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歷 史 旅 行 1/朝鮮王妃陵

東九陵(太祖.文宗.宣祖.顯宗.憲宗.英祖)

(東九陵)

 

에게 가다

 500년 朝鮮王朝旅程을 찿아 떠나는 旅行

 

 

朝鮮王族의 무덤은 모두 119기에 이르며 이 가운데 陵이 42기 이고 園이 13기이며 墓가 64기 이다. 朝鮮王族의 무덤은 무덤주인의 身分에 따라 그 名稱을 달리하는데 능 (陵)은 왕 (王)과 왕비 (王妃)의 무덤을 말하며 원 (園)은 王世子와 王世子妃 또는 王의 사친 (私親)의 무덤을 말하고 그 의 王族의 무덤은 一般人의 무덤처럼 묘(墓)라고 한다. 42기 陵 가운데 北韓 開成에 있는 齊陵(太祖元妃 信義王后의 陵) 厚陵 (正宗과定案王后의陵)을 除外한 40기의 陵이 南韓에 있다. 500년이 넘는 한 王祖의 무덤이 이처럼 穩全하게 保存되어있는 것은 世界에서도 그 由來를 찿아보기 힘들어 文化史的 價値가 매우 높다. 東九陵은 太祖의 健元陵 부터 景陵 (제24대 顯宗肥效獻王后 金氏 繼妃 孝定王后 洪氏) 까지 9릉 17위의 王과 王后陵이 安葬되어있다. 東九陵이라 命名된 것은 鐵宗 6년 (1855) 8월 26일에 壽陵 (追尊文祖,純祖의長男)을 9번째로 모신 以後 부터이다. 

 

 

 

홍살문

 

홍살문은 王陵의 들머리임을 알려주는 建築的 裝置로 이곳을 지날때는 몸과 마음가짐을 嚴肅히 하고 여기에 모셔진 분들에게 敬虔한 禮를 갖추라는 뜻으로 세워진 것이다. 혹은 홍전문 (紅箭門)이라고도 한다.

 

 

재 실

(齋室)

 

齋室은 平常時 영(令:종5품) 또는 참봉(參奉:종9품)등이 陵役의 管理를 위해 勤務하는곳이며. 祭禮時는 祭冠들이 머무르면서 祭禮를 準備하는 空間이다. 主要 施設은 執務室인 齋室 외에 祭禮를 準備하는 空間이다. 主要施設은 執務室인 再室 외에 향(香)을 保管하는 安享廳,제기(祭器)를 保管하는 祭器庫, 行廊채 등이 이었으며, 丹靑은 하지 않았다.

 

 

건원릉

(健元陵)

 

健元陵은 朝鮮의 태조 (太祖) 이성계 (李成桂 1335 ~ 1408)의 陵이다. 太祖는 1392년 7월 17일 開京의 수창궁 (壽昌宮)에서 王位에 올라 새 王朝를 열었다. 太祖는 7년간 王位에 있면서 나라 이름을 조선 (朝鮮)으로 定하고 都邑을 한양 (漢陽. 지금의 서울)으로 옮기는 등 朝鮮 王朝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이 陵의 形式은 團陵으로 屛風石을 두르고 있다. 이 陵에는 太祖의 行跡을 記錄한 神道碑가 있으며 八角長明燈,소전대 등은 高麗의 陵과 다른것들이다. 封墳위엔 잔듸가 아닌 얼새풀이 덮혔는데 이는 故鄕을 그리워하는  太祖를 위해 故鄕 咸興에서 가져온 흙과 억새로 封墳을 덮은 때문으로 傳해진다.

 

 

정자각

(丁字閣)

 

祭香을 올리는 곳으로 亭子模樣으로 지은집 丁字閣에 오를때에는 東쪽으로 오르고 내려올때는 西쪽으로 내려오는대 이를 일러 東入西出 (東入西出)이라고 한다.

