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歷 史 旅 行 1/王 宮

昌德宮

(昌德宮)

 

 

朝鮮時代 宮闕 가운데 하나로 太宗 5年(1405)에 세워졌다. 당시 宗廟·社稷과 더불어 正宮인 京福宮이 있었으므로, 이 宮은 하나의 別宮으로 만들었다. 임금들이 京福宮에서 주로 政治를 하고 百姓을 돌보았기 때문에, 처음부터 크게 利用되지 않은 듯 하다. 壬辰倭亂 以後 京福宮·昌慶宮과 함께 불에 타 버린 뒤 第一 먼저 다시 지어졌고 그 뒤로 朝鮮王祖의 가장 中心이 되는 正宮 역할을 하게 되었다. 火災를 입는 경우도 많았지만 제때에 다시 지어지면서 대체로 元來의 宮闕 規模를 잃지 않고 維持되었다. 임금과 臣下들이 政事를 돌보던 外殿과 王과 王妃의 生活空間인 內殿, 그리고 休息空間인 後園으로 나누어진다. 內殿의 뒤쪽으로 펼쳐지는 後園은 울창한 숲과 연못, 크고 작은 丁字들이 마련되어 自然景觀을 살린 점이 뛰어나다. 또한 우리나라 옛 先賢들이 庭園을 造成한 方法 등을 잘 보여주고 있어 歷史的으로나 建築史蹟으로 貴重한 價値를 지니고 있다. 160여 종의 나무들이 울창하게 숲을 이루며 300년이 넘는 오래된 나무들도 있다. 1917년에는 大造殿을 비롯한 寢殿에 불이 나서 熙政堂 등 19동의 建物이 다 탔는데, 1920년에 日本은 京福宮의 交泰殿을 헐어다가 大造殿을 다시 짓고, 康寧殿을 헐어서 熙政堂을 다시 짓는 등 京福宮을 헐어 昌德宮의 建物들을 다시 지었다. 지금까지 남아있는 建物 중 宮闕 안에서 가장 오래된 建物은 正門인 敦化門으로 光海君 때 지은 것이다. 正宮인 京福宮이 秩序精硏 한 對稱構圖를 보이는데 비해 昌德宮은 地形條件에 맞추어 自由로운 構成을 보여주는 特徵이 있다. 昌德宮과 後園은 自然의 順理를 尊重하여 自然과의 調和를 基本으로 하는 韓國文化의 特性을 잘 나타내고 있는 場所로, 유네스코의 世界文化遺産으로 登錄되어 있다.      

 

 

 

돈화문

(敦化門)

 

寶物 제383호. 1412년(太宗 12)에 昌建되었고, 1451년(文宗 1)과 1506년(燕山君 12)에 改造하여 더 크게 만들라는 王命이 있었다는 記錄을 통해 처음에는 지금보다 작은 規模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또한 이는 別宮이었던 昌德宮이 점차 正宮의 구실을 하게 되면서 正門을 보다 威嚴있게 만들 必要性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壬辰倭亂 때 불탄 것을 1608년(光海君 1) 다시 지었고, 1721년(景宗 1) 東쪽 아래·위층 부연을 修理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앞면 5칸, 옆면 2칸의 2층 우진각지붕을 한 樓門이다. 돌계단이 있는 長臺石 基壇 위에 세워졌는데 基壇은 現在 아스팔트 包裝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다. 다른 宮闕의 門이 앞면 3칸인 데 비해 이 門은 2칸이 더 넓으며, 아래층은 12개의 평주와 4개의 고주로, 위층은 12개의 병연주와 2개의 고주로 이루어져 全體的으로 建物이 옆으로 퍼진 느낌을 준다. 다포계로 아래·위층 모두 내3출목·외2출목으로 되어 있고, 아래층은 우물천장, 위층은 燃燈天障이며, 階段은 左右측 툇간의 끝에 있다. 지붕마루는 양성을 하였으며, 취두(鷲頭)·용두(龍頭)·잡상(雜像)을 올려놓고 사래의 끝에는 吐首를 씌웠다. 朝鮮 중기 성문建築의 特徵을 보여주는 代表的인 宮闕의 樓門이다.    

