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歷 史 旅 行 1/朝鮮王妃陵

隆陵(莊獻世子)

(隆陵)

 

 

隆陵은 훗날 杖朝로 追尊된 莊獻世子와 훗날 敬懿皇后로 追尊된 그의 妃 惠慶宮 洪氏의 合葬陵 이다. 合葬陵이면서 魂遊石은 하나이다. 隆陵은 世子의 墓인 圓의 形式에 屛風石을 設置하고, 上界 空間과 下界 空間으로 나누어 空間을 王陵처럼 照影하였다. 屛風石을 設置하였으나 欄干石이 없으며, 屛風石 덮개의 12방위 연꽃 형의 彫刻은 隆陵만의 독특한 形式이다. 上界에는 陵寢, 魂遊石,望柱石이 配置되어 있으며, 下界에는 文武人石, 石馬가 配置되어 있다. 長明燈의 8면에 彫刻된 梅蘭菊의 무늬는 매우 아름답다. 空間 構成 상의 特異點 중 또 하나로 꼽을 수 있는 것은 丁字閣과 陵寢이 이루는 築이다.

 

 

 

융릉으로가는길

 

대개의 王陵에서 丁字閣과 陵寢이 一直線상에 築을 이루는 반면 隆陵은 一直線을 이루지 않고 있다. 紅箭門의 오른쪽에는 原型의 연못인 곤신지(坤申池)가 있는데, 이들은 모두 風水的 論理에 의해 照映되었다고 한다. 1762년 5월 21일 아버지 英祖의 命으로 뒤주 속에 갇혀 숨진 莊獻世子는 그해 7월 23일 現在의 東大門區 徽慶洞인 揚州 配峰山 아래의 언덕에 安葬되었다. 아들을 죽인 것을 後悔한 英祖는 世子의 죽음을 哀悼한다는 뜻에서 ‘思悼’라는 諡號를 내리고, 廟號를 受恩墓라고 하였다. 1776년 그의 아들 正祖가 卽位하여, 아버지에게 ‘莊獻’이라는 諡號를 올리고, 受恩墓를 園으로 格上시켜, 永祐園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융릉으로가는길

 

1789년(正祖 13)에는 永祐園을 顯隆園으로 고치고 陵을 現在의 位置로 遷葬하였다. 1815년(純祖 15) 12월 15일에는 惠慶宮 洪氏가 春秋 81세로 昇遐하여, 이듬해인 1816년(純祖 16) 3월 3일 顯隆園에 合葬하였다. 1899년(光武 3) 11월 12일 高宗은 莊獻世子를 王으로 追尊하여, 廟號를 章宗으로 올리고, 陵 이름을 隆陵이라 했으며, 12월 19일에는 廟號를 章宗에서 丈祖로 바꾸고 皇帝로 追尊하여 丈祖의皇帝라 했다. 京畿道 楊州郡 南쪽 中浪浦 配奉山에 있었으나, 正祖가 卽位하면서 아버지의 尊號를 莊獻으로 올리고, 1789년 現在의 位置로 墓를 옮긴 後 陵號를 隆陵으로 바꿨다

 

 

홍살문

(紅箭門)

 

 능(陵)·원(園)·묘(廟)·宮殿·官衙 등의 正面 입로(入路)에 세우는 붉은 칠을 한 門.

 

 

배 위

(拜位)

 

紅箭門옆 한坪정도 땅에 돌을깔아 놓은 곳으로 王이나  祭冠이 절을 하는곳이다. 판위 (板位) 어배석 (御拜石)망릉위 (望陵位)라고도 한다.

