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歷 史 旅 行 2/古宮博物館

國立古宮博物館 /宮中懸板

고궁관 

(國立古宮博物館)

 

현판

(宮中懸板)

 

 

宮闕을 포함한  옛 建築物의 처마 아래에는 懸板이 걸려 있읍니다. 懸板에는 建築物의 이름이 새겨져있어 해당 建築物 의 機能과  用途를 알려 줍니다.  建築物에 이름을 지어 懸板을을 거는것은  建築物이 지닌 意味를 밝히고 建築物에 生命力을 불어넣는 일 입니다. 

 

 

 

경운궁의 현판

 (慶運宮 懸板)

 

現在 德壽宮의 옛 이름인 慶運宮의 懸板으로, 글씨는 高宗皇帝의 御筆이다. 이곳에서 大韓帝國이 皇帝國임을 宣布하고 國家發展을 위한 一連의 努力을 하였다. 高宗은 1895年(高宗 32)에 乙未事變으로 인해 身邊의 安全을 위해 러시아 公使館으로 居處를 옮기게 되었다. 그곳에서 世界列强들 사이에서 보다 自主的인 立地를 確保하려는 計劃을 圖謀하면서 慶運宮(德壽宮)을 大大的으로 重建하여 皇帝國의 터전을 마련한 후 1897년 2월에 慶運宮으로 還宮하였다. 그리고 高宗은 慶運宮에서 주로 生活하였으며 1907년 退位 後에도 이 宮闕에서 머무르다 生을 마감하였다.

 

 

1. 현판을 만들다

 

朝鮮이 建國된 뒤 性理學의 統治 理念을 담아 多樣한 宮闕을  새로 지으면서  宮闕 懸板도 함께 만들어졌다. 鄭道傳은 太祖의 命을 받들어 景福宮 이름을 비롯해 闕 안 主要 殿閣과 門의 이름을 지었다.  1475 년 成宗은 아직 懸板을 걸지못해 이름 없는 많은 門을 보고 懸板을 더 만들게 했다. 懸板은 宮闕 建物의  位階와 用途에 따라 크기. 形態. 色相. 製作 技法 등에 差異가 있었다. 朝鮮王室은 百姓이 우러러 볼수 있도록  威嚴을 지니대 사치스럽지 않게 粧飾한 宮闕을 理想的으로 여겼다.  懸板 또한 이러한 精神을 繼承하여  彫刻이나 무늬 粧飾등을 節制하고 간결 하게 表現 하였다.

 

 

관문각현판

(觀文閣懸板)

 

우리나라 最初의 西洋式 宮闕 建築物인 觀文閣에 걸었던 懸板으로 글씨는 高宗의 御筆 이다. 慶福宮 乾淸宮 뒤편에 位置했던 觀文閣은 본래 王室 書齋로 使用 되다가 1875年 觀文堂에서 觀文閣으로 堂號를 고쳤다. 1891년 (高宗 28)에는 러시아 建築家 사바친 A.S Sabatine에 의해 西洋式 벽돌建物로 改築 되었다가 1901년경 撤去되었다.

 

 

돈덕전현판

(惇德殿懸板)

 

慶運宮 惇德殿에 걸었던 懸板이다. 唐나라 歐陽詢의 글자를 集字하였다. 西洋式 建物로 高宗이 外國 使臣을 接見하거나 宴嬉를 開催했던 곳이다. 1907년 에는 이곳에서 純宗 皇帝가 卽位式을 擧行 하였다. 大韓帝國의 歷史와 함께한 重要한 建物이었으나 高宗의 붕어 以後 日帝에 의해 撤去되었다. 

 

 

戶曹에내린 勅諭를 새긴懸板

英祖御製御筆

朝鮮1744 년 (英祖 20) 

 

國家 財政을 管理하던 戶曹에 걸었던 懸板이다. 租稅를 고르게 하여 百姓을 사랑하고 씀씀이를 節約하여 힘을 蓄積하라는 內容을 담고 있다. 龍머리와 鳳凰 머리를 그린 鳳을 갖춘 테두리에 꽃무늬를 粧飾 했다 검은색 바탕에 글씨는 金色이며  陽刻했다.

 

 

孝悌忠信

宣祖御筆

 

昌德宮 映花堂에 걸었던 宣祖(재위 1567 ~ 1608)의 御筆 懸板 이다.  "父母에게 孝道하고 兄 에게 恭遜하며 임금에게 忠誠을 다하고 親舊에게 信義를 지키라" 는 뜻을 담았다.

 

 

2.  현판의 내용을 담다.

