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歷 史 旅 行 3/歷史&文學館

松江文學館

(松江文學館)

 

 

本官은 연일(延日, 또는 迎日), 자는 계함(季涵)이고, 호는 송강(松江), 詩號는 문청(文淸)이다. '松江 鄭澈'로도 부른다. 돈령부 판관(敦寧府 判官) 정유침(鄭惟沉)의 아들]이며, 仁宗의 後宮 貴人 鄭氏의 男同生이다. 기대승(奇大升) 김민후(金隣厚) · 양응정(梁應鼎)의 文人이다. 《關東別曲(關東別曲)》 등 家事와 漢詩를 지었으며, 當代 時調文學 家事文學의 大家로서 時調의 尹善道와 함께 韓國 詩家事象 雙璧으로 일컬어진다. 당색으로는 西人의 指導者였고, 李珥, 成婚 등과 敎諭하였다. 己丑獄事 당시 國門을 主管하던 刑官으로 東人으로부터 怨恨을 사기도 했다.

 

 

 

송강마을

 

이곳 新院洞 松江마을은 松江鄭澈이 父母의 喪을 當하여 侍墓살이를 했고 政治家로서는 가장 비참한 始期에도 王城한 作品具象을 하며살던 곳으로그의 호를 딴 地名들이 곳곳에 남아있다. 마을西쪽으로는 松江고개가 있고 東편에는 곡능천을 가로막아 農業用水로 使用하는 松江보가 자리잡고 있다. 絶壁밑으로 松江 낚시터가 있고 父,母,長子의 墓가 北쪽(華山)에 있으며 晩年에 아끼던 妓生 강아의 墓는 松江의 墓가 鎭川으로 移葬된 뒤에도 그대로 남아 있어 마을사람들은 강아 아씨 墓라 愛情을 담아 부른다.(松江鄭澈侍婢文 內容)

 

 

관동별곡

(關東別曲)

 

1580년(宣祖13)에 지은가사 그의나이 45세 되는 正月에 江原道 관찰사(觀察使)로 제수(除授)되었을때 원주(原州)에 赴任하여 3월에 이르러 내,외,해금강 (內外海金江)과 관동팔경 (關東八景)을 두루遊覽하고 그 절경(絶景)을 노래한 가사

 

 

사미인곡

(思美人曲)

 

1585년 (宣祖18)에 지은 가사(歌辭) 속미인곡(續美人曲)과 동곡이교(同曲異巧)의 作品으로 松江 自身도 전후미인곡(前後美人曲)이라고 칭하였다. 이 作品은 草野에 묻혀 임금을 戀慕하고 고신연주(孤臣戀主)의 정한(情恨)을 한 女人이 그 男便을 生離別하고 戀慕하는 마음에 비유하여 쓴것으로 自身의 忠情을 우의적(禹意的)으로 告白한 作品이다.

 

 

성산별곡

(星山別曲)

 

1560년 (明宗15)에 지은가사(歌辭) 이 작품은 松江이 16세 부터 27세 등과 (登科)할때까지 10년간 落鄕해 있던곳인 성산(星山)이란 地名을 題目하여 쓴 作品이다. 星山은 당시 창평(昌平)지곡리(芝谷里) 星山(별뫼)이며 現在로는 全南 담양군(潭陽郡) 남면(南面) 지곡리(芝谷里)에 해당된다. 隱退後 식영정(息影亭)과 서하당(棲霞堂)등 정자(亭子)를 지었다. 

 

 

속미인곡

(續美人曲)

 

가사.작자가 官職에서 물러나 京畿道 고양(高陽)에 退去 하였다가 창평(昌平)으로 내려가 그의 처외척(妻外戚)인 김성원(金成遠) 의 산정에서 歲月을 보내면서 나라 일과 임금의 恩惠를 생각하며 지은것이다.

