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歷 史 旅 行 1/朝鮮王妃陵

粧陵(端宗)

(莊 陵)

 

 

그날도 흐린날 하늘에서는 비 가 내리고 있다. 莊陵은 朝鮮 6대 임금인 端宗의 陵으로 叔父인 首陽大君에게 王의자리를 빼앗기고 淸泠浦에 流配된 端宗이 17세 되던 해에 죽임을 당하여 그 죽엄이 東江에 버려졌으나 호장 嚴興道가 그 屍身을 修習하여 現在의 陵이 있는 이곳에 暗葬 하였다. 歷史上 가장 슬프고도 哀歡이이 많은 端宗大王의 陵은 다른 陵에 비해 많이 다르다. 漢陽百里 안에 모시는것이 冠禮였지만 地方에 모셔진 唯一한  王陵이며 낮은 丘陵에 모셔진 다른 王陵에 비해 눞은곳에 모셔져있으며 大部分의 王陵이 봉본,丁字閣,참도洪殺門이 一直線 上에 造影되지만 端宗凌의 封墳은 申坐音響으로 모셔져고 丁字閣은 北쪽을 向 하고 있어 陵의 옆구리를 향해 절을 할수밖에 없다. 27대 임금중 유일하게 端宗陵에만 있는 藏版屋은 正朝 15년(1791)에 建立된것으로 端宗을 위해서 목숨을 바친 忠臣위 32인 조사위 186인 還官군노위 44인 여인위 6인을 합하여 268인의 僞幣를 모셔놓은 곳이며 靈泉은 正祖 15년 (1791)에 建立된것으로 朴彭年의 後孫인 寧越府使 박기정이 修築한 우물로서 王陵에 祭香을 지내던 寒食무렵에는 물이 넘치도록 많이 솟아 올랐다는 神靈스러운 샘물이다. 嚴興道 精勵閣은 1726년(英祖2년)에 御命으로 세운 碑閣 으로 嚴興道의 忠節을 기리기 위하여 1833년(純祖 33년)에 呵筆하여 같은해에 또다시 增築하였는데 1876년 (高宗13년)에 高宗이 證示하기를 忠義라 하여 1879년(高宗 16년)에  碑石을 다시 고쳤다. 그 이외도 王陵에 祭香을 올릴때 財物을 올리는  配位廳 이라 불리는  丁字閣이 있으며 中宗 36년 寧越郡守이던  박종원이 老産墓를 찾아 재를 지낸일에 대한 事緣을 記錄한 紀跡碑인 駱村碑閣이 있다.

 

 

 

단 종

(端宗)

 

그날도 흐린날 하늘에서는 비 가 내리고 있다. 莊陵은 朝鮮 6대 임금인 端宗의 陵으로 叔父인 首陽大君에게 王의자리를 빼앗기고 淸泠浦에 流配된 端宗이 17세 되던 해에 죽임을 당하여 그 죽엄이 東江에 버려졌으나 호장 嚴興道가 그 屍身을 修習하여 現在의 陵이 있는 이곳에 暗葬 하였다. 歷史上 가장 슬프고도 哀歡이이 많은 端宗大王의 陵은 다른 陵에 비해 많이 다르다. 漢陽百里 안에 모시는것이 冠禮였지만 地方에 모셔진 唯一한 王陵이며 낮은 丘陵에 모셔진 다른 王陵에 비해 눞은곳에 모셔져있으며 大部分의 王陵이 봉본,丁字閣,참도洪殺門이 一直線 上에 造影되지만 端宗凌의 封墳은 申坐音響으로 모셔져고 丁字閣은 北쪽을 向 하고 있어 陵의 옆구리를 향해 절을 할수밖에 없다. 27대 임금중 유일하게 端宗陵에만 있는 藏版屋은 正朝 15년(1791)에 建立된것으로 端宗을 위해서 목숨을 바친 忠臣위 32인 조사위 186인 還官군노위 44인 여인위 6인을 합하여 268인의 僞幣를 모셔놓은 곳이며 靈泉은 正祖 15년 (1791)에 建立된것으로 朴彭年의 後孫인 寧越府使 박기정이 修築한 우물로서 王陵에 祭香을 지내던 寒食무렵에는 물이 넘치도록 많이 솟아 올랐다는 神靈스러운 샘물이다. 嚴興道 精勵閣은 1726년(英祖2년)에 御命으로 세운 碑閣 으로 嚴興道의 忠節을 기리기 위하여 1833년(純祖 33년)에 呵筆하여 같은해에 또다시 增築하였는데 1876년 (高宗13년)에 高宗이 證示하기를 忠義라 하여 1879년(高宗 16년)에 碑石을 다시 고쳤다. 그 이외도 王陵에 祭香을 올릴때 財物을 올리는 配位廳 이라 불리는 丁字閣이 있으며 中宗 36년 寧越郡守이던 박종원이 老産墓를 찾아 재를 지낸일에 대한 事緣을 記錄한 紀跡碑인 駱村碑閣이 있다.