 

 

진선문

(進善門)

 

 進善門에는 太宗代와 英祖代에 북을 設置하여 억울한 일이 있는 百姓들이 와서 치면 王이 직접 解決해준다는 申聞鼓 혹은 登聞鼓가 있었다고 傳한다. 한편 進善門 懸板 글씨는 1999년 復元 당시 書藝가 정도준씨가 썼다.

 

 

금천교

(金川橋)

 

1411년(太宗11년)에 築造된 돌다리.  朝鮮의 宮闕에는 共通的으로 初入部에 風水地理常 길한 明堂水를 흐르게 하고 그위에 돌다리를 놓음.

 

 

호위청

(扈衛廳)

 

朝鮮 後期에 設置된 軍營의 하나. 1623년(仁祖 1) 宮中을 守護하기 위하여 設置했다. 扈衛廳은 元來 仁祖反正에 참여한 功臣들이個人的으로 거느리고 있던 反正 軍事力을 正規兵力으로 公認하는 課程에서 成立되었다. 扈衛廳은 4名의 勳臣 또는 戚臣이 扈衛大將이 되 各 大將이 100명의 軍官을 거느리고 宮中의 깊은 곳에서 國王을 扈衛하는 任務를 맡도록 하여, 각 大將이 1청씩 맡아 모두 4청으로 構成되었다. 그런데 以後 御營廳 ·총융청總戎廳 등의 新軍營이 設置되는 課程에서 扈衛廳 所屬의 軍官들이 신군영의 基幹 要員으로 빠져나가 位置가 弱化되었다. 이에 따라 顯宗 때는 3청으로 줄었고, 肅宗 때 4청으로 回復되었다가 다시 3청으로 還元되었다. 이때 扈衛廳의 官員으로는 各 廳마다 大將:정1품 3명, 별장(別將:정3품) 3명, 군관(軍官) 350명, 소임군관(所任軍官) 3명, 당상별부료군관(堂上別付料軍官) 1명이 있었다. 扈衛廳의 大將중 1명은 국구(國舅:國王의 장인)가, 2명은 훈신·척신인 대신이 兼職하는 것이 常例였다.

 

 

숙장문

(肅章門)

 

進善門을 지나면 長方形의 마당을 따라 마주보이는 것이 肅章門이다. 이 肅章門 역시 成宗 6年(1475) 左贊成 서거정이 門 이름을 지어올린 거슬, 成宗이 落點하여 지었다고 한다. 1820년대 그려진 <東闕圖>에 따르면 肅章門과 進善門 사이 南쪽 行脚에는 內兵曺, 扈衛廳, 尙瑞院등을 볼 수 있다. 이는 仁政門 뜰과 조정 마당에서 公式的인 宮中 意識이 많이 치러졌기 때문으로 推定된다.

 

 

인정문

(仁政門)

 

仁政門은 昌德宮의 中心 建物인 仁政殿의 正門이다. 孝宗, 顯宗, 肅宗, 英祖 등 朝鮮王祖의 여러 임금이 이곳에서 卽位式을 擧行하고 王位에 올랐다. 王位를 이어받는 意識이 擧行되던 곳으로, 正殿 인 仁政殿과 함께 朝鮮王祖 宮闕의 威嚴과 格式을 가장 잘 간직하고 있는 建築物이다. 仁政門은 朝鮮 英祖 20年(1744) 10월 承政院 火災 때 左右 行閣과 함께 消失되어 이듬해 3월에 再建한 것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인정전

(仁政殿)

 

