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歷 史 旅 行 1/王 宮

昌德宮/後園

 

(昌德宮 後園)

 

 

昌德宮은 아름답고 넓은 後園 때문에 다른 宮闕보다 王들의 사랑을 받았다. 自然地形을 그대로 살리면서 골짜기마다 庭園을 만들었는데 芙蓉池, 愛蓮池 . 觀覽池. 尊德池 같은 연못을 만들고 玉流川 周邊에는 逍遙亭 淸猗亭 太極亭등 아담한 規模의 亭子들을 세워 自然을 더 아름답게 完成 하였다.  後園은 王과 王室의 休息空間 이었지만 王이 主觀하는 여러가지 野外 行事가 열리는 場所이기도 했다.  王은 後園에 穀食을 심고 길러  農事의 어려움을  體驗하였고 王妃는 親히 누에를 쳐서 養蠶을  獎勵하기도 하였다. 

   

 

 

금천교

(金川橋)

 

1411년(太宗11년)에 築造된 돌다리.  朝鮮의 宮闕에는 共通的으로 初入部에 風水地理常 길한 明堂水를 흐르게 하고 그위에 돌다리를 놓음.

 

 

창덕궁향나무

 

이 향나무는 나이가 약 750년 된것으로 推定되며 높이 5.6 m 뿌리부분 둘레 5.9 m 이다. 향나무의 木材는 强한 香氣를 지니고 있어 祭祀때 香을 피우는 材料로 使用 된다. 이곳에 향나무가  심어진것은 東쪽에 있는 璿源殿이 歷代 임금들을 위한 祭禮의 空間 인것과 關聯이 있다. 1836 년 무렵에 그려진 昌德宮 그림 東闕圖 에서도 이 향나무를 찾아볼수 있다.

 

 

인정전

(仁政殿)

 

國寶 제225호. 平面은 앞면 5칸, 옆면 4칸이며, 重層이나 內部는 通層으로 되어 있다. 1405년에 建立되었으며, 壬辰倭亂 때 消失되자 1610년에 重建했고, 1803년(純祖 3)에 불탄 것을 다음해에 復元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長臺石으로 바른층쌓기한 2단의 월대 위에 다시 長臺石 基壇을 쌓고 다듬은 礎石을 놓아 두리기둥을 세워 공포를 기둥 위와 기둥 사이의 평방 위에 짜놓은 多包式 建物이다. 바닥은 쪽마루이나 원래는 전을 깔아 마감한 전바닥이었으며, 처마는 겹처마이고, 용마루와 합각마루는 양성을 했으며 용마루 양 끝에는 취두를, 합각마루와 추녀마루 끝에는 용두를 얹고, 추녀마루 위에는 雜像을 늘어놓아 粧飾했다. 특히 용마루에 5개의 李花紋章의 粧飾을 두었는데 이것은 1930년대에 日帝가 設置한 것이다.

 

 

선정전

(宣政殿)

 

王이 高位職 臣下들과 함께 日常業務를 보던 公式 執務室인 便殿으로 地形에 맞추어 正殿 東쪽에 세워졌다. 아침의 調整會議,業務報告 國政세미나인 경인등 各種 會議가 이곳에서 每日 열렸다. 昌建 당시에는 朝啓廳이라 불렸는데 1461년 (世祖7)에 政治는 베풀어야 한다.는 뜻의 宣政殿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壬辰倭亂과 仁祖反正 등의 火災로 消失되었다가 1647년 (仁祖25)에 仁王山 기슭에 있던 인연궁을 헐어 그 材木으로 再建 하였다. 周圍를 둘러싼 行閣들은 秘書室 附屬室로 利用했으나 全體的으로 비좁았다. 昌德宮 建物중 唯一하게 지붕에 값비싼 靑기와를 올려 이곳이 임금의 執務室임을 象徵하고 있다.

 

 

어차고가된빈청

(御車庫賓廳)

 

宣政殿 앞에 御車庫로 쓰이던 建物은 元來 賓廳이었다. 賓廳은 政丞判書급 高位官僚들이 王을 만나기 前後에 머무르면서 國事를 論議하던 곳이다. 宮闕에 드나드는 官員 가운데 가장 高位 官員들의 空間이었기에 闕內 官廳으로 規模가 꽤컸다. 西쪽과北쪽에 담장을 두르고 마루와 온돌방을 갖추었으며 화장실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 남아있는 賓廳은 外形과 쓰임새 모두 옛 모습과 전혀 다르다. 賓廳은 수종이 昌德宮에 起居할때 車庫로 바뀌었다.

