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歷 史 旅 行 1/王 宮

昌慶宮

 

(昌慶宮)

苑  다시 이 되기까지

 

朝鮮時代 宮闕로 太宗이 거처하던 壽康宮址에 지어진 建物이다. 成宗 14年(1483)에 貞熹王后, 昭惠王后, 安順王后를 위해 昌慶宮을 지었다. 처음 지을 당시의 建物은 明政殿,·文政殿의 正殿과 壽寧殿,·歡慶殿,·景春殿,·仁陽殿,·通明殿들의 寢殿이 있었으며, 養和堂·,麗暉堂·,思政閣 들이 있었다. 朝鮮時代의 宮闕中에서는 唯一하게 東쪽을 向해 지어졌다. 처음에는 별로 使用되지 않다가 壬辰倭亂 때에 京福宮·昌德宮과 함께 불에 탄 以後, 昌德宮과 같이 다시 지어져 朝鮮王祖 歷史의 中心 舞臺가 되었다. 肅宗의 사랑을 받던 張禧嬪이 仁顯王后를 毒殺하려는 못된 行動을 저지르다가 處刑을 당했는데, 당시 禧嬪은 주로 就善堂에서 生活하였다. 또한 英祖는 아들인 思悼世子를 뒤주에 가두어 죽이는 일을 저질렀는데, 世子가 갇힌 뒤주를 宮闕 안의 宣仁門 안뜰에 8일간 이나 가두었었다. 昌慶宮은 純宗이 卽位한 後부터 많은 變化가 있었다. 1909년 宮闕 안의 建物들을 헐어내고 動物園과 植物園을 設置하였으며, 宮의 이름을 昌慶苑  으로 낮추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1984년 宮闕 復元事業이 始作되어 元來의 이름인 昌慶宮을 되찾게 되었고, 闕 안의 動物들을 서울大公園으로 옮기면서 벚나무 역시 없애버렸다. 莊祖·貞祖·純祖·憲宗을 비롯한 많은 王들이 태어난 宮으로, 光海君 때 다시 지어진 正門·正殿들이 保存되어 있으며, 옆에 있는 昌德宮과 함께 朝鮮時代 宮闕의 歷史를 살피는데 없어서는 안될 中要한 遺跡이다.

 

 

 

홍화문

(弘化門)

 

寶物 제384호.昌慶宮의 中心 부분이 東向이기때문에 正門인 弘化門도 東쪽에 세워졌다. 1484년에 建立했으며 壬辰倭亂 때 消失되자 1616년에 重建했다. 2층 누각형 木造建物로서 左右에 한쌍의 十字閣을 세워 品格눞은 大門形式을 갖추었다. 앞면 3칸, 옆면 2칸의 중층 우진각지붕 建物로 昌德宮의 正門인 돈화문(敦化門)과 비슷한 모습이다. 元來 石造基壇을 만들고 그 위에 礎石을 놓았는데 現在 기단 부분은 땅에 묻혀 있다. 다듬은 돌 礎石 위에 두리기둥을 세웠는데 앞과 뒤쪽은 평주이고, 문짝을 단 중앙기둥은 아래·위층을 연결하는 높은 기둥[高柱]이다. 2층 바닥에는 마루를 깔고 앞뒤 양옆에 窓門을 내어 四方을 監視할 수 있도록 했다. 공포의 짜임은 다포식으로 외2출목·내3출목이며, 쇠서는 날카로운 앙서로 되어 있고 안쪽은 교두형이다. 처마는 겹처마 이고 지붕의 용마루와 추녀마루는 양성을 했으며, 그 위에 치미(尾)·龍頭·雜像을 늘어놓아 粧飾했다. 弘化門을 통과하면 明堂水인 金川이 흐르고 그 위에  그위에 500년도 더된 玉川橋가 놓여 있다. 弘化門은  임금이 臣下가 百姓들을 對面하는 곳이기도 하다. 貞祖는 1795년  어머니 惠慶宮洪氏의 回甲을 記念하여  弘化門 밖에 나가  가난한 百姓들에게 쌀을 나누어 주었는데  弘化門 사미도 라는 記錄하에 그 情景이 자세히 描寫 되었다.