 

 

재 실

(齋室)

 

재각(齋閣)·재궁(齋宮)이라고도 한다. 一般的으로 先山·宗山·位土의 近處에 세워진다. 再室은 門中 또는 支派의 公有財産이지만 再室의 保存 責任者는 從孫이나 直系長孫이다. 再室에는 묘직(墓直) 또는 산직(山直)이 살고 있으며, 또 直系長孫과 墓直 사이에는 유사(有司)가 있어서 시향제(時享祭) 및 묘사(墓祀)의 準備, 門中 內外의 連絡業務, 墓所·位土·宗山·先山·再室의 管理 등의 實務를 맡는다. 墓直은 經濟的·身分的으로 從孫이나 儒士에 禮俗되어 再室의 雜務를 處理한다. 過去 再室은 時香臍나 廟祠의 準備場所였으며, 祭享과 關聯된 諸般問題를 論議하던 終會場所였고 때에 따라서는 陰伏과 門中會義意가 行해지던 곳이었다. 하지만 急速한 産業化가 進行되면서 同族觀念이 稀薄해지고 墓直이 사라짐으로써 再室은 점차 消滅되어 가고 있다.

 

 

 

장헌세자

(莊獻世子)

 

노론(老論)의 一黨專制에 批判的이었기 때문에 政治的 謀略에 의해 뒤주 속에 갇혀 죽었다. 사도세자(思悼世子)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이름은 선(愃). 자는 윤관(允寬), 호는 의재(毅齋). 어머니는 영빈이씨(暎嬪李氏)이며, 夫人은 領議政 홍봉한(洪鳳漢)의 딸 惠慶宮 洪氏(惠慶宮洪氏)이다. 異服兄인 효장세자(孝章世子)가 일찍 죽고, 英祖의 나이 40세가 넘었으므로 태어난 지 1년 만에 王世子에 冊奉되었으며, 10세 때 婚姻했다. 어려서부터 매우 英特하여 3세 때 〈孝經〉을 읽고, 〈小學〉의 禮를 實踐했다. 또한 일찍이 높은 政治的 眼目을 가지고 있어서 1743년(英祖 19) 관례(冠禮)를 行하고 나서 父王이 당론(黨論)을 없앨 방법을 묻자 "여러 黨人을 한결로 보아 함께 起用하면 된다"고 대답하여 稱讚을 받았으며, 宮官과 더불어 辛壬士禍를 논하여 義理의 根源을 分明히 가려내기도 했다. 1749년 대리청정(代理聽政)을 하게 되었다.

 

 

사도세자

(思悼世子)

 

英祖와 世子의 사이가 나빠지고 對立關係가 表面化되기 始作한 것은 1752년 臣下들이 病席의 英祖에게 藥을 勸할 것을 從容하자 이를 拒絶한 뒤부터였다. 世子는 英祖가 藥을 물리치는 것이 自身의 허물 때문이므로 藥을 勸할 面目조차 없다고 했으나, 이것이 英祖의 마음을 몹시 상하게 했다. 世子는 代理淸淨 하면서 여러 地方의 換穀에 대하여 덜어내고 더 받는 '부다익과'(芬多益寡)의 政事를 베풀고, 零細民을 괴롭히는 대동(大同)·군포(軍布)의 대전(代錢)·방납(防納)을 禁地시켰다. 또한 英祖 卽位의 義理와 明分에 關聯된 辛壬士禍와 같은 重要한 政治的 問題에 대해 父王과는 다른 意見을 내놓아 對立이 深化되었다. 이에 그를 싫어하는 노른들과 이에 同調하는 貞純王后 김씨(貞純王后金氏), 淑儀 文氏(淑儀文氏) 등이 英祖에게 世子를 無告하여 英祖가 守視로 불러 크게 꾸짖으니 마침내 病이 發作했다.惠慶宮洪氏의 한중록 (恨中錄)에 따르면 이때 세자는 "함부로 宮女를 죽이고, 女僧을 入宮시키며, 몰래 王宮을 빠져나가 平壤을 來往하는 등 難行과 狂態를 일삼았다"고 한다.