 

朝鮮이 國家統治 理念으로 삼은 性理學에서는 成人君主가 仁과 德으로 다스리는 王道政治를 理想的 政治로 여겼다.  宮闕은 儒敎的 이상을 實現 하고자 한 朝鮮의 意志가 담긴 空間 이었다. 鄭道傳은 王命으로 景福宮과 宮闕안 建物의 이름을 定하면서 宮闕의 莊嚴한 外觀에 맞는 아름다운 이름을 지어서 보고 듣는者를 感動 시켜야 한다.  建物 곳곳에 걸린 懸板에도 王道政治를 이뤄내가 위한 바람과 具體的인 努力이 自然스레 담겼다.

 

 

念玆保民 懸板

哲宗御筆

 

철종(哲宗, 1831~1863)의 御筆을 새겨 만든 懸板 이다. 懸板에 새겨진 “念玆保民(염자보민)”은 ‘百姓을 保護할 것을 생각하라’는 뜻으로, 百姓을 생각했던 哲宗의 마음을 엿볼 수 있다. 왼쪽 아래의 落款을 通해 哲宗 御筆 懸板임을 알 수 있다. 懸板 背面에 "□年庚申十月 日"이라는 名門이 있어 1860년(哲宗 11)에 製作된 것을 알 수 있다. 昌德宮에서 保管되어 있었던 것으로 傳 해지나 어느 殿閣에 걸려있었는지는 確認 되지 않는다.

 

 

養和堂懸板

純祖御筆

 

昌慶宮 養和堂에 걸었던 純祖御筆 懸板이다. 글씨는  楷書로 썼다. 養和堂은  和氣를 기르는 곳 이라는 뜻으로 王이 臣下를 接見하는 便殿, 또는 妃嬪의 居處로 利用 되었다. 글씨에 네모난 金箔을 이어 붙여 만든 자국이 反復的으로 보이는데, 昌德宮䪯建道都監儀軌 記錄을 通해 알수 있다. 御筆을 保護하고자 덮는 사롱과 사롱을 固定했던 띠 模樣 鐵物 一部가 남아 있다.

  

 

곤녕합현판

坤寧閤懸板

 

景福宮 乾淸宮안 坤寧閤에 걸었던 高宗 御筆 懸板이다. 坤寧閤高宗의 妃 인 明成皇后의 處所로 王妃가 便安한 곳 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활 模樣으로 깎은 얇은 태두리에 인화唐草 무늬를 그려 粧飾 했다. 검은색 바탕에 글씨는 金色이며 陽刻했다.

 

 

현사궁

(顯思宮)

 

純祖의 生母인 綏嬪 朴氏(綏嬪朴氏, 1770∼1822)의 神位를 奉安한 곳인 顯思宮에 걸었던 懸板이다. 왼쪽에 "癸未二月 日" 간기가 양각되어 있다. 1820년(純祖 20)에 綏嬪 朴氏가 죽자 이듬해 그 神位를 昌慶宮 내 殿閣에 奉安하고 奉安 된 곳을 顯思宮이라 불렀다. 그러나 王이 된 純祖의 思親 四廟를 宮에 두는 것은 前禮가 없다고 하여, 1824 年(純祖 24)에 北部 觀光坊桂洞 의 龍虎營이 있던 자리에 祠堂을 옮겨 모시고 景祐宮이라 하였다.

 

 

3.  현판을 걸다.

 

朝鮮王室 關聯 建物에는 建物의 이름뿐 아니라 당내 王室 王室 의 모습을 보여주는 多樣한 內容이 담긴 懸板이 걸렸다. 建物을 짓는 意義와 祝福을 祈願하는 上樑文 懸板에는 建物을 세운 目的과 課程을 새겨 建物의 性格을 드러냈다. 理想的 國家 運營을 위한 指針, 道德的規範, 王이 臣下에게 내린 訓戒 등을 새긴 懸板은 重要한 價値를 되새기길수 있도록 했다. 官廳의 業務 情報와 規則 所屬管理 名單 國家行事 날짜 등을 새긴 懸板은  官廳 運營에 實質的인 도움이 되었다. 中國의 옛 詩나 名 王 으로 個人的인 感懷나 經驗을 읊은 詩 등을 담은 懸板은 王 自身의 생각과 感情을 公共에 드러내는 窓이 되었다. 懸板의 多樣한 技能은 媒體가 한정된 朝鮮時代에 우리 祖上이 어떤 方式으로로 情報를 共有했는지 잘 보여준다. 이러한 技能은 오늘날 여러 媒體로 變化되어 우리 日常 속에 스며들고 있다.

