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歷 史 旅 行 1/朝鮮王妃陵

懿陵 (景宗)

(懿陵)

 

 

이 陵은 쌍릉 (雙陵)으로 풍수지리설 (風水地理說)에 의해 王과 王妃 의 封墳을 左右로 造成하지앟고 앞뒤로 나란히 配置한 독특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석물 (石物)은 속오예의 (續五禮儀)의 記錄대로 작고 간소한 制度를 따르고 있다. 懿陵은 朝鮮 제20대 경종 (景宗)과 계비 (繼妃) 선의왕후 (宣懿王后) 어씨 (魚氏 1705 ~ 1730)를 모신 陵이다. 景宗은 숙종 (肅宗)의 맏아들로 病弱하고 子孫이 없어 王位에 오른 이듬해 (1721)에 이복 同生인 연잉군 (延礽君.英祖) 을 세제 (世第)로 奉하였고 卽位 4년 만인 37세에 돌아가셨다. 善意王后는 함원부원군 (咸原府院君) 어유구 (魚有龜)의 딸로 肅宗 44년 (1718년)에 世子嬪이 되었다 景宗이 王位에 오른후 王妃가 되었으며 子孫없이 26세에 돌아 가셨다.

 

 

 

홍살문

(紅箭門)

 

紅箭門은 王陵의 들머리임을 알려주는 建築的 裝置로 이곳을 지날때는 몸과 마음가짐을 嚴肅히 하고 여기에 모셔진 분들에게 敬虔한 禮를 갖추라는 뜻으로 세워진 것이다. 혹은 홍전문 (紅箭門)이라고도 한다. 

 

 

비 각

(碑閣)

 

碑石이나 神道碑를 세워둔 곳으로 신도비 (神道碑)는 主人의 業績을 記錄한 碑石을 말한다.

 

 

 

조선국 : 朝鮮國

경종대왕의릉 : 景宗大王懿陵

선의왕후부 : 宣懿王后祔

 

 

경 종

(景宗)

 

이름은 윤(昀). 자는 휘서(輝瑞). 아버지는 肅宗이고, 어머니는 희빈장씨(嬉嬪張氏)이다. 碑는 심호(沈浩)의 딸 단의왕후(端懿王后), 繼妃는 어유구(魚有龜)의 딸 선의왕후(宣懿王后)이다. 1689년(肅宗 15) 원자(元子)로 정호된 뒤 송시열(宋時烈) 등 老論의 反對에 부딪혔으나, 이듬해 小論의 支持를 받아 世子에 冊奉되었다. 1717년(肅宗 43) 대리청정(代理聽政)을 했으나, 肅宗이 이이명(李命)을 몰래 불러 世子가 病弱하고 子息이 없으니 그의 卽位 뒤의 후사(後嗣)는 연잉군(延君 : 뒤의 英祖)으로 定할 것을 부탁했다. 卽位 다음해인 1721년(景宗 1) 後繼者를 세우자는 老論의 建議로 延君을 세제(世弟)에 冊奉하고 世弟의 代理淸淨을 許諾했다.

 

 

단의왕후

(端懿王后)

 

本官은 청송(靑松). 성은 심(沈). 添丁으로 後일 友誼政, 領議政 등으로 追增된 청은부원군(靑恩府院君) 심호(沈浩)의 딸이며, 1696년에 11살의 나이로 世子嬪에 簡擇되어 景宗과 家禮를 올렸다. 景宗 卽位 2년 前인 1718년(肅宗 44), 급작스레 病을 얻어 薨逝하였다. 이에 肅宗은 그녀의 죽음을 비통해하며 단의(端懿)의 詩號를 追書하고 端懿嬪으로 삼았다. 1720년, 景宗이 卽位하자 혜릉(惠陵)의 陵號와 영휘(永徽)의 前號를 받고 端懿王后로 推捧되었다. 後日 英祖가 그녀에게 공효정목(恭孝定穆)의 徽號를 올렸다.

 

 

장희

(張禧嬪)

 

宮女였던 張玉貞은 肅宗에 눈에들어 後宮이 되었다, 王子 均을 出産하여 嬉嬪의 자리에 오른 人物이다 肅宗대는 朝鮮王祖를 통틀어 黨派간 政爭이 가장 심했던 時期로 王은 自身의 女子들을 利用해 黨爭속에서 王權의을 强化를 꾀했다. 均을 世子로 冊封하는 課程에서 西人을 擊沈하고 仁顯王后를 廢位 시켰다가 西人들이 閔씨復位를 꾀하는 課程에서 南人들을 除去한다. 王妃까지 되었다가 다시 降等된 張禧嬪은 仁顯王后를詛呪주하기위해 꼭두각시와 動物의 屍體를 通明殿 周圍에 묻어 두었다. 이것이 發覺되어 死藥을 받으니 수많은 風聞과 逸話를 남긴채 43세를 日記로 生을 磨勘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