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歷 史 旅 行 1/朝鮮王妃陵

思陵 (定順王后)

(思陵)

 

 

思陵은 정순왕후 (定順王后) 송씨 (宋氏)의 陵이다. 貞純王后는 세종 (世宗) 22년 (1440년) 여량부원군 (礪良府院君) 송현수 (宋玹壽)의 딸로 태어나 端宗 2년 (1454년) 1월에 王妃가 되었다. 그러나 다음해 端宗이 수양대군 (首陽大君)에게 王位를 빼앗기고 1457년 노산군 (魯山君)으로 낮추어져 寧越로 流配됨에 따라 王妃도 부인(夫人)으로 낮추어졌다. 夫人은 멀리에서 갇혀지내는 端宗을 생각하며 한 많은 歲月을 보냈으며 端宗이 돌아가신 뒤에는 東大門밖 연미정동 (燕尾亭洞)에 草家를 지어 정업원(淨業院)이라 이름짓고 그곳에서 지내면서 매일 절뒤 산봉우리에 올라 寧越을 바라보며 悲痛해 하였다. 중종 (中宗) 16년 (1521년) 6월 4일 82세로 돌아가셨으며 대군부인 (大君夫人)예로 葬禮를 지냈다. 숙종 (肅宗) 24년 (1698) 11월에 端宗이 복위되자 端宗의 神位와 함께 昌慶宮에 모셔졌다가 宗廟 永寧殿으로 옮겨졌다. 그 후 영조 (英祖)는 정업원구기(淨業院舊基)라는 글을써서 碑와 碑閣을 定業原址에 세우게하고 山峰우리 위에 있는 바위에 동망봉 (東望峰)이라는 글을 親筆로 새겨놓았다.  

 

 

永渡橋濟天雨散,,,영도교제천우산
破裂胸心何不止,,,파열흉심하부지
淸泠浦松血淚墮,,,청령포송혈루타
東望峰不忘宋妃,,,동망봉불망송비

 

永遠히 건너가버린 다리
淸溪川 永渡橋 건널제
하늘에서 빗방울 뿌렸지
우리 님의 눈물인양~

터지고 찢어지는 가슴속의 心臟
어찌하여
그칠줄을 몰랐던가~
차리라 터지고 찢어져
搏動을 멈추지않고

淸泠浦 소나무들도
피눈물을 흘릴 때

 

東望峰엔
잊음을 잃어버린
定順王妃 송후의 피눈물

 

 

정순왕후

(定順王后)

 

朝鮮 端宗의 비(妃) 1440 ~ 1521 性은 송 (宋) 義德王 大妃에 奉하여 졌으나 端宗이 魯山君으로 降等되자 부인 (夫人)으로 降奉 되었다. 魯山君이 端宗으로 추복 (追復) 됨으로써 定順王后가 되고 신위 (神位)가 昌慶宮에 옮겨졌다. 思陵은 정순왕후 (定順王后) 송씨 (宋氏)의 陵이다. 定順王后는 세종 (世宗) 22년 (1440년) 여량부원군 (礪良府院君) 송현수 (宋玹壽)의 딸로 태어나 端宗 2년 (1454년) 1월에 王妃가 되었다.

 

 

사릉으로가는길

陵 主位에 소나무林이 우거져 있다. 

 

 

홍살문

(紅箭門)

 

 능(陵)·원(園)·묘(廟)·宮殿·官衙 등의 正面 입로(入路)에 세우는 붉은 칠을 한 문.

 

 

참도

(參道)

 

홍살문에서 丁字閣까지 이어진길 薄石을 깔아 놓았으며 왼쪽이 약간 높은 기은 神 이 다니는 길이라 하여 신도 (神道)라고하며 오른쪽 약간 낮은 길은 임금이 다니는 길이라 하여 어도 (御道)라고 한다.

 

 

정자각

(丁字閣) 

 

祭香을 올리는 곳으로 亭子模樣으로 지은집  祭享을 올릴때 王의 神主를 이곳에 모신다. 丁字閣에 오를때에는 東쪽으로 오르고 내려올때는 西쪽으로 내려오는대 이를 일러 동입서출 (東入西出)이라고 한다.

 

 

조선국  :  朝鮮國

정순왕후사릉   :  定順王后思陵

 

능침

(陵寢)

 

陵 주인이 잠들어 있는곳  능상 (陵上)이라고도 한다.

