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歷 史 旅 行 1/朝鮮王妃陵

洪陵.裕陵 (高宗純宗)

(洪陵)

 

 

고종 (高宗)은 興宣大院君 李昰應의 둘째아들로 哲鐘이 후사없이 昇遐하자 翼宗의 妃인 神貞王后 趙氏 의 指名으로 王位에 올랐다. 어린나이에 卽位해 아버지 興宣大院君이 國政을 運營하였으나  1873년 親政을 宣布하고 朝日守護條約 朝美守護通商條約을 締結하는등 對外開放政策을  펼쳤다. 壬午軍亂과 甲申政變 東學農民革命 乙未事變 俄館播遷 등 近代 韓國의 主要事件을 겪으며 1897년 大韓帝國 樹立을 宣布하고 皇帝에 올랐다. 1907 년 헤이그萬國平和會義에 密使를 派遣하여 國權을 回復하기 위해 勞力했다. 1919년 德壽宮 含寧殿에서 昇遐했다.

 

 

 

 

배 위

(拜位)

 

홍살문옆 한평정도 땅에 돌을깔아 놓은 곳으로 王이나  祭官이 절을 하는곳이다. 판위 (板位) 어배석 (御拜石)망릉위 (望陵位)라고도 한다. 

 

 

침전

(寢殿)

 

이建物은 朝鮮 제26대 고종황제 (高宗皇帝)의 神位를 모신 祭田이다. 中國을 섬기는 諸侯國家의 豫에 따라 만들어진 朝鮮歷代의 建物과는 型式과 規模가 다르다. 즉 從來의 丁 자 模樣의 丁字閣 대신 正面 5칸 側面 4칸의 建物을 지었으며 그 앞 양쪽에는 文官과 武官의 모습의 文武石이 서 있다. 그 곳부터 지붕없이 붉은 살을 박고 붉은칠을 해서 만든 門까지는 기린,코끼리,사자,해태,낙타,말 모양의 돌彫刻을 만들어 順序대로 配置 하였다.

 

 

대한 : 大韓

고종태황제홍릉 : 高宗太皇帝洪陵

명성태황후부좌 : 明成太皇后祔左

 

 

고종

(高宗)

 

朝鮮 26대 國王으로 초휘 (初諱)재황 (載晃)아명 (兒名) 명복 (命福) 초자 (初子) 명부 (明夫) 자 성림 (聖臨) 호 주연 (珠淵) 영조의 5대손인 興宣大院君 李昰應의 둘째 아들이다. 후사 (後嗣) 없이 昇遐한 哲宗의 뒤를 이어 12세였던 1863년에 卽位 하였다. 1866년에 明成皇后와 結婚하였고  1897년에 國號를 大韓으로 年號를 光武로 고치고 경운궁 (慶運宮) 卽祚堂에서 大韓帝國의 初代 皇帝로 卽位 하였다.

 

 

명성황후

(明成皇后)

 

朝鮮 高宗의 皇后 女聲部院君 민치록 (閔致祿)의 딸이다. 8살에 父母를 잃었으며 1866년  오척 世道政治의  勢力 基盤을 없애기 위하여 興宣大院君의 夫人인 부대부인 (府大夫人) 민씨 (閔氏)의 推薦을 받아 16살에 王妃로 冊奉 되었다. 1895년  日本의 蠻行으로  景福宮에서 弑害 되었고 大韓帝國이 成立된 1897년 皇后로 追從 되었다.

 

 

장명등

(長明燈)

 

長明燈은 文武官石人像과 石馬像을 左右로 하여 封墳 앞 한가운데 北쪽 가까이 設置하는것이 普通이나 이곳 洪陵은 皇帝陵으로 文武官石人像과 石馬像들과는 떨어져 設置되어있는 石燈이다. 불을 켜는 부분인 火舍石과 干珠石은 모두 4면으로 彫刻하였는데, 火舍石의 4면에는 불빛이 퍼져 나오도록 窓이 뚫려 있다. 가운데 받침돌과 아래 받침돌에는 각각 위로 향한 연꽃무늬와 아래로 향한 연꽃무늬가 正敎하게 彫刻되어 있다.

 

 

어 정

(御井)

 

우물로, 朝鮮 歷代 王들이  우물물을 마셨다고 하여 ‘어정(御井)’이라 부른다. 우물의 形態는 둥글고, 깊이는 약 8m에 지름은 1.5m로, 우물 속은 온통 돌벽으로 쌓여 있다. 우물 윗부분은 원래 四角의 긴 돌을 井자 模樣으로 짠 후, 그 위를 그 模樣새에 따라 돌로 쌓아 올린 形態였던 것을, 日帝 時代 때 콘크리트를 발라 그 模樣이 바뀌었고, 石材를 쌓는 方法과 狀態로 보아 朝鮮 에 만든 우물로 推定된다.

