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歷 史 旅 行 2/中央博物館

國立中央博物館/外奎章閣儀軌

국립중앙

 (國立中央博物館)

 

 

外奎章閣 儀軌.

高貴함의 意味

 

 

여러분은 지금 外奎章閣 안에 있읍니다.  朝鮮王室의 貴한 物件들이 가득차 있는 寶物倉庫 입니다. 王室의 象徵인 金寶와  玉冊 先王의 보배 같은 글귀와 유구한 歷史를 담은 王室 族譜등 朝鮮의 正體性이자 王朝의  歷史 그 自體 입니다. 그중에  가장 많은것이 儀軌 였읍니다.  우리가 지금 外奎章閣 儀軌 라고 부르는 바로 그것 입니다.  外奎章閣은 漢江이 끝나는 바다위 江華島에 있었읍니다.   朝鮮時代에 江華島는 外敵의 侵入 으로부터 國家와 王室의  安全을 지켜주는 保障之處 였읍니다.  가장 安全한 땅에 特別히 建物을 지어서 保管할 만큼 外奎章閣 儀軌는 貴한 冊이 었읍니다. 어떤점이 特別 했기에 어떤 重要한 內容을 담고 있기에 이 처럼 貴하게 保管했던 것인지 지금 부터 차근차근 살펴 보겠습니다. 

 

 

인조장열왕후존숭도감의궤

(仁祖莊烈王后尊崇都監儀軌)

 

仁祖의 繼妃 莊烈王后에게 尊號를 올릴때의 意識 節次를 記錄한 儀軌다. 원 表紙를 維持하고 있어서 御覽本 儀軌 表紙의 材料와 章程方法을 알수있다. 草綠色 구름무늬 飛湍으로 表紙를 싸고 놋쇠로 變漆을 대고 5개의 박을못으로 固定시켰다. 變鐵의 中央에는 둥근고리를 달았다.

 

 

외규장각

(外奎章閣)

 

朝鮮 正祖때 王室 관련 書籍을 保管할 目的으로 江華島에 設治한 圖書館으로 王立圖書館인 奎章閣의 附屬圖書館 役割을 하였다.  設治 以後 王室이나 國家 主要行事의 內用을 整理한 儀軌를 비롯한 王室關係 書籍을 保管 하였으나 1866년 (高宗3년) 丙寅洋擾 때 프랑스軍이 江華都를 襲擊 하면서 儀軌를 포함한  書籍등을 掠奪하였으며 나머지는 불타 없어졌다. 大韓民國 政府와 民間團體에서 프랑스政府에 계속해서 外奎章閣 圖書의 回收를 要求 해왔으나  返還協商이 延期되거나 프랑스측 에서 繼續協商을 遲延시키는등  消極的 姿勢를 보이다 2010년 11월 12일 G 20 頂上會議에서 兩國의 大統領간에 外奎章閣 圖書를 5年마다 更新하는 賃貸形式 으로 貸與하기로 合意 하여 145 년만에 우리나라로 돌아왔다.

 

 

규장각

(奎章閣)

 

朝鮮 正祖 卽位年 (1776)에 設置한 王室 圖書館 歷代 임금의 글이나 고명 (顧命)유교(遺敎)선보(瑄譜)보감(寶鑑)따위와 어진(御眞)을 保管하고 많은 冊을 編纂 印刷 頒布하여 朝鮮後期의 문운(文運)을 불러 일으키는 中心 役割을 하다가 1894년 甲午改革때 廢止하였다.

 

 

의 궤

(儀 軌)

 

 

儀軌는 朝鮮時代 國家나 王室의 重要한 行事가 끝난後 그 全課程을 整理하여 冊으로 엮은 記錄物 입니다. 그중 1 부는 王이 읽어보도록 올리고 나머지는 關聯 業務를 맡은 官廳 이나 國家 記錄物 을 保管하는 事庫 보냈읍니다. 王 에게 올린것을 御覽用 여러곳에 나누어 保管한것은 分相用 이라고 합니다. 外奎章閣 儀軌는 몇 券을 除外한 大部分이 王을 위해 만든 御覽用 입니다. 王이 役割을 마친後 御覽用 儀軌는 王室의 貴한 物件들과 함께 奎章閣  또는 外奎章閣 에 奉安 하였읍니다. 後代의 王들이 꺼내 보면서 禮法에 맞는 行事를 치를수 있도록 한것 입니다. 王을 위한冊 外奎章閣 儀軌는 後世를 위한 模範的 先例이자 永久히 傳 해야 할 王朝의 精神的 文化 資産이기도 했던 것입니다.