 

 

훈민가

(訓民歌)

 

연시조(聯時調) 16수 작가가 45세때 江原道 관찰사(江原道觀察使)로 在職시 百姓들을 교유(敎誘),啓蒙하기 위해 지은것이다.

 

(訓民歌)

 

아버님 날 나흐시고 어마님 날 기르시니

두분 곳 아니시면 이몸이 사라실까.하늘같은 가 업슨 은덕을 어데 다혀 갑사오리

님금과 백성과 사이 하늘과 땅이로다.

내의 셜운 일을 다 아로려 하시거든

우린들 살 진 미나리 홈자 엇디 머그리

 

형아 아이야 네 살할 만져 보아

뉘손데 타나관데 양재조차 같아산다

한 젖 먹고 길러 나이셔 닷 마음을 먹디마라

 

어버이 사라진제 섬길일란 다하여라디나간 후면 애닯다 엇디하리 평생에 굣텨 못할일이 잇뿐인가 하노라

 

한몸 둘헤 나누어 부부를 삼기실샤

이신제 함께 늙고 주구면 한데간다

어디셔 망녕의것이 눈 눈 흫긔려 하난고

 

간나회 가는길흘 사나희 에도다시

사나희 녜는 길을 계집이 츠도다시

제 남진 데계집 하니어든 일홈 뭇디 마오려

 

네아들 효경 읽더니 어도록 배왔나니

내아들 소학은 모르면 마칠로다

어네 제이 두글 배화 어딜거든 보려뇨

 

마을 사람들아 올흔 일 하자스라사람이 되여나셔 올치 옷 못하면마소를 갓곳갈 씌워 밥먹이나 다르랴

 

팔목 쥐시거든 두손으로 바티리라

나갈데 계시거든 막대들고 좇으리라

향음주(鄕飮酒)다 파한 후에 뫼셔가려 하노라

 

남으로 삼긴 듕의 벗갓티 유신(有信)하야  

내의 왼일을 다닐오려 하노매라

이몸이 벗님곳 아니면 사람되미 쉬울가

 

어여 뎌 족하야 밥업시 엇디할고

어와뎌 아자바 옷업이 엇디할고

머흔 일다 닐러사라 돌보고져 하노라

 

내집상 사달흔 어도록 찰호산다

네딸 서방은 언제나 마치나산다

내게도 업디커니와 돌보고져 하노라

 

오늘도 다새거나 호미메고 가쟈스라내논다 메여든 네논 점메어주마올길헤 뽕따다가 누에 먹켜 보쟈스라

 

비록 못니버도 남의 옷을 앗디 마라

비록 못먹어도 남의 밥을 비디마라

한적 곳때 시른후면 고텨 씻기 어려우리

 

쌍육(雙六)장기(將碁)하지마라 송사(訟事)글월 하지마라

집배야 무슴하며 남의 원수될 줄엇지

나라히 법을세오샤 죄 잇난줄 모로난다

 

이고 진뎌 늘그니 짐프러 나를주오나는 졈엇거니 돌히라 무거울까늘거도 셜웨라커든 짐을 조차지실까.


 

송강가사

(松江歌辭)

 

松江의 家事와 時調를 收錄한책 私本으로 傳하는것도 있으나 完全하지 못하고 木版本으로 황주본(黃州本) 의성본(義城本) 관북본(關北本) 성주본(星州本) 관서본(關西本)의 다섯 種類가 알려져 있다.

