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歷 史 旅 行 3/歷史&文學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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西大門刑務所歷史館 서대문형무소역사관 (西大門刑務所歷史館) 우리民族은 日帝에 의한 强制占領이라는 아품을 間直하고 있읍니다. 그 時期는 民族의 自尊心을 毁損당하고 民族 스스로의 發展이 中斷하는 苦痛의 歷史였읍니다. 그러나 우리 에겐 歷史的 現實에 屈服하거나 妥協하지 않는 民族獨立을 向한 鬪爭의 歷史가 있으며 그로 말미암아 지금 우리가 存在하는 것입니다. 여기 西大門刑務所歷史觀은 바로 그러한 歷史의 繼承을 위한 배움터로 마련되었읍니다. 未來를 責任질 靑少年들은 물론 온 國民들이 殉國先烈들의 뜻을 기리고 부끄러운 지난날의 歷史를 克服하기 위한 愛國愛族의 뜻을 배우는 歷史의 산 敎育場 이다. 獨立門은 1963년 1월 21일에 史蹟 제32호로 指定되었다. 元來는 現在의 位置에서 東南쪽으로 약 70m 떨어진 獨立門 네거리 中間地点에 ..
蘭皐金炳淵文學館 난고김병연문학관 (蘭皐金炳淵文學館) 허름한 삿갓을 쓰고 朝鮮八道 坊坊曲曲을 돌아다니면서 당시 兩班 貴族들의 부폐상과 罪惡相 非人道性을 風姿한 放浪詩人 本名은 김병연(金炳淵) 호는 난고(蘭皐)이다. 5세때 洪景來難으로 三族이 滅하는 처지에 놓이자 종 이었던 金性洙가 九死一生으로 그를 救出 黃海道 穀産에서 키웠다. 金삿갓은 20세가 되기도전에 天才的인 才能을 보여 白日場에서 壯元이 되었으나 祖父를 욕하였다는 罪責感에 22세부터 放浪을 試作하여 40여년 간 떠돌이 生活을 하면서 읆은 그의 詩는 全國的으로 널리 퍼졌다. 人道主義的인 感情과 平民思想에 基礎하여 支配層에 대해서 강한 反抗精神을 나타낸 그의 詩는 庶民들에게 爆發的인 사랑을 받았다. 1863년 3월 29일 全羅道 和順郡 同腹面 구암리에서 57세로 생을..
李陸史文學館 이육사문학관 (李陸史文學館) 陸史 의 社會活動은 民族解放 鬪爭으로 始作 되었고 그의 文學 活動 그 後에 이루어졌다. 1930 년대에 접어들면서 陸史 는 母國語 를 부려서 쓰느 詩人으로 登場했다. 그의 詩는 처음 事物과 世界를 어두운 色調로 노래 하면서 自身의 목소리를 바닥에 깔았다. 이와 竝行하여 隨筆, 文藝批評, 社會批評에도 손을 댔다. 陸史는 1930년 日帝의 無斷 總督政治가 極盛을 떨때 文學 活動 에 나선 民族詩人 이다. 이 무렵 日本은 滿洲國 侵略後 우리 民族 의 固有한 姓名을 日本式으로 고치라는 창씨 改名令과 朝鮮語 使用을 禁止하는 國語常用令을 公布했다. 칠흑같이 어둡고 긴 밤과 같은 時代에 陸史는 民族鬪爭의 方策을 摸索하며 나라와 겨례에 대한 忠情을 보였다. 陸史의 詩와 文學 은 出發에서부터 ..
