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歷 史 旅 行 1/王 宮

華城行宮


  (華城行宮)

 

 

華城은 朝鮮祖 第 22 代 王  正祖大王이 1794년(正祖18年) 1月에 着工하여  2 年 9 個月 後인 1796年 (正祖20年) 9月에 完工 하였다. 正祖大王은 그의 아버지 思悼世子의 園寢을  楊州 拜峰山에서 水原 華山으로 옮기고 부근에 龍珠寺를 세워 夫王의 冥福을 빌었다. 당시 華山 아래에 있던 官廳과 民家를  八達山 아래로 以前시키고 水原府를 留守府로昇格시킨것이 現在의 水原이다. 華城의 築城은 歷代의 傑作으로 알려져 있다. 城의 施設物은  41個所이며 未 復元施設物은  7個所이다.  210여年前에 築造된 華城은 가장 近代的인 技能을 갖추고 있다.

 

 

 

 

동장대

(東將臺)

 

城 東便 東北空心墩과 東暗門 사이 넓은 곳에 자리하고 있는 東將臺는 軍事들의 訓鍊을 指揮한다는 뜻으로 鍊武臺라는 다른 이름을 갖고 있다. 地形上 높은 곳이 아니어서 城밖을 監視하기보다는 周邊 空地에서 軍事를 訓鍊하고 指揮하기에 알맞은 곳이다. 船巖山 산줄기가 賣鄕洞을 둥그렇게 안고 있는데, 그 가운데 등성이를 따라서 높고 험한 곳에서 意志하고 있다. 視野가 트여 있고 南北의 脈이 東쪽 城으로 띠처럼 이었으니 정말 이 城 중에서 가장 좋은 곳이요, 大將이 먼저 占據할 만한 땅이다.

 

 

동장대

(東將臺)

 

華城城域儀軌 卷首 東將臺는 앞이 넓게 트인 터에 四方으로 담을 두르고 그 안에 築臺를 여러 번 쌓아 높은 대를 만들어 한가운데 네모난 建物을 세웠다. 3層으로 쌓은 대를보면, 아래 대의 앞 쪽은 잡석을 쌓고, 이어서 짧은 담을 둘러쳤다. 중대는 돌로 쌓았고, 그 높이를 반으로 하여 4척(약1.2m)쯤 물려 또 한층을 쌓아 銃手가 숨어서 쏘기 편하게 하였다. 한가운데 左右에 臥長臺를 設置하였는데, 흙을 판판하게 하고 바닥을 돌로 깔아 下臺에서 말을 타고도 長臺까지 올라갈 수 있도록 하였다. 東將臺 建物은 正面 5칸, 側面 4칸의 翼工式 單層 팔작 지붕이다. 軍事 指揮所 建物답게 前面을 모두 開放했으며 바닥에 전돌을 깔았고 다시 한 단 높여서 가운데 기둥 열에 맞추어 전돌 바닥이 이어지고 제일 뒤쪽 퇴칸은 높은 마루를 들였다. 따라서 이 마루는 바닥 중 제일 높은 곳이 되고 여기에 將帥가 앉아 指揮를 하고 命令을 내리도록 하였다. 마루 周邊엔 모두 欄干을 둘렀다. 周邊을 보면 탁 트인 넓은 空地가 있었기 때문에 城岸에서 벌어지는 큰 行事를 이곳에서 자주 치루었다. 그 代表的인 것이 犒饋行事 였는데, 築城 公事를 하면서 11번의 犒饋行事 중 6번이 東將臺에서 行하여졌다. 특히 城域이 거의 끝나갈 즈음인 1796년 8월 19일에 있었던 犒饋가 가장 盛大하게 베풀어졌는데, 이때의 모습은 華城聖域儀軌의 '大犒饋圖'에 잘 나타나 있다.  

  

 

동북공심돈

(東北空心墩)

 

水原華城은 築造以後 日帝强占期를 지나 韓國戰爭을 겪으면서 城郭의 一部가 破損· 損失되었으나 1975~1979년까지 築城直後 發刊된 "華城城域儀軌"에 의거하여 대부분 築城 당시 모습대로 保手·復原하여 現在에 이르고 있다. 城의 둘레는 5,744m, 면적은 130ha로 東쪽地形은 平地를 이루고 西쪽은 八達山에 걸쳐 있는 平山城의 形態로 城意 施設物은 門樓 4, 水門 2, 空心墩 3, 長臺 2, 노대 2, 鋪樓 5, 砲樓 5, 閣樓 4, 巖門 5, 봉墩 1, 적대 4, 치성 9, 은구 2등 총 48개의 施設物로 一郭을 이루고 있으나 이 중 水害와 戰亂으로 7개 施設物(水門 1, 空心墩 1, 巖門 1, 적대 2, 은구 2)이 消滅되고 41개 施設物이 現存하고 있다.

