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歷 史 旅 行 3/歷史&文學館

蘭皐金炳淵文學館

(蘭皐金炳淵文學館)

 

 

허름한 삿갓을 쓰고 朝鮮八道 坊坊曲曲을 돌아다니면서 당시 兩班 貴族들의 부폐상과 罪惡相 非人道性을 風姿한 放浪詩人 本名은  김병연(金炳淵) 호는 난고(蘭皐)이다. 5세때 洪景來難으로 三族이 滅하는 처지에 놓이자 종 이었던 金性洙가 九死一生으로 그를 救出 黃海道 穀産에서 키웠다. 金삿갓은 20세가 되기도전에 天才的인 才能을 보여 白日場에서 壯元이 되었으나 祖父를 욕하였다는  罪責感에 22세부터 放浪을 試作하여 40여년 간 떠돌이 生活을 하면서 읆은 그의 詩는  全國的으로 널리 퍼졌다. 人道主義的인 感情과 平民思想에  基礎하여 支配層에 대해서 강한 反抗精神을 나타낸 그의 詩는 庶民들에게 爆發的인 사랑을 받았다. 1863년 3월 29일 全羅道 和順郡 同腹面 구암리에서  57세로 생을 마감하였고 3년후 아들 익균이 寧越郡 河東面 臥席里 노루묵으로 墓를 移葬하였다.

 

 

 

김삿갓문학관

(金삿갓文學館)

 

김삿갓 硏究에 平生을 바친 고 정암 박영국 先生의 硏究資料 맟 遺物 뿐아니라 금옥(金玉)황녹차집(黃綠此集)동국시(東國詩)필휴집(必携集)해동시선(海東詩選)대동기문(大東埼聞)대동시선(大東詩選)등 김삿갓과 관련된 書籍이 展示되어있다.

 

 

난고문학실

(蘭皐文學室)

 

1939년 이응수작 의 김립시집 외 舊韓末에서 現代까지 各種書籍 刊行物 論文 雜誌등이 展示되어 있는곳으로 資料 讀書空間과 資料檢索空間 이 있다.

 

 

두루마기

 

北方係 民族이 방한(防寒)을 위해 上古時代부터 입던 옷에서 비롯되었으며, 〈三國志〉 扶餘傳의 記錄으로 보아 部族國家時代부터 입었음을 알 수 있다. 高句麗 壁畵에 의하면 두루마기의 形態는 크게 2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소매가 넓고 길며 여밈이 직령교임식(直領交袵式 : 깃은 곧고 섶은 겹치도록 옷을 여미는 방식)인 것과 소매가 좁고 길이가 짧은 것이다.

 

 

김병연주거지

(金炳淵住居地)

 

김삿갓주거 遺跡地는 김삿갓이 放浪을 떠나기전까지 살았던 곳으로 그 時節 허기진 배고품을 함께 나눈 200여년된 고염나무와 돌배나무 250년된 밤나무가 住居址를 지키고 있으며 現在 이곳에는 現代版 김삿갓이 살고 있다하니 世上이야기 함께 나눔도 좋지 안을까 ? 

 

 

 

一般的으로 흑립(黑笠)을 갓이라고 하며, 백관(百官)들이 관청에 드나들 때 着用했으나 朝鮮時代 初期부터 百官의 편복(便服)에 着用했다. 이것은 평량자(平凉子)·초립(草笠) 등의 段階를 거쳐서 마지막에 定立된 朝鮮時代 입제(笠制)의 歸結点으로 兩班身分만의 專用物이었다. 朝鮮時代에 着用한 갓의 種類로는 말총으로 만든 마미립(馬尾笠), 돼지털로 만든 저모립(猪毛笠), 대[竹]를 실같이 가늘게 해서 만든 죽사립(竹絲笠), 죽사립 위에 나(羅)와 주(紬)를 입힌 과라립(裏羅笠), 돼지털과 대를 섞어 만든 죽저모립(竹猪毛笠) 등이 있다. 時代에 따라 모자의 높이와 양태(凉太)의 넓이가 變했으며, 싸개의 種類에 따라 等級이 달라지기도 했다. 갓은 朝鮮時代 中葉에 가서야 비로소 代替的인 樣式이 갖추어졌다

 

 

