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歷 史 旅 行 1/王 宮

景福宮

(景福宮)

 

史蹟 제117호. 現在 서울에 있는 朝鮮時代 5代 宮闕 中 正宮에 해당하는 것으로 北쪽에 자리하고 있어 北闕로도 불린다. 朝鮮王朝를 연 太祖 李成桂가 漢陽으로 都邑을 定하고 가장 먼저 한 일 중의 하나가 景福宮을 만드는 일이었다. 1394년(太祖 3) 12월 4일 始作된 이 工事는 이듬해 9월 重要한 殿閣이 大部分 完工되었다. 宮의 이름은 〈시경 詩經〉에 나오는 王朝의 큰 福을 빈다는 뜻으로 '군자만년개이경복'(君子萬年介爾景福)에서 따왔다. 5대 宮闕 중 가장 먼저 지어졌으나 이곳에 王들이 머문 期間은 1405년(太宗 5) 지어진 一種의 別宮인 昌德宮에 비해 훨씬 짧다. 世宗·文宗·端宗이 이곳에 주로 起居했으며, 王子의 亂으로 인한 開城遷都 기간 동안 빈 宮闕이었다. 王위를 簒奪한 世祖가 景福宮을 기피해 昌德宮에 起居하면서 임금이 살지 않는 宮이 되었다. 1543년(中宗 38) 東宮에서 일어난 火災와 1553년(明宗 8)에 일어난 內殿一廓의 火災로 인해 많은 被害를 입었으나 이듬해 復舊되었다. 38年 뒤 壬辰倭亂으로 인해 모든 建物이 불탄 後 270여 年間 廢墟狀態로 있다가 1865년(高宗 2) 大規模 再建工事가 始作되었다. 1868년 高宗이 이곳으로 옮겨왔으나, 1876년에 일어난 大規模 火災로 다시 昌德宮으로 옮겼다가 1888년 再次 옮기는 등 여러 차례의 被害와 復舊가 거듭되었다. 1904년 이곳에 統監府가 들어섰고 1917년 11월에 일어난 昌德宮의 大規模 火災 뒤 이를 復舊하기 위해 1918~20년 元來 있던 建物을 解體했다. 또 이곳에서 나온 建築資材의 放賣와 國立中央博物館이었던 朝鮮總督府 建物의 建立 등으로 本來의 모습을 잃었으나 1996년 12월 朝鮮總督府 建物의 撤去 등으로 一部가 復舊되었다.

 

 

 

해태

(獬豸)

 

動物의 形象을 하고 있으나 假想의 象徵物이며 火災나 災殃을 물리치는 神獸로 看做된다. 建物 入口에 左右로 1개씩 세우는 것이 普通이며 주로 宮闕 같은 大形 建物을 火災로부터 保護해준다는 俗信이 있다.

 

 

흥례문

(興禮門)

 

興禮門은  景福宮의 正門인 光化門과 勤政殿의 正門인 勤政門 사이에 있는 中門으로, 正面 3칸, 側面 2칸의 中層 木造 建物이다. 元來는 1426年(世宗 8年)에 集賢殿에서 禮를 널리 편다’는 뜻의 弘禮門으로 이름을 지어올렸는데, 1867년(高宗 4年) 景福宮을 重建하면서 靑나라 高宗 건륭제의 휘 홍력(弘曆)을 피하여 지금의 興禮門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興禮門 中央에서 景福宮 안쪽을 들여다보면 영제교를 지나 勤政門, 勤政殿이 次例로 일자로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勤政殿에 가려 보이지는 않지만 勤政門 뒷편의 思政殿과 康寧殿, 交泰殿도 모두 일자로 配置되어 있다. 다만 景福宮의 正門이라 할 수 있는 光化門은 한쪽으로 틀어져 있는데 日帝가 朝鮮總督府 建物을 지으면서 헐어냈던 것을  朴正熙 大統領이 復元하면서 元來의 位置가 아닌 朝鮮總督府 建物에 맞추어 지었기 때문이다.