國寶 제225호. 平面은 앞면 5칸, 옆면 4칸이며, 重層이나 內部는 通層으로 되어 있다. 1405년에 建立되었으며, 壬辰倭亂 때 消失되자 1610년에 重建했고, 1803년(純祖 3)에 불탄 것을 다음해에 復元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長臺石으로 바른층쌓기한 2단의 월대 위에 다시 長臺石 基壇을 쌓고 다듬은 礎石을 놓아 두리기둥을 세워 공포를 기둥 위와 기둥 사이의 평방 위에 짜놓은 多包式 建物이다. 바닥은 쪽마루이나 원래는 전을 깔아 마감한 전바닥이었으며, 처마는 겹처마이고, 용마루와 합각마루는 양성을 했으며 용마루 양 끝에는 취두를, 합각마루와 추녀마루 끝에는 용두를 얹고, 추녀마루 위에는 雜像을 늘어놓아 粧飾했다. 특히 용마루에 5개의 李花紋章의 粧飾을 두었는데 이것은 1930년대에 日帝가 設置한 것이다.

 

 

인정전

(仁政殿)

 

仁政殿과 仁政門 사이의 空間에는 中央이 높고 양쪽이 낮은 어도가 있고, 그 左右에 18品의 品階石이 있으며 마당에는 넓고 얇은 돌을 깔아 마무리했다.

 

 

인정전

(仁政殿)

 

공포는 외3출목·내4출목으로 살미첨차의 바깥은 날카로운 앙서로 되어 있고, 안쪽은 구름 모양으로 초각되어 기둥 윗몸에 놓은 雲工과 調和를 이루고 있다. 下層 축부의 中央과 뒤쪽 中央에 門짝을 달기 위해 문지방만을 놓았으나 나머지 모든 칸에는 소슬빗꽃살창을 달기 위해 높은 머름을 짜넣었다. 상층에는 교창만을 짜넣었다.

 

 

어 좌

(御座)

 

中央칸 안두리기둥 사이에 補佐를 마련하고 그 위에 御座를 設置하였다. 御座 뒤에는 日月五岳屛風을 背景으로 삼아 四龍首를 彫刻한 三折屛을 두었다. 御座 의 上部에는 四角 平面에 多出目의 작은 공포를 짜고 네 귀를 모접이 한 뒤 다시 다출목의 작은 공포를 짜서 이른바 抹角天障形式의 寶蓋를 마련하였다. 그 中央에는 雙龍과 여의보주를 彫刻하였다. 보좌는 覆蓮과 仰蓮을 새긴 연화대좌를 받침으로 하되 대좌의 옆면은 3단의 궁판으로 나누었다. 조롱동자처럼 彫刻한 동자를 사용해서 궁판을 구획하고 여기에 風穴을 새기고 그 사이에 寶相華文을 彫刻하였다. 대좌 위에는 난간을 두었는데, 鷄子脚 사이 아랫부분에는 鬼面을 2구씩 두고 그 상부에는 風穴을 彫刻하였다.

 

 

선정전

(宣政殿)

 

王이 高位職 臣下들과 함께 日常業務를 보던 公式 執務室인 便殿으로 地形에 맞추어 正殿 東쪽에 세워졌다. 아침의 調整會議,業務報告 國政세미나인 경인등 各種 會議가 이곳에서 每日 열렸다. 昌建 당시에는 조계청이라 불렸는데 1461년 (世祖7)에 政治는 베풀어야 한다.는 뜻의 宣政殿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壬辰倭亂과 仁祖反正 등의 火災로 消失되었다가 1647년 (仁祖25)에 仁王山 기슭에 있던 인연궁을 헐어 그 材木으로 再建 하였다. 주위를 둘러싼 行閣들은 秘書室 附屬室로 利用했으나 全體的으로 비좁았다. 昌德宮 建物중 唯一하게 지붕에 값비싼 靑기와를 올려 이곳이 임금의 執務室임을 象徵하고 있다.

 

 

선정문

(宣政門)

 

宣政殿과 宣政門 사이에 壁體가 없는 복도각 建物이 있는데 이 복도는 혼전을 위해 마련된 施設이다. 現在 寶物 814호로 指定 되어 있다.