 

 

옥천교

(玉川橋)

 

 

도깨비상

 

寶物 380호 玉川橋 500년도 넘은 돌다리 가 놓여있다. 다리난간 아래  홍예 (무지개모양) 사이에는 宮闕에 들어오는  나쁜 氣運을 좇기위한 도깨비 像을 彫刻 하였다. 彫刻水가 흐르는 어구 위에 設置한 다리. 宮闕에 들어오는 나쁜 氣運을 쫓기위해 세운 도깨비像을 彫刻하였다.

 

 

명정문

(明政門)

 

이 門은 明政殿을 둘러싼 月廊 중 明政殿과 마주보고 있는 東月廊의 中央部에 있음. 弘化門보다 안쪽에 놓여 中門의 技能을 갖는 平三門. 

 

 

명정전

(明政殿)

 

國寶 제226호. 明政殿은  昌慶宮의 으뜸 殿閣으로 臣下들의 下隷 科擧試驗 宮中宴會 등의 公式 行事를 치렀던 正殿 이다. 앞면 5칸, 옆면 3칸의 단층 팔작지붕건물이다. 1484년에 처음 세웠으나 壬辰倭亂 때 消失된 것을 1616년에 다시 지은 朝鮮 中期의 建築物이다. 花崗石의 長臺石을 바른층 쌓기한 2단의 높은 월대 위에 長臺石 한벌대의 기단을 쌓고, 다듬은 礎石들을 놓은 다음 두리기둥을 세웠다. 월대 가장자리에는 돌난간을 돌리지 않아 돌난간을 두른 京福宮과 비교할 때 격이 낮아 보이는데, 이것은 昌慶宮이 正宮이 아니라 이궁(離宮)으로 지어졌기 때문이다. 기둥과 기둥 사이의 창방(昌枋) 위에는 평방(平枋)을 놓고, 기둥 위에는 물론 기둥 사이에도 공포를 짜놓아 다포양식을 이루고 있다. 출목은 내외3출목(內外三出目)으로 살미첨차의 끝은 날카로운 수서로 되어 있고, 안쪽은 교두형으로 되어 있어 조선 중기의 공포양식을 잘 보여준다.

 

 

답 도

(踏道)

 

明政殿으로 오르는 階段 踏道에는 朝鮮 宮闕의 象徵인 鳳凰이 새겨져 있다.

 

 

소현세자

(昭顯世子)

 

仁祖의 맏아들인  昭顯世子는 丙子胡亂때 靑나라에 불모로  잡혀갔다가  9년 만에 돌아왔다 이때 百姓들이  양칠평(지금의마포부근)에서 弘化門 앞까지 가득메우고  눈물을 흘렸다는 記錄이 있다.  靑나라에 머무르는 동안  昭顯世子는  단순히人質이 아니라 外交官의 역활을 해냈으며 西洋의 發展된  文物을 접하면서 장차 朝鮮을  새롭게 變革 시키겠다는  원대한 꿈을 품었다.  그러나 歸國한지 두 달만에 病이나 病席에 누운지 3일만에 昌慶宮 歡慶殿에서 世上을 떠났다.  死亡 당시 昭顯世子는  새까맣게 변해 있었고 뱃속에서는 피가 솓아졌다고 한다. 여타 情況으로 미루어 靑나라의 新任을 얻고 있던 世子를 毒殺 했다는  主張이 대두되고 있다. 昭顯世子가 王이 되었다면  우리나라 近代史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로 昭顯世子의 갑짝스러운 죽음은 안타까운 일이 아닐수 없다. 

 

 

품계석

(品界石)

 

朝會 시 임금은 正殿의 御座에 자리하고 뒤쪽에는 屛風 과 五峰甁을 둔다. 앞쪽으로는 保安 등의 器物을  周邊으로 다수의 護衛軍事가 配置된다. 文武百官은 마당의 品界石에 따라 자리를 잡는데 王世子 文班이 東쪽으로, 宗親과 武官이 西쪽으로 선다. 월대와 마당 周邊으로는  護衛軍事가  서고 노부가 配列되어 仁政殿과 周邊 마당 全體가 朝會  參禮者로 가득하게 된다.

