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歷 史 旅 行 3/歷史&文學館

江華歷史館

(江華歷史館)

 

 

江華地域에 널리 퍼져있던 先史時代부터 現在까지의 歷史,文化遺跡을 한데모아 展示한것 곳으로 1988년에 完工되었으며 先史,統一新羅,高麗,朝鮮時代등 4개의 展示室로 構成되어있다. 甲串墩臺는 事蹟 제306호로 高麗때 江華의 外城으로 江華海峽을 防禦하며 觀察하고자 墩臺로 肅宗 5년 (1679)에 築造되었다.

 

 

 

 

 

강화비석군

(江華碑石群)

 

이 碑石群은 朝鮮時代 善政을 베푼 留守,判官,經歷,軍需등의 零細 不忘碑및 善政碑이며 自然保護의 一環으로 세운禁標,三忠臣을 기리기 위해 세운 三忠寺跡碑 등 총 67기이다. 自然保護의 一環인 禁標는 肅宗 29년 江華留守府(高麗宮趾)앞과 여러地方에 세웠으나 現在는 거의 없어졌다. 이 禁標는 우리祖上들의 自然保護 精神을 엿볼수 있는 重要한 標石이며 三忠寺跡碑는 仁祖 14년 靑나라 軍事가 우리나라를 侵入하여 江華島를 攻略하자 월곶진(연미정)에서 敵과 歷戰奮鬪 하였으나 重過不足으로 壯烈하게 戰死한 三忠臣(강홍업.구원일.황선신)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碑石으로 護國精神의 얼이담긴 重要한 歷史的 資料이다. 當初 이들 碑石들은 1965년 江華大橋 着工時 그周邊에 있었던것을 용정리 1086번지에 移轉 하였다가 碑石群 整備事業으로 이곳으로 옮겨 現在에 이르고 있다.

 

 

청자진사연화문표형주자

(靑磁辰砂蓮花文瓢形注子)

 

國寶제133호 江華에 있는 高麗時代의 최항(崔沆)의 묘에서 나온 高麗靑瓷 酒煎子의 代表的인 遺物이다. 酒煎子 몸에 연꽃무늬를 진사 (辰沙)로 두드러지게 나타내었으며 동자 (童子)와 개구리 한마리가 있다.

 

 

강화지석묘

(江華支石墓)

 

江華郡 하점면 附近里에 있는 靑銅器時代의 北方式고인돌이다. 高麗山 北쪽 峰우리인 시루메산의 稜線끝자락 部分의 稜線 밭 가운데 獨立해서 있는 것으로 京畿道를 비롯하여 우리나라 中部地域에서는 드물게 보이는 巨大한 北方式(탁자식) 지석묘로 南韓에서는 가장 큰 規模의 지석묘로 알려져 있다. 이 고인돌은 道路에서 약간 떨어진 밭 가운데에 1기가 獨立해 있다. 뚜껑돌[蓋石]은 길이 710cm, 너비 550cm나 되는 거석이고, 그 밑에 2매의 굄돌이 받치고 있다. 一般的으로 北方式 고인돌의 構造는 4매의 굄돌로 직사각형 돌방[石室]을 構築하고, 그 위에 뚜껑돌을 얹어 놓는 方式을 취하는데, 이 고인돌은 돌방의 짧은 변을 이루는 2장의 굄돌이 없다. 이와 같이 2장의 굄돌이 現在 남아 있지 않는 것은 과거에 破壞되어 없어진 것으로 推定된다.

 

 

선사시대

(先史時代)

 

舊石器人들은 작은무리를 지어 江에서 가까운 洞窟이나 큰바위 밑에서 살았으며 周邊의 環境에 따라 이곳저곳을 떠돌아 다녔다. 이들은 주먹도끼.찌르개.긁개등의 떼석기(打製石器)를 使用하여 짐승을 사냥하고 물고기를 잡거나 나무열매와 植物의 뿌리등을 採集하여 먹고 살았다. 

