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歷 史 旅 行 2/宗敎施設 (寺)

德崇山修德寺

(德崇山修德寺)

 

 

文獻에 나타난 百濟 寺刹로는 흥륜사(興輪寺), 왕흥사(王興寺), 칠악사(漆岳寺), 수덕사(修德寺), 사자사(師子寺), 미륵사(彌勒寺), 제석정사(帝釋精寺) 등 12개 寺刹이 傳하지만 修德寺만이 唯一하게 오늘날까지 그 命脈을 維持하고 있다. 百濟寺刹인 修德寺의 創建에 관한 正確한 文獻 記錄은 現在 남아있지 않으나, 學界에서는 代替的으로 百濟 위덕왕(威德王 ,554~597) 在位시에 創建된 것으로 推定하고 있다.또한 修德寺 境內 옛 절터에서 發見된 百濟瓦當은 百濟時代 창건설을 傍證할 수 있는 資料이다. 文獻에 修德寺가 最初로 登場하는 것은, '삼국유사(三國遺事)' 와 '속고승전(續高僧傳)'으로 百濟의 高僧 혜현(惠現)이 修德寺에서 主席하며 법화경(法華經)을 지송하고 삼론(三論)을 강(講)하였다는 記錄으로 보아 당시 修德寺의 사격(寺格)이 갖추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일주문

(一柱門)

 

일주문(一柱門)은 寺刹로 들어가는 첫 번째 關門이다. 원래 지붕을 가진 一般的인 建築物이라고 하면 사방에 네 개의 기둥을 두어 지붕의 하중을 支撑해야 하는 것이 常識이다. 하지만 一柱門은 한 줄로 나란한 두개의 기둥만으로 지붕을 지탱하며 서 있는 建築物이다. 一柱門이란 名稱은 바로 이런 建築的인 特徵에서 붙여지게 된 것이다. 佛敎에서는 이러한 모습에 비추어 일심(一心)이라는 意味를 附與한다. 즉 神聖한 寺刹에 들어서기 前에 흐트러진 마음을 하나로 모아 眞理의 世界로 向하라는 象徵的인 意味가 담겨 있는 것이다. 一柱門의 境地는 아직 무언가를 깨달았다고는 할 수 없는 位置이다. 다만 短狐한 決心과 實踐 意志를 보이면서 求道者로서의 길을 시작하는 段階일 뿐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一柱門을 基準으로 衆生이 사는 世上인 세간(世間), 그리고 속계(俗界)와 생사 煩惱에서 解脫한 깨달음의 世界인 출세간(出世間), 즉 진계(眞界)로 나누어진다는 것이다.

 

사천왕문

(四天王門)

 

寺刹에 들어갈 때 一柱門, 金剛門 다음에 거쳐야 하는 문(門)으로 天王門이라고도 한다. 四天王象을 安置한 天王門은 寺刹을 지키고 惡鬼를 내쫓아 佛道를 닦는 사람들로 하여금 寺刹이 神聖한 곳이라는 생각을 갖게 하기 위해 세워졌다. 四天王門에는 人間의 善惡을 觀察하고 修行者들을 올바른 길로 引導하며 佛法을 守護하는 持國天王, 廣目天王, 增長天王, 多聞天王 등의 四天王象이 있는데 각각 佛國淨土의 東ㆍ西ㆍ南ㆍ北을 지키는 神들이다. 東쪽을 지키는 持國天王은 손에는 寶劍을 쥐고 있다. 西쪽을 지키는 廣目天王은 붉은 官을 쓰고 있으며 三枝槍과 寶塔을 들고 있다. 南쪽을 지키는 增長天王은 오른손에는 龍을 움켜잡고 왼손에는 龍의 입에서 빼낸 如意珠를 쥐고 있다. 北쪽을 지키는 多聞天王은 왼손으로 琵琶를 잡고 오른손으로 줄을 튕기는 모습이다.