 

 

영춘헌

(迎春軒)

 

迎春軒은 王이 居處하던 곳이라고 믿기지 많을 程度로 素朴한 모습이라서 正祖의 儉約한 性品을 느낄수 있다. 正祖는 등에난 腫氣가 原因이 되어 49세로  迎春軒에서 昇遐하였다. 처음에는 가벼운  腫氣로 診察을 받았는데 이날 醫官 서영보를 交替하는등 正祖는 王室 醫官들을 믿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뛰어난 醫學 實力을 갖춘 正祖는  醫員과 直接 議論하고 藥方文을 指定해 주는등 努力을 기울였음에도  診察을 始作한지 불과 15일 만에 죽음을 맞게된다.  正祖가 마지막으로 남긴말이 正敵 定順王后의 居處인 壽寧殿 이었기에 正祖의 毒殺說은 아직 까지도 疑問으로 남아있다. 주로 後宮들이 居處한 內殿 建物인 것으로 推定된다. 1830년 火災로 消失 된것을 1834년 에 再建되었다. 이 때 迎春軒은 昌德宮 中和堂 부근에 있던 장남궁을 헐어 再建 하였다. 正祖는 迎春軒을 讀書室겸 執務室로 利用하기도 하였다.

 

 

통명전

(通明殿)

 

內殿 가장 깊숙한 곳에 南向으로 位置한 通明殿은 王妃의 寢殿으로 內殿의 으뜸 全閣이다. 월대 위에 基壇을 形成하고 그 위에 建物을 올렸으며 演戱나 儀禮를 열수있는  넓은 마당에는  얇고 넓적한 박석(箔石)을 깔았다. 西쪽마당에는  동그란 샘과 네모난 연못이 있으며 그 周邊에 정교하게 돌난간을 두르고 작은 돌다리를 놓았다. 通明殿은 주로 王妃의 寢殿으로 使用하였지만  中宗과 明宗妃의 殯殿으로 使用 된적도 있고 景宗은  便殿으로 使用 하였다.

 

 

통명전

(通明殿)

 

王妃의 寢殿인 通明殿은 內殿의 中心空間으로 規模가 크다.  殿閣옆에 돌난간을 두른 네모난 蓮池와 둥근샘이 있으며 뒤뜰에는 꽃 階段이 마련되어 周邊景觀이 아름답다. 禧嬪 張氏通明殿 일대에 凶物을 묻어 肅宗妃 仁顯王后를 詛呪 하였다가 死藥을 받은 이야기가 有名하다.

 

 

장희빈

(張禧嬪)

 

宮女였던 張玉貞은 肅宗에 눈에들어 後宮이 되었다, 王子 均을 出産하여 嬉嬪의 자리에 오른 人物이다  肅宗대는 朝鮮王祖를 통틀어  黨派간 政爭이 가장 심했던  時期로 王은 自身의 女子들을 利用해 黨爭속에서 王權의을 强化를 꾀했다. 均을 世子로 冊封하는 課程에서 西人을 擊沈하고 仁顯王后를 廢位 시켰다가 西人들이 閔씨復位를 꾀하는 課程에서 南人들을 除去한다. 王妃까지 되었다가  다시 降等된 張禧嬪은  仁顯王后를 詛呪 하기위해 꼭두각시와 動物의 屍體를 通明殿 周圍에 묻어 두었다. 이것이 發覺되어 死藥을 받으니 수많은 風聞과 逸話를 남긴채 43세를 日記로 生을 마감 하였다.

 

 

양화당

(養和堂)

 

養和堂은 內殿의 接待空間 으로  使用되었으나 丙子胡亂때 仁祖가 還道 하면서 머무르기도 했다. 1834년 再建한 것이다.

 

 

통명전연지

(通明殿淵池)

 

通明殿 西쪽 마당에는  동그란샘과 네모난 연못이 있으며 그 周邊에 正敎하게 돌난간을 두르고 작은 돌다리를 놓았다.  通明殿은 주로 王妃의 寢殿으로 使用하였지만 中宗과 明宗妃의 殯殿으로 使用된적도 있고 正祖는 (원래 英宗과 正宗은 高宗 1889 년 高宗 26년 功德에 대한 再評價로 英祖와 正祖 廟號를 宗에서 祖로 追崇)로 便殿으로 도 使用 되었다.

