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歷 史 旅 行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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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承晩墓 (初代 ~ 2.3 代大統領) 初代 ~ 2.3 代大統領 이승만묘 (李承晩墓) 李承晩( Syng-man Rhee 1875년 4월 18일 ( 陰曆 3月 26日) ~ 1965年 7月 19日. 黃海道 平山 出生)은 朝鮮末期의 近代化 運動家이자, 大韓民國의 獨立運動家 겸 敎育家·言論人.·政治人이며 大韓民國의 第 1,2,3代 大統領이자 大韓民國 臨時政府의 初代 大統領이었다. 뭉치면 살고 흐터지면 죽는다 大韓民國 初代 ~ 2,3代大統領李承晩墓 大韓民國初代大統領雩南李承晩博士記念碑 이승만 (初代雩南李承晩) 李承晩 詩 萬枝同根 만가지로 나누어져도 뿌리는같고 尊祖崇宗 조상을 높이고 조상을 존중하여 百派一源 백번갈라진 물도근원은 하나로서 愛親睦族 어버이를사랑하고 동족이 화목하고 敬老慈幼 노인을 공경하고 어린이를 사랑하고 一意循此 한결같이 이 뜻을 따라 斥..
隆陵(莊獻世子) 융 릉 (隆陵) 隆陵은 훗날 杖朝로 追尊된 莊獻世子와 훗날 敬懿皇后로 追尊된 그의 妃 惠慶宮 洪氏의 合葬陵 이다. 合葬陵이면서 魂遊石은 하나이다. 隆陵은 世子의 墓인 圓의 形式에 屛風石을 設置하고, 上界 空間과 下界 空間으로 나누어 空間을 王陵처럼 照影하였다. 屛風石을 設置하였으나 欄干石이 없으며, 屛風石 덮개의 12방위 연꽃 형의 彫刻은 隆陵만의 독특한 形式이다. 上界에는 陵寢, 魂遊石,望柱石이 配置되어 있으며, 下界에는 文武人石, 石馬가 配置되어 있다. 長明燈의 8면에 彫刻된 梅蘭菊의 무늬는 매우 아름답다. 空間 構成 상의 特異點 중 또 하나로 꼽을 수 있는 것은 丁字閣과 陵寢이 이루는 築이다. 융릉으로가는길 대개의 王陵에서 丁字閣과 陵寢이 一直線상에 築을 이루는 반면 隆陵은 一直線을 이루지 않고 있..
健陵(正祖) 건 릉 (健陵) 健陵은 正祖와 孝懿王后의 合葬陵이다. 합장릉이지만 隆陵과 같이 魂遊石이 하나이다. 屛風石이 없고 欄干石을 두른 차이를 除外하고는, 거의 隆陵의 尙設과 恰似하다. 基壇部가 香爐와 같은 形態로 8면에 둥근 원을 그려 매난국의 무늬를 팔면에 새긴 長明燈도 隆陵과 같다. 또한 等身大에 가까운 文石人과 武石人의 彫刻은 매우 事實的이며, 武石人은 金冠朝服을 입고 있다. 1821년(純祖 21) 正祖의 陵을 現 位置인 顯隆園 서쪽 언덕으로 移葬하고 孝懿王后와 合葬해서 오늘날의 健陵이 되었다. 孝懿王后의 陵號는 貞陵이라고 하였다가 위와 같이 健陵으로 合葬하게 됨에 따라 陵號를 따로 쓰지 않게 되었다. 홍살문 (紅箭門) 능(陵)·원(園)·묘(廟)·궁전·관아 등의 정면 입로(入路)에 세우는 붉은 칠을 한 門..
慶熙宮 경희궁 (慶熙宮) 慶熙宮은 朝鮮後期 이궁(離宮)이었다. 1617년(光海君 9)부터 짓기시작하여 1623년 (光海君 15)에 完成 하였다. 慶熙宮의 처음 名稱은 경덕궁(慶德宮)이었으나 元宗의 諡號인 경덕(敬德)과 같은 발음이라 하여 1700년 (英祖 36) 慶熙宮으로 바뀌었다. 慶熙宮은 都成의 西쪽에 있다하여 서궐(西闕)아라고도 불렀는데 이는 昌德宮과 昌慶宮을 합하여 동궐(東闕)이라고 불렀던 것과 對比되는 別稱이다. 仁祖 以後 鐵宗에 이르기까지 10대에 걸처 임금들이 慶熙宮에 머물렀는데 특히 英祖는 치세의 折半을 이곳에서 보냈다. 慶熙宮에는 正殿인 崇政殿을 비롯하여 便殿인 資政殿 寢殿인 隆福殿,會祥殿 등 100여동의 크고 작은 建物이 있었다. 그러나 日帝가 大韓帝國을 强占하면서 慶熙宮은 受難의 歷史를 맞이..
