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歷 史 旅 行 1/朝鮮王妃陵

光海君墓

  (光海君)

 

 

光海君 墓는 15대 임금인 光海君과 王妃 문성군부인 (文城君夫人)유씨 (柳氏)의 묘이다. 光海君은 선조 (宣祖) 뒤를 이어 1608  王位에 올라 在位중에 外交 文化등에 많은 治績을 남겼으나 黨爭에 휘말려 光海君 15년 (1623년) 인조반정 (仁祖反正)으로 王位에서 쫓겨났다. 廢位된 後 江華를 거쳐 濟州島에서 流配生活을 하다가 仁祖 19 년 (1641년) 67세에 돌아가셨다. 夫人 유씨는 仁祖反正으로 王妃 자리에서 쫓겨나 仁祖 원년 (1623년) 流配地인 江華에서 돌아가셨다. 墓는 대군 (大君)예에따라 葬事지냈기 때문에 뒤에는 石佛이 없고 앞에 비석 (碑石).상석 (床石) 망주석 (望柱石).문인석 (文人石)등이 配置되어 있다.

 

 

 

광해군

(光海君)

 

朝鮮 15대 임금인 光海君은 선조 (宣祖)의 뒤를 이어 1608 년 王位에 올라 在位중에 外交 文化등에 많은 治績을 남겼으나 黨爭에 휘말려 光海君(文人石)등이 配置되어 있다.

 

 

인조반정

(仁祖反正)

 

광해군 (光海君)은 江華島로 流配되고 이이점· 정인호·유희분·이위경(李偉卿) 등 光海君 때의 權勢家들이 大逆罪로 慘刑되어 對北은 沒落했다. 이때 對北波로 몰려 斬首된 자가 40명이나 되었으며, 淑淸되어 歸養간 자가 200여 명이라 傳해진다. 反正 謀議에 參與했으나 密告했던 이이반 도 反逆罪로 誅殺 당했다. 以後로 對北은 政界에서 完全히 밀려났으며 北人 政權의 偶像인 南營 曹植 系統의 南明學派는 크게 排斥받았다. 얼마 後 光海君은 濟州島로 다시 流配되었으며, 그곳에서 18년 동안 살다가 生을 마쳤다. 반면 이 反正에 功을 세워 執權한 西人 이귀·김유 등 33명은 3등으로 나누어 정사공신(靖社功臣)의 훈호(勳號)를 받고 각기 등위(等位)에 따라 벼슬을 얻었다. 그러나 이 논공(論功)이 公評하지 못하였다. 여하튼 이 反正으로 西人이 政權을 잡게 되었으며, 南人의 이원익(李元翼)이 다시 召喚되어 입상(入相)함을 繫羈로 南人 제2의 勢力을 形成하게 되었다.

 

 

문성군부인

(文城君夫人)

 

유씨(柳氏)는 仁祖反正 으로 王妃 자리에서 쫓겨나 仁祖 元年 (1623년) 流配地인 江華에서 돌아가셨다.

 

 

광해군

(光海君)

 

光海君의 (1575 ~ 1641) 에대한 評價는 多面的이다. 동생 (永昌大君)을 죽이고 모후 (仁穆大妃)를 쫓아낸 悖倫아 지나친 土木工事로 民心을 잃은 어리석은 君主 로부터 壬辰倭亂이 남긴 後遺症을 克復하는데 功을세운 임금 명 (明)과 청(淸)의 대결 사이에서 슬기로운 外交를 펼친 현군 까지 不定과 肯定이 交叉한다.  光海君이 남긴 빛과 그림자 가운데 어느 側面을 重視 하느냐에 따라 評價가 달라질수 있지만 分明 한것이 하나 있다. 그가 仁祖反正이라는 非正常的인 쿠데타를 通해 廢位 되었다는  事實이다. 그는 왜 쫓겨났을까?  徐當發落이 시정의 流行語가 된 現實을 꼬집은 史官의 指摘가운데 諫言을 拒絶했다는 代木이 注目된다. 光海君은  경연(經筵)을 거의 열지않았다.  競演은 王과 臣僚들이 함께모여 慶典을 읽고 內容을 討論하는 자리다. 王은 그자리에서 統治와 關聯된 過去의 事例를 배울수있고 臣僚들은 平素 품고 있던 生角이나 시정의 與論을 傳達할수 잇었다. 하지만 光海君은 講演을 비롯한 臣僚들들과 對面을 귀찮아했다.  그러다보니 臣僚들의 建議나 要請에 대하여 徐當發落으로 應對하는 일이 잦아졌다. 自然히 與論과 民心을  제대로 읽지못했고 反正을 主導했던 勢力들은 그런 弱点을 파고들었다. 疏通을 위한 勞力을 제대로 기울이지않은것 바로 거기에서 光海君의 悲劇이 삭텄던 것이다  (명지대교수  한명기 글)