붓과벼루

 

붓과벼루는 우리民族의 代表的인 記錄 手段이었을 뿐만아니라 文化,藝術的으로도 매우 重要한 手段이었다. 붓은 짐승의 털을 추려모아 원추형으로 만든다음 竹冠 또는 牧畜에 固定시킨 것으로 호의 끝을봉, 호의 끝부분반을 전호,그 필두까지의 짧은 털을 부호라하며 털이 부드러운 붓을 유호필, 탄력이 큰 털로 맨것을 강호필, 그리고 유호에 강호심을 박은것을 겸호필이라 한다. 벼루는 먹을 가는 文房具로서 먹이 잘갈리고 固有의 묵색이 잘 나타나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연당 표면의 봉망의 强度가 알맞아야 한다. 왜냐하면 봉망이 약하면 먹이 잘갈리지 않고 또 봉망이 너무 강하면 먹이 잘갈리나 먹빛이 좋지 않다.

 

 

김병연과거시험지

 

"논정가산충절사탄김익순죄통우천"( 論鄭嘉山忠節死嘆金益淳罪通于天)이라는 할아버지 益淳을 操弄하는 과시(科詩)로 향시(鄕詩)에서 장원하게 되었다.

 

 

曰爾世臣金益淳 鄭公不過卿大夫 將軍桃李陵西落  烈士功名圖未高
왈이세신김익순 정공불과경대부 장군도이릉서락  열사공명도미고

신하라고 불려 오던 너 김익순은 듣거라
정공은 문관이면서도 충성을 다하지 않았더냐
너는 적에게 항복한 한나라의 이 릉(李陵) 같은 놈이요
정 시의 공명은 송나라의 악비(岳飛)처럼 길이 빛나리로다

詩人到此亦慷慨 撫劍悲歌秋水死  宣川自古大將邑 北諸嘉山先守義
시인도차역강개 무검비가추수사  선천자고대장읍 북제가산선수의


시인은 이런 일에 분개하지 않을 수가 없기에
칼을 어루만지며 물가에서 슬픈 노래를 부르노라
선천은 자고로 대장이 지켜 오는 큰 고을이기에
가산보다도 의를 앞서 가며 지켜야 할 곳이 아니었더냐.

淸朝共作一王臣 死地寧爲二心子 升平日月歲辛未 風雨西關何變有
청조공작일왕신 사지영위이심자 승평일월세신미 풍우서관하변유


두 사람은 다 같은 조정의 신하였는데
죽어서야 할 곳에서 어찌 두 마음을 먹었더란 말이냐
태평 성대와 다름없던 신미년 그 해에
관서에서 풍운이 일었으니 그 무슨 변괴이더냐 

尊周孰非魯仲連 輔漢人多諸募亮 同朝寯臣鄭忠臣 抵掌風塵立節死
존주숙비노중련 보한인다제모양 동조준신정충신 저장풍진립절사


주 나라를 존중하려고 충신 노중련이 나왔고,
한 나라를 돕기 위해서는 제갈량이 나왔듯이
우리나라에도 만고의 충신 정가산이 나와
풍진을 맨손으로 막아 내려다 죽지 않았더냐

嘉陸老吏揭名族 生色秋天白日下 魂歸南畝件岳飛 骨埋西山傍伯夷
가륙노리게명족 생색추천백일하 혼귀남무건악비 골매서산방백이


전사한 충신의 명성은 갈수록 높아 갈 것이니
그 이름은 가을 하늘에 태양처럼 빛날 것이요,
혼백은 남묘로 돌아가 악비와 같이 살게 될 것이고
뼈는 서산에 묻혀 백이 숙제와 이웃하게 될 것이로다.

西來消息慨然多 問是誰家食綠客 家聲壯洞甲族金 名字長安行列淳
서래소식개연다 문시수가식록객 가성장동갑족김 명자장안행열순


서북으로부터 개탄할 소식이 들려 오기에
어느 가문에서 나온 벼슬아치냐고 물어 보았더니
문벌은 명성이 드높은 장동 김씨요
항렬은 장안에서 소문난 순(淳)자 돌림이 아니더냐.