 

 

근정문

(勤政門)

 

勤政門은 政殿인 勤政殿의 正門으로 正面 3칸, 左右로 各各 1칸씩의 옆門을 配置한 重層 構造로 되어 있다. 寶物 제812호로 指定되어 있다.  王이 宮闕 밖으로 行次할 일이 없는 平素에는 門을 닫아두었고 大臣 管理들이 宮에 出入할 때는 左右에 있는 日華門과 月華門을 利用하였는데, 陰陽으로 볼 때 太陽을 뜻하는 文班 官僚 들은 東쪽의 日華門을, 그리고 달을 뜻하는 武班 官僚들은 西쪽의 月華門을 通하여 出入하였다.

 

 

근정전

(勤政殿)

 

景福宮 안에 있는 朝鮮時代의 2層 建物. 國寶 第223호. 規模는 正面 5칸, 側面 5칸으로 總 25칸이며 重層建物이다. 공포는 多包系樣式이고, 構造는 前後退間十一樑構造인데 팔작지붕으로 되어 있다. 臣下들의 朝賀를 받거나 政令을 반포하는 政殿으로, 때로는 使臣을 맞아들이기도 하고 養老宴이나 慰勞宴을 베풀기도 하던 곳이다.

 

 

어 좌

(御座)

 

중앙칸 안두리기둥 사이에 寶座를 마련하고 그 위에 御座를 設置하였다. 御座 뒤에는 日月五岳屛風을 背景으로 삼아 四龍首를 彫刻한 三折屛을 두었다. 御座의 上部에는 四角平面에 多出目의 작은 공포를 짜고 네 귀를 모접이 한 뒤 다시 다출목의 작은 공포를 짜서 이른바 抹角天障形式의 寶蓋를 마련하였다. 그 中央에는 雙龍과 如意寶珠를 彫刻하였다. 寶座는 覆蓮과 仰蓮을 새긴 蓮花對坐를 받침으로 하되 對坐의 옆面은 3단의 궁판으로 나누었다. 조롱동자 처럼 彫刻한 童子를 史用해서 궁판을 구획하고 여기에 風穴을 새기고 그 사이에 寶相華文을 彫刻하였다. 對座 위에는 난간을 두었는데, 鷄子脚 사이 아랫부분에는 鬼面을 2구씩 두고 그 상부에는 風穴을 彫刻하였다.

 

 

사정전

(思政殿)

 

思政殿은 王이 日常 業務를 보는 便殿이다. 앞면 11칸, 옆면 3칸의 33칸 規模로 다포계 樣式의 單層 팔작집이다. 太祖 4年(1395) 세워졌으나 壬辰倭亂 때 불타 高宗 4年(1867)年에 重建되었다. 思政이라는 이름은 모든 이치는 생각하면 얻고 생각하지 않으면 잃는다는 뜻이다. 여기서는 王이 政事를 보고 文臣들과 함께 經典을 講論하고 宗親 大臣들과 酒宴을 함께 하기도 하고, 王이 친히 參席하여 文武 科擧를 보이기도 하는 곳이다.

 

 

강녕전

(康寧殿)

 

康寧殿은 王이 居處하던 寢殿으로 正面 11칸, 側面 5칸 規模의 初翼工 팔작 지붕이다. 王의 寢殿이므로 龍마루가 없으며, 全面에 퇴가 開放된 中央 어칸은 마루로 左右는 온돌방으로 꾸몄다. 康寧殿  일곽은 1920년 昌德宮의 復元을 위해 헐려 없어진 것을 1995년에 復元하였다. 康寧殿은 王이 居處하던 곳인만큼 火災가 나지 않도록 신경을 썼는데, 굴뚝을 建物 가까이에 지을 수 없고 그렇다고 멀리 떨어진 곳에 굴뚝을 지을 수도 없었기에 康寧殿 뒷편의 交泰殿으로 가는 兩儀門 左右에 굴뚝을 붙여 지었다.

 

 

교태전

(交泰殿)

 

交泰殿은 王妃의 寢殿으로 康寧殿에서 양의문을 지나면 나타나는 正面 9칸 規模의 建物이다. 建物 뒷편에는 庭園인 峨嵋山이 位置하고 있는데 峨嵋山을 볼 수 있도록 後面東쪽에 마루와 房으로 連結된 건순각을 配置하였다.康寧殿과 마찬가지로 용마루가 없는 것이 特徵이다.