 

 

인정전

(仁政殿)

 

純宗 때 西洋式 建築의 室內洋式이 들어오면서 西洋式의 커튼박스·電燈施設 ·電燈갓 등으로 粧飾되었다. 平面의 中央 어칸 뒤쪽에는 御座가 마련되어 있고 그 뒤로 日月五岳屛風이 있다. 天障은 우물天障으로, 특히 中央에 보개天障을 만들고 鳳凰새 1雙을 그려 威嚴을 더했다.

 

 

희정당

(熙政堂)

 

仁政殿이 昌德宮의 象徵的인 全閣이라면 熙政堂은 王이 가장 많이 머물렀던 실질적인 中心建物이라 할수있다. 원래이름은 崇文堂이었으나 1496년 (燕山2)에 熙政堂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元來의 便殿인 宣政殿이 비좁고 종종 국장을 위한 혼전으로 쓰이면서 寢殿이었던 熙政堂이 便殿의 技能을 代身하게 되었다. 지금의 熙政堂은 1917년 火災로 消失 된것을 1920년에 復舊하면서 景福宮에 있던 康寧殿을 옮겨 지은것이다. 東闕圖에 그려진 元來의 熙政堂은 여러개의 돌기둥위에 세운 아담한 누마루집 이었고 마당에 연못도 있었다. 지금의 熙政堂은 이 모습은 完全히 다르고 元來의 康寧殿과도 다르다. 再建된 熙政堂 內部는 쪽마루와 카펫 유리窓門 天障에 상들이제 등을 設置하여 西洋式으로 꾸며졌다. 寶物 815로 指定되었다. 

   

 

효명세자

(孝名世子)

 

熙政堂은 純祖의 아들이며 顯宗의 아버지인 孝名世子가 昇遐한 곳이기도 하다. 외모와 聰明함은 물론이고 冊을 좋아하는 모습까지 할아버지 정조를 빼닮았다고 전해지는 孝名世子  純祖의 영으로 19세에 代理聽政을 時作한 孝名世子는 安東 金씨 勢力과 맞서 참신한 人才를  登用하고 改革政治를 펼쳤다. 그러나 아버지의 希望 할아버지의 이상 그리고 朝鮮 百姓 등의 念願을 채우지 못한채 22세 나이로 꽃다운 나이로 夭折하고 말았으니 政事를 돌본지 겨우 3년 3개월 만이었다. 孝名世子는 後園에  작은 공부방인  倚斗閣을 짓고 이곳에서 獨書를 즐겼다.

 

 

어차고가된빈청

(御車庫賓廳)

 

宣政殿 앞에 御車庫로 쓰이던 建物은 元來 賓廳이었다. 賓廳은 政丞判書급 高位官僚들이 王을 만나기 前後에 머무르면서 國事를 論議하던 곳이다. 宮闕에 드나드는 官員 가운데 가장 高位 官員들의 空間이었기에 闕內 官廳으로 規模가 꽤컸다. 西쪽과北쪽에 담장을 두르고 마루와 온돌방을 갖추었으며 화장실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 남아있는 賓廳은 外形과 쓰임새 모두 옛 모습과 전혀 다르다. 賓廳은 수종이 昌德宮에 起居할때 車庫로 바뀌었다.

 

 

조전

(大造殿)

 

寶物 제816호. 1405년에 建立되었으며 壬辰倭亂 때 불탄 것을 光海君 때 重建했다. 仁祖反正 때 다시 消失된 것을 1647년에 다시 지었고, 1833년에 또다시 火災로 消失된 것을 復元 했다. 1917년에 원인을 알 수 없는 불이 나자 日本人들은 京福宮의 수천 칸 全閣들을 헐어낸 材木으로 大造殿과 그 일곽을 復元 했다.

