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歷 史 旅 行 1/王 宮

昌德宮

(昌德宮)

 

 

朝鮮時代 宮闕 가운데 하나로 太宗 5年(1405)에 세워졌다. 당시 宗廟·社稷과 더불어 正宮인 景福宮이 있었으므로, 이 宮은 하나의 別宮으로 만들었다. 임금들이 景福宮에서 주로 政治를 하고 百姓을 돌보았기 때문에, 처음부터 크게 利用되지 않은 듯 하다. 壬辰倭亂 以後 景福宮·昌慶宮과 함께 불에 타 버린 뒤 第一 먼저 다시 지어졌고 그 뒤로 朝鮮王祖의 가장 中心이 되는 正宮 역할을 하게 되었다. 火災를 입는 경우도 많았지만 제때에 다시 지어지면서 대체로 元來의 宮闕 規模를 잃지 않고 維持되었다. 임금과 臣下들이 政事를 돌보던 外殿과 王과 王妃의 生活空間인 內殿, 그리고 休息空間인 後園으로 나누어진다. 內殿의 뒤쪽으로 펼쳐지는 後園은 울창한 숲과 연못, 크고 작은 丁字들이 마련되어 自然景觀을 살린 점이 뛰어나다. 또한 우리나라 옛 先賢들이 庭園을 造成한 方法 등을 잘 보여주고 있어 歷史的으로나 建築史蹟으로 貴重한 價値를 지니고 있다. 160여 종의 나무들이 울창하게 숲을 이루며 300년이 넘는 오래된 나무들도 있다. 1917년에는 大造殿을 비롯한 寢殿에 불이 나서 熙政堂 등 19동의 建物이 다 탔는데, 1920년에 日本은 景福宮의 交泰殿을 헐어다가 大造殿을 다시 짓고, 康寧殿을 헐어서 熙政堂을 다시 짓는 등 景福宮을 헐어 昌德宮의 建物들을 다시 지었다. 지금까지 남아있는 建物 중 宮闕 안에서 가장 오래된 建物은 正門인 敦化門으로 光海君 때 지은 것이다. 正宮인 景福宮이 秩序精硏 한 對稱構圖를 보이는데 비해 昌德宮은 地形條件에 맞추어 自由로운 構成을 보여주는 特徵이 있다. 昌德宮과 後園은 自然의 順理를 尊重하여 自然과의 調和를 基本으로 하는 韓國文化의 特性을 잘 나타내고 있는 場所로, 유네스코의 世界文化遺産으로 登錄되어 있다.   

 

  

돈화문

(敦化門)

 

寶物 제383호. 1412년(太宗 12)에 昌建되었고, 1451년(文宗 1)과 1506년(燕山君 12)에 改造하여 더 크게 만들라는 王命이 있었다는 記錄을 통해 처음에는 지금보다 작은 規模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또한 이는 別宮이었던 昌德宮이 점차 正宮의 구실을 하게 되면서 正門을 보다 威嚴있게 만들 必要性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壬辰倭亂 때 불탄 것을 1608년(光海君 1) 다시 지었고, 1721년(景宗 1) 東쪽 아래·위층 부연을 修理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앞면 5칸, 옆면 2칸의 2층 우진각지붕을 한 樓門이다. 돌계단이 있는 長臺石 基壇 위에 세워졌는데 基壇은 現在 아스팔트 包裝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다. 다른 宮闕의 門이 앞면 3칸인 데 비해 이 門은 2칸이 더 넓으며, 아래층은 12개의 평주와 4개의 고주로, 위층은 12개의 병연주와 2개의 고주로 이루어져 全體的으로 建物이 옆으로 퍼진 느낌을 준다. 다포계로 아래·위층 모두 내3출목·외2출목으로 되어 있고, 아래층은 우물천장, 위층은 燃燈天障이며, 階段은 左右측 툇간의 끝에 있다. 지붕마루는 양성을 하였으며, 취두(鷲頭)·용두(龍頭)·잡상(雜像)을 올려놓고 사래의 끝에는 吐首를 씌웠다. 朝鮮 중기 성문建築의 特徵을 보여주는 代表的인 宮闕의 樓門이다.

 

 

회화나무

 

敦化門 안마당 左右에 자라는 8 그루 회화나무가 모두 天然記念物 이다. 나무키는 15 ~ 16m 가슴높이  줄기둘레 0.9 ~ 1.8m  壽齡은 약 300 ~ 400 년으로 推定 된다.  이곳 회화나무는 1830 년 무렵 昌德宮을 描寫한 東闕圖에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壬辰倭亂으로 불타버린 昌德宮을 다시 지을때 심은것으로 짐작된다. 敦化門 周邊은 調整의 官僚들이 執務하는 官廳이 配置되는 空間으로 이곳에 회화나무를 심은것은 宮闕 正門 안쪽에 槐木(회화나무)을 심고 그 아래에서 三公이 나랏일을 논했다는 中國古事에서 由來 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宮闕 이외에 學德이 높은 선비들이 사는 마을에 흔히 심어서 學者나무라고도 한다. 

