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歷 史 旅 行 2/宗敎施設 (寺)

俗離山法住寺

 

 (法住寺)

 

 

553년(眞興王 14)에 의신(義信) 조사가 創建했으며, 法住寺라는 절 이름은 의신이 서역으로부터 佛經을 나귀에 싣고 돌아와 이곳에 머물렀다는 說話에서 由來된 것이다. 776년(惠恭王 12)에 金山寺를 創建한 진표(眞表)가 이 절을 重創했고 그의 弟子 영심(永深) 등에 의해 彌勒信仰 의 衆心道場이 되었다. 그후 法住寺는 王室의 비호 아래 8차례의 重修를 거쳐 60여 개의 建物과 70여 개의 庵子를 갖춘 大刹이 되었다. 高麗 肅宗이 1101년 그의 아우 大覺國師를 위해 인왕경회(仁王經會)를 베풀었을 때 모인 僧侶의 수가 3만이었다고 하므로 당시 절의 規模를 짐작할 수 있으며, 朝鮮時代에 太祖와 世祖도 이곳에서 法會를 열었다고 傳한다. 壬辰倭亂으로 모든 全閣이 消失된 것을 1624년(仁祖 2)에 벽암(碧巖)이 重創한 후 여러 차례의 重修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現存하는 建物은 1624년에 重建된 大雄殿, 1605년에 再建된 國內 유일의 5층 木塔인 八相殿, 1624년에 重創된 능인전(能仁殿)과 원통보전(圓通寶殿)이 있고 이밖에 一周門·金剛門·天王門·助士閣·舍利閣, 선원(禪院)에 附屬된 대향각·염화실·응향각이 있다. 또한 法住寺의 中心法堂이었으며 장육상(丈六像)을 安置했었다는 용화보전(龍華寶殿)은 그 터만 남아 있고, 이곳에 近代彫刻家인 김복진이 조성 도중 腰絶했다는 시멘트로 된 彌勒佛象이 1964년에 세워졌다. 1986년 이를 다시 헐고 1989년 초파일에 높이 33m의 靑銅彌勒佛象이 점안(點眼)되었다. 이밖에 國家指定文化財인 雙獅子石燈(國寶 제5호)·석련지(石蓮池:國寶 제64호)·四天王石燈(寶物 제15호)·磨崖如來議象(寶物 제216호)·신법천문도병풍(新法天文圖屛風:寶物 제848호)·掛佛幀(보물 제1259호)과 地方指定文化財인 世尊舍利塔(忠淸北道 有形文化財 제16호)·희견보살상(喜見菩薩像:忠淸北道 有形文化財 제38호)·석조(石槽:忠淸北道 有形文化財 제70호)·碧巖大師碑(忠淸北道 有形文化財 제71호)·자정국존비(慈淨國尊碑:忠淸北道 有形文化財 제79호)·掛佛(忠淸北道 有形文化財 제119호)·철확(鐵鑊:忠淸北道 有形文化財 제143호) 등이 있다.

 

 

 

일주문

(一柱門)

 

A.D.553년(진흥왕 14년) 의신(義信)스님에 의해 創建된 이후 776년 진표(眞表) 및 영심(永深)스님 대의 重創을 거쳐 王室의 비호를 받으면서 8차례의 重修를 거듭했던 法住寺는 朝鮮祖 中期에 이르러서는 60여동의 建物과 70여개의 庵子를 거느린 대찰(大刹)로서의 위용을 자랑했던 것 같다. 그러나 壬辰倭亂으로 인해 절의 거의 모든 建物이 불타버렸던 결과 1624년(인조 2년) 경에 이르러 벽암(碧巖)스님에 의해 또다시 법주사는 重創을 거듭하였고 1851년에는 國家的 規模의 重修作業이 進行 되기도 하였던 등 그뒤 수차례의 重建 重修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現在 法住寺에는 팔상전(捌相殿)이라 불리우는 1기의 木塔과 더불어 대웅보전(大雄寶殿)을 중심으로 용화전(龍華殿) 원통보전(圓通寶殿) 명부전(冥府殿) 능인전(能仁殿) 조사각(祖師閣) 진영각(眞影閣) 삼성각(三聖閣) 등 8개의 전각(殿閣)과 일주문(一柱門) 금강문(金剛門) 사천왕문(四天王門) 종고루(鍾鼓樓) 부도전(浮屠殿) 등 5개의 附屬建築 그리고 선원(禪院) 강원(講院) 염불원(念佛院) 등 3개의 원(院)이 또한 염화당( 華堂) 용화당(龍華堂) 미룡당(彌龍堂) 응주전(凝住殿) 사리각(舍利閣) 종무소(宗務所)를 포함한 10여 채의 요사채들이 남아 있어 도합 30여동의 建物이 造成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속리산사실기비

