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석사
(浮石寺)
大韓佛敎曹溪宗 제16교구 本社인 고운사(孤雲寺)의 末寺이다. 〈三國史記〉·〈三國遺事〉에 의하면 義湘大師가 新羅 文武王의 뜻을 받들어 676년에 創建하고 華嚴宗을 널리 傳했다고 한다. 〈송고승전 宋高僧傳〉 의상전(義湘傳)에는 義湘과 선묘, 浮石寺 創建에 관한 說話가 자세히 적혀 있다. 高麗時代에는 선달사(善達寺) 또는 흥교사(興敎寺)라 불렀는데 선달이란 선돌의 음역으로 浮石의 향음(鄕音)으로 보기도 한다. 義湘을 부석존자(浮石尊者)라 하고 그가 창시한 華嚴宗을 부석종(浮石宗)이라 하는 것은 이 절의 名稱에서 由來된 것이다. 義湘 以後 혜철(惠哲)을 비롯하여 新羅 武烈王의 8대손인 무염(無染)과 징효(澄曉) 등 많은 高僧들이 排出되었다. 晩年에 이곳에 머문 원융(圓融)은 大藏經을 印刷했는데 지금 浮石寺에 傳하고 있는 華嚴經版은 이때 만들어진 것으로 推測되고 있다. 1372년(恭愍王 21) 원응(圓應)國使가 主旨로 任命되어 伽藍을 크게 重創했다. 境內에는 高麗時代의 無量壽殿(國寶 제18호)과 祖師堂(國寶 제19호)을 비롯하여 圓覺殿·應診殿·安養樓·선묘각·梵鍾樓·자인당 등 朝鮮時代의 建物들이 남아 있다. 重要文化財로는 無量壽殿앞石燈(國寶 제17호)·소조佛座象(國寶 제45호)·祖師堂壁畵(國寶 제46호)·3層石塔(寶物 제249호)·幢竿支柱(寶物 제255호)·高麗版刻(寶物 제735호)·원융국사비(慶尙北道 有形文化財 제127호) 등이 있다. 이밖에도 이 절의 창建設화와 관련있는 석룡(石龍)·대석단(大石壇)·선묘정(善妙井)·녹유전(綠釉塼)·선비화(禪扉花) 등이 傳해지고 있다.
일주문
(一柱門)
일주문(一柱門)은 寺刹로 들어가는 첫 번째 關門이다. 元來 지붕을 가진 一般的인 建築物이라고 하면 사방에 네 개의 기둥을 두어 지붕의 하중을 支撑해야 하는 것이 常識이다. 하지만 一柱門은 한 줄로 나란한 두개의 기둥만으로 지붕을 지탱하며 서 있는 建築物이다. 一柱門이란 名稱은 바로 이런 建築的인 特徵에서 붙여지게 된 것이다. 佛敎에서는 이러한 모습에 비추어 일심(一心)이라는 意味를 부여한다. 즉 神聖한 寺刹에 들어서기 前에 흐트러진 마음을 하나로 모아 진리의 世界로 向하라는 象徵的인 意味가 담겨 있는 것이다. 一柱門의 境地는 아직 무언가를 깨달았다고는 할 수 없는 位置이다. 다만 단호한 決心과 實踐 意志를 보이면서 求道者로서의 길을 始作하는 段階일 뿐이다. 그러나 分明한 것은 一柱門을 기준으로 衆生이 사는 世上인 세간(世間), 그리고 속계(俗界)와 生死 煩惱에서 解脫한 깨달음의 世界人 出世간(出世間), 즉 진계(眞界)로 나누어진다는 것이다.
당간지주
(浮石寺幢竿支柱)
절에 行事가 있을때 절의 入口에는 당(幢)이라는 깃발을 달아두는데 이 깃발을 달아두는 장대를 당간(幢竿)이라 하며, 장대를 양쪽에서 지탱해 주는 두 돌기둥을 幢竿支柱라 한다. 이 幢竿支柱는 浮石寺 入口에 1m 間隔을 두고 마주 서 있다. 마주보는 안쪽 옆면과 바깥면에는 아무런 粧飾이 없고, 양쪽 모서리의 모를 둥글게 다듬었다. 기둥 윗부분은 원을 2겹으로 경사지게 彫刻하였고, 옆면 3줄의 세로줄이 새겨져 있다. 기둥머리에는 깃대를 단단하게 固定시키기 위한 네모 모양의 홈이 파여 있다. 기둥 사이에는 한 돌로 된 정사각형의 받침 위에 원형을 돌출시켜 깃대를 세우기 위한 자리가 마련되어 있다. 이 周邊에는 연꽃을 粧飾하고, 윗면 中央에는 구멍을 뚫어 幢竿의 밑면을 받치고 있다. 대체로 꾸밈을 두지 않아 素朴한 느낌을 주는 支柱이다. 또한 가늘고 길면서도 아래위에 다소 두께 차이가 나 있기 때문에 오히려 安定感을 주며, 簡潔하고 단아한 각 부분의 彫刻으로 보아 統一新羅 전기의 作品으로 推定된다.
