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歷 史 旅 行 3/歷史&文學館

西大門刑務所歷史館

(西大門刑務所歷史館)

 

 

우리民族은 日帝에 의한 强制占領이라는 아품을 間直하고 있읍니다.  그 時期는 民族의 自尊心을 毁損당하고 民族 스스로의 發展이 中斷하는 苦痛의 歷史였읍니다. 그러나 우리 에겐 歷史的 現實에 屈服하거나 妥協하지 않는 民族獨立을 向한 鬪爭의 歷史가 있으며 그로 말미암아 지금 우리가 存在하는 것입니다. 여기 西大門刑務所歷史觀은 바로 그러한 歷史의 繼承을 위한 배움터로 마련되었읍니다. 未來를 責任질 靑少年들은  물론 온 國民들이 殉國先烈들의 뜻을 기리고 부끄러운 지난날의 歷史를 克服하기 위한 愛國愛族의 뜻을 배우는 歷史의 산 敎育場 이다. 獨立門은 1963년 1월 21일에 史蹟 제32호로 指定되었다. 元來는 現在의 位置에서 東南쪽으로 약 70m 떨어진 獨立門 네거리 中間地点에 있었는데, 城山大路를 開設하면서 1979년 12월 31일에 現在 位置로 옮겨 復元하고 옛 자리에는 ‘獨立門址’라고 새긴 標識板을 묻어 놓았다.

 

 

 

독립문

(獨立門)

 

독립문은 우리나라 最初의 西洋式 建物로 프랑스의 凱旋門을 모델로 삼았고 높이 14.28m로 45㎝×30㎝ 規格의 白色 花崗岩 1,850여 개로 세워졌다. 中央에는 아치형의 虹霓門 模樣으로 되어 있고, 大韓帝國 皇室의 象徵인 이화(李花)무늬가 防牌模樣을 한 紋樣판에 새겨져 있다. 內部의 왼쪽에는 屋上으로 通하는 돌층계가 있다.또한 上段에는 ‘獨立門’이 한글로 새겨져 있고, 반대편에는 ‘獨立門’이란 漢字가 새겨져 있다. 獨立門은 1963년 1월 21일에 史蹟 제32호로 指定되었다. 元來는 現在의 位置에서 東南쪽으로 약 70m 떨어진 獨立門 네거리 中間地点에 있었는데, 城山大路를 開設하면서 1979년 12월 31일에 現在 位置로 옮겨 復元하고 옛 자리에는 ‘獨立門址’라고 새긴 標識板을 묻어 놓았다. 

 

 

서대문형무소역사관

(西大門刑務所歷史館)

 

우리民族은 日帝에 의한 强制占領이라는 아품을 間直하고 있읍니다.  그 時期는 民族의 自尊心을 毁損당하고 民族 스스로의 發展이 중단하는 苦痛의 歷史였읍니다. 그러나 우리에겐 歷史的 現實에 屈服하거나 妥協하지 않는 民族獨立을 向한 鬪爭의 歷史가 있으며 그로 말미암아 지금 우리가 存在하는 것입니다. 여기 西大門刑務所歷史觀은 바로 그러한 歷史의 繼承을 위한 배움터로 마련되었읍니다. 未來를 責任질 靑少年들은  물론 온 國民들이 殉國先烈들의 뜻을 기리고 부끄러운 지난날의 歷史를 克復하기 위한 愛國愛族의 뜻을 배우는 歷史의 산 敎育場 이다.

 

 

조선왕실일가

(朝鮮王室一家) 

 

독방

(獨房)

 

이곳은 1평도 안되는 좁은 空間으로 日帝가 愛國志士들에게 肉體的인 拷問과 心理的,精神的 苦痛을 주기위해 設置한 獨房이다. 日帝는 抗日 獨立運動을 彈壓하고자 愛國志士들을 惡辣한 拷問과 혹독한 受刑生活로 抑壓 하였다. 특히 愛國志士들을 特殊犯罪者로 分類하여 電氣와 便器도 없고 햇빛조차 들어오지 않는 이러한 獨房에 投獄시킨 後 拷問과 暴行등 갖은 惡刑을 일삼았다. 

 

 

한국병합기념장지증

(韓國倂合記念章之證)

 

고문도구

(拷問道具)

 

태형틀

(笞刑틀)

 

笞刑은 受刑者의 양손을 左右로 펼쳐서 形板 위에 엎드리게 하고 양팔 關節과 양다리를 묶고 바지를 벗겨 볼기 부분을 露出시켜 執行하는것이다.