 

 

함인정

(函仁亭)

 

이곳 에는 元來 成宗 15年에 지은 仁陽殿이 있었는데, 壬辰倭亂 때 불타버린 뒤 仁祖 11年(1633)에 인경궁의 函仁堂을 以建하여 함인정(函仁亭)이라 한 것. 이곳은 특히 英祖가 文武科擧에서 壯元及第한 사람들을 接見하는 곳으로 使用. 南向에다 앞마당이 넓게 트여있어 王이 臣下들과 만나고 競演을 하는 곳으로 利用 하였다.  函仁亭은  建物四方이  壁體없이 시원하게 開放된 모습인데 東闕圖에는 지금과 달리 3面이 막혀있다. 

 

 

함인정현판

(函仁亭顯板)

 

춘수만사택(水滿四澤)    봄물은 사방의 못에  가득하고
하운다기봉(雲多奇峰)    여름 구름은 기이한 봉우리에 많네.
추월양명휘(月揚明輝)    가을 달빛은 밝게 빛나며 휘날리는데
동령수고송(嶺秀孤松)    겨울 산고개엔 홀로 선 소나무가 빼어나구나.

 

 

경춘전

(景春殿)

 

경춘전 (景春殿)은 成宗이 1483년 에 仁粹大妃 를 위해 지은 大妃의 寢殿이다. 그러나 正祖와 顯宗이 이곳에서 誕生하고 많은 王后들이 여기서 昇遐한 것으로보아 大妃 뿐만 아니라 王妃와 世子嬪도 많이 使用한듯 하다. 貞祖는 本人의 誕生을 記念해 景春殿 內部에 誕生殿이라고 친히 쓴 懸板을 걸기도 하였다. 昌慶宮 昌建 당시 세워졌다가 壬辰倭亂. 李适-亂 純祖 연간 火災등으로 消失과 再建을 反復 하였다.

 

 

환경전

(歡慶殿)

 

成宗 15년에 建立되었으며, 壬辰倭亂으로 消失된 것을 光海君 8年에 重建하였고. 그 後 純祖 30年(1830)의 큰 불로 消失되었던 것을 그 34年에 重修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이곳은 昌慶宮의 한 內殿으로 王이 늘 거동하던 곳으로 中宗이 이곳에서 昇遐였고  孝明世子가 昇遐했을 때는 嬪宮으로 使用하기도 하였으며 王이나 世子가 起居했던것으로 보인다. 昭顯世子가 歸國한지 두 달만에 病이나 病席에 누운지 3일만에 昌慶宮 歡慶殿에서 世上을 떠났다. 

 

 

보양문

(寶陽門)

 

明政殿 뒤에 있는 寶陽門 이 門을 통해 나오면 函仁亭, 通明殿과 養和堂이 나옵니다.

 

 

사도세자

(思悼世子)장헌세자

 

1762년 윤 5월 13일 文政殿 앞뜰에서는 悲劇的인 事件이 벌어졌다. 당시 執權勢力이었던 노른은 싫어했던 世子가 代理聽政을 始作하자 危機感을 느끼고 英祖에게 온갖 謀略을 告했다. 노른 勢力이었던 世子의  妻家와 누이 花環翁主 등이 이에 合勢 하였고 生母 영빈 李씨가 이날 英祖에게 流言蜚語를 告하여 결국 英祖는  世子에게 自決을  命하기에 이른다. 文政殿 앞들에 놓인 커다란 뒤주에 갖혀 한여름 더위와  8일 동안 呻吟하던 世子는 28세의 젊은 나이에 生을 마감한다. 英祖는  世子의 죽음후 그를 哀悼한다는 意味로 사도 (思悼)라는 諡號를 내린다.