 

 

(樂善齋)

 

英親王은 高宗의 일곱번째 아들로 어머니는 純獻皇貴妃 嚴氏이며 純宗의 異腹동생이다. 이름은 垠 이고 이명은 酉吉이다. 1907년 11세의 나이로 皇太子에 冊封되었으나 12월 留學이라는 名目으로 日本에 人質로 끌려갔다.  1920년 日本에 의해 메이지 天皇의 조카이자 皇族 나사모토의 딸인 미사코(方子)와 政略 結婚하게 되었다. 英親王妃는 메이지 天皇의 조카 나사모토노미아 모리마사와 이쓰코 사이의 長女로 도쿄에서 태어났으며 이름은 마사코 이다 1916년 英親王과 約婚하였고 1920년 學習園 女子高等學敎를 거쳐 같은해 4월 28일 도쿄에서 結婚式을 올렸다. 英親王妃는 結婚後 英親王의 性을 따라 李方子 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朝鮮王祖 마지막 英親王 李垠이 1963 년부터 1970년까지 살았으며, 1966년부터 1989년까지는 李方子 女史가 起居하였다,

 

 

희정당

(熙政堂)

 

仁政殿이 昌德宮의 象徵的인 全閣이라면 熙政堂은 王이 가장 많이 머물렀던 실질적인 中心建物이라 할수있다. 원래이름은 崇文堂이었으나 1496년 (燕山2)에 熙政堂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元來의 便殿인 宣政殿이 비좁고 종종 국장을 위한 혼전으로 쓰이면서 寢殿이었던 熙政堂이 便殿의 技能을 代身하게 되었다. 지금의 熙政堂은 1917년 火災로 消失 된것을 1920년에 復舊하면서 景福宮에 있던 康寧殿을 옮겨 지은것이다. 東闕圖에 그려진 元來의 熙政堂은 여러개의 돌기둥위에 세운 아담한 누마루집 이었고 마당에 연못도 있었다. 지금의 熙政堂은 이 모습은 完全히 다르고 元來의 康寧殿과도 다르다. 再建된 熙政堂 內部는 쪽마루와 카펫 유리窓門 天障에 상들이제 등을 設置하여 西洋式으로 꾸며졌다. 寶物 815로 指定되었다. 

 

 

규장각

(奎章閣)

 

朝鮮 貞祖 卽位年 (1776)에 設置한 王室 圖書館 歷代 임금의 글이나 고명 (顧命)유교(遺敎)선보(瑄譜)보감(寶鑑)따위와 어진(御眞)을 保管하고 많은 冊을 編纂 印刷 頒布하여 朝鮮後期의 문운(文運)을 불러 일으키는 中心 역활을 하다가 1894년 甲午改革때 廢止하였다.

 

 

양지당

(養志堂)

 

昌德宮 璿源殿에 속하는 規模 正面 4칸  側面면  3칸 의 殿閣중 하나로 임금이 璿源에 祭祀를 지내거나  參拜하기전에 머물던 御製室 이다. 또한 御眞 이나 御書를  담은 櫃를 保管하는 곳이다.

 

 

억석루

(憶昔樓)

 

억석(憶昔)' 뜻은 '옛날(昔)을 생각한다(億)'이다. 漢京識略에 따르면, 英祖가 內醫院에다  神農位牌를 모시고 祭祀를 지내라고 하면서 '입심억석(入審憶昔)'이란 글자를 써서 하사했다고 한다. 神農은  中國 神話에 나오는 三皇五帝 중 한 명으로, 多樣한 풀들을 일일이 먹어가면서  藥의 效能을 알아내고 이를 바탕으로  疾病을 治療 했다는 傳說이 있다. 그래서 醫藥의 創始者로 推仰받았다. 즉, 神農을 생각하여 精誠껏 藥을 만들라는 意味이다.