粧陵(端宗) 장 릉 (莊 陵) 그날도 흐린날 하늘에서는 비 가 내리고 있다. 莊陵은 朝鮮 6대 임금인 端宗의 陵으로 叔父인 首陽大君에게 王의자리를 빼앗기고 淸泠浦에 流配된 端宗이 17세 되던 해에 죽임을 당하여 그 죽엄이 東江에 버려졌으나 호장 嚴興道가 그 屍身을 修習하여 現在의 陵이 있는 이곳에 暗葬 하였다. 歷史上 가장 슬프고도 哀歡이이 많은 端宗大王의 陵은 다른 陵에 비해 많이 다르다. 漢陽百里 안에 모시는것이 冠禮였지만 地方에 모셔진 唯一한 王陵이며 낮은 丘陵에 모셔진 다른 王陵에 비해 눞은곳에 모셔져있으며 大部分의 王陵이 봉본,丁字閣,참도洪殺門이 一直線 上에 造影되지만 端宗凌의 封墳은 申坐音響으로 모셔져고 丁字閣은 北쪽을 向 하고 있어 陵의 옆구리를 향해 절을 할수밖에 없다. 27대 임금중 유일하게 端宗陵에..
昌慶宮 창경궁 (昌慶宮) 朝鮮時代 宮闕로 太宗이 거처하던 壽康宮址에 지어진 建物이다. 成宗 14年(1483)에 貞熹王后, 昭惠王后, 安順王后를 위해 昌慶宮을 지었다. 처음 지을 당시의 建物은 明政殿,·文政殿의 正殿과 壽寧殿,·歡慶殿,·景春殿,·仁陽殿,·通明殿들의 寢殿이 있었으며, 養和堂·,麗暉堂·,思政閣 들이 있었다. 朝鮮時代의 宮闕中에서는 唯一하게 東쪽을 向해 지어졌다. 처음에는 별로 使用되지 않다가 壬辰倭亂 때에 京福宮·昌德宮과 함께 불에 탄 以後, 昌德宮과 같이 다시 지어져 朝鮮王祖 歷史의 中心 舞臺가 되었다. 肅宗의 사랑을 받던 張禧嬪이 仁顯王后를 毒殺하려는 못된 行動을 저지르다가 處刑을 당했는데, 당시 禧嬪은 주로 就善堂에서 生活하였다. 또한 英祖는 아들인 思悼世子를 뒤주에 가두어 죽이는 일을 저질렀는..
英陵(世宗) 세종대왕 (世宗大王) 朝鮮의 제4대 王(1418~50 재위).史蹟 제195호. 京畿道 驪州郡 能書面 王臺里에 있다. 元來 英陵은 昭憲王后가 죽은 1446년(世宗 28) 광주(廣州) 獻陵 西쪽에 造成하여 그 우실(右室)을 王의 수릉(壽陵)으로 삼았다가 1450년 王이 죽자 合葬했다. 이 陵은 〈국조오례의 國祖五禮儀〉 치장조(治葬條)를 따른 朝鮮 傳記 菱堤의 基本을 이루었다. 陵의 석물(石物)은 병석(屛石)에서 영저(靈杵)·영탁(靈鐸)·지초문양(芝草紋樣)을 배제하고 구름紋樣과 12地神像만 彫刻해 조선병석문(朝鮮屛石紋)의 基本을 確定했으며, 혼유석(魂遊石)의 고석(鼓石)을 5개에서 4개로 줄이는 등 制度像 고친 것이 약간 있었다. 世祖 때 이 英陵이 불길하다는 議論이 대두했으나 서거정(徐居正)이 "천장(遷葬)..
昌德宮 창덕궁 (昌德宮) 朝鮮時代 宮闕 가운데 하나로 太宗 5年(1405)에 세워졌다. 당시 宗廟·社稷과 더불어 正宮인 京福宮이 있었으므로, 이 宮은 하나의 別宮으로 만들었다. 임금들이 京福宮에서 주로 政治를 하고 百姓을 돌보았기 때문에, 처음부터 크게 利用되지 않은 듯 하다. 壬辰倭亂 以後 京福宮·昌慶宮과 함께 불에 타 버린 뒤 第一 먼저 다시 지어졌고 그 뒤로 朝鮮王祖의 가장 中心이 되는 正宮 역할을 하게 되었다. 火災를 입는 경우도 많았지만 제때에 다시 지어지면서 대체로 元來의 宮闕 規模를 잃지 않고 維持되었다. 임금과 臣下들이 政事를 돌보던 外殿과 王과 王妃의 生活空間인 內殿, 그리고 休息空間인 後園으로 나누어진다. 內殿의 뒤쪽으로 펼쳐지는 後園은 울창한 숲과 연못, 크고 작은 丁字들이 마련되어 自然景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