 

 

문정전

(文政殿)

 

文政殿은 王의 公式 執務室인 편전(便殿)으로  東向인 明政殿과 달리 南向 建物이다. 正殿인 明政殿과 등을 돌리고 있는데 이런 특이한 配置構造는 다른 宮闕에서는 찿아보기 어렵다. 便殿이지만 王室의 神主를 모신 혼전(魂殿)으로 쓰인 경우도 있다. 英祖의 첫째 王妃인 精誠王后와 鐵宗의 妃인 哲仁王后의 混殿으로 使用한것이 그 예이다. 文政殿 일원은 日帝强占期 때 헐렸다가 1986년에 文政門 동행각과 함께 復元되었다.

 

 

숭문당

(崇文堂)

 

崇文堂은 朝鮮 景宗 때 建立 하였으며 임금이 臣下들과 競演을 열어 政事와 學文을 論하던곳이다. 昌慶宮 昌建 당시에는 없었고 光海君 때 昌慶宮을 再建하면서 세운것으로 追從된다. 경사진 터를 巧妙하게 利用하여 뒤에는 낮은 柱礎石을 使用하고 앞에는 높은 柱礎石을 세워 누 처럼 되었다. 純祖 30년에 큰 불로 消失된 것을 그해 가을 重建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英祖는 특히 學文을 崇尙하고 英才를 養成하였는데 이곳에서 친히 成均館 學生을 接見하여 試驗하기도 하고 때로는 主演를 베풀어 그들을 激勵하기도 하였다. 英祖 親筆 懸板 이 지금도 남아있다.

 

 

회화나무와느티나무

 

이 나무는 회화나무와 느티나무가 이어진 連理木 이다. 連理木은 두나무 줄기나 가지가 서로 맞닿아서 하나의 나무가 된것으로 父母와 자식간의 사랑이나 戀人끼리의 사랑을 象徵 하기도 하고 상서로운 일이나 吉兆를 象徵 하기도 한다. 회화나무는 18세기 初 느티나무는 20세기 初 에 심어진것으로 推定 된다. 

 

춘당지

(春塘池)

 

본래 春塘池는  활을 쏘고 과거를 보던 春塘臺 앞 너른터에 자리했던 작은 연못 이다. 지금의 春塘池지 에는 百姓에게 模範을 보이기 위해 王이 直接 農事를 지었던 내농포 라는 논이 있었다.  日帝가 이를 파헤졌서 큰 연못 으로 만들었고 1983 년 以後에는 傳統 樣式의 연못으로 새롭게 造成 한것이 오늘날의 春塘池 이다. 春塘池는 서울 都心에서 흔치 않은 연못으로 周邊의 숲도 울창하여 많은 새의 보금자리가 되고 있다. 天然記念物인 鴛鴦도 春塘池 周邊 에서 볼수 있다.  

 

 

춘당지

(春塘池)

 

春塘池는  現在 두 개의 연못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뒤쪽에는 작은연못이 朝鮮王祖때 부터 있었던 本來의 春塘池 이다. 面積이 넓은 앞쪽 연못은  원래 王이 몸소 農事를 行하던 11개의 논이었다. 이곳에서 임금이 친히 쟁기를 잡고 소를 몰며 논을가는 示範을 보임으로서  豐年을 起源 하였다. 1909년 日帝가 昌慶宮을 破壞할때 이 자리에 연못을 파서 보트를 타고 놀이를 즐기는 遊園地로 만들었다. 연못가운데 섬은 1986년에 造成되었다.

 

 

팔각칠층석탑

(八角七層石塔)

 

이 탑은 朝鮮 성종(成宗)원년(元年 1470)에 中國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日帝强占期인 1911년 昌慶宮에 李王家 박물관(李王家博物館)을 建立할때 商人으로 부터 購入하여 세운것이다. 石塔의 기단(基壇)은 사각형의 받침돌과 팔각의 2중 基壇으로 되어있다. 그 위에 놓인 팔각형 돌의 각 面에는 꽃무늬를 새겼다. 팔각의 납작한 돌 위에는 밥그릇을 엎어놓은 듯한 模樣의 동그스름한 塔身 받침을 놓고 화려한 연꽃무늬의 돌을 새김하였다. 1층 塔身은 위층에 비해 매우높으며 지붕돌은 팔각으로 木造 建物의 지붕처럼 表現하였다. 지붕돌 윗부분은 그 材質로 보아 後代에 補完한것 같다. 이 石塔의 全體的인 形態로 보아 공주(公州) 마곡사(麻谷寺) 石塔과 비교되는 라마탑(喇魔塔)을 聯想케 된다.

