儒生들이 거처하던 東齋· 西齋, 藏書를 보관하던 光明室. 藏板閣, 李滉이 第子들을 가르치던 陶山書堂, 第子들이 居處하면서 工夫하던 隴雲精舍 등이 있다. ..
屛山書院 병산서원(屛山書院)  西厓 柳成龍의 學文과 業績을 기리기 위한 곳으로, 安東에서 西南쪽으로 洛東江 上流가 굽이치는 곳에 花山을 등지고 자리하고 있다. 柳成龍은 道學·글씨·文章·德行으로 이름을 날렸을 뿐만 아니라, 壬辰倭亂 때에도 城郭 收縮·火氣製作을 비롯하여 軍備擴充에 힘써 많은 功을 세운 人物이다.  原來 風岳書堂으로 豊山 柳氏의 敎育機關 이었는데, 柳成龍이 先祖 5년(1572)에 이곳으로 옮겼다. 그 후 光海君 6년(1614)에 尊德祠를 세워 그의 僞幣를 모시고, 1629년에 그의 셋째 아들 유진의 僞幣를 추가로 모셨다. 哲宗 14년(1863)에는 임금으로부터 ‘屛山’이라는 이름을 받아 書院이 되었다. 書院내 建物로는 僞幣를 모신 尊德祠와 강당인 入敎堂, 遺物을 保管하는 藏板閣, 寄宿舍였던 東·書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