 

 

사도세자

(思悼世子)

 

1762년 貞純王后의 아버지인 김한구(金漢耉)와 그 一派인 홍계희(洪啓禧)·윤급(尹汲) 등의 事主를 받은 나경언(羅景彦)이 世子의 失德과 非行을 指摘한 10조목의 上訴를 했다. 英祖는 크게 노해 世子를 휘령전(徽寧殿)으로 불러 自決을 命했다. 世子가 끝내 自決을 하지 않자, 그를 서인(庶人)으로 廢하고 뒤주 속에 가두어 8일 만에 죽게 했다. 당시 英祖의 탕평책(蕩平策)에 의하여 表面上으로는 黨爭이 주춤한 듯했지만 事實上 노론·소론 간의 對立은 深刻한 狀態였다. 卽位科程에서 노론의 支持를 받았던 英祖는 卽位 後 繼續 노론에게 制約되고 있었다. 結局 世子의 노론의 專橫에 대한 批判이 이러한 英祖의 政治的 入場과 맞물려 그를 죽음에까지 이르게 한 것이었다. 이 事件은 이후 노론·소론·南人이 얽힌 시파(時派)·벽파(僻派)의 分爭을 派生시킨 계기가 되었다. 죽은 뒤 바로 사도(思悼)라는 諡號가 내려졌으며, 그의 아들인 正祖가 卽位하자 장헌(莊獻)으로 推尊되었다. 1899년(光武 3)에 다시 장조(莊祖)로 推尊되었다. 능은 水原에 있는 융릉(隆陵)이다.

 

 

경의왕후

(敬懿皇后) 혜경궁홍씨 (惠慶宮洪氏)

 

本官은 風散. 혜경궁홍씨(惠慶宮洪氏)로 알려져 있다. 領議政 홍봉한(洪鳳漢)의 딸이며, 正祖의 어머니이다. 1744년(英祖 20) 世子嬪에 冊奉되었으나, 시파(時派)와 벽파(僻派)의 黨爭에 휘말려 1762년 男便 思悼世子가 뒤주에 갇혀 죽는 悲運을 겪었다. 思悼世子가 죽은 뒤 둘째 아들이 王世孫에 冊奉되어 혜빈(惠嬪)의 號를 받았다. 1776년 正祖가 卽位하자 궁호(宮號)가 惠慶으로 올랐다. 環甲을 맞은 해(1795년)에 閑中錄을 썼는데, 이 作品은 男便의 慘死를 中心으로 自身의 한 많은 一生을 回告하며, 自敍傳的인 사소설체(私小說體)로 記錄한 것이다. 文章이 纖細하고 雅淡하여 〈仁顯王后傳〉과 아울러 宮中文學의 雙璧으로 平價되고 있다. 1899년(光武 3) 男便이 장조(莊祖)로 推尊됨에 따라 경의왕후(敬懿皇后) 에 推尊되었다.

 

 

산신석

(山神石)

 

葬事後 3년 同案 后土神 (땅을관장하는神)에게 祭祀를 지내는곳으로 丁字閣뒤 오른쪽에 있다. 普通 豫感과 마주보는곳에 자리하고 있다.

 

 

융릉비각

(隆陵碑閣)

 

현륭비

(顯隆碑)

 

조선국 :  朝鮮國사도장헌세자현륭원 : 思悼粧獻世子顯隆園

 

 