 

 

성종태실

(成宗胎室)

 

胎室은 王室 子孫의 를 묻어 記念했던 造形物이며 胎室碑는 그 事緣을 記錄한 碑石이다. 胎室은 全國의 風水가 좋은 明堂에 흩어져 있었고 成宗胎室은 京畿道 廣州에 있었다.  1928년 즈음에 朝鮮 王室 胎室 大部分을 西三陵으로 모으는 課程에서 가장 形態가 온전한 成宗胎室만 이곳으로 옮겨 硏究用 으로 삼았다고 한다.

 

 

태실비

(胎室碑)

 

胎室은 王室 子孫의 胎를 묻어 記念했던 造形物이며 胎室碑는 그 事緣을 記錄한 碑石이다.

 

 

느티나무

 

느티나무는 宮闕에서 흔히 볼수있는 나무로 昌德宮 後園에 있는 오래된 나무들은 大部分 느티나무 이다. 느티나무는  木材로 만들었을때 變形이 적고 摩擦이나 衝擊에도 强 해서 建築이나 家具의 材料로 많이 使用 되었다. 영주 浮石寺, 無量壽殿 外部 기둥 16 개 八萬大藏經板을 保管하고 있는  陜川海印寺 法保全의 기둥 48 개가 느티나무로 만든 것이다.  이 느티나무는 18 세기 初盤에 심어진 것으로 推定 된다.

 

 

대온실

(大溫室)

 

昌慶宮 大溫室은 1909 년 建築된 우리나라 最初의 西洋式 溫室 이다. 建築의 뼈대는 木材와 鐵材로 이루어져 있고 外皮는 온통 유리로 덮혀 있다. 당시 새로운 建築材料 였던 鐵과 유리로 지은  大溫室의 外觀은 大部分 古風스러운 木造殿閣인 宮闕 안에서 예나 지금이나 매우 異色的 이다.  大溫室은  日帝의 不遜한 意圖 아래 毁損된 昌慶宮의 一面을  보여주는 建築物이다.  하지만 建築된지 이미 100 여년이 지난 오늘날에는 그 自體가 歷史的 價値와 建築適 意味를  지닌 近代의 文化遺産으로 새롭게 자리 매김되고 있다.  登錄文化財로 指定 되었다.

 

  

풍기대

(風旗臺)

 

風旗臺는 바람의 方向과 세기를 測定하는 바람 깃발을 세운 風向旗의 대(臺)이다 世宗時代에는 農業氣象學이 發達하여 氣象觀測이 활발히 이루어졌다 특히 降雨量의 測定과함께 風向과 風速의 觀測은 重要視 되었는데 風旗臺는 우리손으로 만든 독특한 氣象觀測旗의 하나이다, 이 風向旗 석대(石臺)는 맨 위에 깃대틀 꽃을수 있는 깊이 33cm ,직경 11cm의 구멍이 파여있고 여기에 좁고긴 깃발이 달린 깃대를 세워 깃발이 날리는   方向과 세기를 觀測하기 위한 것이다. 이 風旗臺는 世宗時代의 傳統을 이어 받아 18세기 에 만든 창경궁(昌慶宮)의 풍기대(風旗臺)寶物제846호.

 

 

앙부일구

(仰釜日晷)

 

앙부일영(仰釜日影)이라고도 한다. 네발달린 반구형(半球形)의 솥처럼 생겼기 때문에 仰釜라는 이름이 붙었다. 이것은 (원사 元史) 천문지(天文志)양의(仰儀)에 있는 곽수경법(郭守敬法)에 의해 만들었다고 하나 仰儀 와는 다르다. 우리나라에서는 世宗때 처음 만들었으며 以後 朝鮮末까지 繼續해서 만든 代表的인 해 時計로 公衆用 으로 設置 해놓은 것과 작게 만들어 携帶할수 있는 것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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