(俗離山事實記碑)

 

이 비석은 俗離山의 내역을 記錄한것으로 顯宗7년(1666) 에 宋時烈이짓고 宋浚吉이써서 法住寺 入口에 세운것이다. 內用은 俗離山이 名山임과 世祖가 이곳에 行次 한사실을 적고있다. 특히 水晶峯마루에 있는 거북바위에 대해서는 머리를西쪽으로 두고있는데 中國人들이 中國의 財物이 우리나라로 들어온다하여 그 머리를 자르고 거북의등에 10층 塔을 세워다고 한다. 이것을 孝定4년(1653)에 沃川郡守 이도양이 다시머리을 잇게하였는데 그 후 忠淸兵馬節度使 민이익이 觀徹使 임의백 에게 일러 숙명사대의 名分으로 佛敎를 抑壓 하였음을 알려주고 있다.

  

 

금강문

(金剛門)

 

一周門을 지나 수정교를 지나면 本格的으로 法住寺 嘉藍에 들어서게 되는데 그 첫 入口가 금강문(金剛門)이다. 앞면 3칸, 옆면 2칸의 맞배지붕 建物로 좌우에는 돌담이 늘어서 회랑을 形成하고 있다. 金剛門은 人王象을 奉安하기 때문에 인왕문(仁王門)이라고도 부른다. 대체로 문 양쪽에는 금강저(金剛杵)나 칼과 창을 손에 들고 있는 金剛力士가 모셔진다. 그래서 왼쪽에는 밀적금강(蜜跡金剛), 오른쪽에는 나라연금강(那羅延金剛)을 모시는데, 혹 입을 벌리고 있는 상을 아금강역사(阿金剛力士)라 부르고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을 우금강역사(金剛力士)라 부르기도 한다. 이곳 金剛門 안에는 1974년에 趙晟한 金剛力士 2위와 師子를 탄 文殊菩薩, 코끼리를 탄 普賢菩薩을 함께 奉安하였다.

  

 

천왕문

(天王門)

 

金剛門을 통해 깨뜨릴 수 없는 佛法의 世界를 지나면 천왕문(天王門)을 만난다. 앞면 5칸, 옆면 2칸의 맞배지붕 建物로 앞면 3칸에는 판문(板門)을 달아 出入하도록 하였고 양쪽의 끝 칸에는 門이 아니라 작은 판창(板窓)을 달았다. 대개 寺刹의 金剛門은 앞면 3칸 정도의 規模인데, 이처럼 5칸을 마련하고 양옆에 판창을 댄 法住寺의 경우는 매우 특이한 경우로, 國內의 天王門 중 規模가 가장 크다. 現在 忠淸北道有形文化財 제46호로 指定되어 있다. 안에는 四天王象을 奉安하였는데, 東쪽 世界를 官狀하는 지국천왕(持國天王)은 손에 비파를 들고 人間 感情의 기쁨의 世界를 총한다. 西쪽 世界를 官狀하는 광목천왕(廣目天王)은 龍과 如意珠를 들고서 노여움의 感情을 主管하고, 南쪽 世界를 官杖하는 증장천왕(增長天王)은 칼을 들고 사랑의 感情을 主管하며, 끝으로 北쪽 世界를 다스리는 다문천왕(多聞天王)은 塔 또는 큰 깃대를 들고 즐거움의 憾情을 主管한다.이 처럼 人間事를 官莊하고 있는 四天王은 착한 일과 악한 일을 적절한 時期에 判斷하여 그에 따른 賞과 罰을 내린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天王門에 들어서는 사람들은 두려운 마음으로 最大의 恭敬을 올리곤 한다.