 

 

진선문

(進善門)

 

 進善門에는 太宗代와 英祖代에 북을 設置하여 억울한 일이 있는 百姓들이 와서 치면 王이 직접 解決해준다는 申聞鼓 혹은 登聞鼓가 있었다고 傳한다. 한편 進善門 懸板 글씨는 1999년 復元 당시 書藝가 정도준씨가 썼다.

 

 

금천교

(金川橋)

 

1411년(太宗11년)에 築造된 돌다리.  朝鮮의 宮闕에는 共通的으로 初入部에 風水地理常 길한 明堂水를 흐르게 하고 그위에 돌다리를 놓음.

 

 

숙장문

(肅章門)

 

進善門을 지나면 長方形의 마당을 따라 마주보이는 것이 肅章門이다. 이 肅章門 역시 成宗 6年(1475) 左贊成 서거정이 門 이름을 지어올린 것을, 成宗이 落點하여 지었다고 한다. 1820년대 그려진 <東闕圖>에 따르면 肅章門과 進善門 사이 南쪽 行脚에는 內兵曺, 扈衛廳, 尙瑞院등을 볼 수 있다. 이는 仁政門 뜰과 조정 마당에서 公式的인 宮中 意識이 많이 치러졌기 때문으로 推定된다.

 

 

호위청

(扈衛廳)

 

朝鮮 後期에 設置된 軍營의 하나. 1623년(仁祖 1) 宮中을 守護하기 위하여 設置했다. 扈衛廳은 元來 仁祖反正에 참여한 功臣들이個人的으로 거느리고 있던 反正 軍事力을 正規兵力으로 公認하는 課程에서 成立되었다. 扈衛廳은 4名의 勳臣 또는 戚臣이 扈衛大將이 되 各 大將이 100명의 軍官을 거느리고 宮中의 깊은 곳에서 國王을 扈衛하는 任務를 맡도록 하여, 각 大將이 1청씩 맡아 모두 4청으로 構成되었다. 그런데 以後 御營廳 ·총융청總戎廳 등의 新軍營이 設置되는 課程에서 扈衛廳 所屬의 軍官들이 신군영의 基幹 要員으로 빠져나가 位置가 弱化되었다. 이에 따라 顯宗 때는 3청으로 줄었고, 肅宗 때 4청으로 回復되었다가 다시 3청으로 還元되었다. 이때 扈衛廳의 官員으로는 各 廳마다 大將:정1품 3명, 별장(別將:정3품) 3명, 군관(軍官) 350명, 소임군관(所任軍官) 3명, 당상별부료군관(堂上別付料軍官) 1명이 있었다. 扈衛廳의 大將중 1명은 국구(國舅:國王의 장인)가, 2명은 훈신·척신인 대신이 兼職하는 것이 常例였다.

 

 

인정문

(仁政門)

 

仁政門은 昌德宮의 中心 建物인 仁政殿의 正門이다. 孝宗, 顯宗, 肅宗, 英祖 등 朝鮮王祖의 여러 임금이 이곳에서 卽位式을 擧行하고 王位에 올랐다. 王位를 이어받는 意識이 擧行되던 곳으로, 正殿 인 仁政殿과 함께 朝鮮王祖 宮闕의 威嚴과 格式을 가장 잘 간직하고 있는 建築物이다. 仁政門은 朝鮮 英祖 20年(1744) 10월 承政院 火災 때 左右 行閣과 함께 消失되어 이듬해 3월에 再建한 것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인정전

(仁政殿)

 

國寶 제225호. 平面은 앞면 5칸, 옆면 4칸이며, 重層이나 內部는 通層으로 되어 있다. 1405년에 建立되었으며, 壬辰倭亂 때 消失되자 1610년에 重建했고, 1803년(純祖 3)에 불탄 것을 다음해에 復元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長臺石으로 바른층쌓기한 2단의 월대 위에 다시 長臺石 基壇을 쌓고 다듬은 礎石을 놓아 두리기둥을 세워 공포를 기둥 위와 기둥 사이의 평방 위에 짜놓은 多包式 建物이다. 바닥은 쪽마루이나 원래는 전을 깔아 마감한 전바닥이었으며, 처마는 겹처마이고, 용마루와 합각마루는 양성을 했으며 용마루 양 끝에는 취두를, 합각마루와 추녀마루 끝에는 용두를 얹고, 추녀마루 위에는 雜像을 늘어놓아 粧飾했다. 특히 용마루에 5개의 李花紋章의 粧飾을 두었는데 이것은 1930년대에 日帝가 設置한 것이다.