 

 

서연회강식현판

書蓮會講式懸板

 

王世子가 한달에 두번 그동안 배웠던 內容을 試驗하는 會講때의 規則을 새긴 懸板이다. 講論을 擔當한 文官인 講官가 世子가 번갈아 가면서 음을 읽고 解釋하는 方式으로 이루어졌음을 알수있다. 희강은 여러사람 앞에서 學問을 試驗하는 자리였기 때문에 세자가 質問을 받고 대답할 만한 能力을 갖출만큼 學問이 무르익어야 行 할수 있었다.

 

 

종정부현판

宗正府懸板

 

朝鮮末期에 王室 宗親을 統率하는 業務를 官長하던 宗正府에 걸었던 懸板 이다. 구름 모양 봉을  갖춘 테두리에 七寶 무늬를 粧飾 했다. 글씨는 陽刻한 後 그 위에 金屬板을 작은 못으로 박아 附着했다. 이러한 글씨 製作 方式은 景福宮 勤政殿과 德壽宮 中和殿 懸板에서도 確認 할수 있다.

 

 

영추문현판

迎秋門

 

景福宮 西門에 걸었던 懸板으로 武臣 하계가 글씨를 썼다.  武臣이 宮闕 懸板의 글씨를 쓴 경우는 드믈지만  朝鮮王朝實錄 을 通해 景福宮의 4개 大門인  光化門, 建春門, 迎秋門, 神武門 懸板을 모두 武臣이 썼음을 알수 있다.  宮闕 의 바깥문에 武臣이 쓴 懸板을 걸어 王室을 安全하게 守護하고자 한 所望을 담은것으로 보인다.

 

 

수라간현판

水剌間懸板

 

王室의 家族의 飮食을 準備하던 空間인 水剌間에 걸었던 懸板이다. 테두리가 없는 흰색 바탕에 글씨는 陽刻한 後 검은색으로 칠했다. 懸板의 形態와 色을 보아 水剌間이 낮은 위계를 지닌 건물임을 알수있다. 가로로 긴 形態인  懸板이 一般的이지만 이 懸板처럼 새로 形態로도 드믈게 남아 있다.

 

 

봉수당현판

(奉壽堂懸板)

 

華城行宮의 正堂에 걸었던 懸板이다. 지어질 당시에는 正祖가 漢陽 南쪽에 位置한 水源을  莊嚴하게 하려는 意味를 담아 正南軒이라 이름 짓고 글씨를 썼다. 以後  1995년 어머니 惠慶宮 洪氏 回甲을 맞아  윤 2 월 正南軒에서 回甲記念잔치를 열었는데 正祖는 어머니의 萬壽無疆을 祈願하는 뜻을 담아 正堂의 이름을 奉壽堂이라 고쳐 孝心을 나타냈다.

 

 

書下戶曺懸板

 

戶曺에 내린 勅諭를 새긴 懸板(英祖御製御筆)

 

 

규장각현판

奎章閣懸板

 

奎章閣의 附屬 機關으로 各臣들의 勤務處인 이문원(摛文院)에 걸었던 懸板이다. 懸板에 새겨진 '奎章閣學士之署(규장각학사지서)'는 '奎章閣 學士의 官廳'이라는 뜻으로, 이름에 맞게 責任을 갖고 業務에 任하라는 正祖의 意圖가 담겨 있다. 現在 懸板의 頹落이 심하나 바탕의 흰색과 글자 부분에 파란색 顔料가 일부 남아 있으며, 꽃잎이 8개인 화문(花文) 사이에 唐草紋이 그려진 테두리를 갖추었다. 글씨는 일제학(一提學) 김종수(金鍾秀)가 命을 받들어 썼으며 左側 下段에 '김종수인(金鍾秀印)' 落款이 있다.

 

 

춘장대현판

春搶臺懸板

 

正祖가 昌德宮 後園에서 활쏘기를 하여 화살을 命中시키고  行한 일을 記錄한 懸板

 

 

대안문현판

大安門懸板

 

경운궁(덕수궁)정문에 걸었던 현판이다. 크게 편안한문 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본래는 경운궁 남쪽 인화문이 정문 이었으나  1902 년 철거되면서 대안문이 정문 역활을 했다. 1906 년 4월 대안문을 수리하면서 고종 (재위 1863 ~ 1907년)의 명에 따라 이름을 대한문으로 바꾸고 현판 또한 새롭게 달았다. 대한은 큰 하늘 이라는 의미로 한양이 창대해지라 는 대한제국의 소망을 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