안양루
(鳳凰山浮石寺安養樓)
장종각
(藏種閣)
무량수전
(浮石寺無量壽殿)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粧飾한 構造를 簡潔한 形態로 기둥 위에만 짜올린 柱心包 樣式이다. 특히 細部 手法이 後世의 建物에서 볼 수 있는 장식적인 要所가 적어 柱心包 樣式의 기본 手法을 가장 잘 남기고 있는 代表的인 建物로 平價 받고 있다. 建物 안에는 다른 佛殿과 달리 佛殿의 옆면에 佛像을 모시고 있는 것이 特徵이다. 無量壽殿은 우리 나라에 남아 있는 木彫 建物 중 奉呈辭 極樂殿(國寶 제15호)과 더불어 오래된 建物로서 古代 寺刹建築의 構造를 硏究하는데 매우 重要한 建物이 되고 있다.
삼층석탑
(浮石寺三層石塔)
浮石寺 無量壽殿 東쪽에 세워져 있는 石塔으로, 2단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세운 모습이다. 基壇에는 각 면의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 模樣의 彫刻을 두었는데, 아래층 基壇은 가운데에 2개씩의 彫刻을 두고, 위층 基壇에는 하나씩을 두었다. 塔身의 몸돌과 지붕돌은 각각 하나의 돌로 되어있는데, 몸돌은 모서리마다 기둥 模樣을 彫刻하였으며, 지붕돌은 밑면의 받침이 5단으로 統一新羅의 전형樣式을 따르고 있다. 文武王 16년(676) 浮石寺를 創建할 당시에 만들어진 것으로, 아래층 기단의 너비가 매우 넓고, 1층 몸돌 또한 높이에 비해 너비가 넓어서 莊重해 보인다. 1960년 解體하여 復原할 때 철제탑, 佛像의 破片, 구슬 등이 發見되었고 이 때 일부 破損된 부분은 새로운 부재로 보충하였다. 塔은 元來 法堂 앞에 建立되는 것이 通例이나 이 石塔은 法堂의 東쪽에 세워져 있어 눈길을 끈다.
선열당
(禪悅堂)
님들이 거처하는 요사채로 梵鍾閣과 安養樓 사이에 位置하고 있으며 元來 位置는 祖師堂 東쪽이었는데 日帝 때 現在의 자리로 뜯어 옮겼다. 建物을 헐면서 墨書가 쓰여진 副材가 나타났는데 이로 말미암아 元來 建物은 朝鮮 孝宗 元年(1649)에 修理한 事實을 알게 되었다. 지금은 취현암을 復元하여 鳳凰禪院으로서 禪房으로 利用하고 있다.
응향각
(凝香閣)
취현암 바로 앞에 位置하고 있는 또하나의 寮舍體인데 원래 강원 建物이었다. 無量壽殿으로 오르는 階段 오른쪽에 있었는데 通路와 너무 引接하여 1980년 撤去하고 뒤로 물려서 新築하였다. 正面 5칸, 側面 1칸 반의 익공계 맞배집으로 最近에는 全面에 마루를 덧달았다
안양루
(安養樓)
正面 3칸 側面 2칸 規模의 팔작지붕 建物로 無量壽殿과 함께 이 領域의 中心을 이루고 있다.
삼성각
(三聖閣)
七星, 獨聖, 山神 세 분을 한 곳에 모신 前脚으로 無量壽殿 西쪽 石築 아래에 位置하고 있다. 三聖閣은 우리나라 재래의 수(壽), 복(福), 재(財)의 三神 信仰과 密接한 關係가 있다고 한다. 現在의 三聖閣은 元來 축화전(祝花殿)이라 불렀는데 英祖 때 大妃의 願堂으로 지은 建物이라 한다. 1979년의 부수 때까지는 원각전(圓角殿)이라 하였고 木造 阿彌陀如來 坐像을 모셨었다.