 

 

의기강아묘

(義妓江娥墓)

 

松江 鄭澈이 全羅道 觀察使로 있을때 사랑하자 世上사람들이 松江의 강(江)자를 따서 강아(江娥)라 불렀다. 松江은 1582년 9월 都承旨에 任命되어 江娥에게 惜別의 詩를 지어주고 臨地인 한양(漢陽)으로 떠났다. 그후 江娥는 松江에 대한 연모(戀慕) 의 情이깊어 江界로 貴陽가 圍籬 安置중인 松江을 찿았으나 壬辰倭亂이 나자 宣祖가 特命으로 松江을 다시 召喚되어 1952년 7월 忠淸道地方의 都制札使로 任命되었다. 江娥는 다시 松江을 만나기위해 홀홀單身으로 敵陣을 뚫고 南下하다가 敵兵에게 붙잡히자 義兵將의 勸誘로 자기몸을 祖國의祭壇에 받치기로 決心하고 적장 小西行長을 誘惑 我軍에게 捷報를 提供하여 結局戰勢를 逆戰시켜 平壤奪還의 큰功을 세웠다고 한다. 그후 江娥는 소심(素心) 菩薩이라는 이름으로 入山修道 하다가  高陽 신원의 松江墓所를 찿아 한 平生을 마감하였다.

 

(紫薇花)

 

일원춘색자미화

一園春色紫薇花

 

재간가인승옥채

縡看佳人勝玉釵

 

막향장안루상망

莫向長安樓上望

 

만가쟁시연방화

滿街爭是戀芳華

 

봄빛 가득한 동산에 자미화 곱게펴

그 예뿐 얼굴은 玉비녀보다 곱구나

망루에 올라 長安을 바라보지 말라

거리에 가득한 사람들 모두 다

네모습을 사랑하리라.

 

 

정황의묘

(鄭滉墓)

 

資憲大夫 兵曹判書行通政大夫 內膽寺副正 迎日 鄭公滉之墓

鄭澈의 위로 자(滋), 소(沼), 황(滉) 세 형과 두 누이가 있었다

 

 

묘비명

(墓碑名)

 

贈資憲大夫 兵曹判書行通政大夫 內膽寺副正 迎日 鄭公滉之墓

配贈貞夫人富平韓氏祔

 

 

묘비명

(墓碑名)

 

有明朝鮮貴人迎日鄭氏之墓

 

정귀인묘

(鄭貴人墓)

 

貴人 鄭氏는 정유침(鄭惟枕)의 딸이며, 인종(仁宗)의후궁(後宮)이며 文臣 松江 鄭澈의 큰 누이로 그녀 또한 小生이 없다. 仁宗의 陵은 京畿道 高陽市 原糖洞에 있으며, 그의 孝行을 기리는 뜻으로 陵號는 효릉(孝陵)이라 부른다.

 

 

송강정철

(松江鄭撤)

 

정철(鄭撤)1536 ~ 1593년 은 朝鮮의中期의 詩人이자 政治家이다. 本官은 연일(延日,또는迎日)자는 계함(溪函)이고 ,호는 송강(松江) 시호는 문청(文靑)이다. 江原道 觀察使로 登用되어 그후 3년 동안 江原道 全羅道 咸鏡道의 觀察使를 지내면서 地方長官 으로서 보다는 한사람의 詩人으로서 그의 天才的 才質을 나타낸 作品을 썼다 그의 最初의 家事 關東別曲은 金剛山을 비롯한 關東八景을 두루두루 遊覽하면서 산수(山水)를 노래하고 또한 고사(故事)風俗까지 揷入한 것이며  訓民歌 16수는 百姓을 교화(敎化)할때 布告文이나 諭示文을 大新하여 시조(時調)의 型式을 빌려 지은것이다. 1583년 禮曹 參判이 되고 이어 刑曹와 禮曹의 判書를 歷任하고 1584년 大司憲이 되었으나 東人의 논척 (論斥)으로 다음해 辭職하고 故鄕에 돌아가 4년 동안 家事生活에 들어갔다. 이때 사미인곡(思美人曲) 속미인곡 (續美人曲) 성산병곡(星山別曲)등 수많은 가사와 단가를 지었다. (竹西樓에있는 松江鄭澈家事의터)

    

 

정철묘비명

(鄭撤墓碑名)

 

有明朝鮮 左義政寅城府院君 諡文淸號 松江鄭公澈之墓

貞敬夫人 文化柳氏 祔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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