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歷 史 旅 行 1/朝鮮王妃陵

光陵 (世祖)

광 

(光陵)

 

 

光陵은 朝鮮 제7대 세조(世祖)와 王妃 정희왕후 (貞熹王后) 윤씨 (尹氏, 1418 ~ 1483)의 陵이다. 世祖는 태종 (太宗) 17년 (1417) 제4대 세종대왕 (世宗大王)의 둘째아들로 태어나 世宗 27년 (1445) 수양대군 (首陽大君)으로 冊奉되었다. 1452년 단종(端宗)이 어린나이로  王位에 오르자 1453년 황보인 (皇甫仁) 김종서 (金宗瑞)등을 殺害하여 權力을 帳幄하고 아우 안평대군 (安平大君)을 除去하였으며 1455년 端宗으로 하여금 王位를 넘겨주겠다는 교서 (禪位敎書)를 내리게 하여 王位에 올랐으며 성삼문 (成三問)등의 집현전 (集賢殿) 學者들이 端宗을 復位 시키려다 發覺되자 모두 死刑에 처하고 集賢殿을 廢止 하였다. 

 

 

 

홍살문

(紅箭門)

 

홍살문은 王陵의 들머리임을 알려주는 建築的 裝置로 이곳을 지날때는 몸과 마음가짐을 嚴肅히 하고 여기에 모셔진 분들에게 敬虔한 禮를 갖추라는 뜻으로 세워진 것이다. 혹은 홍전문 (紅箭門)이라고도 한다.

 

 

세조

(世祖)

 

在位기간 동안 王權强化, 郡縣의 整備, 직전법(職田法)의 實施, 군액(軍額)의 增强, 佛敎의 振興 등의 政策을 실시해 朝鮮 初期 王權 强化에 公憲했다. 이름은 유(瑈) 자는 수지(粹之). 世宗의 둘째 아들이고, 文宗의 아우로, 어머니는 소헌왕후(昭憲王后) 沈氏이다. 비는 윤번(尹璠)의 딸 정희왕후(貞熹王后)이다.

 

 

계유정난

(癸酉靖難)

 

世宗의 뒤를 이은 病弱한 文宗은 自身의 단명(短命)을 豫見하고 領議政 皇甫仁, 左議政 南旨, 友誼政 金宗瑞 등에게 자기가 죽은 뒤 어린 王世子가 登極하였을 때, 잘 輔弼할 것을 부탁하였다. 文宗의 뒤를 이어 卽位한 端宗이 卽位 당시 12세로 어렸기 때문에 世宗과 文宗의 유명을 받들어 漕艇과 軍權을 帳幄한 당시  左議政 金宗瑞를 中心으로 한 領議政 皇甫仁 등이 政權을 잡았다.  垂簾聽政을 통해 王室의 求心点 役割을 해야 할 大妃, 大王大妃 등의 不在 狀況에서, 世宗의 英特한 아들들은 世宗 時代에 各種 政治, 文化 事業에 參與한 課程에서 各自 만만치 않은 勢力을 이루고 있었으며, 그중 에서도 世宗의 둘째아들 首陽大君과 셋째아들 安平大君 등의 勢力이 가장 强盛해, 漕艇의 臣僚와 王室, 심지어 還官, 拿引까지도 이들의 勢力으로 兩分되어 있었다.

 

 

계유정난

(癸酉靖難)

 

이에 王權에 威脅이 될 수도 있다고 判斷한 金宗瑞와 皇甫仁 그리고 吏曹判書 閔伸 등은 그중에서도 가장 威脅的인 首陽大君을 牽制할 必要性을 느끼고 安平大君과 손을 잡았다. 安平大君 역시 首陽大君과의 政治的 對決은 親兄弟 關係를 떠나 피할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의 冊士 노릇을 한 이현로, 아우이자 世宗의 6남 錦城大君을 中心으로 首陽大君과 對立하게 된다.

 

 

계유정난

(癸酉靖難)

 

漕艇 大臣들이 安平大君과 손을 잡게 되자, 政治的 立志에 危險을 느낀 首陽大君은 自身의 뜻을 뒷받침해 줄 수하 책사로 권람,한명회 등을 맞이하게 되는데, 이 두 사람의 合流 以後 首陽大君의 政治的 勢力 擴大에 加速度가 붙어, 平素 切親한 關係였던 集賢殿學士 出身의 少壯派 官僚 申叔舟, 武藝에 正統한 文官 洪允成, 武官 양정, 淸白吏 領議政 黃喜의 아들 황수신, 金宗瑞의 최측근 이징옥의 형과 아우 이징규, 이징석 형제 등이 그 勢力으로 合流하게 되며, 王室 人物들의 包攝에도 勞力을 기울여 양녕대군,임영대군,영응대군 그리고 世宗의 後宮 新賓 金氏 小生인 桂陽君 이증 등의 主要 宗親도 그의 勢力이 되었다.