 

 

당간지주 

(幢竿支柱)

 

統一新羅時代부터 寺刹 앞에 設置했던 建築物로서 그 周邊地域이 寺刹이라는 神聖한 領域을 表示하는 役割을 하였다. 돌로 만드는 것이 普通이지만 鐵·金銅·나무로도 만든다. 2개의 기둥을 60~100㎝ 間隔으로 양쪽에 세우고 마주보는 안쪽 면에 간(杆)을 設置하기 위한 간구(杆溝)나 간공(杆孔)을 두고 아래에는 간대(竿臺)나 基壇부를 設置했다. 간구는 반드시 안쪽 상단에 있으며 그 아래의 간공은 구멍수가 一定하지 않다. 이러한 시원(始源) 形式은 時代에 따른 變化가 없으며, 각면에 粧飾된 文樣과 止住의 치석수법(治石手法)만이 時代的 特徵을 보일 뿐이다.

  

 

석연지

(石蓮池)

 

法住寺 天王門을 들어서면 오른쪽으로 이 석연지(石蓮池)가 보인다. 돌로 만든 작은 연못으로, 물을 담아두며 연꽃을 띄워 두었다고 한다. 불교에서의 연꽃은 極樂世界를 뜻하여 寺刹 곳곳에서 이를 본뜬 여러 形相들을 만날 수 있다.  연지는 8각의 받침돌 위에 버섯 모양의 구름무늬를 새긴 사잇돌을 끼워서 큼지막한 몸돌을 떠받치고 있는 모습이다. 몸돌은 커다란 돌의 내부를 깎아 만들었는데, 반쯤 피어난 연꽃 모양을 하고 있어 그 쓰임과 잘 어울리며, 外部의 曲線과도 아름다운 調和를 이룬다. 表面에는 밑으로 작은 연꽃잎을 돌려 素朴하게 粧飾하였고, 윗부분에는 큼지막한 연꽃잎을 두 겹으로 돌린 후 그 안으로 화사한 꽃무늬를 새겨두었다. 入口 가장자리에는 낮은 기둥을 세워 둥글게 난간을 이루었는데, 그 위로도 짧은 기둥을 새긴 후 난간 模樣이 되도록 彫刻해 놓아 마치 난간이 두 줄로 된 듯하다. 윗난간에 세워진 기둥은 아주 기발한 着想이라 할 수 있는데, 佛國寺 多寶塔에 새겨진 돌난간의 기둥과도 비슷하여 예스러움을 간직하고 있다. 밑의 난간벽에는 여러가지 무늬를 새겨 놓아 華櫚함을 한층 더 살려준다. 8세기경에 제작된 統一新羅時代의 作品으로, 節制된 華櫚함 속에 우아함이 피어나는 아름다운 자태는 석연지의 代表作이라 불리울 만하다. 다만, 크게 갈라진 연지의 몸돌을 쇠붙이로 겨우 이어놓아 안타까움을 주고 있으며, 文化財 保存의 必要性을 다시금 일깨워준다.

 

 

석 조

(石槽)

 

法住寺의 3천 僧侶들의 食水를 담아두던 돌그릇이라 한다. 直四角形 模樣으로, 아무런 彫刻을 하지 않은 簡潔한 모습이며, 규모는 길이 446㎝, 폭 240㎝로 제법 크다. 統一新羅 聖德王 1년(720)에 製作된 것으로 짐작된다.

 

 

 

 

 

 

 

 

 

 

금동미륵대불

(金銅彌勒大佛)

 

金銅彌勒大佛은 龍華淨土에 이르러 깨달음의 法을 說하시는 未來의 彌勒부처님의 現存을 意味하는 것으로 花崗石으로 만든 높이 약 8m에 이르는 基壇 위에 높이 약33m의 國內에서 最大의 規模이다. 金銅彌勒大佛은 龍華征討에 이르러 깨달음의 法을 說하시는 未來의 彌勒부처님의 現存을 意味한다. 東洋 最大의 彌勒佛 立像으로 新羅 36대 헤공왕 때 진표율사가 靑銅으로 鑄造하여 1000여 년간 내려왔으나 大院君에 의하여 「當百錢」의 材料로 쓰기 위하여 훼철되고 그 뒤 1939년 조각가 김복진에 의해 만들어진 시면트 佛像이 약 50여 년간 있어오다가 1987년 解體되고 1990년 靑銅彌勒大佛에 이르렀으며 現在의 金銅彌勒大佛은 총 12억원을 들여 지난 2000년부터 改金佛事 工事를 始作 17개월만인 2002. 6. 5일 完成되었다. 金銅彌勒大佛은 총 80㎏의 純金이 所要됐으며. 겉부분(연면적 900㎡)에 3미크론(0.003㎜)두께의 금막이 입혀져 있고 섭씨 80℃∼-30℃에서 견딜 수 있는 乾式 電氣鍍金工法으로 光澤을 維持할 수 있도록 特殊 鍍金돼 있다. 