 

 

수라간

(水剌間)

 

임금의 진지를 짓던 柱房

 

 

어재실

(御齋室)

 

이 建物은 朝鮮 26대 고종황제 (高宗皇帝)의 陵이 딸린 再室이다. 高級 살림집형의 再室은 行廊채와 그 밖의 附屬建物들을 거느리고 있다. 이곳은 祭官들의 祭祀準備와 休息을 위하여 使用되었으며 陵을 管理하는 陵參奉이 派遣되어 머물러 있기도 하였다. 高宗이 皇帝로 登極하고 大韓帝國을 樹立하면서 모든制度를 革新함에 따라 陵의 構造와 돌로만든 石物의 配置등도 바뀌었고 再室 建築도 바뀌었다. 따라서 이 御齋室은 歷代의 陵과는 다르게 構成되어 있다.

 

 

수복방

 

修復房은 祭祀 그릇을 保管하고 守陵官(陵을 지키는 管理) 또는 修復(청소일을 하던 一種의 官奴婢)이 지내던 집이다. 정전 東門 北쪽에 位置한 宗廟의 修復房은 두벌 장대 기단위에 正面3~ 4칸, 側面 단칸의 맞배집이다.

 

 

연 지

(淵池)

 

천원지방 (天圓地方) "밖은 땅을 象徵하는 四角形이고 안은 하늘을 象徵하는 원형" 의 연못이 아닌 가운데 둥그런 섬을 두고 연못 全體의 형태도 원형인 원지원도 型式의 연못이 造成되어있다.

 

 

 

洪陵에서  裕陵으로 가는길   1919년 考終 印章. 明成皇后릉 天藏後 合葬하여 洪陵으로 造成함  洪陵祭享日은 高宗은 每年 1월 21일 明成皇后는 10월 8일 陽曆으로 擧行됩니다.

 

(裕陵)

 

 

純宗은 高宗과 明成皇后의 둘째 아들로 高宗의 뒤를 이어 1907년에 卽位 하였다. 1926년 昌德宮 大造殿에서 昇遐하였으며 純宗 國葬일에 맞추어 6.10 萬歲運動이 일어났다. 純明皇后는 여은府院君 민태호의 딸로 1897년에 皇太子妃가 되었으나 純宗이 卽位하기전에 昇遐하여 지금의 陵洞 어린이大公園에 모셨다가 純宗이 世上을 떠나자 天藏하여 함께 모셨다. 純情皇后는 海風府院君 윤택영의 딸로 純宗의 繼後가 되었다. 純正皇后는 日帝强占期와 解放 韓國戰爭을 겪었고 末年에 佛敎에 귀의하여 슬품을 달래다가 1966년 73세로 昇遐하였으며 純宗과의 사이에는 子女를 두지못했다.

 

 

 

침 전

(寢殿)

 

이建物은 朝鮮 제27대 순종황제 (純宗皇帝)의 神威를 모신 祭典이다. 中國을 섬기는 諸侯國家의 예에 따라 만들어진 朝鮮歷代의 建物과는 規模가 다르다. 즉 從來의 丁 자 모양의 丁字閣 대신 정면 5칸 측면 4칸의 건물을 지었으며 그 앞 양쪽에는 文官과 武官의 모습의 文武石이 서 있다. 그 곳부터 지붕없이 붉은 살을 박고 붉은칠을 해서 만든 문까지는 기린,코끼리,사자,해태,낙타,말 모양의 돌조각을 만들어 順序대로 配置 하였다.

 

 

어 정

(御井)

 

우물로, 朝鮮 歷代 왕들이  우물물을 마셨다고 하여 ‘어정(御井)’이라 부른다. 우물의 形態는 둥글고, 깊이는 약 8m에 지름은 1.5m로, 우물 속은 온통 돌벽으로 쌓여 있다. 우물 윗부분은 원래 四角의 긴 돌을 井자 모양으로 짠 후, 그 위를 그 모양새에 따라 돌로 쌓아 올린 형태였던 것을, 日帝 時代 때 콘크리트를 발라 그 模樣이 바뀌었고, 石材를 쌓는 方法과 狀態로 보아 朝鮮 에 만든 우물로 推定된다.

 

 

순종효황제유릉 : 純宗孝皇帝裕陵

순명효황후부좌 : 純明孝皇后祔左

순정효황후부우 : 純貞孝皇后祔右

 

 

홍살문

(紅箭門)

 

홍살문은 王陵의 들머리임을 알려주는 建築的 裝置로 이곳을 지날때는 몸과 마음가짐을 嚴肅히 하고 여기에 모셔진 분들에게 敬虔한 禮를 갖추라는 뜻으로 세워진 것이다. 혹은 홍전문 (紅箭門)이라고도 한다.

