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歷 史 旅 行 1/朝鮮王妃陵

長陵(仁祖)

 

 

(長 陵)

 

 

 

坡州 長陵은 朝鮮 16대 仁祖 와 첫번째 王妃 仁烈王后 韓씨의 陵 이다. 仁祖는 推尊 元宗과 仁獻王后 具氏 의 아들로 1623년에 反正으로 王에 올랐다.  在位期間 동안 李适-亂 丁卯胡亂 丙丁虜亂을 겪었으며 軍制를 整備하여 摠戎廳과 守御廳을 새로 만들었다.  仁烈王后는 韓浚謙 의 넷째 딸로 1623년에 王妃 가 되었으며 6남 1녀를  낳았다. 長陵은 처음 1635년 에 仁烈王后가 世上을 떠나자 이듬해 坡州 운천리에 陵을 造成하였고 1649년 仁祖가 世上을 떠나자 雙陵의 形態로 陵을 造成 하였다.  以後 뱀의 被害가 있자 1731년 現在의의 자리로 옮겼다. 옮겨지면서 合葬陵으로 造成 하였다. 

 

 

 

금천교

 

재실

(齋室)

 

이 建物은 仁祖와 仁烈王后 韓씨의 祭享을 準備하는 齋室이다. 齋室은 王陵의 守護와 管理를 위하여 祭官들이 머물면서 祭祀에 관련된  全般的인 準備를 하던 空間 이다.  陵參奉의 執務室인 齋室,香과 祝文을 保管하는 安香廳 祭器를 保管하던 祭器庫와  그 附屬空間인 空間인 行廊 등으로 構成되어 있다.  朝鮮後期의 文獻인 春官通考에 의하면 長陵의 齋室은 典祀廳 8칸  祭器庫 2칸 安香廳  6칸 齋室 5칸으로 構成 되었다고 한다. 

 

 

장릉비문 역문

 

朝鮮 第 16 代王,  李倧, 莊穆 憲文烈武明肅純孝 大王,
莊穆王,  仁祖憲文烈武明肅純孝大王,  仁祖開天肇運正紀宣德憲文烈武明肅純孝大王 

 

"仁祖憲文烈武明肅純孝大王은 萬曆 乙未年(1595. 宣祖 28) 11월 7일(乙亥)에 誕生하여 처음 綾陽君에 奉해졌고, 天界 癸亥年(1623, 仁祖 1)에 卽位하였다. 崇禎 己丑年(1649, 仁祖 27) 5월 8일(丙日)에 昇遐하니 在位는 27년이고 나이는 55세이다. 王妃 明德貞順仁烈王后 韓氏는 萬曆 甲午年(1594, 宣祖  27) 7월 1일(丁丑)에 誕生하여 癸亥年(1623, 仁祖 1)에 王妃로 冊封되었다. 崇禎 己丑年(1635, 仁祖  13) 12월 9일(을유)에 昇遐하니 나이는 42세이다. 처음에는 坡州읍 북운천리에 卯坐로 산등성이는 같으나 血자리를 달리하여 葬事되었다가, 崇禎 紀元 後 103년(1731, 英祖 7 辛亥) 8월 30일(庚申)에 교하 구읍 자좌 언덕에 移葬하고 合葬하였다. 겉(外形)은 임좌이다."

 

 

조선국  :  朝鮮國

인조대왕장릉  :  仁祖大王長陵 仁烈王后 祔左

 

 

신계와 어계

(階.御階)

 

丁字閣으로 올라가는 階段이 있는데 왼쪽은 神의 通路이며 오른쪽은 임금이 오르는 通路이다. 

 

 

홍살문

(紅箭門)

 

 능(陵)·원(園)·묘(廟)·宮殿·官衙 등의 正面 입로(入路)에 세우는 붉은 칠을 한 門.