 

 

팔상전

(八相殿)

 

國寶 제55호. 5층의 옥개는 네모지붕이며 그 위에 상륜부가 完全하게 남아 있다. 1968년 解體 重修할 때 5층 도리에서 上樑文이 發見되고 심초석(心礎石)에서 舍利裝置와 함께 銅版에 새긴 글이 發見되었는데, 그 內容에 의하면 八相殿은 壬辰倭亂 때 完全히 消失된 것을 1605년에 再建하고 1626년에 重修했다고 한다. 建物은 2단의 石造基壇 위에 세워졌는데 基壇의 각 면 中央에는 돌階段이 있다. 建物의 平面은 正四角形이며 建物의 外觀은 層이 높아지면서 주간(柱間)의 수가 줄어들어 강한 체감(遞減)을 보이는데 1·2층은 5칸, 3·4층은 3칸, 5층은 2칸이다. 공포의 짜임은 金山寺 彌勒殿이나 雙峯寺 大雄殿에서 볼 수 없었던 特殊한 方式으로 1층은 주심포식(柱心包式)이지만 2층 이상은 다포식(多包式)이다.        金理那 글

 

 

쌍사자석등

(雙獅子石燈)

 

國寶 제5호. 높이 330cm. 이 石燈은 一般形 石燈의 간석(竿石) 부분을 8각기둥 대신 雙獅子로 變化를 준 異形石燈이며, 雙獅子石燈의 典型的인 예에 속한다. 地面에 놓인 넓은 8각 地臺石의 옆면에는 上下에 테를 두르고 宇宙를 새겼으며, 윗면 中央에는 2단의 괴임을 두어 下臺石을 받치고 있다. 下臺石과 간석을 대신한 雙獅子와 상대석은 하나의 돌로 되어 있다. 下臺石 역시 8각이며 옆면에는 단판의 내림연꽃이 8개 彫刻되어 있다. 그 위에 師子 2마리가 뒷발을 下臺石에 버티고 마주 서서 앞발로 상대석을 떠 받치고 있는데 머리와 갈기와 다리 근육이 사실적으로 彫刻되었다. 상대석에도 단판의 올림연꽃이 上下로 彫刻되었으며 蓮板 안에 꽃무늬가 粧飾되어 있다. 상대석 위에 얹힌 8각의 화사석(火舍石)에는 4면에 장방형 화창(火窓)이 있고 화창 주위에 작은 구멍이 남아 있다. 8각의 개석(蓋石)은 처마 밑이 수평이며 추녀 끝에 약간의 반전이 있고 내림연꽃이 조각된 頂上部에는 보주(寶珠)만 남아 있다. 8각을 기본으로 하면서 간석에 變化를 준 이 石燈은 構成이 簡潔하고 全體 比例가 適當하여 統一新羅時代 石燈의 걸작으로 꼽히며 8세기경에 製作된 것으로 推定된다.

 

 

원통보전

(圓通寶殿)

 

 大鳥寺는 林泉면소재지에서 성흥산성(聖興山城)으로 약 800m쯤 올라간 聖興山城 南쪽 중턱에 위치하고 있다. 이 절은 最近들어 境內 全面을 새로 丹粧하여 높은 階段을 오르면 中心部에 임천관아(林川官衙)의 동헌건물(東軒建物)을 最近에 옮겨지은 원통보전(圓通寶殿)이 있고 그 전면에는 3층石塔이 있다. 이 圓通寶殿 左側으로 범종각(梵鐘閣)과 명부전(冥府殿)·산신각(山神閣)이 있고 뒷편 높은 곳에 석조미륵보살입상(石造彌勒菩薩立像)이 서 있는데 그 앞에는 이 石佛을 주존(主尊)으로 모시는 용화보전(龍華寶殿)이 있다. 大鳥寺의 主法堂인 圓通寶殿은 정면 4칸 측면 2칸에 팔작지붕을 올렸다. 圓通寶殿은 정면이 4칸이라 中心칸인 어칸이 따로 없다. 建物의 懸板은 右側에서 두번째 칸에 달려있고 기단위로 올라가는 階段도 그에 맞추어져 있다. 