 

 

팔만대장경

(八萬大藏經)

 

八萬大藏經은 高麗때 蒙古의 侵入을 佛敎의 힘으로 물리치고자 하는 念願에서 만들어졌다. (般若波羅蜜多心經)부분.

 

 

조선백자

(朝鮮白磁)

 

白瓷는 朝鮮時代 初期부터 國家次元에서 生産과 管理에 힘을기울였으며 白瓷에대한 選好가 대단하여 독특한 바전을 이루게 되었다. 時間이 지날수록 여러種類의 模樣과 紋樣이 開發되어 朝鮮後記에는 多樣하면서도 華櫚한 白磁가 만들어졌으며 實用性과 機能性을 兼備 하였다. 이렇게 朝鮮時代의 白磁는 自然스럽고 實用的이며 單純하고 簡潔한데서 그 아름다움과 海壑을 찿는것이 特徵이라 할수 있다. 

 

 

정족산사고

(鼎足山史庫)

 

사고 (史庫)란 歷代 王朝의 실록 (實錄)과 문헌(文獻)을 保管하던 곳이다. 壬辰倭亂때 中央의 춘추관 (春秋館)과 충주 (忠州)성주 (星州)의 사고에 保管된 實錄은 불타없어지고 오직 전주사고 (全州史庫)만이 被害를 입지 않았다. 倭軍이 全州를 攻擊하자 全州史庫의 소장본 (所藏本)은 정읍 (井邑)내장산 (內藏山) 용굴암으로 옮겼다가 아산 (牙山)과 해주 (海州) 그리고 江華를 거쳐 묘향산 (妙香山) 보현사 (普賢寺)로 보내졌으며 이후 摩尼山사고로 옮겨졌다. 그 뒤 鼎足山城안에 새로 史庫를 짓고 移轉하여 춘추관 (春秋館)의 官場에 保管되었다. 1910년 日本에 國權을 빼앗긴 뒤 鼎足山本은 태백산본(太白山本)춘추관본 (春秋館本)과 함께 總督府 鶴舞과 紛失에 移關되었다가 1930년에 경성제국대학 (京城帝國大學)으로 옮겨졌고  光復과 더불어 서울大學校에서 保管하고 있다.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

(白雲和尙抄錄佛祖直指心體要節)

 

직지심체요절  (直指心體要節) 現存하는 世界最高의 金屬活字本으로 1377년 에 印刷되었다. 直指心體要節은 上下 2권 2冊인데 上卷에는 印度와 中國의 有名한 스님들의 이야기가 적혀있고 下卷에는 스님들의 게송(偈頌),찬송(讚頌)법어 (法語)문답(問答) 서신 (書信)등이 적혀 있다.

 

 

화문석

(花紋席)

 

花紋席은 완초(莞草)를 利用하여 花紋席 틀에 한올 恨올 엮어 나가면서 여러가지 色갈로 무늬를 수놓은 最高級의 돗자리이다. 江華에서 生産되는 天然材料인 순백색 (純白色)의 莞草로 만들기 때문에 潤氣가 있고 부드럽다. 특히 여름철에 땀을 잘吸收하고 시원하며 겨울에는 冷氣를 防止해 주어 널리 愛用되고 있다. 高麗中葉부터 만들기 始作한 江華 花紋席은 多樣한 무늬와 製造技術의 開發로 現在까지 優秀한 傳統을 繼承하고 있으며 완초장 (莞草匠)은 重要 無形文化財 제 103호로 指定되어있다. 