 

 

백성들이 따르고 애도한 왕후의 뒤안길  

 

世祖가 末年에 定順王后에게 窮乏을 免할수 있는 집과 食糧을 주었지만 定順王后는 그것을 고이 받아줄 女人이 아니었다. 生活苦가 王后로서의 自尊感을 쓸쓸히 죽은 男便의 억울함과 열여덟에 홀로된 自身의 恨을 지울수는 없는 일 侍女들이 동냥한 飮食으로 살아가는 悲慘한 삶이있었지만 定順王后는 世祖의 도움도 뿌리치고 자줏물을 들이는 염색업으로 生計를 이어 나간다. 後世 사람들은 그녀가 染色業을 했던 골짜기를 자줄골이라 불렀다. 

 

 

정순왕후

(定順王后)

 

端宗이 수양대군 (首陽大君)에게 王位를 빼앗기고 1457년 노산군 (魯山君)으로 낮추어져 寧越로 流配됨에 따라 王妃도 부인(夫人)으로 낮추어졌다. 夫人은 멀리에서 갇혀지내는 端宗을 생각하며 한 많은 歲月을 보냈으며 端宗이 돌아가신 뒤에는 東大門밖 연미정동 (燕尾亭洞)에 草家를 지어 정업원(淨業院)이라 이름짓고 그곳에서 지내면서 每日 절뒤 山峰우리에 올라 寧越을 바라보며 悲痛해 하였다. 중종 (中宗) 16년 (1521년) 6월 4일 82세로 돌아가셨으며 대군부인 (大君夫人)예로 葬禮를 지냈다. 숙종 (肅宗) 24년 (1698) 11월에 端宗이 복위되자 端宗의 神位와 함께 昌慶宮에 모셔졌다가 宗廟 永寧殿으로 옮겨졌다. 그 後 영조 (英祖)는 정업원구기(淨業院舊基)라는 글을써서 碑와 碑閣을 正業원터에 세우게하고 山峰우리 위에 있는 바위에 동망봉 (東望峰)이라는 글을 親筆로 새겨놓았다.  

 

 

단 종

(端宗)

 

아버지는 제5대 王 文宗이고, 어머니는 현덕왕후(顯德王后) 권씨(權氏)이다. 비는 정순왕후(定順王后) 송씨(宋氏)이다. 1448년(世宗 30) 8세 때 王世孫에 冊奉되고, 1450년 文宗이 卽位하자 王世子에 冊奉되었다. 1452년 5월 文宗이 在位 2년 만에 죽자, 12세에 王位에 올랐다. 그前에  文宗은 自身이 病弱하여 황보인(皇甫仁)·김종서(金宗瑞) 등에게 나이 어린 世子의 輔弼을 부탁했고, 集賢殿 學士인 成三問·朴彭年·申叔舟 등에게도 左右에서 힘을 모아 도와주라는 遺言을 했다. 그러나 1453년 叔父 首陽大君이 권람(權擥)·한명회(韓明澮) 등과 함께 皇甫仁·金宗瑞 등을 除去하고 군국(軍國)의 모든 權利를 帳幄하자 端宗은 단지 이름뿐인 王이 되었다. 1455년 端宗은 韓明澮·권람 등의 强要에 더이상 견디지 못하여 首陽大君에게 王位를 물려주고 상왕(上王)이 되었다. 1456년 成三問·朴彭年·河緯地·耳介·兪應孚·柳誠源 등이 端宗 復位를 桃毛하다 모두 處刑된 뒤, 1457년 上王에서 노산군(魯山君)으로 降奉되어 江原道 寧越로 流配되었다. 그해 9월 慶尙道 순흥에 流配되었던 叔父 금성대군(錦城大君)이 다시 端宗의 復位를 計劃하다가 發覺되자, 魯山君에서 서인(庶人)으로 降奉되었으며 10월에는 마침내 죽음을 당했다

 

 

예감

 

祭香後 祝文을 태우는 함(函)인 叡感의 뚜껑은 나무로 만들어지는것이 普通이었으나 思陵의 叡感 뚜껑은 石材로 만들어져 現在까지 남아있다.

 

 

단종어보,정순왕후어보

(端宗御寶,定順王后御寶)

 

제6대 端宗大王의 印章과 夫人인 定順王后의 印章

 

 

재실

(齋室)

 

齋室은 平常時 영(令:종5품) 또는 참봉(參奉:종9품)등이 陵域의 管理를 위해 勤務하는곳이며. 祭禮時는 祭冠들이 머무르면서 祭禮를 準備하는 空間이다. 主要 施設은 執務室인 齋室 외에 祭禮를 準備하는 空間이다. 主要施設은 執務室인 齋室 외에 향(香)을 保管하는 安享聽,제기(祭器)를 保管하는 祭器庫, 행랑채 등이 이었으며, 丹靑은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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