 

 

정순왕후

 (定順王后)

 

아버지는 제5대 王 文宗이고, 어머니는 현덕왕후(顯德王后) 권씨(權氏)이다. 비는 정순왕후(定順王后) 송씨(宋氏)이다. 1448년(世宗 30) 8세 때 王世孫에 冊封되고, 1450년 文宗이 卽位하자 王世子에 冊封되었다. 1452년 5월 文宗이 在位 2년 만에 죽자, 12세에 王位에 올랐다. 그전에  文宗은 自身이 病弱하여 황보인(皇甫仁)·김종서(金宗瑞) 등에게 나이 어린 世子의 輔弼을 附託했고, 集賢殿 學士인 成三問·朴彭年·申叔舟 등에게도 左右에서 힘을 모아 도와주라는 遺言을 했다. 그러나 1453년 叔父 首陽大君이 권람(權擥)·한명회(韓明澮) 등과 함께 皇甫仁·金宗瑞 등을 제거하고 군국(軍國)의 모든 權利를 帳幄하자 端宗은 단지 이름뿐인 王이 되었다. 1455년 端宗은 韓明澮·권람 등의 强要에 더이상 견디지 못하여 首陽大君에게 王位를 물려주고 상왕(上王)이 되었다. 1456년 成三問·朴彭年·河緯地·李塏·兪應孚·柳誠源 등이 端宗 復位를 圖謀하다 모두 處刑된 뒤, 1457년 上王에서 노산군(魯山君)으로 降封되어 江原道 寧越로 流配되었다. 그해 9월 慶尙道 순흥에 流配되었던 叔父 금성대군(錦城大君)이 다시 端宗의 復位를 計劃하다가 發覺되자, 魯山君에서 서인(庶人)으로 降封되었으며 10월에는 마침내 죽음을 당했다.

 

 

낙촌비각

(駱村碑閣)

 

이 碑閣은 박충원의 忠臣됨을 後世에 널리 알리기 위해 1973년 에 세운 것이다. 충신(忠臣) 박충원은 中宗 26년 (1531)문과 (文科)에 及第 하였으며 死後에 문경공(文景公)이란 詩號를 받았다. 中宗 11년 (1516)蘆山墓를 찾으라는 御名에 의하여 찾아 致祭하였으나 그 後 放置되었던 墓를 中宗 36년 (1541) 寧越郡守로 赴任한 박충원 의 現夢에 의해 봉축(封築)하고 전물(奠物)을 갖추고 祭文을 지어 致祭하였다.

 

 

장판옥

(藏版屋)

 

이 建物은 正祖 15년 (1791)에 建立한 것으로 단종(端宗)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 충신위(忠臣位) 32인 조사위(朝士位) 186인 환자군노(宦者軍奴) 44인 여인위 (女人位) 6인을 합하여 268 인의 위패(位牌)를 모셔놓은 곳이다.