 

 

흥복헌

(興福軒)

 

大造殿 역시 王妃의 寢室이 었으나 火災로 인하여 京福宮의 交泰殿을 옮겨오면서 西편은 王妃의 東편은 王의 寢室이다. 東편의 興福軒은 1910년  마지막 御殿會議 열어 庚戌 國恥가 決定되었던  韓日合邦의 場所이다.

 

 

을사보호조약체결

(乙巳保護條約)

 

 

수라간

(水剌間)

 

임금의 진지를 짓던 마지막 廚房

 

 

앙부일구

(仰釜日晷)

 

仰釜日影이라고도 한다. 네 발 달린 半球形의 솥처럼 생겼기 때문에 仰釜라는 이름이 붙었다. 이것은 〈원사 元史〉 天文志  仰儀 에 있는 곽수경법 郭守敬法 에 의해 만들었다고 하나 仰儀  와는 다르다. 우리나라에서는 世宗 때 처음 만들었으며 以後 朝鮮末까지 繼續해서 만든 代表的인 해시계로 公證용으로 設置해놓는 것과 작게 만들어 携帶할 수 있는 것이 있다

 

 

경훈각

(景熏閣)

 

아궁이

 

가마나 방, 솥, 구덩이 같은 데에 불을 때기 위하여 만든 구멍.

 

 

 

굴뚝

 

반월문

(半月門)

 

樂善齋 後園은 西쪽 승회루 庭園과 連結되는데 그 사이 담장에 특이 하게도 원형의 半月門을 만들었다. 建物과 後園사이에는 작은 石築들을 階段式으로 쌓아 花草를 심었고 그 사이사이에 洗練된 굴뚝과 怪石들을 配列 하였다. 宮闕의 品格과 女人의 空間 특유의 아기자기함이 어우러진 代表的인 庭園이다.

 

 

      

(樂善齋)

 

英親王은 高宗의 일곱번째 아들로 어머니는 純獻皇貴妃 嚴氏이며 純宗의 異腹동생이다. 이름은 垠 이고 이명은 酉吉이다. 1907년 11세의 나이로 皇太子에 冊封되었으나 12월 留學이라는 名目으로 日本에 人質로 끌려갔다.  1920년 日本에 의해 메이지 天皇의 조카이자 皇族 나사모토의 딸인 미사코(方子)와 政略 結婚하게 되었다. 英親王妃는 메이지 天皇의 조카 나사모토노미아 모리마사와 이쓰코 사이의 長女로 도쿄에서 태어났으며 이름은 마사코 이다 1916년 英親王과 約婚하였고 1920년 學習園 女子高等學敎를 거쳐 같은해 4월 28일 도쿄에서 結婚式을 올렸다. 英親王妃는 結婚後 英親王의 性을 따라 李方子 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朝鮮王祖 마지막 英親王 李垠이 1963 년부터 1970년까지 살았으며, 1966년부터 1989년까지는 李方子 女史가 起居하였다,

 

 

낙선재

(樂善齋)

 

憲宗에 뜻에 따라 丹靑을 하지 않았다. 樂善齋의 懸板은 淸나라의 대가 섭지선의 글씨이다. 大廳마루 앞 柱聯에는 秋史 金正喜의 스승인 옹방강의 글씨도 있다. 朝鮮王祖 마지막 英親王 李垠이 1963 년부터 1970년까지 살았으며, 1966년부터 1989년까지는 李方子 女史가 起居하였다,

 

 

한정당

(閒靜堂)

 

樂善齋 後園 에 있는 閒靜堂은 조용하고 한적한 집이라는 뜻이다. 

 

 

 

樂善齋 後園

 

운하연지

(雲下硯池)

 

구름 아래 벼루 연못

 

 

상랑정

(上凉亭)

 

마치 매가 날개를 편것같이 날렵한 모습이다. 平圓樓 다 懸板은 上凉亭이라 적혀 있다. 東宮들의 書籍을 保管하던 書庫 이다.