 

 

(笞)

 

日帝는 朝鮮笞刑令을 1912년 3월 18일 에 制定恐怖하여 우리民族에게 笞刑을 適用하다가 3.1運動을 契機로 1920년에 廢止할때까지 使用하였다. 

 

 

감방

(監房)

 

日帝는 監獄을 漢民族 彈壓의 重要한 手段으로 利用하였기 때문에 監獄의 繼續的인 增設에도 不拘하고 受容할수 있는 面積이 絶對的으로 不足하였다. 1908년 全國에 8개소의 監獄을 設置했을때 제대로 監獄施設을 갖춘곳은 京城監獄 뿐이었고 그 외의 監獄은 不完全한 온돌감방이 2 ~ 3개 있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1908년 말에 收監人員은 이미 2,000명을 넘었고 坪當 7.9명이 受容되고 있었으며 監獄의 衛生 給食常態는 마치 짐승 우리와도 같았다. 大部分의 監房은 햇빛과 通風이 잘되지 않아 어듭고 습기가 찼고 用便施設을 갖추지 않아 방안에서 便通을 使用해야만했다. 또한 屋舍는 가득 찼으나 收監人員이 날로 增加하여 監房은 제대로 앉지도 못할만큼 비좁았다. 많은 收監者가 營養失調로 목숨을 잃었다. 

 

 

포로수용소감시원

(軍屬)

 

捕虜收容所 監視員 으로 徵用 당했던 오탱석氏가 解放後 自身이 目擊한 日本軍人들의 民間人 虐殺과 捕虜 處刑등 끔찍한 蠻行들을  그림으로 再現 했다. 

 

 

공작사

(工作舍第13獄舍)

 

이 建物은 1923년에 지은 獄舍로 投獄者들을 强制로 動員하여 일을 시켰던 作業場이다. 이곳에서는 刑務所 軍部隊 官公署 등에서 必要한 官用물품 (官用物品)을 만들어 供給하였다. 그리고 日帝가 제2차 世界大戰을 일으킨 뒤에는 軍需用品을 生産하여 調達하는데 强制 動員한 곳이기도 하다.

 

 

한센병사

 

한센兵舍는 한센病을 앓고 있는 受刑者를 隔離 受容하기 위하여 1923년 지은 獨立獄舍 이다. 建物內部 全面에 복도가 있고 그 後面에 작은 옥방 2 개와 큰 옥방 1 개가 竝列로 配置되어있다. 오른쪽 中央下段에 煖房을 위한 아궁이가 設置되어있는 것이 特徵이다.

 

 

사형장과통곡의미루나무

(死刑場慟哭木)

 

이곳의 미루나무는 1923년 死刑場 建立당시 殖財되어 死刑場으로 끌려가는 殉國先烈들이 조숙의 獨立을 이루지 못하고 生을 磨勘해야 하는 한 (恨)을 눈물로써 토 해낼때 붙들고 痛哭했던 것으로 痛哭의 미루나무 라고 이름 지어졌다. 또한 死刑場 안에 있는 또한 그루의 미루나무는 같은 時期에 심어졌으나 殉國先烈의  한 (恨)이 서려 잘 자라지 않는다는 逸話가 傳해지고 있다.

 

 

시구문

(屍軀門)

 

이곳은 日帝가 愛國志士들을 死刑한후 屍身을 刑務所 밖 共同墓地로 運搬하기 위해 파놓은 秘密 通路이다. 日帝는 그들의 漫行을 감추기 위해 入口를 막았으나 1992년 西大門獨立公園을 造成할때 약 40 m 길이로 發掘하여 復元하였다. 