 

 

동북공심돈에서본풍경

(東北空心墩風景)

 

水原華城은 中國, 日本 등지에서 찾아볼 수 없는 平山城의 形態로 軍事的 防禦 機能과 商業的 機能을 함께 保有하고 있으며 施設의 機能이 가장 科學的이고 合理的이며, 實用的인 構造로 되어 있는 東洋 城郭의 白眉라 할 수 있다. 城壁은 外側만 쌓아올리고 內側은 自然地勢를 이용해 흙을 돋우어 메우는 外築내탁의 築城術로 自然과 調和를 이루는 城郭을 만들었으며, 또한 水原華城은 哲學的 論爭 대신에 百姓의 現實生活束에서 學問의 實踐課題를 찾으려고 努力한 實學思想의 影響으로 벽돌과 石材를 混用한 築城法, 懸案ㆍ漏槽의 考案, 擧重器의 發明, 木材와 벽돌의 調和를 이룬 築城方法 등은 東洋城郭 築城術의 結晶體로서 稀代의 秀作이라 할 수 있다. 특히, 當代學者들이 充分한 硏究와 密緻한 計劃에 의해 東西洋 築城術을 集約하여 築城하였기 때문에 그 建築事的 意義가 매우 크다.

 

 

동북노대

(東北弩臺)

 

弩臺는 城 가운대 多連發 활인 쇠뇌를 쏘기 위하여 높이 지은것 으로서 華城의 弩臺는 西弩臺와 東北弩臺 의 2기 가있다. 東北弩臺 蒼龍門東北 空心墩의 中間에 東北向으로 자리잡고 있으며 반달모습 담장으로 保護하고 있다.

 

 

포 루

(砲樓)

 

차성(稚城)위에 設置한 누 (樓)로 軍事들을 숨겨두고 敵軍이 보지못하게 하는 施設物로 아래쪽은 돌로 쌓고 中間 부분부터 벽돌로 築造 하였다. 그 위에 집을 짓고 판자를 깔아 門樓를 만들고 左右에는 활을 쏘는 구멍도 만들었다.

 

 

동일포루

(東一砲樓)

 

砲樓는 城郭을 導出시켜 만든 치성위에 지은 木造建物이며 哨所나 軍隊 待機所와 같은 곳이다. 동일砲樓는 華城의 5개 砲樓중 東쪽에 位置 하고있으며  1796년 (正祖20년) 7월 10일 完工 되었다. 平坦하고  넓은 地形에 位置하고 있으며  西北쪽의 砲樓와 다르게 城壁에서 많이 導出 되었으며 板門이 設置 되어 있지 않다.

  

 

창룡문

(蒼龍門)

 

창룡문은 화성의 4대 문중 동쪽대문으로  1795년 (정조19년) 5월 8일 터닦기 공사를 시작하여 10월 17일에 완공되었으나 한국전쟁으로 문루가 파괴 되었던것을  1976년 중건 하였다. 창룡은 곳 청룡으로 풍수지리상으로 좌청룡 우백호 를 통해 동쪽을 의미한다.  성문을 보호하기위한 옹성을 반달 모양으로 쌓았는데 장안문과 팔달문과 달리 한쪽문을 열어놓았다. 옹성안 홍예문 좌측 석면에서는 석문공사를 사람들과 책임자를 기록한 공사 실명판이 있다.

 

 

 

성곽의  

(華城)

 

 

華城行宮은 史蹟  제478호로 1789년 (正祖13년) 水源 신읍치 建設後 八達山 동쪽 기슭에 建立 되었다. 당초에는 수원부 官衙와 行宮으로 使用되다가 1794년(正祖 18년)  ~ 1796년 (正祖 20년)에 걸처 진행된 華城 築城 期間에 擴大하여 최종 完成 하였다. 正祖는 孝性이 지극하여 父親인 莊獻世子(思悼世子)의 園寢인 華城行宮에서 留宿하였다. 건립당시에는 봉수당(奉壽堂)복내당(福內堂)유여택(維與宅)신풍루(新豊樓)남북군영(南北軍營)우화관(于華館)득중정(得中亭)등 600여 여칸으로 정궁(正宮)형태를 이루고 있었다. 우리나라 行宮중 가장 規模가 크고 아름다윘으며 正祖大王께서는 母親 惠慶宮 洪 氏의 進饌延을 열었던 宮이기도 하다. 洛南軒을 제외한 다른 모든 施設物들은 日際의 民族文化와 歷史 抹殺政策으로 인해 사라져 버렸지만 1980년대말 뜻있는 지역 시민들이 復原推進委員會를 구성 꾸준하고 적극적인 復原運動을 펼친 결과 1996년 復原工事가 시작되어 마침내 華城行宮 1단계 復原이 完了되어 2003년 10월 일반에게 公開하기 이르렀다.