 

 

수강재

(壽康齋)

 

大妃(純元王后)가 居處하던곳

 

 

의두각

(倚斗閣)

 

倚斗閣 오른 쪽 倚斗閣은 寄傲軒 보다 작은 倚斗閣은 안에 한 사람이 누울 空間도 없을 정도이다.두 곳 모두 그늘진데다가 北쪽을 向하고 있어서 겨울에는 눈이 늦도록 녹지 않고 쌓여 있다. 이 곳 역시 孝名世子가 즐겨 찾았던 곳이다. 寄傲軒 처럼 민도리집으로 홑처마 팔작지붕을 이루고 있다.丹靑을 하지 않은 소박한 白骨宅으로 正面 2칸, 側面1칸의 극히 작은 平面을 이루고 있다.  할아버지인 貞祖를 본받아 젊은 人才들을 登用하고 改革政治를 펼치려했던 孝名世子는 안타깝게도 3년 3개월이란 짧은 代理聽政을 끝으로 아버지 純祖의 希望을 펴지 못하고 1830년 5월 6일 22세 나이로 世上을 떠나게 된다. 

 

 

기오헌

(寄傲軒)

 

昌德宮 後園, 奎章閣 뒷편에 위치  寄傲軒 왼쪽   寄傲軒 은 순조(純祖, 23대)의 아들 孝明世子가 지은 집이며 때때로 독서를 즐기던 곳이다.장대석을 한벌로 두른 낮은 기단위에 네모 뿔대의 다듬은 初石을 놓고 네모 기둥을 세워 납도리로 결구한 민도리 집으로 홑처마의 팔작지붕을 이루고 있다. 단청을 하지 않은 극히 소박한 집으로 정면 4칸, 측면3칸의 방형 평면으로 왼쪽 1칸폭이 온돌방이고, 중앙 2칸폭이 우물마루의 대청이고, 오른쪽 1칸폭이 누마루이다.

 

 

영화당

(暎花堂)

 

暎花堂에서는 王이 入會하는 特別한 科擧試驗을 치르기도 했다. 暎花堂은 東쪽으로 春堂 대마당 을 西쪽으로는 芙蓉池를 마주하며 앞뒤 에 뒷마루 를 둔 특이한 建物이다. 休息을 위한 芙蓉亭은 연못에 발을 담그고 있는 形象이고 行事가 치러지던 暎花堂은 연못에 면해 있으며 學文을 硏磨하던 宙合樓는 높은곳에서 연못을 내려다 보고있다.

 

 

부용정

(芙蓉亭)

 

北쪽 연못에는 정자의 두리기둥 礎石들이 물 속에 있어 韻致를 더하고 있다. 바닥은 우물 마루이고 툇마루에는 아름다운 평난간을 돌렸다. 芙蓉亭 앞의 芙蓉池는 네모난 模樣이고 연못의 가운데에 둥근 섬이 있으니 이는 神仙들이 논다는 三神仙山의 하나인 방장(方丈)이나 봉래(蓬萊) 또는 영주(瀛州)를 象徵한 것으로 보인다. 연못에는 西北쪽 溪谷의 물이 龍頭로 된 石漏槽를 채우고 넘치는 물은 연못의 東쪽 돌벽에 있는 出水口로 흘러나가도록 되어 있다.

 

 

부용지

(芙蓉池)

 

규장각

(奎章閣)

 

朝鮮 貞祖 卽位年 (1776)에 設置한 王室 圖書館 歷代 임금의 글이나 고명 (顧命)유교(遺敎)선보(瑄譜)보감(寶鑑)따위와 어진(御眞)을 保管하고 많은 冊을 編纂 印刷 頒布하여 朝鮮後期의 문운(文運)을 불러 일으키는 中心 역활을 하다가 1894년 甲午改革때 廢止하였다.

 

 

어수문

(漁水門)

 

높은 언덕위에 있는 宙合樓로 오르는 正門이 漁水門 이다.  물고기가  물을 떠나서 살수없다.는 格言과 같이 統治者는 항상 百姓을 생각하는 敎訓이 담긴 門으로 貞朝의 미본政治 哲學을 보여준다. 큰 門 하나와 左右로 작은 문 두개로 나누어진 모습도 독특하다.