  

 

희견보살상

(法住寺喜見菩薩像)

 

法住寺喜見菩薩像은 地臺石 위에 比較的 큰 香爐를 머리에 이고 서 있는 흔치 않은 彫刻像이다. 喜見菩薩像으로 불리어 오고 있으나 그 유래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수 없다. 하부 대석과 신부, 그리고 香爐 받침까지가 1석이고 그위에 발우형 香爐가 올려져 있다. 부처님께 향불을 供養 올리는 독특한 彫刻像이다. 彫刻은 얼굴부분이 심하게 破損되었으나, 그 밖의 부분은 比較的 良好하다. 특히 香爐를 받쳐 든 두 팔의 모습이나 가슴부위의 事實的 表現과 함께 배면에 나타난 천의의 表現技法은 絶妙하여 같은 境內의 雙獅子石燈을 製作한 同一한 作家의 作品으로 推定된다. 法住寺喜見菩薩像은 비록 얼굴부분에 損傷이 있으나 香爐를 받쳐 든 全體的 구성미나 細部 彫刻手法이 獨特한 彫刻像이다.

 

 

대웅보전

(大雄寶殿)

 

대웅보전(大雄寶殿)은 앞면 7칸, 옆면 4칸의 2층 팔작지붕 建物이다. 옛 記錄과 기단석(基壇石의) 樣式으로 보아 지금의 建物은 高麗 中期에 처음 세운 것으로 보인다. 新羅 때 創建 했을 무렵에는 大雄寶殿이 存在하지 않았을 것이다. 당시에는 彌勒章陸象을 모신 龍華寶殿이 있어 미륵신앙 道場인 法住寺의 中心 役割을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記錄에 의하면, 1624년(인조 2)에 重建하였고 以後 잦은 重修를 거듭하였지만, 朝鮮 中期의 樣式을 잘 갖추고 있어 寶物 제915호로 指定되었다. 2층 建物의 構造를 위해 안에는 두 줄의 기둥을 세우고, 그 앞뒤로 바깥 기둥을 세워 서로 連結하였다. 2층에 비해 1층이 높은 편이지만 左右로 7칸에 달하는 큰 規模를 勘案하면 아주 適切한 比率이라고 할 수 있다. 忠淸南道 마곡사(麻谷寺)의 大雄殿과 무량사(無量寺)의 極樂殿, 全羅南道 화엄사(華嚴寺)의 覺皇殿 등과 함께 2층 全脚으로서 매우 貴重한 建物이다.

 

 

사천왕석등

(四天王石燈)

 

法住寺 八相殿의 서쪽에 자리잡고 있는 石燈이다. 全體的으로 8각의 平面을 基本으로 하고 있으며 불을 밝히는 화사석(火舍石)을 中心으로 아래에는 3단의 받침돌을 두고 위에는 지붕돌을 올리고 있다. 네모난 받침돌 위에 아래받침돌은 면마다 안상을 얕게 새기고 그 윗면은 가운데받침돌을 사이에 두고 윗받침돌과 대칭되게 연꽃을 조각하였다. 화사석은 4면에 창을 두었고 나머지 4면에는 佛法을 守護하는 神으로 사천왕상(四天王像)을 彫刻하였다. 지붕돌은 여덟 곳의 귀퉁이가 살짝 치켜올라가 경쾌한 느낌을 준다. 대체로 各 部分의 樣式이 정제되어 있고 彫刻手法이 優秀하여 統一新羅時代의 石燈을 代表할 만한 作品이라고 할 수 있다. 製作시기는 新羅 佛敎美術이 꽃피워진 8세기 中期 以後로 斟酌된다.