 

 

 

 

봉수당

(奉壽堂)

 

華城行宮의 正堂으로 이곳에서 正祖大王은 어머니인 惠慶宮 洪氏의 回甲延을 열었다.  正祖13년(1789)에 水源 신읍을 영건(營建)할 때 지어, 1790년 원행(園幸) 때에 正祖가 직접 편액(扁額)을 써서 장남헌(壯南軒), 또는 화성행궁(華城行宮)이라 하였다. 현륭원(顯隆園) 전배(展拜) 때에 正祖가 머무르던 行宮 正堂 이었으며, 平常時에는 부사(府使)가 집무하는 동헌(東軒)으로 쓰였다. 정조19년(1795) 어머니 惠慶宮 洪氏의 回甲宴을 祝賀하는 뜻을 담아 正祖가 새로이 봉수당(奉壽堂)이라는 당호를 내려 전참판 조윤형(曺允亨, 1725-1799)에게 편액(扁額)하게 하고, 回甲宴 진찬례(進饌禮)를 여기서 거행하여 惠慶宮에게 수복(壽福)을 기원하며 잔을 올렸다. 奉壽堂은 나의 어머니에게 술잔을 올리고 오래 사는 것을 비는 곳이며 (奉壽堂卽奉我慈宮稱觴獻壽之所) [화성성역의궤 부편2 연설(筵說), 1796년 11월 19일] 진찬례에서 혜경궁은 거처인 장락당(長樂堂)에서 奉壽堂으로 이동해 正祖의 잔을 받게 되었는데, 正祖는 惠慶宮이 建物을 移動하는 불편을 줄이기 위해 奉壽堂과 장락당을 서로 통하게 만들도록 하였다. 이 때문에 奉壽堂과 장락당은 두건물의 벽과 지붕이 한쪽 모서리에서 맞붙어 있는 매우 특이한 구조를 보여준다. 奉壽堂은 정면으로 삼문형식의 중양문(中陽門), 좌익문(左翊門)을 두고, 行宮正門인 신풍루(新豊樓)와 일직선이 되는 위치에 동쪽을 향하도록 앉아있어, 行宮 全體의 中心軸을 이룬다. 正祖13년(1789) 8월 19일에 上樑하여, 9월 25일에 7량 21칸의 正堂과 行閣 43칸이 完功되었고, 正祖18년(1794)에 북각도(北閣道) 등 48칸을 增築하여 모두 112칸의 規模를 갖추었다.

 

 

경륭관

(景龍館)

 

長樂堂으로 들어서는 누문으로 景龍이란 帝王을 象徵하는 큰 龍을 뜻한다.

 

 

혜경궁홍씨의회갑연

(惠慶宮洪氏回甲宴)

 

本官은 豊山. 혜경궁홍씨(惠慶宮洪氏)로 알려져 있다. 領議政 홍봉한(洪鳳漢)의 딸이며, 正祖의 어머니이다. 1744년(英祖 20) 世子嬪에 冊封되었으나, 시파(時派)와 벽파(僻派)의 黨爭에 휘말려 1762년 남편 思悼世子가 뒤주에 갇혀 죽는 悲運을 겪었다. 思悼世子가 죽은 뒤 둘째 아들이 王世孫에 冊封되어 혜빈(惠嬪)의 호를 받았다. 1776년 正祖가 즉위하자 궁호(宮號)가 惠慶으로 올랐다. 還甲을 맞은 해(1795년)에 閑中錄을 썼는데, 이 작품은 남편의 慘事를 中心으로 자신의 한 많은 一生을 回顧하며, 自敍傳的인 사소설체(私小說體)로 記錄한 것이다. 文章이 纖細하고 雅談하여 〈仁顯王后傳〉과 아울러 宮中文學의 雙璧으로 評價되고 있다. 1899년(光武 3) 남편이 장조(莊祖)로 推尊됨에 따라 敬懿王后에 推尊되었다.

 

 

장락당

(長樂堂)

 

화성행궁의 침전으로 정조대왕이 혜경궁홍씨의 만수무강을 빌며 편액을 써서 걸었다

 

 

정조대왕능행도

(正祖大王陵幸圖)

 

正祖大王의 陵行 行次 모습을 그린 그림  歷史的 考證을 통해 2000명이 참가 再演한 正祖大王 陵行次 正祖大王은 62.2km 昌德宮을 出發後 3일만에 華城行宮 ,奉壽堂에서 어머니 惠慶宮洪氏 回甲잔치를 베풀었다.