 

 

아미산

(峨嵋山)

 

寶物 濟811호. 峨嵋山의 굴뚝은 王妃의 寢殿인 交泰殿의 온돌방과 連結된 굴뚝으로, 1865년(高宗 2年) 景福宮을 重建할 때 만든 것이다. 現在는 4개가 남아있는데 육각형의 굴뚝 벽에는 덩굴, 학, 박쥐, 봉황, 소나무, 매화, 국화, 불로초, 바위, 새, 사슴 등의 무늬를 벽돌로 구워 配列하였고 벽돌 사이에는 회를 발라 面을 構成하였다. 十長生, 四君子와 長壽 富貴 등 길상의 무늬 및 火魔 惡鬼를 막는 상서로운 짐승들도 表現되어 있다.굴뚝의 윗부분은 조형전으로 木造 建物의 形態를 模倣하였고 그 위로 煙氣가 빠지도록 粘土를 빚어서 만든 집 模樣의 粧飾을 設置하였다. 굴뚝으로서의 技能을 充實히 하면서 各種 文樣의 形態와 構成이 매우 아름다워 宮闕 後園의 裝飾的 造形物로서 훌륭한 作品이다.

 

 

아미산 굴뚝

(峨嵋山)

 

王妃의 寢殿 뒤쪽에 人工으로 階段式 庭園을 만들고 가운데 단에 六角形 굴뚝 4개를 나란히 세웠다. 흙을 구워 만든 연한 朱黃色 전벽돌 몸체 위해 기와 지붕을 얹고 그 위에 4 개씩 작은 굴뚝을 모았다. 몸체에 여러무늬들은 각각 象徵的인 意味를 갖는다. 鳳凰은 王妃를 박쥐는 富貴를 梅花와 君子의 心性을 鶴,  사슴,,불로초,  소나무,  대나무, 돌, 등 十長生은 長壽를 뜻한다. 庭園의 아랫단에는 돌로 만든 그릇인 돌함지와 花盆 등이 놓였는데 涵月池는 달이 담긴 湖水를 落下담은 노을이 비친 연못을 意味한다. 階段式 庭園은 山을 돌함지 따위는 湖水를 굴뚝의 무늬는 動植物들의 生態系를 象徵하여 峨嵋山 庭園은 神仙이 사는 自然의 世界를 象徵 한다.

 

 

향원정

(香遠亭)

 

景福宮 香遠亭과 醉香橋는 正確한 創建年代 記錄이 發見되지 않았지만, 1887년(高宗 24년)의 ‘承政院日記’에 ‘香遠亭’이라는 名稱이 처음 登場하면서 建立 時點을 1887년 以前으로 推定해 왔다. 하지만, 이번 復元工事에서 실시한 木材 年輪 年代 調査를 通해 1881년과 1884년 두 차례에 걸쳐 伐採된 木材가 使用된 것이 確認되어 建立 時期를 推定하는 根據가 마련되면서 香遠亭 建立 時期는 1885년으로 推定하게 되었다.

 

 

취향교

(醉香橋)

 

醉香橋는 乾淸宮 領域과 연못안에 있는 香遠亭을 連結하기 위한 둥근 나무다리이다. 元來 香遠亭 北쪽에 있었으나 韓國戰爭으로 消失되자 1953년 香遠亭 南쪽으로 옮겨 세웠다.  2017 년 發掘調査를 거쳐 醉香橋 現在의 位置를 確認한 후 南쪽 다리는 撤去하고 寫眞등을 參考 하여 2019년 復元 하였다.

 

 

한국전기발상지

(韓國電氣發祥地)

 

이곳은 高宗皇帝의 御命으로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發電所를 設立하여 1887年 3月 6日 乾淸宮 電燈에 點火하고 景福宮에 750개의 電燈을 架設 點登함으로써 이땅에 비로소 文明의 빛을 밝힌 유서 깊은 곳이다.  電氣라는 이 文明의 불은 事實 1887年보다 3年 여 일찍 들어올 豫定이었다. 槪況을 開始한 朝鮮은 美國과도 1882년 5월 22일에 韓美通商協定을 맺었다. 協定 締結 이듬해인 1883年 5月, 美國은 初代駐韓公社로 푸트를 任命, 서울에 赴任시켰으며 朝鮮도 같은 해 8월 민영익, 홍영식 등을 使節團으로 美國에 보냈다. 

