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歷 史 旅 行 2/宗敎施設 (寺)

伽倻山海印寺

(海印寺)

 

 

海印寺는 新羅時代에 그 도도한 華嚴宗의 精神的인 基盤을 擴充하고 宣揚한다는 기치 아래, 이른 바 화엄십찰華嚴十刹의 하나로 세워진 伽藍이다. 華嚴宗의 근본 慶典인 華嚴經은 4세기 무렵에 中央아시아에서 成立된 代僧 慶典의 最高峯으로서, 그 본디 이름은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이며 東洋文化의 정수라고 일컬어진다.  이 慶典에 해인삼매海印三昧라는 句節이 나오는데, 海印寺 이름은 바로 이 '海印三昧'에서 비롯되었다.

 

 

 

해인사

(海印寺)

 

新羅伽倻山海印寺선안주원벽기 新羅伽倻山海印寺善安住院壁記〉·〈伽倻山海印寺固積〉에 의하면, 신림(神林)의 弟子인 순응(順應)이 766년(惠空왕 2) 中國에 건너가서 法을 傳授받고 歸國한 뒤 802년(애장왕 3) 伽倻山에 海印寺를 創建하다가 갑자기 죽자 이정(利貞)이 그의 뒤를 이어 절을 完城했다고 한다. 그러나 〈三國遺事〉에는 676년(文武王 16) 의상(義湘)이 浮石寺를 創建하고 곧 海印寺·華嚴寺·凡於事 등 華嚴10찰(華嚴十刹)을 세웠다고 되어있어 創建年代가 分明하지 않다. 절의 이름은 〈華嚴經〉에 나오는 '해인삼매'(海印三昧)에서 由來되었고, 그 개조(開祖)였던 순응 역시 義湘의 孫弟子였다는 事實 등에서 화엄사상(華嚴思想)을 根本으로 하여 이루어진 華嚴의 대도량이었음을 알 수 있다.

 

 

해인사

(海印寺)

 

高麗時代에는 高麗 太祖를 도와 後百濟를 滅亡시키고 나라를 세운 희랑(希郞) 法師가 太祖가 獻納한 전지 500결을 가지고 절을 重建하고, 이곳에서 華嚴寺상을 크게 펼친 것으로 有名하다. 1398년(太祖 7) 江華 선원사(禪源寺)에 있던 高麗大藏經을 海印寺로 옮겨옴으로써 護國寺刹의 中心地가 되었다. 1483년(成宗 14) 世祖의 비인 정희왕후(貞憙王后)가 海印寺를 重建하고자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1488년 德宗의 비인 인수왕비와 睿宗의 계비인 仁惠王妃가 학조(學祖)에게 明解 대장경판전(大藏經板殿)을 重建했으며 또 3년간에 걸쳐 大寂光殿을 비롯하여 法堂·寮舍 등 160여 칸을 새로 建立했다. 1695년(숙종 21) 火災로 만월당(滿月堂)·원음루(圓音樓) 등 여러 요사채가 燒失되었고, 그 이듬해 다시 불이 나서 무설전(無說殿) 등 나머지 요사채가 불타버리자 뇌음(雷音)이 重建했다.

 

 

해인사

(海印寺)

 

大藏經은 高麗時代에 두 차례에 걸쳐 國家事業으로 刊行되었다. 먼저 刊行된 口瓣大藏經은, 1011년에 부처님의 위신력으로 거란의 侵攻을 물리치려는 發願에서 始作하여 1087년까지 무려 77년에 걸쳐 이루어진 것으로, 그 무렵으로서는 中國의 藏經에 견주어 內容이 完璧한 것이었다. 그러나 八公山 夫人寺에 奉安된 이 舊版 大藏經은 高宗 19년인 1232년에 蒙古軍의 放火로 그만 불타 버리고 말았다. 그로부터 5년뒤인 1236년에 다시 本格的으로 大藏經 刊行 佛寺를 推進하여 1251년에 그 完成을 보게 되니, 16년에 걸친 이 큰 佛寺의 結實이 바로 지금 海印寺에 保管되어 있는 高麗大藏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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