 

 

화령전

(華零殿)

 

朝鮮 제22대 임금이었던 正祖(재위 1776∼1800)의 肖像畵를 모셔놓고, 해마다 祭祀 지내던 建物이다. 華零殿은 사적 제 115호로 1801년 (純祖元年) 正祖大王의 維持를 받들어 華城行宮 옆에 세운 正祖의 영전(影殿)이다. 영전은 보통 祭祀 를 지내기 위해 神位를 모신 祠堂과는  구별되는 建物로 비록 돌아가신 先王 이지만 先王의 肖像畵를 모셔놓고 살아 있을 때와 같이 奉安 하는 곳이다.  23 대 임금 純祖는 아버지 正祖의 지극한 孝誠을 본받기 위하여 純祖 1년(1801)에 水源部의 行宮 옆에 建物을 짓고 華零殿이라 하였다.

 

 

정조대왕영정

(正祖大王影幀)

 

正祖大王 朝鮮時代 제 22대 王. 재위 1776~1800년. 이름은 山, 자는 형운, 호는 홍재. 英祖의 둘째 아들인 莊獻世子(일명 思悼世子)와 惠慶宮 洪氏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규장각(奎章閣)을 설치하고  탕평책(蕩平策)과 백성을 위한 많은 제도를 실시하였다.  사후 시호는 정종문성무열성인장효대왕(正宗文成武烈聖仁莊孝大王)이며 이후 廟號가 正宗에서 正祖로 바뀌고 大韓帝國 때 선황제(宣皇帝)로 推尊하고 尊號를 더하여 정식 시호는 정조경천명도홍덕현모문성무열성인장효선황제(正祖敬天明道洪德顯謨文成武烈聖仁莊孝宣皇帝)이다. 능은 수원(水原)의 건릉(健陵)이다.

 

 

제 정

(祭井)

 

祭井은 華零殿의 祭禮에 使用될 井華水를 뜨는 우물로 어정(御井)이라고 한다. 華零殿전 制定은 正方形의 形態로 各 方向에 14개(4면 56개)의 長臺石을 치밀하게 쌓아 올렸다. 높이는 5.5 m 이고 바닥에서 물이 고인 높이는 약 4 m이다 華城의 制定은 물이 豐富하고 現在도 46개 항목 모두를 통과하는 가장 좋은 물로 判明 되었다.

 

 

낙남헌

(洛南軒)

 

1795년 惠慶宮洪氏 回甲宴 기간중 科擧試驗과 養老宴 등의 여러가지 行事가 치러졌다.  장남헌(壯南軒, 奉壽堂의 옛 이름) 북쪽에는 正祖가 行次時에 활쏘기를 하던 활터가 있었는데, 正祖18년(1794)에 行宮을 增築할 때, 그곳에 있던 득중정(得中亭)이라는 丁字를 西쪽으로 옮기고, 그 터를 넓게 닦아서 낙남헌(洛南軒)을 새로 지었다.

 

 

정조의시

(正祖의詩)

 

영조 43년 (1767)경 정조가 세손으로 있을때 지은 시문을 왕이 된후 쓴 글씨의 탁본이다. 소요정 (消遙亭)등 총 15편의 시가 수록되었는데 정조의 시 세계와 글씨를 볼수있다.

 

 

정조신한

(正祖宸翰)

 

정조가 쓴 편지로 외삼촌인 홍낙임 에게 보낸것과 심환자 에게 보낸것을 모은 첩이다. 당시 남인의 지도자 채재공과 정국을 함께 주도한 노론의 지도자 심환지에게 보낸 편지는 첩과 두루마리 형식으로 봉투에 삼청동즉전 (三淸洞卽傳)이라고 쓰고 있다.