 

 

열상진원 샘

列上眞源泉

 

이 샘은 景福宮 創建(1395) 당시부터 있던 王宮의 샘으로 옛날 부터 물이맑고 차서 飮料水로 利用하였다. 글을 새긴 우물 뚜껑은 景福宮 重建(1868)때 만든것이다. 샘에서 솟아난 물이 두번 직각으로 꺽여서 연못으로 잔잔히 흘러들도록 만들었는데 이것은 香遠池에 드리워진 亭子와 꽃나무의 그림자가 물결에 흔들리지 않고 고요히 비치도록 하기위한 것이다. 꺾어지는 수로는 둥근돌로 通路를 만들어 흐르는 물이 더욱 生氣를 띠게 한다.

 

 

건청궁

(乾淸宮)

 

景福宮 重建事業이 끝난 이듬해인 1873年 高宗은 景福宮 北쪽 東山庭園인 鹿山과 香遠亭사이에 乾淸宮을 建立케 하고 明聖王后와 起居 하였다. 乾淸宮의 建築樣式은 宮闕의 寢殿樣式과는 달리 兩班家屋 살림집을 應用하여 長安堂 안채(곤녕함) 附屬建物 (복수당)行脚 등으로 構成 되었는데 그 規模는 兩班家屋 上限線인 99칸의 2.5배 되는 250칸 이다.

 

 

건청궁

(乾淸宮)

 

乾淸宮이 建立된지 3年이 지난 1876년 景福宮에 큰불이 나자 高宗은 昌德宮으로 生活空間을 옮겼으며 1885년에 다시 乾淸宮으로 돌아와 1896년 俄館播遷때 러시아 公館으로 避身할때까지 10여년간 줄곳 이곳에서 지냈다. 한편 乾淸宮은  1887년 美國의 에디슨 電氣會社에서 發電機를 設置하여 우리나라 最初로 電燈이 伽設된곳이다.

 

 

추수부용루

(秋水芙容樓)

 

秋水芙蓉’이란 ‘가을 물 속의 연꽃’을 뜻한다.

 

 

옥호루

(玉壺樓)

 

明聖王后께서 머므시던 곳으로  皇后의 弑害 場所로 追從되는 場所 입니다. 高宗은 弑害 事件 以後  俄館播遷을 하게됩니다. 1896年 2月 11日부터 1897年 2月 20日까지 親러 勢力에 의하여 高宗과 世子가 러시아 公使館으로 옮겨서 거처한 事件. 日本 勢力에 대한 親러 勢力의 反撥로 일어난 事件으로, 이로 말미암아 親日 內閣이 崩壞되었으며 各種 經濟的 利權이 러시아로 넘어갔다.

 

 

필성문

(弼成門)

 

弼成은 臣下가 임금을 輔弼하여 共業을 이룬다는 意味로 볼 수 있다.

 

 

소주방

燒廚房

 

景福宮 燒廚房은 朝鮮時代 임금의 수라와 宮中의 잔치飮食을 準備하던 宮中 부엌으로 내燒廚房. 외燒廚房. 生物房등 8 區域으로 나뉘어 있다. 내燒廚房은 임금의 수라를 만들던 곳이며 외燒廚房 宮中의 잔치,고사飮食을 차리던 곳이다. 그리고 生物房은 임금의 間食인 茶食, 죽, 과일, 떡등을 차리던 곳이다. 燒廚房 朝鮮 太祖 4 년(1395) 景福宮 創建때 建立되었으나 1592년 壬辰倭亂 당시 火災로 消失됐다가 高宗 4년 (1867) 景福宮을 重建할때 建立되었다. 그러나 1915년 日帝가 朝鮮物産共進會를 開催하는 課程에서 景福宮의 여러 殿閣들과 함께 헐려없어졌다. 現在의 燒廚房은 2011년부터 復元工事를 始作하여 2015년에 復元 完了 하였다.

