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歷 史 旅 行 3/歷史&文學館

鄭芝溶文學館

(鄭芝溶文學館)

 

 

鄭芝溶文學觀을 들어서면 案內데스크가 正面에 있고 右側으로 鄭芝溶의 蜜蠟人形이 밴취에 앉아 있는데 양옆에 빈자리가 마련되어 있어서 訪問客이 人形과 함께 記念撮影을 할 수 있도록 磨鍊된 小品이다. 鄭芝溶文學觀의 銅線은 右側 어두운 터널 같은 入口부터 始作하는데 이곳에 들어서면 音樂과 함께 鄭芝溶의 詩 世界를 音樂과 이미지로 觀覽客에게 傳達하는데 ‘ㄱ’자의 壁面 귀퉁이 양 壁面에 映像을 비추어 짧은 時間에 많은 情報를 觀覽客에게 傳達하고 있다.

 

 

 

 

정지용

(鄭芝溶)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의 作家 鄭芝溶 詩人은 1902년 陰曆 3월 15일 아버지 정태국 어머니 정미하 사이에 長男으로 태어나 당시 玉泉 公立普通學校 (現 走向初等學校)와 서울 徽文高等普通學校 그리고 日本 도지사(同志社)大學 英文科를 卒業하고 歸國하여 母敎인 徽文高普 英語敎師로 在職한바 있다. 1945년 梨花女子專門學敎 敎授 京鄕新聞社 主幹을 歷任하였고 서울大學校 講師로 出講한바 있다.

 

 

  

(鄕愁)

                                          鄭芝溶

 

넓은 벌 동쪽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비인밭에 밤바람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조름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벼개를 돋아 고이 시는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흙에서 자란 내마음, 파란 하늘빛이 그리워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러 풀섶이슬에

함추름 휘적시던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전설바다에 춤추는 밤 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것도 없는 사철 발벗은 아내가
따가운 햇살을 등에지고 이삭 줏던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하늘에는 성근별, 알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서리 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지붕 흐릿한 불빛에 돌아앉아 도란도란거리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

 

 

문학전시실

(文學展示室)

 

文學展示室은 테마별로 鄭芝溶의 文學을 接할 수 있도록 芝溶年報, 芝溶의 삶과 文學, 芝溶文學指導, 詩ㆍ散文集 初刊本 展示 등 多樣한 空間을 마련하고 있다. 

 

 

정지용문학관

(鄭芝溶文學館)

 

鄭芝溶文學館의 動線은 右側 어두운 터널 같은 入口부터 始作하는데 이곳에 들어서면 音樂과 함께 鄭芝溶의 詩 世界를 音樂과 이미지로 觀覽客에게 傳達하는데 ‘ㄱ’자의 壁面 귀퉁이 양 壁面에 映像을 비추어 짧은 時間에 많은 情報를 觀覽客에게 傳達하고 있다.

 

 

삶과문학

 

“芝溶年報”는 鄭芝溶과 그의 時代를 詩人이 살았던 時代的 狀況과 文學史의 展開 속에서 그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알 수 있는 곳이며 스크린북에 上映되는 聯想을 通해 追憶의 앨범을 넘기듯 詩人의 自取를 더듬어 볼 수 있다.  “芝溶의 삶과 文學”은 年代記와 主題別로 鄕愁, 바다와 거리, 나무와 산, 산문과 동시 등 4구역으로 나뉘어져 있으며 鄭芝溶의 삶과 文學을 深度 있게 理解할 수 있는 空間으로 꾸며져 있다.

 

 

정지용시집

(鄭芝溶詩集)

 

“詩ㆍ散文集 初刊本 展示”는 『鄭芝溶詩集』, 『白鹿潭』, 『芝溶詩線』, 『文學讀本』,『散文』등 鄭芝溶 詩人의 詩?散文集 原本을 展示하고 肉筆原稿 및 初刊本의 內容을 映像으로 感想 할 수 있도록 하여 당시의 狀況을 느낄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이상과 같이 테마를 따라 가는 銅線은 展示室의 벽 3면을 가득채운 文學展示 空間으로 이루어져 있다.

 

 

향 수

(鄕愁)

 

시 〈鄕愁〉는  1927년에 發表되었고,  歌曲 鄕愁는 1930년대에 作曲家 채동선에 의해 作曲되었다.  1989년에 김희갑이 作曲하여 테너 박인수와  大衆音樂 가수  이동원이 듀엣으로 부른 노래가 널리 알려져 있다.

 

 

정지용밀랍인형

 

鄭芝溶文學觀을 들어서면 案內데스크가 正面에 있고 右側으로 鄭芝溶의 蜜蠟人形이 밴취에 앉아 있는데 양옆에 빈자리가 마련되어 있어서 訪問客이 人形과 함께 記念撮影을 할 수 있도록 磨鍊된 小品이다.