 

 

 

대한  : 大韓

태조고황제건원릉  : 太祖高皇帝健元陵

 

 

신도비

(神道碑)

 

書前判漢城府事鄭矩篆額賜石璘鞍馬矩馬一匹

永樂七年四月 日 立石

 

 

이성계

(李成桂)

 

朝鮮의 제1대 王(1392~1398 在位 卓越한 武將으로 高麗末 紅巾賊과 倭寇의 侵入을 擊退하는 데 크게 活躍했으며, 改革派 士類와 함께 高麗 왕조를 무너뜨리고 朝鮮을 建國했다. 本官은 전주(全州). 이름은 이성계(李成桂). 자는 중결(仲潔), 호는 송헌(松軒). 왕이 된 후 이름을 단(旦), 자를 군진(君晉)으로 고쳤다. 화령(和寧:永興) 출신이다. 아버지는 자춘(子春)이며 어머니는 최씨(崔氏)이다. 비는 신의왕후 한씨(神懿王后韓氏)와 신덕왕후 강씨(神德王后康氏)이다.

 

 

이성계의호적

(李太祖戶籍原本)

국보 제131호

 

이성계 (李成桂) 1335 ~ 1408 가 태어난 咸鏡道 화령 (和寧) (지금의 咸鏡南道 永興)에서 作成된 戶籍이다. 첫머리에 李成桂의 官職과 세계 (世系)등이 記錄되었고 戶籍의 作成 경위와 방침 30여 호의 戶籍이 차례로 실려 있다. 永興府 준원전 (濬源殿)에 保管되다가 日帝强占期에 서울로 옮겨왔다. 

 

 

이성계사리함

(李成桂舍利函)

 

朝鮮建國 直前인 1390 ~ 1391년에 李成桂가 夫人 姜氏를 비롯하여 自身의 支持層 千여명과 함께 協贊하여 奉獻한 舍利具이다. 金剛山에서 發見되었다.  

 

 

진충귀문서

(陳忠貴文書)

 

太祖 4년 (1395) 功臣都監에서 진충귀를 開國原從功臣에 奉하면서 發給한 記錄文書인 녹권 (錄券)이다. 이때 任命된 原從功臣 106명에게는 各各 논밭 30걸 노비 3구 와 함께 父母와 妻에게 職位를 내리고 子孫들에게는 科擧를 보지않고 벼슬에 오르는 特典을 주고 碑를 세워 功勞를 記錄할것을 明示 하였다.  寶物 제1160호

 

 

수 릉

(綏陵)

 

綏陵은 朝鮮의 24대왕  憲宗의 아버지인 推尊王 문조 (文祖 1809 ~ 1830)와 신정왕후(神貞皇后) 조씨 (趙氏 1808 ~ 1890)의 합장릉 (合葬陵)이다. 文祖는 23대왕 純祖의 맏아들로 曉明世子 時節 代理淸淨을 하면서 人才를 널리 燈用하고 刑罰을 愼重히 하는등 百姓을 위한 政策을 施行하였다.처음에 의릉 (懿陵) 왼쪽 언덕에 葬事했다가 風水 論議가 있어 1855년 철宗때 이곳으로 옮겼다. 憲宗이 王位에 오르자 翼宗으로 推尊되었다가 大韓帝國 光武 3년 (1899)에 다시 文祖皇帝가 되었다. 神貞王后는 憲宗의 大妃가 되었고 鐵宗 때 大王大妃가 되어 垂簾聽政을 하면서 安東金氏의 勢力을 弱化시키고 高宗을 王位의 자리에 앉혔다.

 

 

비 각

(碑閣)

 

碑石이나 神道碑를 세워둔 곳으로 신도비 (神道碑)는 主人의 業績을  記錄한 碑石을 말한다.

 

 

 

대한 : 大韓

문조익황제수릉 : 文祖翼皇帝綏陵

신정익왕후부우 : 神貞翼王后祔右

 

 

 

조선국 : 朝鮮國

익종대왕수릉 : 翼宗大王綏陵

신정왕후부우 : 神貞王后祔右

 

 

수 릉

(綏陵)

 