尹東柱文學館 윤동주문학관 (尹東柱文學館) 敎會 長老이면서 小學校 敎師인 아버지 영석(永錫)과 어머니 김룡(金龍) 사이의 7남매 중 맏아들로 태어났다. 1925년 明洞小學校에 入學해 1931년 卒業했으며, 中國의 官立小學校를 거쳐 이듬해 家族이 모두 용정(龍井)으로 移徙하자 龍井 恩津中學校에 入學했는데, 이때 송몽규·문익환도 이 學校에 入學했다. 1935년 平壤에 있는 崇實中學校에 編入하고 校內 文藝部에서 펴내는 雜誌에 시 〈空想〉을 發表했다. 〈空想〉은 그의 作品 가운데 처음으로 活字化된 것이다. 1936년 崇實中學校가 神社參拜 拒否로 閉校당하자 龍井으로 돌아가 光明學院 4학년에 編入했으며, 옌지[延吉]에서 發行하던 〈가톨릭 少年〉에 윤동주(尹童柱)라는 筆名으로 童詩를 發表했다. 용정중학교 (龍井中學校) 大成中學은 ..
鄭芝溶文學館 정지용문학관 (鄭芝溶文學館) 鄭芝溶文學觀을 들어서면 案內데스크가 正面에 있고 右側으로 鄭芝溶의 蜜蠟人形이 밴취에 앉아 있는데 양옆에 빈자리가 마련되어 있어서 訪問客이 人形과 함께 記念撮影을 할 수 있도록 磨鍊된 小品이다. 鄭芝溶文學觀의 銅線은 右側 어두운 터널 같은 入口부터 始作하는데 이곳에 들어서면 音樂과 함께 鄭芝溶의 詩 世界를 音樂과 이미지로 觀覽客에게 傳達하는데 ‘ㄱ’자의 壁面 귀퉁이 양 壁面에 映像을 비추어 짧은 時間에 많은 情報를 觀覽客에게 傳達하고 있다. 정지용 (鄭芝溶)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의 作家 鄭芝溶 詩人은 1902년 陰曆 3월 15일 아버지 정태국 어머니 정미하 사이에 長男으로 태어나 당시 玉泉 公立普通學校 (現 走向初等學校)와 서울 徽文高等普通學校 그리고 日本 도지사(同..
江華歷史館 강화역사관 (江華歷史館) 江華地域에 널리 퍼져있던 先史時代부터 現在까지의 歷史,文化遺跡을 한데모아 展示한것 곳으로 1988년에 完工되었으며 先史,統一新羅,高麗,朝鮮時代등 4개의 展示室로 構成되어있다. 甲串墩臺는 事蹟 제306호로 高麗때 江華의 外城으로 江華海峽을 防禦하며 觀察하고자 墩臺로 肅宗 5년 (1679)에 築造되었다. 강화비석군 (江華碑石群) 이 碑石群은 朝鮮時代 善政을 베푼 留守,判官,經歷,軍需등의 零細 不忘碑및 善政碑이며 自然保護의 一環으로 세운禁標,三忠臣을 기리기 위해 세운 三忠寺跡碑 등 총 67기이다. 自然保護의 一環인 禁標는 肅宗 29년 江華留守府(高麗宮趾)앞과 여러地方에 세웠으나 現在는 거의 없어졌다. 이 禁標는 우리祖上들의 自然保護 精神을 엿볼수 있는 重要한 標石이며 三忠寺跡碑는 仁祖..
李孝石文學館 이효석문학관 (李孝石文學館) "대화마을까지는 팔십리 밤길 고개를 둘이나 넘고 개울을 하나건너고 벌판과 산길을 걸어야 된다 길은 지금 긴 산허리에 걸려있다. 밤중을 지난 무렵인지 죽은듯이 고요한 속에서 짐승같은 달의 숨소리가 손에 잡힐듯이 들리며 콩포기와 옥수수 잎세가 한층 달에 푸르게 젖었다. 산허리는 온통 메밀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듯이 흐뭇한 달밤에 숨이 막힐지경이다 붉은대궁이 향기같이 애잔하고 나귀들의 걸음도 시원하다 길이 좁은까닥에 세 사람은 나귀를 타고 외줄로 늘어섰다. 방울소리가 시원스럽게 딸랑딸랑 메밀밭께로 흘러간다. 앞장선 허생원의 이야기 소리는 꽁무니에 선 동이에게는 정확하게 안들렸으나 나는 그대로 서운한 제멋에 적적하지는 않았다" 文學思想에 실린 메밀꽃필무렵. 文學思想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