 

 

효장세자책례도감의궤

(孝章世子冊禮都監儀軌)

 

同一한 內用의 粉狀用 儀軌다 종이는 御覽本의 輕愚 高級 초주지 (草注紙)를 粉狀用은 草注紙 보다 질이낮은 저주지 (楮注紙)를 使用하였다. 인찰선(印札線)은 御覽本의 境遇 붉은 선을 直接 그었는데 粉狀用에서는 檢定線이 版으로 찍혀 區劃되었다. 御覽用은 붓으로 直接形態를 그린후 多樣한 顔料로 칠하였으나 粉狀用은 도장을 찍어 人物을 排置하고 色相도 單調롭다. 

 

 

풍정도감의궤

(豊呈都監儀軌)

 

인목대비 (仁穆大妃)의 長壽를 祈願하기 위해서 인경궁 (仁慶宮)에서 열린잔치 行事를 記錄한 粉狀用 儀軌다. 당시 후금 (後金)과의 關係가 긴박하고 凶年이들어 財政 常態가 좋지 않았으나 仁祖는 自身의 반정 (反正)을 合法的으로 認定해준 對備에 대한 고마움으로 풍정(잔치)을 올렸다. 한책만 남아 있는 唯一本으로 外奎章閣 儀軌중 그製作 時期가 가장 빠른 것이다.

 

 

강화부외규장각형지안

(江華府外奎章閣形止案)

 

江華府 外奎章閣에 保管된 책보 (冊寶)王室族譜 王의글과 글씨 및 書跡의 數量과 位置를 적은 형지안 (形止案)이다 形止案 이란 現在의 狀況을 밝힌 壯夫란 뜻으로 儀軌는 아니다. 1875년 9월에 作成한 것으로 儀軌는 주로 北쪽과 西쪽의 壁面에 있는 書家에 保管되었다.

 

 

정종정안왕후시호도감의궤

(定宗定安王后諡號都監儀軌)

 

朝鮮時代에는 王室의 各種 意識 및 行事를 執行하기 위해서 우선 臨時 機構인 도감 (都監)을 設置 하였다. 圖鑑은 여러官廳의 管理들을 망라하여 組織 하였으며 總責任者인 도제조 (都提調) 1인은 政丞級 에서 任命하였다. 朝鮮의 제2대 오아에게 정종 (定宗)의 묘호 (廟號)를 올리는 儀軌로 당시 領議政이었던 김수향 (金壽恒)이 都提調를 맡았다.

 

 

헌종경릉산릉도감의궤

(憲宗景陵山陵都監儀軌)

 

헌종 (憲宗)이 昇遐한후 6월부터 11월까지 경릉 (景陵)의 造成 課程을 整理한 御覽用 儀軌다 元標地를 維持하고 있어서 御覽本 儀軌 標紙의 材料와 장정 方法을 알수있다. 草綠色 비단으로 表紙를 싸고 놋쇠로 變鐵을 대고 5개의 박을못 (朴乙釘)으로 固定시키고 박을못 밑에 둥근 菊花무늬판을 對語 製本을 했다. 變鐵의 中央에는 둥근 고리를 달았다.

 

 

의궤사목

(儀軌事目)

 

儀軌編纂에 관한規則.

1.儀軌는 堂上 세명과 도청 두명이 이어서 管理監督한다.

1.낭청 두명은 戶曹淨光 임세집 부사과 이수보가 이어서 管理監督한다.

1.堂上 도청 낭청은  本事에 宿直하는 것을 制外하고는 모든 共和에 參席하지 않으며 祭禮에도 差出하지 않는다.

1.堂上 도청의 도장 각1 과는 그대로 使用한다.

1.儀軌 5件中 御覽用은 1件이고 春秋館에 1건 議政府에1건 禮曹에 1건 江華府에 1건씩 나누어 保管한다.

 

 

인조장릉천릉도감의궤

(仁祖長陵遷陵都監儀軌)

 

1731년 3월 16일 에서 9월 初까지 朝鮮제 16대 王 仁祖와 그의 碑 인열왕후 한씨 (仁烈王后韓氏)의 장릉 (長陵)을 옮겨 새로 무덤을 造成한 課程을 記錄한 儀軌다 總 7책이나 되는 方臺한 儀軌의 제 1.2책으로서 도청 이하 여러府署에서 業務를 細密하게 粉粧한 사항과 儀軌의 具體的인 體制와 構成을 알수있다.