서삼층석탑
(西三層石塔)
무량수전
(無量壽殿)
浮石寺의 主佛殿으로 阿彌陀如來를 모신 全閣이다. 阿彌陀如來는 끝없는 智慧와 무한한 生命을 지녔으므로 無量壽佛로도 불리는데 '無量壽'라는 말은 이를 意味하는 것이다. 無量壽殿은 우리나라에 現存하는 建物 가운데 하나이다. 歷史的으로 認定되기로는 安東 奉呈辭 極樂殿이 가장 오래된 木造 建築物로 알려져 있지만 建物 規模나 構造 方式, 法式의 完成度라는 側面에서는 無量壽殿에 비하여 다소 떨어진다.그러므로 無量壽殿은 古代 佛殿 形式과 構造를 硏究하는데 있어서 基準이 되는 重要한 建物이다 圓融國師碑文]에 의하면 高麗 顯宗 7년(1016) 圓融國師가 無量壽殿을 重創하였다고 한다. 1916년 실시된 解體 工事 때 發見된 西北쪽 귀공포의 墨書에는 恭愍王 7년(1358) 倭寇에 의하여 建物이 불타서 우왕 2년 (1376)에 圓融 國師가 重修하였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建築 樣式이 高麗 後期 建物과 많은 차이를 보이므로 元來 建物은 이보다 약 100년 정도 앞선 13세기에 建立된 것으로 推定된다. 朝鮮時代에는 光海君 3년(1611)에 서까래를 깔고 丹靑을 하였고 1969년에는 번와 보수하였다.
석 등
(石燈)
浮石寺 無量壽殿 앞에 있는 統一新羅時代 石燈. 國寶 제17호. 높이 297cm. 방형의 地臺石 위에 기대받침이 있으며, 기대석의 각 면에는 안상(眼象)이 2구씩 粧飾되었고 윗면에는 8각의 蓮花 下臺石이 있다. 蓮花 下臺石에는 귀꽃이 뚜렷한 8개의 복련(覆蓮)이 돌아가며 彫刻되었고 복련 가운데에는 간주석(竿柱石)을 받치는 3단 받침이 있다. 八角形의 간주석은 가늘고 높은 편이며 상대석에는 寶相華무늬가 粧飾된 앙련(仰蓮)이 비교적 立體的으로 表現되었다. 화사석(火舍石)은 8각으로 8면 가운데 4면에 화창(火窓)을 냈는데 그 주위에 창문을 고정시켰던 작은 구멍이 남아 있으며, 다른 4면에는 蓮花座 위에 보살 1구씩을 彫刻했다. 屋蓋石은 끝부분이 약간 위로 올라가 가벼운 느낌을 주며 그 아래받침은 2단으로 되어 있다. 相輪部에는 일부 破損된 연꽃 모양의 보주(寶珠)가 남아 있다. 이 石燈은 全般的으로 裝飾性이 弱化된 簡潔한 모습이나 상하 比例가 調和를 이루고 있는 점으로 보아 統一新羅時代의 典型的인 8각석등 임을 알 수 있다.
지장전
(地藏殿)
地藏菩薩을 모신 法堂 그는 抑壓받는 자, 죽어가는 자, 나쁜 꿈에 시달리는 자 등의 救援者로서, 地獄으로 떨어지는 罰을 받게 된 모든 사자(死者)의 靈魂을 救濟할 때까지 自身의 일을 그만두지 않겠다는 書院을 세웠다고 한다. 그는 前生에 브라만 집안의 딸로 태어나 釋迦牟尼에게 獻身적으로 祈禱함으로써 自身의 邪惡한 어머니가 地獄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한 적도 있다. 中國에서 찬술한 〈지장본원경 地藏本願經〉에는 孝行을 主題로 한 地藏菩薩에 관련된 傳說들이 많이 실려 있다. 中國에서 地漿信仰이 널리 퍼지기 始作한 것은 신행(信行:540~594)이 삼계교(三階敎)를 세우면서부터이다. 그는 당시를 말법 時代로 規程하면서, 그러한 時代에는 地藏菩薩을 崇拜하는 것이 合當한 일이라고 하여 말법 思想에 基礎한 地藏信仰을 널리 傳播했다. 우리나라에서는 新羅 眞平王 때 원광(圓光)이 〈점찰경 占察經〉에 의거한 信徒 組織인 '占察寶'를 設置하면서부터 地藏信仰이 大衆化되기 始作했다. 〈占察經〉이 모든 衆生들로 하여금 地藏菩薩에게 禮拜하여 自身의 罪를 참회하고 고쳐나갈 것을 권하는 慶典이라는 점에서, 우리나라의 地漿信仰은 倫理的 特性을 江하게 드러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日本에서 地藏菩薩은 9세기경부터 널리 崇拜되기 始作했으며, 특히 어린이들의 保護者이자 庶民들에게 여러 가지 祝福을 주는 菩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