 

 

後 園

 

 

昌德宮은 아름답고 넓은 後園 때문에 다른 宮闕보다 王들의 사랑을 받았다. 自然地形을 그대로 살리면서 골짜기마다 庭園을 만들었는데 芙蓉池, 愛蓮池 . 觀覽池. 尊德池 같은 연못을 만들고 玉流川 周邊에는 逍遙亭 淸猗亭 太極亭등 아담한 規模의 亭子들을 세워 自然을 더 아름답게 完成 하였다.  後園은 王과 王室의 休息空間 이었지만 王이 主觀하는 여러가지 野外 行事가 열리는 場所이기도 했다.  王은 後園에 穀食을 심고 길러  農事의 어려움을  體驗하였고 王妃는 親히 누에를 쳐서 養蠶을  獎勵하기도 하였다. 

 

 

昌德宮 後園 으로 가는길

 

애련정

(愛蓮亭)

 

1629년 (肅宗 18년)에 연못 가운데 섬을 쌓고 亭子를 지었다고 하는데 지금 그 섬은 없고 亭子는 연못 북쪽 끝에 걸쳐 있다. 연꽃을 특히 좋아하는 肅宗이 이 亭子에 애련(愛蓮) 이라는 이름을 부여 연못은 愛蓮池가 되었다. 肅宗은 내 연꽃을 사랑함은 더러운 곳에 처하여도 맑고 깨끗하여 은연히 君子의 德을 지녓기 때문이다. 라고 새 亭子의 이름을 지은 까닭을 밝혀 놓았다. 愛蓮池 서쪽 延慶堂 사이에 또하나의 연못이 있는데 원래 이곳에 漁水堂 이라는 亭子가 있었다. 하나 지금은 없어졌다.  1827년 (純祖 27년)孝名世子는 愛蓮池 南쪽에 倚斗閣을 비롯한 몇 개의 建物을 짓고 담장을  쌓았다. 現在 寄傲軒 이라는 現版이 붙은 倚斗함은 4칸 의 短出한 書財로 丹靑도 없는 매우 소박한 建物이다. 바로 옆의 운정거는 闕安에서 가장작은 한칸 반짜리 建物이다.

 

 

부용정

(芙蓉亭)

 

1707년에 지은 澤水齋를 1792년(貞祖 16)에 고쳐 지으면서 芙蓉亭이라 했다. 平面構造는 앞면 3칸, 옆면 4칸의 아(亞)자형을 基本으로 하면서 그 南쪽 面의 一部가 突出되어 있다. 長臺石 基壇 위에 다듬은 8각형의 礎石을 놓고 圓柱를 세우고, 기둥 위에는 주두와 익공 2개를 놓아 굴도리를 받치고 있는 이익공집 이다. 처마는 부연을 단 겹처마 이고, 지붕은 팔작지붕이다. 亭子의 기단 南면과 양측면에 階段을 두어 툇마루로 오르게 되어 있으며, 亭子 北측에 파놓은 넓은 연못[方池]를 向하도록 되어 있다.

 

 

주합루

(宙合樓)

 

宙合樓는 貞祖가 卽位한 1778년에 創刊한 2층 樓閣이다. 아래층에는 王室 直屬 圖書館인 奎章閣을 위층에는 閱覽室겸 누마루를 만들었다. 奎章閣이란 文章을 擔當하는 하늘의 별인규숙 (奎宿)가 빛나는 집이란 뜻이고 宙合樓란 天地宇宙와 通하는 집이란 뜻이다.

 

 

어수문

(漁水門)

 

높은 언덕위에 있는 宙合樓로 오르는 正門이 漁水門 이다.  물고기가  물을 떠나서 살수없다는 格言과 같이 統治者는 항상 百姓을 생각하는 敎訓이 담긴 門으로 貞朝의 미본政治 哲學을 보여준다. 큰 門 하나와 左右로 작은 문 두개로 나누어진 모습도 독특하다.

 

 

영화당

(暎花堂)

 

暎花堂에서는 王이 入會하는 特別한 科擧試驗을 치르기도 했다. 暎花堂은 東쪽으로 春堂 대마당 을 西쪽으로는 芙蓉池를 마주하며 앞뒤 에 뒷마루 를 둔 특이한 建物이다. 休息을 위한 芙蓉亭은 연못에 발을 담그고 있는 形象이고 行事가 치러지던 暎花堂은 연못에 면해 있으며 學文을 硏磨하던 宙合樓는 높은곳에서 연못을 내려다 보고있다.