 

 

수자기

(帥子旗)

 

1871년 신미영요 (莘未洋擾)당시 조선군 (朝鮮軍) 사령관 (司令官)의 장수기 (蔣帥旗) 강화도 (江華道) 광성보 (廣城堡)에서 미함대 (美艦隊)와 조선수비군 (朝鮮守備軍)과의 치열한 격전 (激戰)이 있었고  그 戰鬪에서 朝鮮이 패 (敗)함에 따라 수 (帥)자기를 빼앗겼다. 이기는 美國 애나폴리스 해군사관학교 (海軍士官學校)박물관 (博物館)에 所藏되어 있었던것을 2007년 10월 文化財廳에서 長期對與하여 現在 우리나라에 保管중이다. 

 

 

강화외성

(江華外城)

 

高麗는 1232년 蒙古의 侵掠에 對抗하기 위해 江華로 天道한後 내성 (內城)중성 (中城) 외성 (外城)등의 여러 防禦施設을 만들었다. 이중 江華 外城 은 東쪽 海岸線을 따라 쌓은 토성 (土城)으로 둘레는 약 23 km 이다.

 

 

삼별초항쟁

(三別秒抗爭)

 

1270년 三別抄의 大夢抗爭 당시 三別抄가 江華를 더나 진도 (珍島)로 근거를 옮기는 모습 三別抄는 江華에 남아있는 귀족,고관 (高官)의 家族들을 人質로삼고 떠나는데 이때 動員된 배가 1.000척에 이르렀다고 한다.

 

 

암행어사절목

(暗行御使節目)

 

어사 (御使)가 임금의 命을 받아 각처 (各處)를 돌아본 後에 보고들은것을 記錄한것

 

 

양헌수장군

(梁憲洙將軍)

 

朝鮮末期의 武臣으로 1848년에 무과 (武科)에 及第하여 여러官職을 거쳤으며 1866년 丙寅洋擾가 일어나자 정족산성 (鼎足山城)에서 프랑스군을 擊退하고 江華城을 回復하였다. 1874년에는 捕盜大將을 지냈고 1875년에는 어영대장 (御影大將)에 1882년에는 지삼군부사 (知三軍府事)에 1884년에는 工曹判書에 任命되었다. 1887년 독련사 (督鍊使)가 되었으며 시호 (諡號)는 충장공(忠莊公)이다.  

 

 

정족산성전투

(鼎足山城戰鬪)

 

1866년 丙寅洋擾 당시 鼎足山城에서 벌어진 朝鮮軍과 프랑스軍 사이의 治熱한 戰鬪모습 이 戰鬪에서 프랑스軍은 60 ~ 70명의 死傷者를 내었으나 朝鮮軍의 被害는 戰死者 1명과 負傷者 4명 뿐이넜다고 傳 한다.

 

 

광성보전투

(廣城堡戰鬪)

 

1871년 辛未洋擾 당시 廣城堡에서 벌어진 朝鮮軍과 美軍사이의 治熱한 戰鬪 모습 이 戰鬪에서 美軍의 被害는 아주적었으나 朝鮮軍 戰死者는 350여명에 이르렀다고 傳 한다.

 

 

어재연장군

(魚在淵將軍)

 

朝鮮 後期에 무신 (武臣)으로 1841년 (顯宗7)에 武科에 合格하여 忠淸道兵馬節度使가 되었다. 1866년 丙寅洋擾 때에는 廣城鎭을 守備하였으며 1871년에 신미양요 (辛未洋擾)가 일어나자 진무중군 (鎭撫中軍)으로서 廣城堡에서 美軍과 치열한 戰鬪를 벌였으나 戰力의 劣勢로 敗하고 순절 (殉節)하였다. 後에 병조판서삼군부사(兵曹判書知三軍府事)에 追從되었다. 詩號는 충장공 (忠莊公)이다.

 

 

조 총

(鳥 銃)

 

1866년 丙寅洋擾 당시 우리나라는 火繩銃인 조총 (鳥銃)을 가지고 있었는데 반해 프랑스군은 뇌관식 (雷管式)小銃과 유탄포 (유彈砲)를 개량한 艦砲를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프랑스군과 戰鬪에서 苦戰하였다. 또한 1871년 심美洋擾 때에도 美國軍은 레밍턴 (Remington)小銃등 近代的인 小銃과 後裝式 강선포 (腔線砲)를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武器의 相對的 劣勢를 보인 朝鮮軍은 敗하여 江華島가 크게 蹂躪당 하였다.