 

 

자경전

(慈慶殿)

 

憲宗(24代王)의 어머니인 神貞王后 趙大妃는 高宗 (26 代王)의 卽位에 決定的인 寄與를 했다. 이에 報答하여 興宣大院君은 趙大妃를 위한 居處를 宮 안에서 가장 華櫚하고 纖細하게 만들었다.  1888년 再建된 慈慶殿을 重心으로 西北쪽 福安堂에 온돌방을 들여 겨울용 寢殿으로 東쪽 聽鉉樓에는 누마루를 設置해 여름용 居室로 삼았고, 協慶堂등 여러 附屬 施設을 連結 시켰다. 뒤편 담장의 十長生 굴뚝은 여러개 온돌방의 굴뚝 들을 하나로 합친 集合 굴뚝이며 無病長壽를 象徵하는 動植物들을 彫刻하여 藝術品 으로 昇華 시켰다. 西편 담장에도 여러꽃나무들과 萬壽無疆을 祈願하는 文字들을 새겨 넣어 나이든 大妃殿 主人의 長壽를 祈願 했다.

 

 

자경전십장생굴뚝

(慈慶殿 十長生 煙突)

寶物 810호

 

慈慶殿 十長生 굴뚝은 慈慶殿  뒷담과 굴뚝을 調和롭게 結合하여 만든것이다. 慈慶殿에는 많은 온돌방이 있었는데 각 방들과 連結된 煙氣 길을 모아 하나의 굴뚝으로 만들었다. 굴뚝 正面에는 가운데에 해,산,돌,물,구름,학,소나무,사슴,거북,불로초의 十長生  무늬를 넣었고 그 위와 아래에 鶴과 나티및 불가사리를 配置하여 不老長生 등 吉祥의  技能과 惡鬼를 막는 辟邪의 役割도 갖추도록 하였다. 굴뚝으로서의 實用的인 技能에 充實 하면서도 造形美가 빼어나 朝鮮時代 宮闕 굴뚝 中 가장 뛰어난 作品으로 平家 받고 있다.

 

 

수정전

(修政殿)

 

修政殿은 돌로 높고 넓게 基壇을 쌓고 그 위에 建物을 세운 것으로, 元來 이 자리엔 世宗大王 때 訓民正音 創製의 産室이었던 集賢殿이 있었다. 1456년 世祖가 王위에 오른 後 集賢殿을 廢止하였고, 建物은 1592년 壬辰倭亂 때 불탄 後 버려져 있었다. 1867年(高宗 4年)에 建物을 다시 짓고 이름을 修政殿이라 하였다. 王이 나랏일을 보던 便殿으로 推定되는 이 建物은 1894年 제1차 甲午改革 때 軍國機務處로 使用되었고 以後 內閣의 廳社로 使用되기도 하였다.  修政殿은 지금은 홀로 남아 있지만 둘레에는 담 役割을 하는 긴 집채인 行脚들이 200칸 가까이 있었고 周邊에는 나랏일을 돌보던 여러 官廳이 있었다. 西쪽에는 宮中의 經書, 文書 등을 官理하고 王의 諮問에 응하였던 玉堂과 歷代 王들이 쓴 글과 玉璽를 保管하고 書籍의 收集과 出版을 擔當한 檢書廳 등이 있었고 南쪽으로는 備邊司의 堂上官 등 臣下들이 나랏일을 議論하던 賓廳과 王命 出納을 擔當하던 承政院 등의 建物이 迎秋門에 이르기까지 즐비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修政殿 左側 앞에는 蔣英實이 自擊漏를 세웠던 곳이라는 表式이 세워져 있다.

 

 

경회루

(慶會樓)

 

나라에 慶事가 있거나 外國 使臣이 왔을 때 宴會를 베풀던 樓閣이다. 이 建物은 太宗 12年(1412)에 建立되었으나 壬辰倭亂으로 燒失된 뒤 高宗 4年(1867)에 重建되었다. 慶會樓는 물 속에 長大石을 쌓아 섬을 만들어 그 위에 세운 앞면 7칸, 옆면 5칸의 二翼工 形式으로 八作지붕을 하고 있다. 景福宮에서 勤政殿 다음으로 큰 建物이다.