 

 

불로문

(不老門)

 

이문을 通하는자는 늙지 않는다. 京福宮 電鐵驛에 模造品이 設置되어 있다. 이 門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디긋자형의 돌이 이은자국이 없다. 原石의 크기를 짐작할수 있으며 돌기둥에 門을 달았던 痕跡을  볼수 있다.

 

 

기오헌

(寄傲軒)

 

昌德宮 後園, 奎章閣 뒷편에 위치  寄傲軒 왼쪽   寄傲軒 은 순조(純祖, 23대)의 아들 孝明世子가 지은 집이며 때때로 독서를 즐기던 곳이다.  長臺石을 한벌로 두른 낮은 基壇위에 네모 뿔대의 다듬은 初石을 놓고 네모 기둥을 세워 납도리로 결구한 민도리 집으로 홑처마의 팔작지붕을 이루고 있다. 단청을 하지 않은 극히 소박한 집으로 정면 4칸, 측면3칸의 방형 평면으로 왼쪽 1칸폭이 온돌방이고, 중앙 2칸폭이 우물마루의 대청이고, 오른쪽 1칸폭이 누마루이다.

 

 

의두각

(倚斗閣)

 

倚斗閣 오른 쪽 倚斗閣은 寄傲軒 보다 작은 倚斗閣은 안에 한 사람이 누울 空間도 없을 정도이다.두 곳 모두 그늘진데다가 北쪽을 向하고 있어서 겨울에는 눈이 늦도록 녹지 않고 쌓여 있다. 이 곳 역시 孝名世子가 즐겨 찾았던 곳이다. 寄傲軒 처럼 민도리집으로 홑처마 팔작지붕을 이루고 있다.丹靑을 하지 않은 소박한 白骨宅으로 正面 2칸, 側面1칸의 극히 작은 平面을 이루고 있다.  할아버지인 貞祖를 본받아 젊은 人才들을 登用하고 改革政治를 펼치려했던 孝名世子는 안타깝게도 3년 3개월이란 짧은 代理聽政을 끝으로 아버지 純祖의 希望을 펴지 못하고 1830년 5월 6일 22세 나이로 世上을 떠나게 된다. 

 

 

청의정

淸猗亭

 

淸猗亭은 現在 宮闕에 남아 있는 唯一한 초가집 이다.

 

 

옥류천

玉流川

 

玉流川이란 後園의 北쪽 깊은 골짜기에 흐르는 시내를 뜻한다. 1636년, 巨大한 바위인  逍遙巖을 다듬고 그 위에 홈을 파서 휘도는 물길을 끌어들였고 이 물길을 아래로 내려뜨려 작은 瀑布가 되게 하고 이 瀑布가 떨어진 곳에서 玉流川은 始作된다.  구불구불한 물길 위에 술잔을 띄우고 詩 를 짓는 놀이인 流觴曲水宴이 이곳에서 벌어지기도 했다. 바위에 새겨진 세 글자 玉流川은 仁祖의 親筆이고 五言絶句 한 구(절)가 다섯 글자로 된시는  일대의 景致를 옮은 肅宗의 詩 이다. 逍遙亭. 太極亭 .籠山亭. 翠寒亭 등 작은 亭子가 曲曲에 있는 매우 單蛾하고 아기자기한 庭園 이다. 옆에 작은 논이 있는 淸猗亭은 現在 宮闕에 남아 있는 唯一한 초가집 이다.

 

 

숙종 어제

비류삼천척(飛流三百尺)  요락구천래(遙落九天來)

 

날아 흐르는 물이 삼백척이요  아득히 떨어지는 물은 구천에서 내리네.

 

간시백홍기(看時白虹起)  번성만학뢰(翻成萬壑雷)

 

볼 때 흰 무지개 일고  골짜기마다 우레 소리 가득 하네.

 

 

연경당현판

(演慶堂懸板)

 

 

연경당

(演慶堂)

 

昌德宮 演慶堂은 孝名世子(1809~1830)가 勢道政治에 시달리는 아버지 純祖를 즐겁게 하기 위한 孝道의 次元에서 昌德宮 後園에  建立한 것으로 어머니인 元王后의 生日 祝賀 진작(進爵:술잔을 올리는 의식)  行事와 각종 정재(呈才:궁중 행사용 춤과 노래)公演이 擧行되었던 곳으로 경축(慶祝)行事를 연행(演行)한다는 意味에서   연경당(演慶堂)이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합니다 지금의 演慶堂은 高宗이 1865년쯤에 새로지은 것으로 推定된다.士大夫 살림을 본떠 王의 사랑채와 王妃의 안채를 中心으로 이루어졌으며 丹靑을 하지 않았다.  사랑채와 안채가 분리되어 있지만 내부에는 連結되어 있는점도 類似하다 그러나 一般民家가 99칸으로 規模가 制限된 데비해 演慶堂은  120여칸이어서 차이가난다. 書材인  善香齋 는 靑나라풍 벽돌을 使用하였고 銅板을 씌운 지붕에 도르래식 차양을 設置하여 이국적인 느낌이 든다.