 

 

순 종

(純宗)

 

1874년 2월 高宗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1875년 世子로 冊奉되었다. 1882년 뒤에 순명효황후(純明孝皇后)가 된 閔氏를 世子嬪으로 맞았고, 1904년에는 尹氏를 皇太子妃로 새로 맞이했다. 1907년 高宗이 日帝의 强要에 의해 王位에서 물러나자 大韓帝國의 皇帝로 卽位하여 年號를 융희(隆熙)로 고쳤다. 同生인 영친왕(英親王)을 皇太子로 冊立했다. 卽位 후 日本의 强要로 韓日新協約을 締結함으로써 日本人 次官이 國政 全般을 干涉하는 次官政治가 始作되었다. 이어 日帝는 財政不足의 理由를 들어 軍隊를 强制 解散했으며, 1909년에는 己酉覺書를 통해 司法權마저 빼앗았다. 政治·外交·軍事·經濟·司法權 등을 强奪한 日帝는 朝鮮을 完全한 植民地로 만들기 위해 이용구·송병준 등이 중심이 된 一進會를 앞세워 合倂을 推進하여 1910년 韓日合倂條約을 締結함으로써 大韓帝國은 무너지게 되었다. 大韓帝國 崩壞 후 純宗은 王으로 降等되어 昌德宮에서 居處하다 1926년 죽었다. 純宗의 葬禮 때 6·10萬歲運動이 일어났다. 陵은 유릉(裕陵)이다.

 

 

장명등

(長明燈)

 

長明燈은 文武官石人像과 石馬像을 左右로 하여 封墳 앞 한가운데 北쪽 가까이 設置하는것이 普通이나 이곳 洪陵은 皇帝凌으로 文武官石人像과 石馬像들과는 떨어져 設置되어있는 石燈이다. 불을 켜는 부분인 火舍石과 間柱石은 모두 4면으로 彫刻하였는데, 火舍石의 4면에는 불빛이 퍼져 나오도록 窓이 뚫려 있다. 가운데 받침돌과 아래 받침돌에는 각각 위로 향한 연꽃무늬와 아래로 향한 연꽃무늬가 正敎하게 彫刻되어 있다.

   
 

순명효황후

(純明孝皇后)

 

1872년 양덕방 계동에서 태어나, 1882년에 11살의 나이로 世子嬪으로 冊奉되었고, 1897년에는 皇太子妃로 冊奉되었으나, 男便인 純宗이 皇帝로 卽位하기 前인 1904년陰曆 9월(양력 11월)에 慶運宮의 江太室에서 33살의 나이에 死亡하였다. 처음에는 京畿道 揚州 龍馬山 來同에 안장되었으며, 陵號를 유강원(裕康園)이라 했으며 皇太子妃로 死亡하였기에 詩號를 순명비(純明妃)라 하였다.. 1907년 純宗의 卽位에 따라 皇后로 推捧되어 純明皇后로 올려졌고, 陵號도 유릉(裕陵)으로 바꾸었다. 以後, 純宗이 崩御한 1926년에 南楊州市 金谷洞으로 移葬되어 合葬으로 모셔졌다.

 

 

순정효황후

(純貞孝皇后)

 

純貞孝皇后 윤씨(純貞孝皇后 尹氏, 1894년 1894년 陰曆 8월 20일 ~ 1966년 揚力 2월 3일)는 大韓帝國 純宗의 두 번째  皇后로 本官은 해평(海平)이다. 박영효, 이재각 등과 함께  日本 政府로부터 侯爵 爵位를 받았던 親日 人事인 윤택영의 딸이다. 定式 詩號는 헌의자인순정효황후(獻儀慈仁純貞孝皇后)이다. 裕陵은 한 陵寢에 세명을 모신 東峯三室 合葬陵의 形態로 助命되었다. 裕陵은 朝鮮王陵 가운데 柳一한 同封三室 合葬陵이다.

 

 

수복방

 

修復房은 제사 그릇을 保管하고 守陵官(陵을 지키는 管理) 또는 修復(청소일을 하던 一種의 官奴婢)이 지내던 집이다. 情田 東문 北쪽에 位置한 宗廟의 修復房은 두벌 장대 基壇위에 正面3~ 4칸, 側面 단칸의 맞배집이다.

 

 

어재실

(御齋室)

 

이 建物은 朝鮮 27대 순종황제 (純宗皇帝)의 陵이 딸린 再室이다. 高級 살림집형의 再室은 行廊채와 그 밖의 附屬建物들을 거느리고 있다. 이곳은 祭官들의 祭祀準備와 休息을 위하여 使用되었으며 陵을 管理하는 陵參奉이 派遣되어 머물러 있기도 하였다. 高宗이 皇帝로 登極하고 大韓帝國을 樹立하면서 모든制度를 革新함에 따라 陵의 構造와 돌로만든 石物의 配置등도 바뀌었고 再室 建築도 바뀌었다. 따라서 이 御齋室은 歷代의 陵과는 다르게 構成되어 있다.

 

 

 

裕陵에서  洪陵으로 가는길   1926년 純宗 印章.龍馬山에 있던 純明皇后 懿陵 天藏後 合葬하여 裕陵으로 造成 1966년 純正皇后 合葬  裕陵 祭享日은  每年 4월 25일 陽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