 

 

명부전

(冥府殿)

 

시왕전(十王殿) 또는 지장전(地藏殿)이라고도 한다. 이 法堂의 주불(主佛)은 地藏菩薩이며 그 좌우에 도명존자(道明尊者)와 무독귀왕(無毒鬼王)을 夾侍로 奉安하며 다시 그 左右에 冥府十王象을 安置한다. 後佛탱화로는 地藏菩薩 뒤에 地藏撑畵를, 十王의 뒤에 冥府시왕撑畵를 奉安한다. 冥府殿은 一般的으로 大雄殿을 향해 右側편에 位置하며, 代表的인 예로는 江華島 전등사(傳燈寺)의 冥府殿과 全羅北道 高敞郡 아산면 禪雲寺(禪雲寺)의 冥府殿을 들 수 있다.

 

 

삼성각

(三聖閣)

 

독성각(獨聖閣)·산신각(山神閣)·칠성각(七星閣)이 있으며, 대개 三成閣에 三神을 같이 모신다. 獨聖閣은 佛敎에서 말하는 독각(獨覺)을 모신 곳이다. 獨覺은 釋迦牟尼처럼 스승 없이 홀로 깨우친 자를 말한다. 大乘佛敎의 敎學에서 獨覺은 他人을 위해 가르침을 說하지 않는 利己的인 者를 뜻하지만, 이 경우에는 좋은 意味의 獨覺이다. 山神閣은 檀君이 山神이 되었다는 傳說에서 由來하는 山神을 모신 곳이다. 七星閣은 北斗七星에 祝願하는 道敎의 信仰을 받아들여 北斗七星을 佛敎의 如來로 造化하여 모신 곳이다. 따라서 三成閣은 佛敎가 受容되는 科程에서 土着 信仰 또는 民間信仰과 融合하여 빚어진 變容이다. 이런 식의 變容은 中國이나 日本에서도 흔히 目擊되는데, 異質的인 信仰을 佛敎로 包容하여 보다 높은 次元으로 誘導한다는 데에 意義가 있으나, 자칫 기복 위주의 呪術的 信仰으로 佛敎의 본질을 歪曲시킬 우려와 弊端도 있다. 實題 그러한 弊端이 있었음은 韓龍雲이 朝鮮佛敎有神論 에서 巫俗的인 山神과 七星을 除去하고 釋迦牟尼佛만을 奉安할 것을 主張한 데서도 알 수 있다.

 

 

 

金銅彌勒大佛 基壇部 안에는 彌勒菩薩이 머물고 있는 도솔천의 모습을 形象化시킨 용화전이 있으며 용화전 壁面에는 13개의 彌勒십선도가 부조되어 있다. 金銅彌勒大佛은 龍華淨土에 이르러 깨달음의 法을 說하시는 未來의 彌勒부처님의 現存을 意味하는 것으로 花崗石으로 만든 높이 약 8m에 이르는 기단 위에 높이 약33m의 국내에서 最大의 規模이다

 

 

팔상전

(法住寺捌相殿)

 

法住寺는 新羅 眞興王 14년(553)에 印度에서 工夫를 하고 돌아온 僧侶 의신이 처음 지은 절이다. 法住寺 八相殿은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유일한 5층 木造塔으로 지금의 建物은 壬辰倭亂 以後에 다시 짓고 1968년에 解體·修理한 것이다. 벽 면에 부처의 一生을 8장면으로 區分하여 그린 팔상도(八相圖)가 그려져 있어 八相殿이라 이름 붙였다. 1층과 2층은 앞·옆면 5칸, 3·4층은 앞·옆면 3칸, 5층은 앞·옆면 2칸씩으로 되어 있고, 4면에는 돌계단이 있는데 낮은 기단 위에 서 있어 크기에 비해 安定感을 준다. 지붕은 꼭대기 꼭지점을 中心으로 4개의 지붕면을 가진 사모지붕으로 만들었으며, 지붕 위쪽으로 塔 形式의 머리장식이 달려 있다. 建物의 樣式 構造가 層에 따라 약간 다른데, 1층부터 4층까지는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粧飾하여 짜은 構造가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이고, 5층은 기둥과 기둥 사이에도 공포를 設置한 다포 양식으로 꾸몄다. 建物 안쪽은 舍利를 모시고 있는 空間과 佛像과 八相圖를 모시고 있는 空間, 그리고 예배를 위한 空間으로 이루어져 있다. 法住寺 八相殿은 지금까지 남아 있는 우리 나라의 塔 중에서 가장 높은 建築物이며 하나뿐인 木造塔이라는 점에서 重要한 意味를 갖는다.