 

 

사랑채

(舍廊棟)

 

舍廊棟는 男性들이 生活하는 집채인데 普通 女性들이 居處하는 안채와 딴채로 짓는데 안채와 연이어 짓는 경우도 있다. 사랑채는 主人이 낮에 거처하며 손님을 맞이하는 사랑방과 이 사랑방을 드나들 때 전실처럼 쓰이고 여름철에 많이 利用되는 큰 마루 그리고 여름의 居處인 누마루 취침때 쓰는 寢房으로 構成 된다. 연경당 (演慶堂) 사랑채는 길게 다듬는은 돌로 만든 基壇위에 주춧돌을 놓고 네모기둥 (方柱)을 세워 斷面이 原形인 굴도리를 받치고 斷面이 四角形인 민도리를 올려 지은집 으로 네귀에 모두 추녀를 단 팔작지붕을 얹고 처마 서까레만 걸어 꾸민 홀처마를 이루고 있다. 四方에 모두 窓戶를 달고 앞쪽의 窓戶들은 여름이면 접어 들쇠에 매달아 開放 할수 있도록 하였다.

 

 

선향재

(善香齋)

 

善香齋는 書冊을 保管하고 冊을 읽으며 또 손님도 맞이하는 집이었다. 선향재장서지처(善香齋藏書之處)라는 글이 궁궐지 (宮闕誌)에 있는 것으로 보아 연경당(演慶堂)의 書材로 지어진 집임을 알수있다. 집의 構造는 正面 7칸 側面 2칸으로 中央에 큰마루를 두고 左右로 온돌방을 두었다. 이 집의 西쪽에는 차양(遮陽)을 달았는데 예부터 士大夫집에 만들어져 따가운 夕陽볕이나 비바람을 피하던 構造이다. 善햔齋의 東쪽 언덕에는 돌을 層層이 쌓아 花階를 만들어 꽃과 나무를 심어 놓고 보며 즐겼다.

 

 

존덕정과 정조의교시

尊德亭과正祖의敎示

 

尊德亭 안 北쪽벽에 萬川明月主人翁自序 라는  題目으로 빽빽하게 쓴 懸板이 있는데 正祖가 執權 末期인 1798 년 直接 지은글 이다. 世上에 모든 시내는 달을 품고 있지만 하늘에 떠 있는 달은 唯一하니 그 달은 곧 임금인 나이고 시내는 곧 너희 臣下 들이다. 따라서 시내가 달을 따르는것이 宇宙의 이치 라는 强力한 內容 이다. 平生 王權强化를 위해 努力 했던 正祖의 峻嚴한 꾸짗음을 듣는듯 하다.  天障 中央에는 雙龍이 如意珠를 戱弄하는 그림을  그렸는데 이 역시 王權의 志嚴함을 象徵하는 것이다. 

 

 

농수정

(濃繡亭)

 

마치 매가 날개를 편것같이 날렵한 모습이다. 안채 뒤편에는 飮食을 準備하던 반빗간이 있다. 高宗이후 演慶堂은 外國 公事들을 接見하고 宴會를 베푸는등 의 政治的인 目的으로 利用 되었다.

 

 

창덕궁향나무

 

이 향나무는 나이가 약 750년 된것으로 推定되며 높이 5.6 m 뿌리부분 둘레 5.9 m 이다. 향나무의 木材는 强한 香氣를 지니고 있어 祭祀때 香을 피우는 材料로 使用 된다. 이곳에 향나무가  심어진것은 東쪽에 있는 璿源殿이 歷代 임금들을 위한 祭禮의 空間 인것과 關聯이 있다. 1836 년 무렵에 그려진 昌德宮 그림 東闕圖 에서도 이 향나무를 찾아볼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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