家門如許聖恩重 百萬兵前義不下 淸川江水洗兵波 鐵甕山樹掛弓枝
가문여허성은중 백만병전의불하 청천강수세병파 철옹산수괘궁지


가문이 훌륭하여 성은도 두터웠을 것이니
백만 대적 앞에서도 의를 굽히지 않았어야 할 것을
청천강물에 고이 씻긴 병마는 어디다 두고
철옹산에 간직했던 궁시(弓矢)는 어떻게 했단 말이냐.

吾王庭下進退背 背向西域凶賊股 魂飛莫向九泉去 地下猶存先代王
오왕정하진퇴배 배향서역흉적고 혼비막향구천거 지하유존선대왕


임금님 앞에 꿇어 엎드리던 바로 그 무릎으로
서북 흉적에게 무릎을 꿇고 항복했으니
너는 죽어 황촌에도 못 갈 놈이라
저승에는 선대왕이 계실 것이니 말이다.

忘君是日又忘親 一死猶輕萬死宜 春秋筆法爾知否 此事流傳東國史
망군시일우망친 일사유경만사의 춘추필법이지부 차사유전동국사


너는 임금도 배반하고 조상도 배반한 놈
한 번 죽어서는 너무 가볍고 만 번 죽어야 마땅하다
춘추의 필법을 너는 아느냐 모르느냐
치욕적인 이 사실은 역사에 남겨 길이 전해야 하리라



이런 시로 그는 장원급제를 했고 술한잔 걸쭉하게 걸치고
행복한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와 그의 홀어머니에게 자랑을 시작하였는데

이게 웬 일인가!

 할아버지 익순을 조롱하는 과시(科詩)로 향시(鄕詩)에서 장원하게 되었다.

 

 

사서삼경

(四書三經)

 

사서삼경(四書三經)이란 儒敎의 基本慶典으로서 四書는 대학(大學) 논어(論語)맹자(孟子)중용(中庸)을 말하며 三經은 시경(詩經)서경(書經)주역(周易)을 이른다. 四書는 宋나라때 亭子라는 분이 자은(子恩)의 예기에서 大學과 中庸을 分理하여 論語 孟子와 함께 엮어 四書로 만들었으며 三經은 春秋時代의 民擾를 中心으로 한  詩集인 詩經과 堯舜 때부터 周나라 때까지의 情事에 대한 文書을 모아둔 書經과 占을 보는 占書인 周易으로 構成되는데 이러한 四書三經은 漢學을 工夫하는 基本敎材가 된다.

 

 

난고김병연

(蘭皐金炳淵)

 

本官은 安東. 자는 성심(性深), 별호는 난고(蘭皐), 호는 김립(金笠) 또는 김삿갓. 그의 一生은 여러 가지 記錄과 證言들이 뒤섞여 正確하지는 않지만 大略 다음과 같이 傳해온다. 6세 때에 선천부사(宣川府使)였던 할아버지 익순(益淳)이 平安道 農民戰爭 때 洪景來에게 投降한 罪로 處刑당하자, 그는 黃海道 穀産에 있는 종의 집으로 피했다가 赦免되어 父親에게 돌아갔다. 아버지 안근(安根)이 火病으로 죽자 어머니는 子息들이 폐족(廢族)의 子息으로 蔑視받는 것이 싫어 江原道 寧越로 옮겨 숨어 살았다. 이 事實을 모르는 그는〈논정가산충절사탄김익순죄통우천 論鄭嘉山忠節死嘆金益淳罪通于天〉이라는 할아버지 益淳을 조롱하는 과시(科詩)로 향시(鄕詩)에서 壯元하게 되었다. 그뒤 어머니로부터 집안의 내력을 듣고 祖上을 욕되게 한 罪人이라는 自責과 廢族의 子息이라는 世上의 蔑視를 참지 못해 妻子息을 버려두고 집을 떠났다. 自身은 푸른 하늘을 볼 수 없는 罪人이라면서 삿갓을 쓰고 放浪했으며, 그의 아들이 安東·平康·益山에서 3번이나 그를 만나 집으로 돌아가자고 했지만 매번 逃亡했다고 한다. 57세 때 全羅道 동복현의 어느 땅(지금의 全南 和順郡 同腹面)에 쓰러져 있는 것을 어느 선비가 자기 집으로 데려가 거기에서 半年 가까이 살았고, 그뒤 智異山을 두루 살펴본 뒤 3년 만에 衰弱한 몸으로 그 선비 집에 되돌아와 죽었다고 한다.