 

 

수복실

(守僕室)

 

이 建物은 능(陵)과 경내(境內)를 管理하는 陵地技가 寄居하던 곳으로 英祖 9년 (1733)에 정자각(丁字閣)과 함께 세운것이다.

 

 

단종비각

(端宗碑閣)

 

英祖 9년 (1733)에 御命으로 단종대왕릉비(端宗大王陵碑)와 비각(碑閣)이 丁字閣,수복실과 함께 建立되었다. 碑石 앞면에는 朝鮮國端宗大王莊陵 (朝鮮國端宗大王莊陵)이라는 글이 陰刻되어 있으며 뒷면에는 단종대왕(端宗大王)의 生涯가 記錄되어 있다.

 

 

조선국        :  朝鮮國

단종대왕장릉        : 端宗大王莊陵

 

 

정자각

(丁字閣)

 

寒食날인 端宗祭香때 財物을 올리는 곳으로 丁字閣 또는 배위청 (拜位廳)이라 한다.

 

 

영 천

(靈泉)

 

 이 靈泉은 장릉(莊陵)서쪽에 있는 우물로써 正祖 15년(1791)에 御命으로 寧越副使 박기정(朴基正)이 修築하여 寒食때 제정(祭井)으로 使用 하였다. 普通때에는 조금씩 샘물이 솟았으나 매년 寒食때 祭享을 지낼때에는 물이 많이 용출(湧出)하였다. 우물깊이는 1.5m 程度이며 下部는 花崗石 돌담으로 둥굴게 쌓여 있고 上部는 正方形 이다.

 

 

정려각

(旌閭閣)

 

이 비각은 嚴興道의 충절(忠節)을 後世에 알리기 위하여 英祖 御命으로 세운 碑閣 으로 嚴興道의 忠節을 기리기 위하여 1833년(純祖 33년)에 가필하여 같은해에 또다시 增築하였는데 1876년 (高宗13년)에 高宗이 證示하기를 忠義라 하여 1879년(高宗 16년)에  碑石을 다시 고쳤다. 그 이외도 王陵에 祭香을 올릴때 財物을 올리는  配位廳 이라 불리는  丁字閣이 있으며 中宗 36년 寧越郡守이던  박종원이 노산묘를 찾아 재를 지낸일에 대한 事緣을 記錄한 紀跡碑인 駱村碑閣이 있다. 忠臣 嚴興道가 영월호장(寧越戶長)으로 있을때 단종(端宗)이 노산군으로(魯山君) 강봉 流配되어 관풍헌 (觀風軒)에서 1457년 10월 24일 漕艇에서 내려진 死藥을 받고 僧下하여 그 玉體가 江물에 버려지자 端宗의 屍身을 거두는자는 삼족(三族)을 滅한다는 御命에도 不久하고 家族과 함께 端宗의 屍身을 暗葬하여 忠臣으로 推仰 받고 있다. 純祖 33년 (1833)에 工曹判書(工曺判書)로 追從되었고 高宗 13년 (1876)에 충의공(忠懿公)이란 諡號를 받았다.

 

 

엄흥도

(嚴興道)

 

朝鮮의 忠臣이다. 江原道 寧越에서 虎將으로 있을 때 端宗이 世祖에 의해 寧越에서 억울한 죽음을 당하자, 사람들은 화가 미칠 것을 두려워하여 端宗의 시신을 돌보지 않았다. 嚴興道는 棺을 비롯한 葬禮 器具 一體를 혼자서 磨鍊하여 正中하게 葬事를 치른 後, 벼슬을 내놓고 아들을 데리고 숨어 살았다. 顯宗 때 宋時烈의 建議로 그의 子孫이 燈用되었고, 英祖 때 그의 忠誠心을 記念하는 정문(旌門)이 세워졌고 工曹參判에 追增되었다.