思悼 修德敦經 紅燐敬止 莊獻世子는 崇禎 紀元後 108년 (英祖 11, 1735)乙卯年 正月 21일에 誕生하시었다. 丙辰年(英祖 12, 1736)에 원자 (元子,世子)로 冊奉되고 己巳年(英祖 25, 1749)에 王世子에 冊奉되시어 대리청정(代理聽政)의 命을 받았으며 壬午年(英祖 38, 1762)윤 5월 21일에 훙서(薨逝)하시니 壽限이 28세 이셨다. 諡號를 사도(思悼)라 내리시고 7월 23일 揚州南쪽 중량포(中梁浦)의  配奉山 갑좌(甲坐)의 언덕에 葬事지냈다. 소자 (아들正祖를가리킴)가 卽位하던 丙申年 (1776)에 諡號를 장헌(莊獻)으로 추상(追上)하고 원호(園號)를 榮紆로 올렸다. 癸卯年(正祖 7 1783)에  尊號를 修德敦經이라 추상(追上)하였고 이듬해인 甲辰年 (1784)에는 尊號를 興仁京址라 가상(加上)해 올렸다. 己酉年(正祖 13 1789) 10월 초 7일 水源의 화산(化山) 계좌(契坐)의 언덕으로 千峯하고 원호(園號)를 현륭(顯隆)을 고쳤다. 

 

 

융릉비

(隆陵碑)

 

대한  : 大韓 장조의황제융릉 : 莊祖懿皇帝隆陵현경의황후부좌  : 顯敬懿皇后祔左

 

 

莊祖思悼 修德敦經 好人京址 長輪隆範記銘昌烋 贊原憲姓系尙賢熙 神文煥武張賢 官曉의皇帝 묘도(墓道)의 돌(碑石)은 正祖 先皇帝께서 친히 쓰신 것이다. 乙卯年 (正祖 19 1795)에 尊號를 추상(追上)하여 長輪隆範期名娼烋라 올렸으며 철종(哲宗) 乙卯年 (鐵宗 6 1795)에는 尊號를 推尙하여 찬원헌성계상현희라 더하여 올렸다. 光武 3년 (1899) 己亥年 10月에는 王으로 올려 추존(追尊)하여 詩號를 신문환무장현 광효로 올렸으며 묘호(墓號)를 장종(莊宗)에 奉하였다. 陵號는 융릉 (隆陵)으로 그해 11월에 推尊했는데 諡號는 가로되 의황제(懿皇帝)이고 廟號는 장조(莊祖)이시다. 皇后는  효강자희정선휘목유정 인철계성 현경의皇后 洪氏로 開國 344년 乙卯年(英祖 14 1735) 6월 18일 誕生하시어 甲子年 (영조 20 1744)에 世子嬪에 冊奉되었으며 壬午年 (英祖 38 1762)년 惠賓 의 號를 받앗으며 正祖卽位年 (1776)에 窮戶가 惠景으로 올랐고 純祖 乙亥年(순조 15 1815) 12월 15일 81세를 一己로 昇遐하여 이듬해 (丙子年 3월 3일) 顯隆園 左側에 奉陵되었다. 乙卯年(鐵宗6 1855)에 尊號를 有頂이라 하고 光武 3년 (1899 己亥年) 10월 王侯로 追從하면서 揮毫를 人鐵溪聲이라 올렸으며 諡號를 懸磬이라 하였다가 그해 11월 諡號를 意皇后로 追尊하였다. 이제 또 碑石을 세우니 恭敬하여 앞면에 추가로 휘음(徽音)을 적어 넣는다.  光武 4년 (1900)   월  일

 

 

사도세자묘지명

(思悼世子墓誌銘)

 

白磁 靑華 英祖 御製  思悼世子 墓誌銘 

 

이 墓地는 英祖 (38년)가 죽은 아들을 위해 直接 지은것으로 늙은 아비로 하여금 萬苦에 없이 子息을 죽이는 일을 하게되었다 는 英祖의 깊은 嘆息과 辨明이 적혀 있다.

 

 

사도세자휘지

(思悼世子徽旨)

 

朝鮮時代 王에게 대리청정 (代理聽政)을 委任받은 王世子가 命令을 내릴때 使用한 證票이다. 1749년 (英祖25)英祖가 사도세자 (思悼世子)에게 政治를 가르치기 위해 代理聽政)을 시키자 世子는 이 徽旨로 署務를 處決했다. 徽旨에는 英祖의 署名이 陰刻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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