 

 

하향정

(荷香亭)

 

荷香亭은 慶會樓와 蓮池 北쪽에 있는 亭子로 1959년에 지어졌다. 荷香亭은 一般 亭子에서는 보기드문 六字形의 形態태이며 規模는 작지만 建築技法이 纖細세하고 翼工形式의 朝鮮後期 宮闕 建築樣式을 따랐다.

 

 

태원전

泰元殿

 

王과 王妃가 죽으면 殯殿에 棺을 모시고 郊外에 마련한 山稜에 屍身과 棺을 묻은 後에는 魂殿에 神主를 모셔 定해진 葬禮 期間을 치른 後에 宗廟로 神位를 옮겨 모시게 된다. 泰元殿은 景福宮의 殯殿으로 文慶殿은 魂殿으로 建立 되었다. 周邊에 恭黙齋, 永思齋등 喪禮用 建物들도 들어서 一廓을 이루었으나 日帝强占期에 撤去를 겪고 한때 靑瓦臺 警護部隊가 駐屯 하는등 變化를 겪었다. 2006년 이 일원의 復元工事가 마무리되어 元來의 모습을 되찾았다. 

 

 

장고

醬庫

 

醬庫는 宮中 宴會나 祭禮에 쓰이는 을 保管 하는 곳이다. 北闕 圖形에는 咸和堂 緝敬堂을 中心으로 東쪽과 西쪽에 醬庫가 있는데 이곳은 西쪽 醬庫 로서 泰元殿과 慶會樓 사이에 位置 한다. 큰 잔치가 있을때는 臨時廚房인 熟設所가 醬庫 가까이에 設置 되었으며 醬庫마마가 장독들을 管理 하였다. 現在 醬庫의 모습은 發掘調査 結果에 따라 2005년에 復元 한것으로 傾斜地를 活用한 階段式 장독대의 모습을 볼수있다. 展示된 독은 2007년에 全國에서 收集 한것으로 우리나라 독의 아름다음을 보여준다.

 

 

집옥재

(集玉齋)

 

集玉齋는 高宗이 個人 書齋 겸 專用 圖書室로 使用하던 建物이다. 神武門의 東쪽에 있으며 正面 5칸, 側面 4칸 規模로 처마 서까래 위에 덧서까래를 달아 꾸민 겹처마에 建物의 側面 左右 끝에 牔栱을 달아 壁面 上部가 삼각형으로 된 맞배집으로 도리가 7개로 된 지붕틀을 쓴 칠량 構造다. 景福宮의 다른 殿閣들과 달리 中國式 洋式으로 지어졌다.

 

 

자선당기단과주춧돌

資善堂基壇基石

 

資善堂은 王世子및 世子妃의 居處로서 資善은 어진 性品을 기린다.는 뜻이다. 資善堂은 世宗 9년 (1427) 勤政殿의 東쪽에 建立된 以後 여러차례의 消失과 重建을 거듭하다 高宗 25 년 (1888)에 重建 되었다. 朝鮮의 國權이 喪失된 以後 1914년에 日本은 資善堂을 撤去하여 日本으로 옮겨갔다. 오쿠라 기하치로(大倉喜八郞)는  1916년에 資善堂을 東京에 있는 自身의 自宅으로  옮겨 朝鮮館 이라는 懸板을 달고 私設美術館으로 使用 하였다. 그러나 1923년 關東大地震으로 建物은 모두 消失되고 基壇과 주춧돌만 남게 되었다. 이것을 1993년 당시 文化財專門委員 김정동 목원大學校 建築學科 敎授가 發見하여 1995년에 國內로 들여왔으나 構造 安全上 問題로 동공 圈域인 資善堂 復元建物의 基礎를 세우는데에 再使用되지 못하고 이 자리에 남게 되었다. 

 

 

해태

(獬豸)

 

動物의 形象을 하고 있으나 假想의 象徵物이며 火災나 災殃을 물리치는 神獸로 看做된다. 建物 入口에 左右로 1개씩 세우는 것이 普通이며 주로 宮闕 같은 大形 建物을 火災로부터 保護해준다는 俗信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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