 

 

반닫이

 

반닫이는 두꺼운 箱子模樣으로 앞의 위쪽 折半이 門짝으로 되어 아래로 젖혀 여닫게 되어있다. 가장 오래전 부터 使用되어온 家具로 책,두루마기,衣服,옷감 등을 넣어두는데 使用한다. 이러한 반닫이는 우리나라 全域에서 널리 使用되었는데 특히 平安北道 박천 (博川)지방과 더불어 이곳 江華地域의 반닫이가 손곱히고 있다.

 

 

강화행렬도

(江華行列圖)

 

1849 년 6월 朝鮮 24대 獻宗의 王位를 繼承하게될 변 철종 (哲宗)을 모시러오는 王室의 行列을 그린 역사기록화 (歷史記錄畵)이다. 地形에 따라 굽루구불길게 늘어선 긴 行列과 江華의 全景을 12폭 병풍 (屛風)에 담았다. 威嚴있고 盛大한 行列을 畵面中心에 排置하면서 여러 성곽 (城郭)과 크고작은 建物들 섬사람들의 生活과 바닷가의 風景을 纖細하게 表現하여 당시의 現實을 實感나게 보여주고 있다. 비록 人物들이 작게 그려져 있으나 農民들 漁夫들 장사꾼들과 兩班士大夫들 僧侶 그리고 老人들과 아낙네들 어린이들에게 이르기까지 각 階層 人物들의 모습이 비교적 생생하게 나타나 있다. 선과점 피우기를 基本으로 하는 조선화 (朝鮮畵)의 表現技法을 能熟하게 活用하여 그린 優秀한 作品이며 한 화폭에 방대한 內容을 이야기 形式으로 表現한 典型的인 作品이다.

 

 

탱자나무

 

이 탱자나무는 사기리 (사기리)의 탱자나무 (天然記念物 제79호)와 함께 江華島가 우리나라 西海岸에서 탱자나무 자랄수 있는 北쪽 限界線이 됨을 立證하는 貴重한 資料가된다. 한편 이곳 江華島에 처음 탱자나무를 심게된 理由가 城壁 밑에 敵兵의 接近을 막기위한 것이었다는 점에서 이 탱자나무는 우리祖上들의 國土防衛의 意地를 엿볼수 있는 遺物이기도 하다.

 

 

갑곶돈대

 

갑곶墩臺는 事蹟 제306호로 高麗때 江華의 外城으로 江華海峽을 防禦하며 觀察하고자 墩臺로 肅宗 5년 (1679)에 築造되었다.

 

 

대포

(大砲)

 

浦口에서 火藥과 砲彈을 裝塡한다음 뒤쪽 구멍에 點火하여 射擊하는 포구장전식화포 (砲口裝塡式火砲)로 射程距離는 700 m 이며 朝鮮英祖때부터 鑄造하여 使用하였다. 火藥의 爆發하는 힘으로 砲彈은 날아가나 砲彈自體는 爆發하지 않아 偉力은 弱하다.

 

 

소 포

(小砲)

 

浦口에서 火藥과 砲彈을 裝塡한다음 뒤쪽 구멍에 點火하여 射擊하는 포구장전식화포 (砲口裝塡式火砲)로 射程距離는 300 m 이며 우리나라 在來式 火砲중 가장 發達된 形態를 갖추고 있다.

 

 

불랑기

(佛狼機)

 

佛狼機는 壬辰倭亂을 계기로 널리 使用된 火繩으로 포 1문에 다섯개에서 아홉개의 자포 (子砲)를 結合하여 連續射擊할수 있는 發達된 火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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