 

 

옥사빈터와붉은벽돌영구보존

(獄舍跡地瓦永久保存)

 

1987년에 서울拘置所가 京畿道로 옮겨갈때 獄舍는 15개동 이었으나 歷史性과 保存價値를 고려하여 제9,10,11,12,13옥사 .中央舍.癩病舍를 保存하였다. 그 중 獄舍 3개동 (제10,11,12옥사)과 死刑場은 1988년 2월 27일에 史蹟 제324호로 指定되었다. 이 길 양쪽에 位置한 부분을 미보존 獄舍의 빈터이며 西大門刑務所歷史觀 곳곳에서 볼수있는 붉은 벽돌은 日帝가 收監중에 있던 愛國志士들을 强制로 動員하여 구워낸 歷史의 産物이다. 벽돌 한면에 日帝 强占時代에 京城監獄 에서 製作된 것임을 立證하는 경 자가 새겨져 있다. 西大門刑務所歷史觀에서는 이것을 永久保存하여 우리 愛國先烈들의 넔을 기리고 後孫들에게 自主獨立 精神을 일깨워 주는 歷史의 산 敎育場으로 삼도록 하고있다.

 

 

유관순열사

(柳寬順烈士)

 

유관순(柳寬順, 1902년 陰曆 11월 17일 ~ 1920년 9월 28일)은 韓國의 獨立運動家이다. 日帝 强占期에 3.1 運動으로부터 始作된 萬歲運動을 主導하다가 日本 帝國의 모진 拷問으로 18세 때 殉國하였다. 1962년 大韓民國 建國勳章 獨立章이 追書되었으며, 1996년 梨花女子高等學校는 名譽 卒業狀을 追書하였다. 忠淸南道 天安市 東南區 병천면 용두리의 生家가 復元되어  1991년 史蹟 제230호로 指定되었다. 柳寬順烈士 遺跡과  天安市 西北區 白石洞에 있는 天安綜合運動場의 ‘柳寬順體育館’은 柳寬順의 이름을 딴 것이다.

 

 

지하감옥과 유관순열사

(地下監獄柳寬順烈士)

 

이곳은 日帝가 民族獨立運動에 참여한 女性들만 收監하고 拷問하기 위해 1916년에 新築한 女性獄舍이다. 그 뒤 1934년경에 獄舍를 고쳐 지으면서 地下監獄의 面積은 높이는 1.48 m 로 허리를 똑바로 펼수도 없으며 채 1평도 안되는 獨監房 4개가 있어 惡辣한 日帝蠻行의 생생한 痕跡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특히 이곳은 1920년 10월 柳寬順 烈士가 日帝의 彈壓에 抗拒하다가 殘酷한 拷問과 營養失調로 殉國하신 곳으로서 一名 柳寬順窟 이라고도 한다. 

 

 

망루

 

投獄者들의 脫獄을 막고 動態를 監視하기위해 1923년에 設置한 붉은벽돌담과 望樓가 保存되어 있읍니다.

 

 

독립선언문

(獨立宣言門)

 

1919년 3·1 運動 때 韓國의 獨立을 世界萬方에 宣布한 宣言書. 崔南善이 基礎하고 民族代表 33 인이 署名하여 그해 3월 1일 하오 2시에 서울 태화관 (泰和館) 에서 發表 하였다.

 

 

모화관

(慕華館)

 

獨立館은 元來 1407년 (太宗7년)에 中國使臣을 迎接하기위해 지어진 迎賓館으로서 初期의 이름은 慕華樓였으나 1429년 (世宗11년)擴張 改築되면서 慕華館으로 改稱되었다. 慕華館 建物은 中國使臣들의 迎接宴과 傳送宴을 베풀던 迎賓館의 하나다. 1894년 (甲午更張)以後 徐載弼이 發意하고 獨立協會에서 主導하여 改修한後 獨立館으로 改稱하고 이곳에서 愛國討論會를 開催하여 自主,民權,自强,思想을 鼓吹하는 場所로 使用하였으나 日帝에 의하여 撤去되었다. 獨立館은 地上1층 韓式 木造建物로서 正面 6칸 측면 4칸 7량 팔작지붕 構造였다. 元來位置는 東南쪽 으로 약 350 m 地点이었다. 西大門獨立公園 造成事業計劃에 의거 專門家의  考證自文에에 따라 地上層은 當初대로 韓式 木造建物로 復元하여 殉國先烈들의 僞幣奉安 및 展示室로 使用하고 地下層은 行事및 遺物保管을 위해 1995년 12월 28일 부터 1996년 12월 31일 까지 서울시에서 建立 하였다. 