 

 

마애여래상

(磨崖如來象)

 

寶物 제216호. 높이 500cm. 광배는 생략되었으며 두 손은 가슴 앞에서 설법인(說法印)을 결하고 있고 蓮花座 위에 걸터앉아 두 다리를 내려딛고 있는 의상(倚像)이다. 머리는 나발(螺髮)이며 육계 밑에 계주가 表現되어 있고, 얼굴은 둥근형으로 살이 쪘으며, 턱 밑의 주름과 짧은 목에 表現된 삼도(三道)가 목걸이처럼 늘어져 있다. 눈꼬리가 길게 위로 치켜올라가 있고, 납작하게 눌린 듯한 코는 살찐 뺨에 파묻혀 있는 듯하다. 상체는 두 어깨가 각이 진 편으로 허리가 지나치게 좁게 표현되었고, 오른쪽 어깨를 드러낸 우견편단(右肩偏袒)으로 옷을 입고 있다. 두 무릎 역시 어깨처럼 각이 지게 표현되어 있다. 身體比例로 보면 下體가 허리와 上體에 비해 매우 貧弱하지만 밑에서 올려다보면 어느 정도 均衡이 잡혀 있는 것같다. 全體的인 彫刻守法은 얼굴을 除外한 身體 각 부분의 부분평면적이며 옷주름은 거의 선각으로 形式化되어 있다. 그러나 佛身의 윤곽선, 손가락의 描寫, 蓮花臺座의 꽃잎 形態는 매우 자연스럽고 부드러운 會話的인 曲線으로 纖細하게 表現되어 있다. 高麗佛畵 가운데 1350년에 製作된 〈彌勒下生硬便想到〉(日本 신노인[親王院] 소장)의 本尊佛과 細部表現에서 많은 類似點이 發見된다. 歷史的으로 法住寺는 彌勒信仰의 中心道場이었으므로 이 佛像組成의 信仰的 背景으로 彌勒信仰이 注目된다. 이 佛像의 수인인 說法人은 現存하는 韓國 佛像 가운데 드문 도상으로 統一新羅時代의 雁鴨池 出土 金銅三尊板佛에서 볼 수 있으며, 義湘의 姿勢는 慶州 南山 三和令 출토 石彫三尊佛像 中 本尊佛의 예가 있다.

 

 

철 확

(鐵鑊)

 

큰 사발(大鉢)의 形相을 한 法住寺 철확은 높이 1.2m, 지름 2.7m, 둘레 10.8m, 두께 10∼3㎝의 巨大한 크기로, 上部의 외반된 전이 달린 구연부는 둥글게 處理하였고 기벽(器壁)의 두께는 3∼5㎝ 정도이며 무게는 약 20여 톤으로 推定된다. 比較的 單純한 構造에 몸체에는 아무런 文樣이나 記錄이 鑄造되지 않아 製造年代·製作者 및 製造方法 등을 알 수 없지만, 鎔解溫度가 靑銅보다 훨씬 높은 鑄鐵로 鑄造된 大刑의 鑄物솥이라는 점에서 技術士的 側面에서 매우 貴重한 資料이다. 法住寺의 사세(寺勢)가 가장 隆盛했던 時期에 製作되었을 것으로 보이는 이 철확은 國內에 傳하는 사례가 매우 稀貴할 뿐만 아니라 거의 完璧한 造形狀態를 維持하고 있다.

 

 

정이품송

(正二品松)

 

정이품송(正二品松)은 忠北 報恩郡 內俗理面 裳板里에 있는 소나무이며, 天然記念物 103호로 指定되어 있다.

 

 

 

1464년 世祖가 法住寺로 行次하는 중 소나무 가지가 쳐저 있어 걸리게 되는 것을 나무가 저절로 들어서 지나가게 했었다고 한다. 후에 世祖가 나무에 正二品 벼슬을 내렸다고 해서 正二品松이라 불린다. 솔잎혹파리등의 害蟲들로 인한 病蟲害때문에 治療를 받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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