 

 

주합루

(宙合樓)

 

宙合樓는 貞祖가 卽位한 1778년에 創刊한 2층 樓閣이다. 아래층에는 王室 直屬 圖書館인 奎章閣을 위층에는 閱覽室겸 누마루를 만들었다. 奎章閣이란 文章을 擔當하는 하늘의 별인규숙 (奎宿)가 빛나는 집이란 뜻이고 宙合樓란 天地宇宙와 通하는 집이란 뜻이다.

 

 

궁궐의정원

(宮闕의庭園)

 

이곳은 첫 번째 中心의 庭園으로 休息뿐 아니라 學文과 敎育을 하던 비교적 公開된 場所이다. 300평 넓이이 四角形 연못인 芙蓉池를 中心으로 여러建物이 있다. 宙合樓 일원의 奎章閣 書香閣 등은 王室 圖書館 用途로 쓰였고 暎花堂 에서는 王이 立會하는 特別한 科擧試驗을 치르기도 했다.

 

 

부용정

(芙蓉亭)

 

1707년에 지은 택수재를 1792년(貞祖 16)에 고쳐 지으면서 芙蓉亭이라 했다. 平面構造는 앞면 3칸, 옆면 4칸의 아(亞)자형을 基本으로 하면서 그 南쪽 面의 一部가 突出되어 있다. 長臺石 基壇 위에 다듬은 8각형의 礎石을 놓고 圓柱를 세우고, 기둥 위에는 주두와 익공 2개를 놓아 굴도리를 받치고 있는 이익공집이다. 처마는 부연을 단 겹처마이고, 지붕은 팔작지붕이다. 정자의 기단 南면과 양측면에 階段을 두어 툇마루로 오르게 되어 있으며,정자 北측에 파놓은 넓은 연못[方池]를 向하도록 되어 있다.

 

 

불로문

(不老門)

 

이문을 通하는자는 늙지 않는다. 京福宮 電鐵驛에 模造品이 設置되어 있다. 이 門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디긋자형의 돌이 이은자국이 없다. 原石의 크기를 짐작할수 있으며 돌기둥에 門을 달았던 痕跡을  볼수 있다.

 

 

애련정

(愛蓮亭)

 

1629년 (肅宗 18년)에 연못 가운데 섬을 쌓고 정자를 지었다고 하는데 지금 그 섬은 없고 정자는 연못 북쪽 끝에 걸쳐 있다. 연꽃을 특히 좋아하는 肅宗이 이 정자에 애련(愛蓮) 이라는 이름을 부여 연못은 愛蓮池가 되었다. 肅宗은 내 연꽃을 사랑함은 더러운 곳에 처하여도 맑고 깨끗하여 은연히 君子의 德을 지녓기 때문이다. 라고 새정자의 이름을 지은 까닭을 밝혀 놓았다. 애련지 서쪽 연경당 사이에 또하나의 연못이 있는데 원래 이곳에 漁水堂 이라는 정자가 있었다. 하나 지금은 없어졌다.  1827년 (純祖 27년)孝名世子는 愛蓮池 南쪽에 倚斗閣을 비롯한 몇 개의 建物을 짓고 담장을  쌓았다. 現在 寄傲軒 이라는 現版이 붙은 倚斗함은 4칸 의 短出한 書財로 丹靑도 없는 매우 소박한 建物이다. 바로 옆의 운정거는 闕安에서 가장작은 한칸 반짜리 建物이다.