 

난고김병연의묘

(蘭皐金炳淵墓)

 

金炳淵은 안동 金氏의 始祖인 高麗開國功臣 選評의 後裔로 純祖 7년 (1807년) 3월 13일 京畿道 楊州郡 回天面 회암리에서 부 안근과 모 咸平 李氏 사이의 二男으로 出生하였고 本名은 炳然이고 호는 蘭皐이다. 純祖 11년 (1811) 洪景來亂이 일어났을때 祖父 金益淳이 宣川副使로 있으면서 洪景來에게 降伏 逆賊으로 몰려 廢族 處分을 받아 家族이 寧越로 옮겨와 隱遁生活을 하였다. 이러한 生活속에서도 母親은 子息에게 祖父의 事緣을 감추고 글을 가르쳤으며 20세 되던해 寧越 東軒에서 白日場에 應試하여 祖父를 批判하는 글로 壯元이 되었다. 그 後 祖父라는 史實을 알고 自責과 痛恨을 이기지못하여 22세에 집을나서 放浪生活을 하면서 庶民들에 哀歡을 詩로 읊어 庶民文學의 큰 틀을 磨鍊 하였다. 1863년 全羅南道 和順郡 同腹에서 作故하여 그 곳에 墓를 썼으며 三年 後 둘째 아들 익균이 지금의 墓로 옮겨 모셨다.

 

 

김병연유적비

(金炳淵遺蹟碑)

 

그의 詩는 沒落兩班의 情緖를 代辯한 것으로 당시 무너져가는 身分秩序를 反映하고 있다. 風姿와 解學을 담은 漢詩의 희작(戱作)과, 漢詩의 型式에 우리말의 음과 뜻을 巧妙히 丘史한 諺文風月이 特徵이다. 口傳되어오던 그의 詩를 모은 〈金笠詩集〉이 있다. 1978년 後孫들이 光州 無等山 기슭에 그의 시비(詩碑)를 세웠고, 江原道 寧越에도 全國詩家碑同好會에서 詩碑를 세웠다 

 

 

 

차죽피죽화거죽 빈객접대가세죽

풍타지타낭타죽 시정매매세월죽

반반죽죽생자죽 만사불여오십죽

시시비비부피죽 연연연세과연죽

이대로 저대로 되어 가는대로

바람부는대로 물결치는대로

 

밥이면 밥 죽이면 죽 이대로살아가고

옳다면 옳거니 그려면 그려러니 그렇케 아세

손님 접대는 집안형편되로하고

장터에서 사고팔기는 시세대로하세

세상만사가 내 마음대로 안되니

그렇고 그린세상 그린대로 살아가세

 

※한자의 운을 빌어서 세상사의 흐름을 나타낸것으로

김삿갓의 뛰어난 재치를 음미할수 있는시

  

 

명 천

(明川)

 

明川明川人不明 :밝다밝다 하면서도 사람은 밝지 못하고

魚佃魚佃食無魚 : 어물전어물전 하면서도 어느한집 식탁에 생선은 없네

 

 

꼬마신랑

 

畏鳶身細隱冠盖 : 솔개도 무서워한 작은몸 갓에 가려 보이지 않으니

何人咳嗽吐租咽 : 어떤사람이 기침해서 내밷은 대추씨앗 인가?

約思魅人個與差 : 사람마다 모두 이와같이 몸집이 작다면

一複嫁生五六人 : 한번出産에 대여섯 아이를 낳을수 있겠지

 

각자 解釋에 맞는 漢字로 詩를 한번 만들어 보세요?

 

 

(水)

 

我向靑山去 : 나는 청산을 향해 가거니와

綠水移河來 : 녹수야 너는 어디로 부터 오느냐

 

 

 

'歷 史 旅 行 3 > 歷史&文學館' 카테고리의 다른 글

太白山脈文學館  (0) 2010.12.16
西大門刑務所歷史館  (0) 2010.08.27
李陸史文學館  (0) 2010.08.07
尹東柱文學館  (0) 2010.06.26
鄭芝溶文學館  (0) 2010.06.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