 

 

인목대비

(仁穆大妃)

 

宣祖의 계비 (繼妃) 1584 ~ 1632). 性은 김 (金).선조 35년(1602) 王妃에 冊奉되었으나 光海君이 卽位하자  대북(大北)의 謀略으로 서궁(西宮)에 流弊되었다가 仁祖反正 으로 풀려났다.  

 

 

서당발낙

(徐當發落)

 

1621년 (光海君13) 5월 15일 종묘(宗廟)에서 徹夜祭祀를 마치고 還宮하던 光海君은 수레를 멈추고 百姓들의 山臺놀이를 觀覽했다. 臣僚들은 더운날씨에 玉體가 상한다며 속히 還宮하라고 권했지만 光海君은 듣지 않았다. 그런데 問題가 생겼다. 수레를 끌던 人夫 한 사람이이 쓰러져 바퀴에 치여 죽는 事故가 일어난것이다. 司憲府는 行事를 잘못 主管하여 사람이죽었으니 責任者를 處罰하라고 促求했다. 그러자 光海君은  천천히 決定하겠다.(徐當發落고 답했다. 그런데 (光海君日記)에서 이 臺木을 言及한 사평 (史評)이 興味롭다. 천천히 決定하겠다는말은 나라를 亡치는것이다. 王이 이런말을 하게된것은 애초 優柔不斷한데서 비롯되었지만 끝내는 諫言을 拒絶하고 賂物을 받아들이는 바탕이되고 말았다. 놀이를 즐기는 일 때문에 사람이 죽었는데 官員을 處罰하라는 靑을 받아들이지 않으니 마음을 잃은것이 아니겠는가  당시 한 娼女가 길을가는데 한 少年이 웃으면서 約束을 靑했다. 娼女는 對答하지 않고 지나가다가 少年이 再三 청하자. 천천히 결정하겠다 고 말했다. 임금의 말씀이 도리어 천한 장기들의 농담거리가 되었으니 또한 매우 슬픈일이다.  (명지대교수  한명기글)  

 

 

영창대군

(永昌大君)

 

宣祖는 이미 世子로 冊奉한 光海君을 싫어하여 영의정(領議政) 유영경(柳永慶) 이하 몇몇 臣下와 永昌大君을 世子로 冊奉할 것을 몰래 議論하였다. 이 눈치를 안 이이첨(李爾瞻)· 정인홍(鄭仁弘) 등은 世子를 바꿔서는 안 된다고 主張하다가 宣祖의 비위를 거슬러 무근한 소리를 퍼뜨린다는 罪目으로 貴陽을 가게 되었다. 貴陽길 떠나는 것을 此日彼日하던 차에 갑자기 宣祖가 世上을 떠나자 光海君은 當日로 王位에 올라 이들도 다시 불러 登用하였다. 1611년(光海君 3년)에 永昌大君에 冊奉되었다. 앞서 宣祖가 永昌大君을 王世子로 삼으려던 일 때문에 永昌大君을 둘러싼 갈등이 發生하게 된다. 光海君은 이이첨·정인홍 등의 농간으로 형 임해군(臨海君)을 죽이고 人目王后를 西宮에 잡아 가두고 人目王后의 아버지 김제남(金悌男)을 反逆罪로 몰아 西小門 밖에서 死刑에 처했는데, 이 때에 永昌大君도 같은 罪目으로 官爵을 빼앗기고 서인(庶人)이 되어 江華島에 끌려가 投獄되었다. 그 뒤 이이첨 一派는 강화부사(江華府使) 정항(鄭沆)으로 하여금 증살(蒸殺)케 하였다. 이 때가 1614년 음력 2월로, 永昌大君의 나이 9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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