推遵 門祖와 그의妃 神貞王后 趙氏의 陵이다. 門祖는 純祖와 純元王后 金氏사이에서 純祖 9년 (1809) 8월 9일 昌德宮 大造殿에서 誕生하여 王世子로 冊奉되으나 純祖 30년 (1830) 5월 6일 昌德宮 회정당에서 春秋 22세로 1남 (제24대헌종)을 남기고 昇遐하여 같은해 8월 4일에 義陵 (景宗) 왼편에 모시고  연경묘 (延慶墓)라하였다. 憲宗 원년 91835) 5월 19일 王으로 推尊하고 廟號를 翼宗, 陵號 를 綏陵으로 올렸다. 憲宗 12년 (1846) 윤  5월 20일 揚州 龍馬峰 아래 옮겼다가 鐵宗 6년 (1855)에 다시 건원릉 (健元陵)왼쪽에 옮겨 모셨다. 神貞王后 조씨는 풍은府院君 조만영의 달로 純祖 8년 (1808)誕生하여 同王 19년 世子嬪에 冊奉되었으며  高宗 27년 4월 17일 景福宮 興復澱에서 春秋 83세로 昇遐하여 같은해  같은해 8월 30일 모셨다. 지근가지의 文人石은 공복 (公服)에 복두 (僕頭)를 着用하였으나 이 陵은 金冠朝服으로 되었다. 文官이 使用하는 관은 오량관 (五梁冠)이나 綏陵에는 육량으로 되었다.

 

 

현 릉

(顯陵)

 

顯陵은 朝鮮 5대 임금 문종 (文宗)과 현덕왕후 권씨 (顯德王后 權氏)의 陵으로 동원이강릉 (同原異岡陵)이다. 文宗은 世宗의 맏아들로 世宗의 訓民正音 創製를 도왔으며 在位 3년동안 고려사 (高麗史)와 高麗史節要를 編纂하고 軍事制度를 整備 했다. 顯德王后는 권전 (權專)의 딸로 王妃가 되기전에 단종 (端宗)을 낳은후 곧 世上을 떠나 京畿道 安山에 安葬되었다. 以後 文宗 卽位年에 소릉 (昭陵)으로 格上 하였으나 端宗의 復位事件으로 世祖가 다른곳으로 옮겼다가 中宗 8년 (1513)에 이곳으로 옮겨 造成했다. 西쪽이 王陵이고, 東쪽이 王妃陵이다.

 

 

 

조선국 : 朝鮮國

문종대왕현릉 : 文宗大王顯陵

현덕왕후부좌강 : 顯德王后祔左岡

 

 

문 종

(文宗)

 

이름은 휘(徽), 자는 촉유(燭幽). 제8대 顯宗의 셋째 아들이며, 어머니는 원혜태후(元惠太后) 金氏이다. 1022년(顯宗 13) 낙랑군(樂浪君)에 冊奉되고, 1037년(正宗 3) 내사령(內史令)이 되었다. 그의 兄인 正宗에게 아들이 있었으나, 正宗이 죽은 뒤 王位를 繼承했다. 卽位하자 市中 최충(崔沖)에게 명해 종래의 율령(律令)·서산(書算)에 대한 詳細한 고정(考定)을 가해 형법(刑法)의 기틀을 마련하게 했다.

 

 

현덕왕후

(顯德王后)

 

文宗의 王妃이며, 端宗의 어머니이다. 성(姓)은 권(權), 휘호는 인효순혜현덕왕후(仁孝順惠顯德王后)이다. 華山府院君 권전 과 海州府夫人 崔氏의 딸이다. 元來 王世子 향(문종)의 後宮인 承徽로 宮에 들어갔으나, 世子의 두 夫人인 徽嬪 金氏와  純嬪 奉氏가 갖가지 飛行으로 王室을 紊亂케 한 뒤 廢位되자, 이미 딸(敬愛公主)을 낳은 權氏가 世子嬪으로 冊奉되었다. 1441년 에 元孫(端宗)을 낳았으나, 元孫을 낳자마자 3일 뒤에 産後病으로 死亡하니 나이가 겨우 24세였다. 男便  文宗이 王位에 오른 뒤, 顯德王后로 推尊되었다.훗날,  世祖가  端宗을 죽인 뒤, 顯德王后의 魂靈이 世祖의 長男인  義警世子의 꿈에 나타나 그를 죽게 하였다고도 한다. 이에 忿怒한 世祖는 顯德王后의 安山에 있던 顯德王后의 少陵을 파헤치고 棺은 江에다 버렸으며 顯德王后의 神主를 宗廟에서 내쳤다. 肅宗 年刊에 그녀의 新主가 宗廟에 다시 올려지게 되었다.

 

 

목 릉

(穆陵)

 

제 14대 宣祖와 그의 整備 宜人王后朴氏 및 繼妃 人目王后 金氏의 陵이다. 宣祖는 德興大院君 (中宗의아들)과 河東府大夫人 鄭氏와의 3남으로 明宗 7년 (1552) 11월 11일 誕生하여 1567년 卽位하였다. 1608년 2월 초하루에 慶運宮에서 14남 11녀를 남기고 春秋 57세로 僧下 하였다.