 

 

엄흥도지문

(嚴興道之門)

 

홍문(紅門)·홍살문이라고도 한다. 그 行實을 널리 알리고 表彰하는 것을 정표(旌表), 그 일을 정려(旌閭)라고 했다. 朝鮮은 性理學을 統治理念으로 하면서 儒敎價値觀을 擴散시켰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儒敎的 倫理規範에 따른 善行을 壯麗하는 일이었다. 그 價値基準에 合當한 人物, 곧 효자·순손(順孫)·의부(義夫)·절부(節婦) 등을 가려 뽑아 禮曹에 報告하도록 하고 정문·복호(復戶)·상직(賞職)·상물(賞物) 등으로 정표했다. 때로는 면천(免賤)을 통한 身分上昇의 機會도 주어졌다. 英祖 때 그의 忠誠心을 記念하는 정문(旌門)이 세워졌고 工曹參判에 追增되었다.

 

 

재 실

(齋室)

 

建立年代는 자세히 알수없으나 1932년 에 重建하였다. 이곳에는 陵을 지키는 參奉 1인과 守護軍 9인이 寄居 하였으며 每年 端宗 祭享 지낼때 이곳에서 財物을 準備하고 祭器를 비롯한 各種 使用 器具를 保管 해오던 곳이다. 1997 ~ 1998년 在室 지붕 및 排水路를 保守 整備 하였다.

 

 

단종역사관

(端宗歷史館)

 

1층은 端宗의時代 端宗의僧下 端宗의復權 이렇게 세 部分으로 區分된다. 이 코너들을 통해 端宗의 世子卽位에서 端宗大王으로 復權되기까지 端宗의 生涯를 자세히 살펴볼수 있으며 端宗大王陵이나 端宗際 民間 信仰에 대한 細部的인 智識도 얻을수 있게 되었다. 地下 展示室은 端宗에 대한 資料와 한께 端宗의 定妃였던 定順王后에 대한 史料들이 展示되어있다  더불어 朝鮮時代의 宮中 衣服에 대해서도 자세히 살펴볼수 있게 企劃되어 있다.

 

 

사육신

(死六臣)

 

死六臣은 成三問, 河緯地, 兪應孚, 朴彭年, 耳介, 柳誠源 여섯 명이고, 기타 윤영손(尹鈴孫), 金文起와 成勝, 金叱, 권자신(權自愼) 등이 加擔했다. 그리고 申叔舟는 參與를 拒否하였다. 그러나 金叱이 끝에 背信하면서 死六臣과 兪應孚, 成勝 등은 모두 慘殺當했다. 한편 死六臣 집안의 女性들은 亂臣에 관계된 婦女子라 하여 奴婢가 되거나 官奴, 寄生 등으로 끌려갔다가가 뒤에 一部 釋放되었다. 死六臣의 屍身은  成三問의 사위인 박임경이 修習하여 漢江邊  鷺梁津에 埋葬하였다.

 

성삼문

(成三問)

 

成三問(1418년~1456년)은 朝鮮 前期의 文臣·學者로서, 死六臣의 한 사람이다. 자는 근보(謹甫)·눌옹(訥翁), 호는 매죽헌(梅竹軒), 시호는 충문(忠文), 本官은 昌寧이다. 성승(成勝)의 아들이며, 성달생의 孫子이다. 

 

하위지

(河緯地)

 

河緯地(1387년~1456년)는 朝鮮 前期의 文臣으로 死六臣의 한 사람이다. 本官은 晋州이고 자는 천장(天章)·중장(仲章)이며, 호는 단계(丹溪)·연풍(延風)이고 시호는 충렬(忠烈)이다.

 

유응부

(兪應孚)

 

兪應孚(? - 1456년)는 朝鮮의 武臣이며 死六臣의 한 사람이다. 자는 신지, 호는 벽량, 시호 충목(忠穆), 本官은 機械이다.

 

박팽년

(朴彭年)

 

朴彭年(1417년 ~ 1456년)은 朝鮮의 文臣 겸 學者로 死六臣의 한 사람이다. 자는 인수, 호는 취금헌(醉琴軒), 本官은 順天이다. 孫子 박일산이 生存하여 死六臣 중 河緯地가와 함께 後孫이 傳한다.