 

 

정희왕후

(貞熹王后)

 

정희왕후 윤씨(貞熹王后 尹氏, 1418 ~ 1483)는 朝鮮 세조(世祖)의 왕비이다.詩號는 자성흠인경덕선열명순원숙휘신혜의신헌정희왕후(慈聖欽仁景德宣烈明順元淑徽愼惠懿神憲貞熹王后)이다.  파평부원군 정정공 윤번(坡平府院君 貞靖公 尹璠)의 딸로, 本官은  파평(坡平)이다. 朝鮮 最初로 大王大妃의 稱號를 받았고, 또한 朝鮮 最初로 垂簾聽政을 한 王后이기도 하다. 紅酒에서 태어났으며, 1428년 世祖(당시 晉陽大君)와 婚姻하였다. 所生으로는 훗날 德宗에 推尊된 疑驚世子, 睿宗, 義塾公主가 있다.

 

 

정희왕후

(貞熹王后)

 

1455년 癸酉靖難이 일어날 때 정난에 나가는 것을 부추겼다고 하며, 端宗을 上王으로 올리는 것과 流配를 보내고 死藥을 내리는 것에도 관여하였다고 한다. 世祖가 卽位하면서 王妃 에 冊奉되었다. 貞熹王后는 女丈夫 氣質을 가진 女人으로 알려져 있으며, 世祖가 僧下하고 睿宗이 卽位한 뒤 王大妃가 되었고, 睿宗이 즉위 1년 만에 갑작스레 病으로 僧下하자 당일날 바로 韓明澮와 結託하여 둘째 손자 자을산군을 王位에 올린 뒤 自信은 王室 最高 어른인 大王大妃로서 朝鮮 最初의 垂簾聽政을 하였다.

 

 

정희왕후

(貞熹王后)

 

垂簾聽政은 歷史드라마에서 보는 것과는 달리 어린 王의 뒤에서 발을 치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王이 臣下들과 討論한 內容을 말하면 貞熹王后가 適切한 助言을 주는 方式의 政治를 말한다. 攝政 당시에 그녀의 果斷性이 있는 性格과 훌륭한 政治的 감각 德分에 朝廷은 平和로워 安定期를 구가하였다고 한다. 1483년(成宗 14년) 陰曆 3월 30일 溫陽 行宮에서 僧下하였다

 

 

하마비

(下馬碑)

 

光陵 初入에는 朝鮮王陵에서는 唯一하게 下馬碑가 남아 있다. 先王先非를 모시는 祭祀를 主觀하기 위해 親行을 한 王조차도 이곳 下馬碑에서 부터는 말이나 家馬에서 내려야 했다.

 

 

재실

(齋室)

 

재각(齋閣)·재궁(齋宮)이라고도 한다. 一般的으로 先山·宗山·位土의 近處에 세워진다. 再室은 門中 또는 支派의 公有財産이지만 再室의 保存 責任者는 從孫이나 直系長孫이다. 再室에는 묘직(墓直) 또는 산직(山直)이 살고 있으며, 또 直系長孫과 墓直 사이에는 유사(有司)가 있어서 시향제(時享祭) 및 묘사(墓祀)의 준비, 門中 內外의 連絡業務, 墓所·位土·宗山·先山·再室의 管理 등의 實務를 맡는다. 墓直은 經濟的·身分的으로 宗孫이나 儒士에 隸屬되어 再室의 雜務를 處理한다. 過去 再室은 時香臍나 廟祠의 準備場所였으며, 祭享과 關聯된 諸般問題를 論意하던 宗會場所였고 때에 따라서는 飮服과 門中會義가 行해지던 곳이었다. 하지만 急速한 産業化가 進行되면서 同族關念이 稀薄해지고 墓直이 사라짐으로써 再室은 점차 消滅되어 가고 있다.

 

 

 

'歷 史 旅 行 1 > 朝鮮王妃陵' 카테고리의 다른 글

光海君墓  (0) 2010.10.31
燕山君墓  (0) 2010.08.20
泰陵 (文定王后)  (0) 2010.08.05
洪陵.裕陵 (高宗純宗)  (0) 2010.07.02
坡州三陵(章順王后.孝純王后.恭惠王后)  (0) 2010.05.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