 

 

정리자

(整理字)

 

정리자는 정조 19년 (1795)정리의궤통편 (整理儀軌通編)을 찍기 위해만든 활자를 일컽는다.글시체는 청나라때 만든 사전(康熙字典)인 글씨체를 바탕으로 하였다. 철종 8년 (1857)활자를 보관해 두었던 주자소(鑄字所)의 화재로정리자가 불타버리자 이듬해 다시 정리자를 만들었다

 

 

화성성역의궤

(華城城役儀軌)

 

1796년  정리의궤 (整理儀軌)등을 간행하기 위해 만든 초주정리자로 인쇄한 책 축성 후 1801년에 발간된 「화성성역의궤」에는 축성계획, 제도, 법식뿐 아니라 동원된 인력의 인적사항, 재료의 출처 및 용도, 예산 및 임금계산, 시공기계, 재료가공법, 공사일지 등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어 성곽축성 등 건축사에 큰 발자취를 남기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기록으로서의 역사적 가치가 큰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수원화성은 사적 제3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으며 소장 문화재로 팔달문(보물 제402호), 화서문(보물 제403호), 장안문, 공심돈 등이 있다. 수원화성은 1997년 12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헤경궁홍씨회갑연

(惠慶宮洪氏回甲宴)

 

원행 (園幸)은 왕이 원 (園)에 행차함을 뜻한다. 원(園)이란 왕실의 묘소 가운데 세자,세손과 그 배우자의 묘소,기타 왕을 낳은 후궁 (後宮)의 묘소를 가리킨다. 정조는 재위기간 (1777 ~ 1800년)중 아버지 세도세자 묘인 현릉원 (顯陵園)을 13번 다녀왔으며 이 원행정리의궤는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치른 을묘년의 행차를 정리한 책이다. 

 

 

화성성역의궤

(華城城役儀軌)

 

화성 (華城)을 축성한뒤 화성의 설계도와 당시 투입된 인원,재정,조직등의 내용을 담아간행한 종합보고서이다. 화성에 설치된 각시설물과 축성 기계들의 설계도를 비롯하여 전국에서 동원된 석수,목수,미장이와 같은 장인들이 직종별,지역별로 나뉘어 수록되어있고 장인들의 이름,일한곳과 날짜 임금에  대한정보도 담겨있다.

 

 

거중기

(擧重器)

 

거중기(擧重器)는 수원 화성을 쌓을 때 쓰인 복합  도르래이다. 정약용에 의해 고안되었다고 하며  화성성역의궤에 설계도가 실려 있다. 정약용이 고안한 기계로 1792년 수원 화성을 쌓는데 이용되었다. 도르래의 원리를 이용하여 작은 힘으로 무거운 물건을 들어 올리는 장치이다. 정약용은 정조가 중국에서 들여온 《기기도설(奇器圖說)》이란 책을 참고하여 거중기를 개발하였다.  위에 네 개 아래에 네 개의 도르래를 연결하고 아래 도르래 밑으로 물체를 달아매고, 뒤 도르래의 양쪽으로 잡아당길 수 있는 끈을 연결하여 이 끈을 물레에 감아 물레를 돌림에 따라 도르래에 연결된 끈을 통해 물체가 위로 들어올려지도록 했다.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에 완전히 조립된 모습의 전체 그림과 각 부분을 분해한 그림이 실려있다. 이 책에는 수원성(화성) 공사를 위해 제작한 기구의 종류, 수량이 나와있는데, 거중기는 1대가 사용되었으며 왕실에서 직접 제작하여 공사현장에 내려보냈다고 한다.

 

 

녹 로

(轆轤)

 

녹로는 토목이나 건축공사에서 도르래와 물레 하나씩을 이용하여 무거운 물건을 들어올리는데 쓰이던 기구의 일종이다. 조선후기 (19세기)에 성을 쌓거나 큰 집을 지을때 사용하였다. 각목으로 네모난 틀을 만들고 틀의 앞족으로 긴 지주 (支柱)구싱을 하는 간목 (竿木)둘을 비스듬히 세운 다음 간목 꼭대기에는 활차를 달고 나무틀의 뒤족에는 얼레를 설치하여 동아줄을 얼레와 활차에 연결하고 줄의 반대쪽에 물건을 달아맨뒤 얼래를 돌려 줄을 감으면서 물건을 들어올리도록 한것으로 1796년 (정조 20년)화성 (水原城)성곽을 쌓을때에 두 틀을 만들어 사용하였다.  화성성역의궤 (華城城役儀軌)에 완전히 조립된 모습의 전체 그림과 각부분을 그림이 실려있다.

 

 

영 조

(英祖)

 

조선의 제21대 왕(재위 1724~1776). 탕평정책을 시행하여 붕당의 대립을 완화하였고 여러 차례 사치풍조 금단의 조치를 내렸다. 《농가집성》을 보급하고 균역법을 시행하였으며 청계천을 준설하고 신문고를 설치하는 등 많은 업적을 남겼다.

 

 

 

'歷 史 旅 行 1 > 王 宮' 카테고리의 다른 글

慶熙宮  (0) 2009.12.22
昌慶宮  (0) 2009.12.03
昌德宮  (0) 2009.12.02
德壽宮  (0) 2009.12.02
景福宮  (0) 2009.11.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