 

 

종묘영녕전증수도감의궤

(宗廟永寧殿增修都監儀軌)

 

1835년 (憲宗1년)10월부터 1836년 3월까지 宗廟의 正殿 과 永寧殿을 擴張하는 課程을 記錄한 粉狀儀軌다. 이 工事를 위해 1836년 1월에 宗廟와 永寧殿에 모셔져 있던 神位를 慶熙宮으로 옮겼고 3월 27일 제자리로 移安했다. 이 工事로 宗廟의 正殿과 永寧殿이 擴張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어진도사도감의궤

(御眞圖寫都監儀軌)

 

高宗 皇帝 御眞 과 皇太子 예진의 製作科程을 記錄한 皇太子용 즉 睿覽用 儀軌로서 붉은 비단을 表紙로 하였다. 이 行事는 高宗이 平壤에 지은 皇室 離宮인 風景宮의 太極殿과 中和殿에 御眞과 睿眞을 鳳眼하기 위해 열린것이었다.

 

 

현종명성왕후가례도감의궤

(顯宗明聖王后嘉禮都監儀軌)

 

顯宗이 王世子시 세자빈(후의明聖王后)을 맞이한 婚禮式 課程을 記錄한 儀軌로 동뢰연을 치르기 위해 別宮에서 宮闕로 가는 世子嬪의 연 (輦)과 이를 護衛하는 行列을 그린 班次圖이다. 王世子가 使臣을 보내 新婦를 모셔오도록 하였기 때문에 行列에 王世子는 그려지지 않았다.

 

 

순조순원왕후가례도감의궤

(純祖純元王后嘉禮都監儀軌)

 

純祖와 純元王后 金氏의 婚禮式 課程을 記錄한 儀軌로 친영 (親營)儀式을 마친後 國王이 친히 王妃를 宮闕로 모셔오는 場面을 담은 班次圖로 王의 연 (輦)이 그려졌다. 純元王后는 19세기 安東金氏 勢道政治의 形成에 重要한 役割을 한 人物로서 顯宗.哲宗代까지 垂簾聽政을 하였다.

 

 

납체의

(納采儀)

 

王이 婚姻을 請하는 儀式

 

 

헌종효헌왕후혼예가례도감의궤

(憲宗孝憲王后婚禮嘉禮都監儀軌)

 

憲宗이 孝憲王后를 맞이한 婚禮式 課程을 記錄한 儀軌다. 王과 大闕로 들어온 王妃가 서로 절하는 자리와 술과 飮食을 나누는 器物 配置圖가 그려져 있다.

 

 

인선왕후책례도감의궤

(仁宣王后冊禮都監儀軌)

 

孝宗妃인 仁宣王后 張氏를 世子嬪에서 王妃 즉 中宮殿으로 冊奉한 課程을 記錄한 儀軌로 金寶와 普通의 規格과 製作에든 材料를 記錄하였다.  조제조는 領議政 김육이 擔當하고 一方에서는 玉色을 製作하고 二方에서는 金寶를 三方에서는 玉冊과 金寶를 싣고 갈 어련의 製作을 擔當하였다.

 

 

영조왕세제책례도감의궤

(英祖王世第冊禮都監儀軌)

 

영인군 (英祖)을 王世弟로 冊奉한 課程을 記錄한 儀軌다. 당시 후사가 없었던 景宗 임금은 母后인 인원왕후 金氏의 뜻을 받들어 당시 28세인 異腹 兒憂 영잉군을 世弟로 冊奉하였다.

 

 

한국의왕실의궤

 

프랑스國立圖書館 所長儀軌에 대한 박병선 博士의 書誌學的 硏究書로 1992년 서울大學校 奎章閣에서 프랑스語로 出版하였다. 이 冊은 外奎章閣 儀軌 297책에 대한 槪要및 페이지別 情報가 실린 本文과 프랑스語로 彩色桃板으로 構成되었다. 모리스 쿠랑의 韓國書誌,韓國의奎章閣,藏書閣에서 所長하고 있는 同一儀軌의 서지사함을 함께 收錄하였다.

 

 

 

丙寅洋擾 당시 프랑스軍의 侵略課程을 描寫한 週刊誌이다. 1834년에 創刊된 프랑스 最初의 週刊誌이다. 丙寅洋擾에 參戰했던 프랑스 海軍 쥐베르가 寄稿한 1867년 1월 19일 기사인 Expedition de Coree 에는 당시 프랑스軍의 侵略課程과 戰鬪事項을 詳細히 描寫되어 있다. 外奎章閣으로 推定되는 建物앞을 行軍하는 프랑스軍의 모습이 담긴 스케치가 눈길을 끈다.

 

 

이곳에서 感歎하면서 볼수밖에 없고

우리의 自尊心을 상하게 하는것은

아무리 가난한 집이라도 어디든지 冊이 있다는 事實이다

 

(丙寅洋擾에 參戰했던 프랑스海軍 쥐베르의 朝鮮원정기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