 

 

 

조선국  : 朝鮮國

선조대왕목릉  : 宣祖大王穆陵

의인왕후부중강  : 懿仁王后祔中岡

인목왕후부좌강  : 仁穆王后祔左岡

 

 

선 조

(宣祖)

 

사림정치(士林政治)가 確立되고 以後 붕당정치(朋黨政治)가 始作되었으며, 壬辰倭亂·丁酉再亂이 勃發했다. 初名은 균(鈞), 改名은 공(昖). 中宗의 일곱째 아들인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의 셋째아들이며, 어머니는 정세호(鄭世虎)의 딸 하동부대부인(河東府大夫人) 鄭氏이다. 비는 박응순(朴應順)의 딸 의인왕후(懿仁王后)이며, 계비(繼妃)는 김제남(金悌男)의 딸  인목왕후(仁穆王后)이다.

 

 

의인왕후

(懿仁王后)

 

宜人王后 朴氏는 伴性府院君 박응순의 딸로서 明宗 10년 4월 15일에 誕生하여 宣祖 2년 (1569)王妃에 冊奉되었으며 宣祖 33년 (1600) 6월 27일에 所生없이 春秋 46세로 僧下하였다. 같은해 12월 22일에 유릉 (裕陵)이라 하였다가 1630년 王陵을 이곳으로 옮기면서 穆陵 으로 고쳤다.

 

 

인목왕후

(仁穆王后)

 

仁穆王后 金氏는 연흥부원군 김제남의 딸로 宣祖 17년 11월 14일에 誕生하여 宣祖 35년에 王妃로 冊奉되었다. 仁祖 10년 6월 28일에 仁慶宮 흠명전에서 春秋 49세로 僧下하여 같은해 10월 6일에 穆陵 왼쪽에 모셔졌다.  仁穆王后의 長明燈과 望柱石의  苔石에는 새로운 花紋 (연화.모란)을 새겼다. 現在 仁穆王后 릉 앞에는 가정자각터가 남아있다.

 

 

휘 릉

(徽陵)

 

제 16대 仁祖의 繼妃 莊烈王后 曺氏의 陵이다. 莊烈王后는 翰苑府院君 조창원의 딸로 仁祖 2년 (1624) 11월 7일 誕生하여 仁祖 16년 (1638) 15세에 王妃로 冊奉되어 肅宗 14년 (1688) 8월 26일 昌慶宮 內班院에서 春秋 65세로 所生없이 僧下하였다. 같은해 12월 16일에 이곳에 모셔졌다.

 

 

 

조선국 : 朝鮮國

장렬왕후휘릉 : 莊烈王后徽陵

 

 

장렬왕후

(莊烈王后)

 

恣意恭愼輝憲綱認定淑溫鞋莊烈王后 조씨는 仁祖大王의 繼妃로 天界 4년 (1624)11월 7일 誕生하여 崇禎 戊寅年 (1638) 王妃로 冊奉되었으며 (1688)8월 26일 僧下하였다 그해 12월 16일 揚州 健元陵 西쪽 등유자의 언덕에 葬禮하였다. 나이 65세 이다.

 

 

원 릉

(元陵)

 

제 21대 英祖와 그의 繼妃 貞純王后 金氏의 陵이다. 英祖는 肅宗 20년 (1694) 9월 13일 肅宗의 4째아들로 昌德宮 寶鏡堂에서 誕生하여 景宗 元年 (1721)에 王世子로 冊奉되었다.가 1724년 8월 30일 卽位하였다. 1776년 3월 5일 慶熙宮 執耕堂에서 2남 12녀를  남기고 春秋 83세로 僧下하여 같은해 7월 27일에 이곳에 모셨다. 英祖는 朝鮮王祖의 歷代임금중  在位期間이 가장긴 (52년)王으로 蕩平策을 써서 黨爭의 根絶에 힘섰고 均役法을 施行하여 百姓의 負擔을 輕減 시켰다. 繼妃 貞純王后 金氏는 鰲興府院君 金漢耉의 딸로 英祖 21년 (1745)11월 10일 誕生하여 英祖 35년 王妃에 冊奉되었다. 純祖 5년 正月 12일 春秋 61세에 所生없이  昌慶宮 慶福殿에서 僧下하여 같은해 6월 20일 에 雙龍으로 모셔졌다. 文人石과 武人石 사이의 階段을 없애고 同一 平面에 排置하였으며 以後 造成되는 王陵은 이 制度를 따랐다. 