 

 

인 조

仁 祖

 

朝鮮 제 16대 王이자 宣祖의 孫子로 이름은 倧, 자는 和伯, 호는 松窓. 西人 光海君을 王位에서 내쫓고 擁立했으므로 西人들이 中心이 되어 國政을 運營했으며 反正功臣들의 影響力이 强했기 때문에 王權을 强하게 내세우지 못했다. 仁祖는 中華思想을 重視하는 西人들의 影響으로 親明拜金 政策을 내세웠다. 後金은 丁卯胡亂을 일으켰고, 以後 淸으로 國號를 바꾼 後 丙子胡亂을 일으키자 仁祖는 淸에게 降伏하고 臣下의 關係를 맺었다.  坡州 長陵에는 屛風石과 欄干石이 있는데, 傳統的으로 封墳을 감싸는 12면의 屛風石에는 12 地神床과 구름 文樣을 彫刻 하였지만, 長陵의 屛風石에는 牧丹과 蓮花 文樣이 彫刻되어 있으며.  封墳 바깥쪽으로 12칸의 欄干石을 둘렀으며, 石羊, 石虎 각 2 雙을 交代로 配置 하였다. 

 

 

 

인열왕후

仁烈王后

 

인열왕후 한씨(仁烈王后 韓氏, 1954년 8월 16일 (陰曆 7월  1일 ) ~  1636년  1월  16일 (1635년  陰曆 12 월 9일)은 朝鮮의 제16대 王인 仁祖의 정비(正妃)로, 昭顯世子 제17대 王 孝宗 의 母后 이다. 正式 諡號는 정유명덕정순인열왕후(正裕明德貞順仁烈王后)이며, 本館은 菁州 이다.

 

 

능침

(陵寢)

 

陵 주인이 잠들어 있는곳  능상 (陵上)이라고도 한다.

 

 

정자각

(丁字閣) 

 

祭香을 올리는 곳으로 亭子模樣으로 지은집  祭享을 올릴때 王의 神主를 이곳에 모신다. 丁字閣에 오를때에는 東쪽으로 오르고 내려올때는 西쪽으로 내려오는대 이를 일러 동입서출 (東入西出)이라고 한다.

 

 

참도

(參道)

 

홍살문에서 丁字閣까지 이어진길 薄石을 깔아 놓았으며 왼쪽이 약간 높은 기은 神 이 다니는 길이라 하여 신도 (神道)라고하며 오른쪽 약간 낮은 길은 임금이 다니는 길이라 하여 어도 (御道)라고 한다.

 

 

소현세자

(昭顯世子)

 

仁祖의 맏아들인  昭顯世子는 丙子胡亂때 나라에 불모로  잡혀갔다가  9년 만에 돌아왔다 이때 百姓들이  양칠평(지금의마포부근)에서 弘化門 앞까지 가득메우고  눈물을 흘렸다는 記錄이 있다.  나라에 머무르는 동안  昭顯世子는  단순히人質이 아니라 外交官의 役割을 해냈으며 西洋의 發展된  文物을 접하면서 장차 朝鮮을  새롭게 變革 시키겠다는  원대한 꿈을 품었다.  그러나 歸國한지 두 달만에 病이나 病席에 누운지 3일만에 昌慶宮 歡慶殿에서 世上을 떠났다.  死亡 당시 昭顯世子는  새까맣게 變해 있었고 뱃속에서는 피가 솓아졌다고 한다. 여타 情況으로 미루어 나라의 新任을 얻고 있던 世子를 毒殺 했다는  主張이 대두되고 있다. 昭顯世子가 王이 되었다면  우리나라 近代史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로 昭顯世子의 갑짝스러운 죽음은 안타까운 일이 아닐수 없다. 

 

 

 

'歷 史 旅 行 1 > 朝鮮王妃陵' 카테고리의 다른 글

金浦章陵(元宗.仁獻王后)  (0) 2022.04.27
宣.靖陵(成宗.中宗,貞顯王后)  (0) 2021.11.03
思陵 (定順王后)  (0) 2010.10.31
光海君墓  (0) 2010.10.31
燕山君墓  (0) 2010.08.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