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歷 史 旅 行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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德壽宮 덕수궁 (德壽宮) 大韓帝國의 正宮이었던 德壽宮은 史蹟 제124호. 朝鮮의 5대 宮闕 중에서 가장 規模가 작은 것으로 朝鮮末 高宗이 살던 곳이다. 宮闕의 자리는 원래 成宗의 兄인 月山大君의 집이 있었던 곳으로 先祖가 壬辰倭亂 직후 臨時 居處로 使用하면서 行宮이 되었다. 光海君은 이곳에서 卽位한 뒤 1611년 10월 慶運宮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1615년(光海君 7) 昌德宮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빈 宮闕이 되었으며 1618년 仁穆大妃가 이곳에 幽閉되면서 西宮으로 불렸다. 인조는 이곳 별당에서 즉위했으나 昌德宮으로 居處를 옮기는 바람에 다시 빈 宮闕이 되었다. 1896년 俄館播遷으로 王太后와 王太子妃가 이곳으로 옮겨와 生活했으며 1897년 高宗이 러시아 領事館에서 이곳으로 居處를 옮기면서 본격적인 宮闕建物의 建..
景福宮 경복궁 (景福宮) 史蹟 제117호. 現在 서울에 있는 朝鮮時代 5代 宮闕 中 正宮에 해당하는 것으로 北쪽에 자리하고 있어 北闕로도 불린다. 朝鮮王朝를 연 太祖 李成桂가 漢陽으로 都邑을 定하고 가장 먼저 한 일 중의 하나가 景福宮을 만드는 일이었다. 1394년(太祖 3) 12월 4일 始作된 이 工事는 이듬해 9월 重要한 殿閣이 大部分 完工되었다. 宮의 이름은 〈시경 詩經〉에 나오는 王朝의 큰 福을 빈다는 뜻으로 '군자만년개이경복'(君子萬年介爾景福)에서 따왔다. 5대 宮闕 중 가장 먼저 지어졌으나 이곳에 王들이 머문 기간은 1405년(太宗 5) 지어진 一種의 別宮인 昌德宮에 비해 훨씬 짧다. 世宗·文宗·端宗이 이곳에 주로 起居했으며, 王子의 亂으로 인한 開城遷都 기간 동안 빈 宮闕이었다. 王위를 簒奪한 世祖..
百濟王陵苑 백제왕릉원 (百濟王陵苑) 백제왕릉원(百濟王陵苑)은 扶餘邑 陵山里에 位置한 陵山里 山의 중턱에 있는 무덤들로 古墳의 겉모습은 모두 元型奉 土墳이고,內府는 窟室 突放 무덤으로 百濟後記 寺婢時代의 墓祭를 살필수 있는 좋은資料와 王과 王族(百濟 26대 成王과 관련된 王陵), 그리고 上流層의 墳墓로 王과 王族(百濟 26대 成王과 관련된 王陵), 그리고 上流層의 墳墓로 推定된다고 합니다. 陵山里 山의 중턱에 있는 무덤들로 앞뒤 2줄로 3기씩있고 뒤쪽제일높은곳에 1기로 모두7기로 이루어져있다 古墳의 겉모습은 모두圓峯形 土墳이고 內部는 널길이 붙은 窟式突放무덤(橫穴式 石室墳)으로 뚜껑돌 아래는 모두 地下에 만들어 百濟後期의 寺婢時代의 墓祭를 살필수있는 좋은資料 로서 位置와 規模로보아 王과 王族,上流層의 墳墓로 推定된다..
金庾信將軍墓 김유신 (金庾信) 金庾信은 금관가야(金官伽倻) 마지막王인 구형왕(仇衡王)의 증손(曾孫)으로 15세에 花郞이 되었으며 武藝와 智略이 뛰어나 나라에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앞장서서 指揮하였다. 신라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 7년 (660)에 羅唐 연합군(羅唐 聯合軍)이 結成 되었을때 新羅軍 總司令官이 되어 百濟를 倂合하였고 이어 문무왕(文武王) 8년(668)에는 高句麗를 倂合하였으며 韓半島 全體를 復屬시키려는 野心을 가지고 있던 唐나라 軍事도 물리쳤다. 文武王 때에는 태대각간(太大角干)이라는 관작(官嚼)을 받았고 뒷날 흥덕왕(興德王)때에는 흥무대왕(興武大王)으로 推捧되었다. 陵은 믿둘레가 50 m 지름이 18 높이는 5.3 m 인데 아래쪽에는 높이 1.2 m 의 십이지상(十二支神像)을 새긴 保護石이 둘러져 있다...