 

범종각

(梵鐘閣)

 

범종(梵鍾)은 天上과 地獄을 制度하기 위한 것이다. 처음에 梵鍾은 修行者를 激勵하기 위한 象徵物로써의 役割도 했다. 그런 理由로 榮州 浮石寺의 梵鍾閣은 安養樓 밖에 位置할 수 있었다. 그 후에 地獄衆生을 救濟하는 法救로 認識되어지면서 梵鍾에 地藏菩薩과 觀世音菩薩을 새기게 되었다. 打鐘은 特別한 規則이 定해져 있지는 않으나 새벽에는 28번, 저녁에는 33번을 친다. 28이라는 숫자는 욕계 6천, 색계18천, 무색계4천의 합 28천의 衆生을 깨운다 는 意味를 담고 있고, 33은 부처님나라에 들어서기 전, 도리천(33천)의 門을 通過한다는 意味가 있다고 한다.

 

법고각

(法鼓閣)

 

修德寺의 法鼓閣은 宗務所 조인정사 앞에 있다. 梵鍾閣과 같은 規模로 正面3칸 側面2칸의 다포계집이다. 지붕 역시 팔작지붕이다. 法鼓閣은 소리를 통해 뭇 衆生들에게 부처님의 眞理를 傳達해 주고자 하는 사물이 奉安되어 있는 곳이다. 梵鍾은 맞은편의 鐘閣 안에 奉安했기에 이곳 法鼓閣에는 法鼓 木魚, 雲版이 있다.

 

수덕사대웅전

(修德寺大雄殿)

 

國寶 제49호. 앞면 3칸, 옆면 4칸에 겹처마와 맞배지붕을 지닌 주심포계 建物이다. 배흘림이 현저한 기둥은 낮고 기둥 사이는 넓어서 安定感을 주며, 헛첨차를 써서 공포가 주두(柱頭) 아래에서 始作되는 百濟계 建築樣式을 보여준다. 마루보와 대들보의 낙차를 크게 두고 우미량을 겹으로 걸어 지붕에서부터 계속된 우미량의 율동미가 소슬합장의 곡선, 이중량(二重樑)의 곡면과 함께 百濟계 特有의 우아한 아름다움을 느끼게 한다. 1937년부터 4년간에 걸친 解體·修理 作業中에 發見된 묵서명에 의해 1308년(忠烈王 34)에 세워졌음이 確認되었다. 忠淸南道 地域의 代表的인 建物로서 建築年代가 뚜렷하며 이 시기 木造建物 樣式編年의 基準이 되는 것으로 重要한 意義를 갖는다.

 

1937년부터 4년간 大雄殿을 解體·修理하던 중 發見되었다. 당시 丹靑과 壁畵의 모사(模寫)를 맡아 이 工事에 參與했던 임천(林泉 : 1908~65)이 모사중에 1528년(중종 23) 丹靑을 개채(改彩)했다는 기명을 發見하고, 모사하던 벽 내면에 있던 밑그림이 원래의 것임을 確因했다. 그리고 壁畵가 그려졌던 壁體를 분리하던 중에 "至大元年戊甲四月十七日立柱"라는 묵서명을 發見함으로써 大雄殿과 壁畵의 製作年代가 1308년임이 確認되었다.

 

수덕사명부전

(冥府殿)

 

冥府殿은 地獄 衆生의 離苦得樂을 祈願하는 前脚으로 主尊은 地獄衆生의 救濟를 誓願한 地藏菩薩이다. 전각내에는 地藏菩薩과 유명계 판관인 시왕이 奉安되는 것이 一般的이다. 修德寺 冥府殿은 1968년에 원담스님이 建立하였으며 地藏菩薩 後面에는 木刻喉佛撑과 木彫示王象을 造成한 것이 特徵이다.

 

조인성사

 

壁畵는 6·25戰爭 때 破壞되었고 現在는 임천의 모사도 一部만이 國立中央博物館에 保管되어 있다. 이들 壁畵는 建物 결구 사이의 작은 空間에 그려진 것으로 모두 40점이며, 주로 소불삼체(小佛三體), 奏樂비천, 羅漢圖, 청·백 극락조, 수생화(水生花), 野生花 등을 그린 장엄용 壁畵들이다. 모사도만으로 당시의 樣式을 正確히 判別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만 現在 高麗時代의 壁畵가 드문 狀況에서 이 作品은 高麗 末期 사원벽화의 大體的인 모습을 斟酌할 수 있게 해주는 貴重한 資料이다.과거 강원(講院)을 運營했던 傳統을 되살리고, 부처님의 法을 後學에게 傳授할 目的으로 1996(佛紀 2540)년 開設된 修德寺 僧伽大學(修德寺 江原)에서는 여러 學人들이 聽講과 講論에 全力하고 있다. 修德寺 僧伽大學은 佛敎傳統方式의 受業內容과 더불어 現實에 맞는 佛敎史 및 외전(外典)을 겸하고 있는 것이 特徵이다.