 

 

연경당현판

(演慶堂懸板)

 

연경당

(演慶堂)

 

昌德宮 演慶堂은 孝名世子(1809~1830)가 勢道政治에 시달리는 아버지 純祖를 즐겁게 하기 위한 孝道의 次元에서 昌德宮 後園에  建立한 것으로 어머니인 元王后의 生日 祝賀 진작(進爵:술잔을 올리는 의식)  行事와 각종 정재(呈才:궁중 행사용 춤과 노래)公演이 擧行되었던 곳으로 경축(慶祝)行事를 연행(演行)한다는 意味에서   연경당(演慶堂)이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합니다 지금의 演慶堂은 高宗이 1865년쯤에 새로지은 것으로 推定된다.士大夫 살림을 본떠 王의 사랑채와 王妃의 안채를 中心으로 이루어졌으며 丹靑을 하지 않았다.  사랑채와 안채가 분리되어 있지만 내부에는 連結되어 있는점도 類似하다 그러나 一般民家가 99칸으로 規模가 制限된 데비해 演慶堂은  120여칸이어서 차이가난다. 書材인  善香齋 는 靑나라풍 벽돌을 使用하였고 銅板을 씌운 지붕에 도르래식 차양을 設置하여 이국적인 느낌이 든다.

 

 

사랑채

(舍廊棟)

 

舍廊棟는 男性들이 生活하는 집채인데 普通 女性들이 居處하는 안채와 딴채로 짓는데 안채와 연이어 짓는 경우도 있다. 사랑채는 주인이 낮에 거처하며 손님을 맞이하는 사랑방과 이 사랑방을 드나들 때 전실처럼 쓰이고 여름철에 많이 이용되는 큰 마루 그리고 여름의 거처인 누마루 취침때 쓰는 침방으로 구성된다. 연경당 (演慶堂) 사랑채는 길게 다듬는은 돌로 만든 기단위에 주춧돌을 놓고 네모기둥 (方柱)을 세워 단면이 원형인 굴도리를 받치고 단면이 사각형인 민도리를 올려 지은집 으로 네귀에 모두 추녀를 단 팔작지붕을 얹고 처마 서까레만 걸어 꾸민 홀처마를 이루고 있다. 사방에 모두 창호를 달고 앞쪽의 창호들은 여름이면 접어 들쇠에 매달아 開放 할수 있도록 하였다.

 

 

선향재

(善香齋)

 

善香齋는 書冊을 保管하고 冊을 읽으며 또 손님도 맞이하는 집이었다. 선향재장서지처(善香齋藏書之處)라는 글이 궁궐지 (宮闕誌)에 있는 것으로 보아 연경당(演慶堂)의 書材로 지어진 집임을 알수있다. 집의구조는 正面 7칸 側面 2칸으로 中央에 큰마루를 두고 左右로 온돌방을 두었다. 이 집의 西쪽에는 차양(遮陽)을 달았는데 예부터 사대부집에 만들어져 따가운 석양볕이나 비바람을 피하던 構造이다. 善햔齋의 東쪽 언덕에는 돌을 층층이 쌓아 花階를 만들어 꽃과 나무를 심어 놓고 보며 즐겼다.

 

 

농수정

(濃繡亭)

 

마치 매가 날개를 편것같이 날렵한 모습이다. 안채 뒤편에는 飮食을 準備하던 반빗간이 있다. 高宗이후 演慶堂은 外國 公事들을 接見하고 宴會를 베푸는등 의 政治的인 目的으로 利用 되었다.

 

 

안채

(內舍)

 

內舍는 女性들이 生活하는 집채인데 普通 바깥주인이 居處하는 사랑채와 따로 짓지만 연이어 짓기도 한다. 內舍는 안주인이 방인 안방과 큰 마루 며느리방인 건넌방.부엌칸.찬간으로 構成된다. 연경당(演慶堂) 안채에서는 부엌이 반빗간으로 안채 뒤쪽에 따로 지었기 때문에 부엌칸 자리에는 안방에 불을때는 함실아궁이와 여름을 보내는 누다락을 두었다. 안채는 네 귀에 모두 추녀를 단 팔작지붕을 얹고 길게 다듬은 돌로 만든 기단 위에 주춧돌을 놓고 네모 기둥(方柱)을 세우고 기둥위에 사각형 단면으로된 납도리를 얹어 꾸민 단층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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