太宗武烈王陵 태종무열왕릉 (太宗武烈王陵) 新羅 태종무열왕(太宗武烈왕 在位 654 ~ 661)의 偉大한 業績을 기리기 위해 세운 것이다. 이 碑는 武烈王陵의 左側에 位置하고 잇다 現在 빗돌(碑身)은 없어지고 거북模樣의 받침돌(龜?)과 용을 새긴 머릿돌 만 남았다. 길이 333 cm 너비 254 cm 높이 86 cm 이며 거기에 彫刻된 돌 거북은 목을 높이 처들고 발을 기운차게 뻗으며 힘차게 앞으로 나가는 모습으로 新羅人의 進就的인 奇想을 잘 보여주고있다. 눞이가 110 cm 인 머릿돌 左右에는 여섯마리의 龍이 서로 세 마리씩 뒤엉켜 如意珠를 몰고있는 모습이다. 앞면 中央에 武烈王의 둘째 아들 김인문(金仁問)이 쓴 태종무열왕지비(太宗武烈大王之碑)라는 글이 돋을새김되어 있어 비의 主人公을 밝혀 주고있다. 이 비는 表現이 ..
慶州古墳郡(大陵苑) 대릉원 (大陵苑) 경주시내를 멀리서 바라볼때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집들사이로 우뚝우뚝 솟아있는 거대한 고분들이다 지금부터 천년도 넘는 시절에 살았던 옛 사람들과 오늘을 사는 사람들의 터전이 한테 어울려 있기에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신비감이 더 진하게 느껴진다. 특히 경주의 고분들이 평지에 자리잡고 있는것은 당시의 다른지역들에 견주어서도 특이한 점이라 하겠다. 남산의 북쪽에서부터 국립경주박물관 자리와 반월성을 거쳐 황오동,노동동,노서동,으로 이어지는 평지에는 고분들이 집중적으로 모여있다. 그 가운데 약 12만 5,400 평의 평지에 23개의 능이 솟아있는 황남동 대릉원은 고분군의 규모로는 경주에서 가장 큰능 이다. 대릉원 (大陵苑) 慶州市內를 멀리서 바라볼때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집들 사이로 우뚝우뚝 솟아..
朝鮮王祖/宗廟 朝鮮王祖 500年  朝鮮의 王과 王妃 神主를 모신宗 廟  宗廟는 儒學을 基盤으로 建國한 朝鮮王朝가 歷代 王과 王妃 그리고 추존된 王과 王妃의 神主를 모시고 祭祀를 奉行하던 곳이다. 조선시대에는  지금의 正殿을 宗廟라 하였으나 현재는 正殿과 永寧殿을 합쳐 宗廟라부른다. 正殿과 永寧殿은  長石과 技巧를 節制하여 단조로워 보이지만 이는 王室의 祭祀를 모시는 空間이기에 尊嚴하고 神聖한 雰圍氣를 위한 意圖的인 裝置이다. 正殿에는 태조의 神主를 비롯하여 功德이 있는 歷代  王과 王妃 49분의 神主를 모시고 있고 永寧殿에는 太祖의 4 대조를 비롯하여 朝鮮의  王과 王妃 그리고 推尊된  王과 王妃 34 분의 神主를 모시고 있다. 宗廟는 建物과 더불어 建物및 祭禮樂을 그대로  保存하고 있다. 이러한 理由..
聖雄李舜臣將軍墓 이순신 (李舜臣) 忠武公 李純信將軍은 1545년 4월 28일 서울에서 出生하셨으며 壬辰倭亂 때 三道水軍 統制使로서 거북선을 創製하여 옥포,당포,당항포, 閑山島 앞바다외 釜山,明朗,古今島 등 海戰에서 外船 數百척과 倭兵 數萬名을 무찔러 나라와 겨레를 求하셨다. 이 忠武公은 露梁海戰에서 敵軍을 椎擊중 敵의 榴彈에 맞아 54세를 一期로 1598년 12월 16일 南海 海上 觀音浦 에서 戰死 하였다. 將軍의 墓所는 처음 牙山郡 금성사에 모셨다가 16년후 인 光海君 (1614년) 에 이곳에 옮겨 모셨다. 李舜臣 將軍은 一平生 定義를 實踐함에 있어, 조금도 不意와 妥協하지 않는 올곧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武官으로서 항상 功과 事를 嚴格히 區分하였으며, 옳다고 생각되는 일에는 上官이나 權力者에게도 서슴없이 誤謬를 指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