 

 

독립관

(獨立館)

 

이 建物은 朝鮮時代에 中國 使臣들에게 迎接宴과 傳送宴을 베풀던 ‘모화관(慕華館)’으로 使用했던 곳이다. 1894년 甲午更張 뒤에는 使用되지 않고 있다가 1897년 5월에 獨立協會가 中心이 되어 建物을 고치게 되고, 皇太子(純宗)는 '獨立館'이라고 쓴 懸板을 하사 하였으며, 獨立協會의 事務室 겸 集會所로 使用하였다. 獨立館은 開化運動과 愛國啓蒙運動의 中心地 役割을 擔當하였던 곳이다. 自主獨立·民族文化 宣揚·利權讓與 反對·自由言論 伸張·新敎育 振興·産業開發 등을 主題로 1898년 末까지 每週 討論會가 開催되었으며, 自主·民權·自强思想과 民族意識을 鼓吹하고 市民大衆을 啓蒙하는 集會場으로 使用하다가 日帝에 의해 强制 撤去되었다. 獨立館의 元來 位置는 이곳에서 東南쪽으로 350m 떨어진 곳에 位置하였으나, 現在 位置에 韓式 木造建物로 復元하여 殉國先烈들의 위패(位牌) 奉安과 展示室로 使用하고 있다.

 

 

서재필

(徐載弼)

 

獨立運動家,政治家 (1864 ~ 1951) 호는 송재 (松齋) 金玉均 등과 일으킨 甲申政變의 失閉로 日本과 美國에서 亡命生活을 하였다. 後에 歸國하여 獨立協會를 組織하고 우리나라 最初의 民間新聞인 獨立新聞을 發刊하였다.

 

 

갑신정변

 (甲申政變)

 

朝鮮 高宗 21년 (1884)에 金玉均,朴泳孝 등의 開化黨이 閔 氏 一派를 몰아내고 革新的인 政府를 세우기 위하여 일으킨 政變. 甲申政變의 前衛隊로 나서 功을 세운 徐載弼은 兵曹參判 겸 政令官으로 任命되어 있었다  擧事 이틀 後에 閔 氏등의 守舊黨과 靑나라 軍事의 反擊을 받아 失敗로 돌아갔다. 金玉均 등과 일으킨 甲申政變의 실폐로 日本과 美國에서 亡命生活을 하였다

 

 

독립문

(獨立門)

 

1895년 2월(高宗 32년) 美國에서 歸國한 서재필(徐載弼) 博士가 組織한 獨立協會를 中心으로 事大主義의 象徵인 영은문(迎恩門)을 헐고, 그 자리에 우리나라가 中國·日本·러시아와 그 밖의 西區列强과 같은 自主獨立國임을 國內外에 宣布하기 위해 獨立門을 建立하기로 하고, 1896년 7월부터 最初로 全 國民的인 募金運動을 展開한 誠金으로 工事를 始作하였다. 設計는 徐載弼의 構想아래 獨逸公使館의 스위스인 기사가 도와 細部設計圖를 作成하였고, 工事監督은 朝鮮人 심의석(沈宜碩)이 맡았으며, 일은 中國人 勞務者를 雇用하였다. 1896년 11월 21일부터 工事를 始作하여 1년 뒤인 1897년 11월 20일에 完工하였으며 總 工事費는 그때 貨幣로 3,825원이 들었다.

 

 

영은문주초

(英恩門住礎)

 

1407년(太宗 7년)에 西大門 밖에 慕華樓를 세워 明나라의 使臣을 迎接하는 곳으로 1430년(世宗12년)에 모화관(慕華館)으로 이름을 바꾸고, 그 앞에 홍살문을 세웠으나, 1536년 (中宗 31년)에 김안로(金安老)의 建議로 홍살문을 大新해 靑起臥를 입혀 연조문(延詔門)이라고 하였다. 1539년(中宗 34년)에 明나라 使臣 설정총(薛廷寵)이 '영은문(迎恩門)'으로 고쳐 使用하였으며, 그 뒤 360년 동안 事大主義의 象徵物로 남아 있다가 1895년 2월(高宗 32년) 김홍집(金弘集)내각 때에 주춧돌 2기를 남기고 撤去하였다. 주춧돌은 4각의 민흘림 長礎石의 花崗石으로 4변에 모를 죽여 8각형을 이루고 있으며, 1963년 1월 21일에 事蹟 제33호로 指定되었다. 迎恩門 柱礎는 1934년에 元來의 位置에서 南쪽으로 옮겨져 獨立門 앞에 세워졌으며, 1979년에 城山大路 工事 때문에 獨立門과 함께 現在의 位置로 다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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