 

 

(鄭芝溶生家)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의 作家 鄭芝溶 詩人이 이 집에서 태어나 꿈 많던 어린時節을 보냈다 그래서 옛 모습을 되찾아 生家를 復元 하였다. 1902년 陰曆 3월 15일 아버지  정태국 어머니 정미하 사이에 長男으로 태어나 당시 玉泉 公立普通學校 (現 炷香初等學校)와 서울 徽文高等普通學校 그리고 日本 도지사(同志社)大學 英文科를 卒業하고 歸國하여 母校인 徽文高普 英語敎師로 在職한바 있다. 1945년 梨花女子 專門學校 敎授 京鄕新聞社 主幹을 歷任하였고 서울大學校 講師로 出講한바 있다. 그는 天才的 氣質과 素朴한 인푼을 가지고 鄕愁,故鄕,白鹿潭 등 珠玉같은 明視를 연이어 發表하였고 文章紙를 通하여 이른바 靑綠派詩人(박두진,박목월,조지훈)을 文壇에 登壇 시키는 등 現代 詩文學의 先驅者로 現代  序詩를 裝飾한 분이다. 그의 詩와 글은 鄭芝溶 時節,芝溶시선,文學讀本 白鹿潭 등의 進行본解에 收錄되어 있으며 그에 대한 硏究 論文이 繼續 나오고 있다.

 

 

정지용생가

(鄭芝溶生家)

 

1996년에 原型대로 復元되어 管理되고 있는 鄭芝溶 生家는 舊邑射距離에서 수북방향으로 청석교 건너에 位置한다. 舊邑射距離에서 수북방면으로 길을 잡아 청석교를 건너면 ‘鄕愁'를 새겨 놓은 詩碑와 生家 案內板이 있는 곳에 이르게 된다. 이곳이 鄭芝溶 生家이며, 生家 앞 청석교 아래는 여전히 ‘鄕愁'의 서두를 粧飾하는 실개천이 흐르고 있으며 그 모습은 變한지 오래이지만 흐르는 물은 예전과 같아 맑기만 하다.  초가삼간(草家三間) 집을 짓고 뜰 안 텃밭 일구어 푸성귀 내어먹고, 소작(小作)시름 힘겹더라도 살뜰한 아내 덕에 父母子息 乾飼하면 幸福하였던 時節. 부엌 하나에 안방, 골방 나누고 방 앞에 툇마루 내고, 지붕에 이엉 얹어지면 草家三間은 마련되었으며, 싸리가지 꺾고 엮어 마당을 “비잉” 둘러 세워두면 그 안은 뜰이었고, 집안 들락거릴 사립문 하나 엮어 세우면 어엿한 民家하나 지어졌었던 時節.

 

 

초 가

(草家)

 

박 익고 감 익는 가을을 훌쩍 넘어선 초가(草家)의 뜰 안 감나무에 까치밥 몇 알 남겨 놓고, “배고프면 언제든 날아와 먹고 가라”는 人心에 보답하려는지, 까치는 가끔 반가운 손님소식 傳했던 時節을 그대는 記憶하는가.  부드러운 谷線을 지닌 우리네 傳統民家 草家은 대물림 가난에 시름 앓지만, 그래도 幸福을 엮어가던 民草를 닮아 질박한 아름다움을 지닌 故鄕의 집이었다. 고래 등 같은 기와집의 女人네 버선코처럼 살짝 치켜 올려진, 처마 끝과 龍마루 끝의 멋스러움이 아무리 높다한들 草家집의 질박한 아름다움에 비할까.

 

 

가 구

(家具)

 

鄭芝溶 생가는 房門을 항상 열어두어 찾는 이에게 그의 아버지가漢藥房을 하였었음을 가구(家具)로 알리고 있으며,  視線가는 곳 어디마다 鄭芝溶의 시 를 걸어놓아 시를 吟味할 수 있도록 配慮해 놓았다. “窒化爐에 재가 식어지면 뷔인 밭에 밤바람소리 말을 달리고,”, “흐릿한 불빛에 돌아 않어 도란도란거리는 곳”, ‘鄕愁'의 시어 따라 방안에 配置된 소품 窒化爐와 燈盞은 自然스럽게 ‘鄕愁'를 다시금 吟味하게 하고 있다  그러나 이제는 더 以上 그 정겹던 草家의 風景은 애써 찾지 않으면 다가설 수 없는 것이 되고 보니 故鄕가면 동구 밖 지키는 둥구나무만 늙어가고 있다.

 

 

사립문

 

鄭芝溶 生家는 두개의 사립門이 있다.  하나면 足할 것을 두개씩이나 門을 낸 뜻은 訪問客의 動線을 考慮하여, 또는 한 개의 門으로 드나드는 번잡함을 피하기 위하여 그랬는지는 모르겠다. 또 生家의 原型 그대로 復元했다 하니 물레방아 쪽 사립門은 텃밭 드나드는 用度로 원래부터 있었는지도 모른다.

 

 

 

一山湖水公園에 있는 鄭芝溶의 (湖水) 시비 (詩碑)

 

텃밭사립문

 

鄭芝溶 生家에 간다면 이 두개의 사립문 중, 물레방아 옆의 ‘텃밭사립문(그냥 이렇게 부르고 싶다)’ 風景을 눈여겨 볼 일이다. 사립문 언저리에 까치밥 남아 있는 감나무의 風景은 鄭芝溶 生家인 草家와 잘 어우러져 초겨울 故鄕의 運置가 더욱 살아나는 곳이다. 군것질 거리가 귀했던 時節의 아이들까지도 까치밥만큼은 慾心내지 않았으며, 하루 중 어느 때. 꼭 까치뿐만이 아니어도 낯선 새가 찾아와 감을 쪼고 있으면 그 모습이 반갑고 고마웠던 것이 우리네 정서였으니 그 아니 어울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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