 

이개

(李塏)

 

李塏(1417년 ~ 1456년)는 朝鮮屍臺의 學者이자 管理이며, 또한 死六臣 중의 한 사람이기도 하다. 本官은 한산(韓山)이며, 호는 백옥헌(白玉軒)이다. 李穡의 曾孫子이다. 1436년 文科에 及第한 후, 1441년 世宗에 의해 集賢殿 學者가 되었다. 1450년에  文宗이 王位에 오른 뒤, 後에 端宗이 된 王子의 個人 敎師 役割을 하였다.1455년에 端宗이 世祖에 의해 王位를 빼앗기자, 李塏는 高位 管理들과 함께 端宗의 復位를 꾀하다가 붙잡혀 處刑당하였다.

 

유성원

(柳誠源)

 

柳誠源(? ~ 1456년)은 朝鮮의 文臣이자 死六臣의 한 사람이다. 자는 태초(太初), 시호는 절의(節義), 뒤에 충경(忠景)을 더하였다.

 

 

단종어보,정순왕후어보

(端宗御寶,定順王后御寶)

 

朝鮮時代 王室의 印章을 意味하며 제6대 端宗大王의 印章과 夫人인 定順王后의 印章

 

 

청령포

(淸泠浦)

 

江原道 寧越郡에 있는 단종(端宗)의 流配地. 寧越 八景의 하나로 꼽히는데, 솔숲이 울창하고 맑은 서강(西江)이 굽이친다.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된 端宗은 1457년(世祖 3) 10월 이곳에서 고혼(孤魂)이 되었다. 淸泠浦는 東,西,南,北 三面이 물로 둘러쌓이고 西쪽으로는 육육봉이라 불리는 險峻한 岩壁이 솟아있어 나룻배를 利用하지 않으면 밖으로 出入할수 없는  마치섬과도 같은 곳이다. 端宗은 이 적막한곳에서 外部와 斷切된 流配生活을 했으며 당시에 이곳에 居處할수 있는 집이 있어 호장 嚴興道는 남몰래 밤이면  이곳을 찾아 問安을 드렸다고 한다.  그 해 뜻박에 큰 洪水로 江물이 氾濫하여 淸泠浦가 물에 잠기게 되니 端宗은 寧越 東軒의 客舍로 處所를 옮겼다. 지금 淸泠浦에는 英祖 2년 에세운 금표비(禁標碑)와 단묘재본부시유지 (端廟在本府時遺地)가 서있어 옛일을 傳하고있다.

 

 

永渡橋濟天雨散,,,영도교제천우산
破裂胸心何不止,,,파열흉심하부지
淸泠浦松血淚墮,,,청령포송혈루타
東望峰不忘宋妃,,,동망봉불망송비

 

영원히 건너가버린 다리
청계천 영도교 건널제
하늘에서 빗방울 뿌렸지
우리 님의 눈물인양~

터지고 찢어지는 가슴속의 심장
어찌하여
그칠줄을 몰랐던가~
차리라 터지고 찢어져
박동을 멈추지않고

청령포 소나무들도
피눈물을 흘릴 때

동망봉엔
잊음을 잃어버린
정순왕비 송후의 피눈물

 

  백성들이 따르고 애도왕후뒤안길

 

 

世祖가 末年에 定順王后에게 窮乏을 面할수 있는 집과 食糧을 주었지만 定順王后는 그것을 고이 받아줄 女人이 아니었다. 生活苦가 王后로서의 自尊感을 쓸쓸히 죽은 男便의 억울함과 열여덟에 홀로된 自身의 限을 지울수는 없는 일 侍女들이 동냥한 飮食으로 살아가는 비참한 삶이있었지만 定順王后는 世祖의 도움도 뿌리치고 자줏물을 들이는 染色業으로 生計를 이어 나간다. 後世 사람들은 그녀가 染色業을 했던 골짜기를 자줄골이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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