 

 

영조

(英祖)

 

조선 후기 탕평책(蕩平策)을 推進해 黨爭의 調定에 힘썼고, 균역법(均役法)을 실시해 양역(良役)의 부담을 줄였다. 한편 社會變化에 對應해 실학(實學)의 진작 및 文化暢達에 勞力했다. 이름은 금(昑). 자는 광숙(光叔), 호는 양성헌(養性軒).

 

정순왕후

(貞純王后)

 

慶州김씨(慶州金氏)로, 아버지는 오흥부원군(鰲興府院君) 한구(漢耉)이다. 英祖의 正妃 정성왕후(貞聖王后) 서씨(徐氏)가 죽은 뒤, 1759년(英祖 35)에 王妃에 冊奉되었다. 1772년 예순(睿順)·명선(明宣) 등의 尊號를 받았다. 所生은 없었고, 正賓 이씨(李氏)의 所生인 思悼世子 와 사이가 나빴다. 나경언(羅景彦)이 아버지 漢耉의 사주를 받아 世子의 非行을 上訴하자, 思悼世子를 庶人으로 廢位시키고 뒤주 속에 가두어 굶어죽게 했다. 그후 로도 思悼世子를 同情하는 시파(時派)를 미워하고, 그 반대파인 벽파(僻派)를 擁護했다. 正祖가 죽고 나이어린 純祖가 卽位하자, 垂簾聽政을 하면서 공서파(攻西派)와 結託하여 天主敎 禁壓令을 내려 신서파(信西派)를 大大的으로 肅聽했다. 陵은 원릉(元陵)이며 詩號는 貞純이다.

 

 

 

조선국 : 朝鮮國

영조대왕원릉 : 英祖大王元陵                                            정순왕후부좌  : 貞純王后祔左

 

 

혜 릉

(惠陵)

 

제20대 景宗의 正妃 端懿王后 沈氏의 陵이다. 端懿王后는 청은府院君 沈鎬의 딸로서 肅宗 12년 (1686) 5월 21일에 태어나 肅宗 22년 (1696)世子嬪에 冊奉되고 肅宗 44년 (1718) 2월 7일에 昌德宮 長春軒에서 春秋 33세로 所生없이 僧下하여 같은해 4월 19일 이곳에 모셨다. 景宗이 王으로 卽位함 (1720)과 同時에 王后로 推尊되었다.

 

 

단의왕후

(端懿王后)

 

功效貞穆端懿王后 沈氏는 景宗大王 元妃로 丙寅年 (1686) 5월 21일 誕生하여 丙子年 (1696) 世子嬪에 冊奉되었고 戊戌年 (1718) 2월 7일 昇遐하여 4월 19일 揚州 崇陵 左側登城에 酉坐의 언덕에 葬禮하였다. 나이 33세였으며 庚子年 (1720) 王妃로 推捧되었다.

 

 

 

조선국 : 朝鮮國

단의왕후혜릉 : 端懿王后惠陵

 

 

느티나무

 

우리나라 마을앞 정자나무의 大部分은 느티나무 입니다. 오래살고 가지를 많이 뻗어 쉄터를 충분히 마련해 주기때문이죠 나무는 결이 곱고 황갈색의 색갈에 약간 윤이 나며 썩거나 벌레가 먹는일이 적은데다 무늬도 아름답습니다. 갈라지거나 비틀림이 적고 마찰이나 충격에 강하며 단단하기까지 하여 나무가 갖추어야 할모든 장점을 다 가지고 있읍니다. 나무의 皇帝라 할수 있지요.

 

 

홍살문

(紅箭門)

 

神聖한 地域임을 알리는 문 붉은 칠을한 둥근  기둥2개를 세우고 위에는 살을 박아 놓았다. 홍살문(紅-門) 또는 홍전문 (紅箭門)이라고도 한다.

             

寒食날 어머니 산소에 死草後 오는길에 들렸읍니다.  空氣도 맑고 날씨도 和暢해서 좋았읍니다.

어떻게 寫眞을 못찍게 하는지 運動도 많이 했읍니다.  좋은 하루였읍니다.

모두들 健康하고  幸福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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