 

대웅전

(大雄殿)

 

대웅보전(大雄寶殿)이라고도 한다. '大雄'이란 부처의 덕호(德號)이다. 恒常 寺刹의 中心을 이룬다. 中央에 佛壇을 設置하고 그위에 佛像을 모시는데, 釋迦牟尼佛을 中心으로 文殊菩薩과 普賢菩薩을 左右에 奉安한다. 그러나 格을 높여 大雄寶殿이라 할 때는 釋迦牟尼佛 左右로 阿彌陀佛과 藥師如來를 모시며, 각 如來像 左右에 夾侍菩薩을 奉安하기도 한다. 또 삼세불(三世佛:釋迦牟尼佛·彌勒菩薩·갈라보살)과 삼신불(三身佛)을 奉安하기도 하는데, 三身佛은 대개 法身인 毘盧遮那佛, 보신(報身)인 阿彌陀佛과 藥師如來, 화신(化身)인 釋迦牟尼佛을 가리킨다. 우리나라 大雄殿에는 선종의 三神說을 따라 毘盧遮那佛·盧遮那佛·釋迦牟尼佛을 奉安하는 것이 通例로 되어 있다.

 

황화정루

(黃河亭樓)

 

寺刹의 主佛殿과 마주하는 곳에는 樓閣이 세워진다. 樓閣은 一般的으로 이층의 形態를 취한다. 누각 講堂은 大雄殿을 親見할 수 있게 하는 空間的 昇華感을 가져다 주며 寺刹을 訪問하는 사람들이 절에서 行하는 모든 行事에 同參할 수 있도록  意識 執典 場所로서의 技能을 水飯한다. 黃河亭樓도 이층의 樓閣으로 大雄殿과 마주하여 92년에 竣工 되었으나 그 規模가 巨大하고 龍마루 線이 높아 大雄殿을 외호 한다는 根本 취지에서 벗어나 94년에 지금의 場所로 移轉 改築하였다. 山地形 寺刹에서 보여지는 위계 秩序를 考慮한 것이다. 黃河亭樓는 정면7칸 측면3칸의 맞배지붕 建物이다. 3익공구조로 1고주 11량가구집이다.  現在 이 樓閣의 地下는 근역성보관인 박물관으로, 地上一層은 博物館 事務室로 二層은 講堂으로 使用되고 있다.  建物에 걸려있는 '선지종찰수덕사'와 '황하정루' 懸板은 원담스님 글씨이다. 황하정루(黃河亭樓)의  황(黃)은 부처님의 精神을 뜻하고, 하(何)는 큰江이 흐르듯 精進한다는 意味를 지닌다고 한다.

 

수덕사

(修德寺)

 

〈삼국사기〉에 의하면 百濟末 숭제법사(崇濟法師)가 創建하고 高麗 恭愍王 때 나옹(懶翁)이 重修했다고 하며, 一說에는 百濟 599년(法王 1)에 지명법사(智命法師)가 創建하고 元曉가 重修했다고도 한다. 朝鮮時代末에 경허(鏡虛)가 선풍(禪風)을 일으킨 뒤 1898년(高宗 35) 그의 弟子인 만공(滿空)의 重創으로 繁盛하여 現在 36개 末寺를 官長하고 있다.

 

德崇山 내에는 정혜사(定慧寺)능인선원(能仁禪院) 에서는 수십여명의 선객들이 參禪에 매진하고 있으며, 우리나라의 代表的인 비구니 선원인 견성암(見性庵 )에서는 백 여명의 비구니 스님들이 밤낮으로 話頭에 餘念이 없다. 또한 賣달 陰曆 그믐날에는 사부대중들이 모여 徹夜정진을 통한 선수행(禪修行)을 實踐하고, 여름철에는 선실천 修練大會를 갖는 등 선의 生活化와 仙風진작의 傳統을 繼承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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