 

 

어 좌

(御座)

 

中央칸 안두리기둥 사이에 補佐를 마련하고 그 위에 御座를 設置하였다. 御座 뒤에는 日月五岳屛風을 背景으로 삼아 四龍首를 彫刻한 三折屛을 두었다. 御座 의 上部에는 四角 平面에 多出目의 작은 공포를 짜고 네 귀를 모접이 한 뒤 다시 다출목의 작은 공포를 짜서 이른바 抹角天障形式의 寶蓋를 마련하였다. 그 中央에는 雙龍과 如意寶珠를 彫刻하였다. 보좌는 覆蓮과 仰蓮을 새긴 蓮花臺座를 받침으로 하되 臺座의 옆면은 3단의 궁판으로 나누었다. 조롱동자처럼 彫刻한 동자를 사용해서 궁판을 구획하고 여기에 風穴을 새기고 그 사이에 寶相華文을 彫刻하였다. 대좌 위에는 난간을 두었는데, 鷄子脚 사이 아랫부분에는 鬼面을 2구씩 두고 그 상부에는 風穴을 彫刻하였다.

 

 

인정전

(仁政殿)

 

仁政殿은 昌德宮의 正殿으로서 王의 卽位式이나 外國 使臣 接見등 나라의 公式 行事를 치르던 곳이다.  1908 년 仁政殿을 고치면서 커튼, 電燈 設置등 西洋式 室內 粧飾이 導入 되었다. 

 

 

어차고가된빈청

(御車庫賓廳)

 

宣政殿 앞에 御車庫로 쓰이던 建物은 元來 賓廳이었다. 賓廳은 政丞判書급 高位官僚들이 王을 만나기 前後에 머무르면서 國事를 論議하던 곳이다. 宮闕에 드나드는 官員 가운데 가장 高位 官員들의 空間이었기에 闕內 官廳으로 規模가 꽤컸다. 西쪽과北쪽에 담장을 두르고 마루와 온돌방을 갖추었으며 화장실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 남아있는 賓廳은 外形과 쓰임새 모두 옛 모습과 전혀 다르다. 賓廳은 수종이 昌德宮에 起居할때 車庫로 바뀌었다.

 

 

선정전

(宣政殿)

 

王이 高位職 臣下들과 함께 日常業務를 보던 公式 執務室인 便殿으로 地形에 맞추어 正殿 東쪽에 세워졌다. 아침의 調整會議,業務報告 國政세미나인 경인등 各種 會議가 이곳에서 每日 열렸다. 昌建 당시에는 朝啓廳이라 불렸는데 1461년 (世祖7)에 政治는 베풀어야 한다.는 뜻의 宣政殿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壬辰倭亂과 仁祖反正 등의 火災로 消失되었다가 1647년 (仁祖25)에 仁王山 기슭에 있던 인연궁을 헐어 그 材木으로 再建 하였다. 주위를 둘러싼 行閣들은 秘書室 附屬室로 利用했으나 全體的으로 비좁았다. 昌德宮 建物중 唯一하게 지붕에 값비싼 靑기와를 올려 이곳이 임금의 執務室임을 象徵하고 있다.

 

 

운하연지

(雲下硯池)

 

구름 아래 벼루 연못

 

 

상랑정

(上凉亭)

 

마치 매가 날개를 편것같이 날렵한 모습이다. 平圓樓 다 懸板은 上凉亭이라 적혀 있다. 東宮들의 書籍을 保管하던 書庫 이다.

 

 

(樂善齋)

 

英親王은 高宗의 일곱번째 아들로 어머니는 純獻皇貴妃 嚴氏이며 純宗의 異腹동생이다. 이름은 垠 이고 이명은 酉吉이다. 1907년 11세의 나이로 皇太子에 冊封되었으나 12월 留學이라는 名目으로 日本에 人質로 끌려갔다.  1920년 日本에 의해 메이지 天皇의 조카이자 皇族 나사모토의 딸인 미사코(方子)와 政略 結婚하게 되었다. 英親王妃는 메이지 天皇의 조카 나사모토노미아 모리마사와 이쓰코 사이의 長女로 도쿄에서 태어났으며 이름은 마사코 이다 1916년 英親王과 約婚하였고 1920년 學習園 女子高等學敎를 거쳐 같은해 4월 28일 도쿄에서 結婚式을 올렸다. 英親王妃는 結婚後 英親王의 性을 따라 李方子 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朝鮮王祖 마지막 英親王 李垠이 1963 년부터 1970년까지 살았으며, 1966년부터 1989년까지는 李方子 女史가 起居하였다,

 

 

낙선재

(樂善齋)

 

憲宗에 뜻에 따라 丹靑을 하지 않았다. 樂善齋의 懸板은 淸나라의 대가 섭지선의 글씨이다. 大廳마루 앞 柱聯에는 秋史 金正喜의 스승인 옹방강의 글씨도 있다. 朝鮮王祖 마지막 英親王 李垠이 1963 년부터 1970년까지 살았으며, 1966년부터 1989년까지는 李方子 女史가 起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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