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歷 史 旅 行 1/朝鮮王妃陵

英 陵/世 宗

(英陵)

 

 

英陵은  朝鮮 제 4 대 世宗 (1379 ~ 1450 在位 1418 ~ 1450)과 昭憲王后 (1395  ~ 1446)의 陵이다. 하나의 封墳아래  石室 2개를 붙여 王과 王妃를 함께 安置한 朝鮮王陵  最初의 合葬陵 이다.  英陵은  1469 년 (睿宗 1)에 이 곳으로 옮겨올때 封墳 內部를  石室에서  灰隔으로 바꾸어 造成 하였고 石物중  望柱石, 長明燈, 石守石人은  單陵처럼 配置하였으나 石像만  2개를 設置하여 合葬陵 임을 나타내었다.  英陵은 朝鮮前期 王陵 配置의 基本이 되는 陵으로  무덤 配置는 (國朝五禮儀)에 記錄된 制度를  따랐다. 封墳 둘레에는  欄干石을 두르고 힁석주를  받치고 있는  童子石柱에 漢字로 12 지를 새겨 防衛를  標示 하였다.  陵의 位置를 살펴보면 風水地理상에 따라 主神을 뒤로하고 神의 中허리에 封墳을 造營 하였으며  左右側으로 靑龍白虎를 이루고  南쪽으로는 멀리 案山北城山을  바라보고 있다.  世祖 以後 英陵의 자리가 좋지 않다는  理由로 陵을 옮기자는 主張이 있었으나 徐居正의 反對로 옮기지 못하다가 1469 (睿宗 1)에 現在의 位置로 옮겨오게 되었다.

 

 

 

영 릉

(英陵)

 

史蹟 제195호. 京畿道 驪州郡 能書面 往代里에 있다. 元來 英陵은 昭憲王后가 죽은 1446년(世宗 28) 廣州 獻陵 西쪽에 造成하여 그 右室을 王의 壽陵으로 삼았다가 1450년 王이 죽자 合葬했다.

 

 

王陵으로 가는길

 

홍살문

(紅箭門)

 

神聖한 곳을 알리는 붉은색을 칠한 나무문 紅箭門. 紅門 이라고도 한다. 화살模樣의 살대는 法度의 곧고 바름을 意味 하며 나라의 威嚴을 象徵한다.  陵域의 들머리에는 紅箭門이 서 있고 祭官들이 찾을때 절을 하는 拜位가 造成되어 있다.  紅箭門에 到着한 祭官은  拜位에 절을 하고 丁字閣에 이르는데 紅箭門과 丁字閣을 連結하던 돌길을 參道 라 하며 가운데 높은 길은 神道라 불러 돌아가신 先王의 魂靈만이 神道로 出入 할수 있을 뿐이다.

 

 

홍살문

(紅箭門)

 

 능(陵)·원(園)·묘(廟)·宮殿·官衙 등의 正面 입로(入路)에 세우는 붉은 칠을 한 門.

 

 

참도

(參道)

 

홍살문에서 丁字閣까지 이어진길 薄石을 깔아 놓았으며 왼쪽이 약간 높은 기은 神 이 다니는 길이라 하여 신도 (神道)라고하며 오른쪽 약간 낮은 길은 임금이 다니는 길이라 하여 어도 (御道)라고 한다.

 

 

정자각

(丁字閣) 

 

祭香을 올리는 곳으로 亭子模樣으로 지은집  祭享을 올릴때 王의 神主를 이곳에 모신다. 丁字閣에 오를때에는 東쪽으로 오르고 내려올때는 西쪽으로 내려오는대 이를 일러 동입서출 (東入西出)이라고 한다.

 

 

신계와 어계

(神階.御階)

 

丁字閣으로 올라가는 階段이 있는데 왼쪽은 神의 通路이며 오른쪽은 임금이 오르는 通路이다. 

 

 

영릉비각

(英陵碑閣)

 

碑閣은 陵 主人의 자취를 記錄한 神道碑나 標石을 세우고 비바람 따위를 막기 위하여 그 위를 덮어 지은 집이다. 英陵碑閣 안에 있는 英陵 標石은 英祖 21 년 (1745)에 세운것으로 標石 앞면의 글은 조상경이 썼고 뒷면의 글은 이학이 썼다.

 

 

영릉비

(英陵碑)

 

 

조선국  :  朝鮮國

세종대왕영릉  : 世宗大王英陵 

  소헌왕후부좌  : 昭憲王后祔左

 

世宗  世宗莊憲英文睿武仁聖明孝大王  洪武 三十年 (丁丑年 1397) 四月十日誕生

永樂六年 (戊戌年 1418)에 王位 景泰 元年(庚午年 1450) 二月十七日 昇遐

六 月 廣州 獻陵  葬事  成化 五 年 (己丑年 1469) 三 月 六 日 驪州  西北聖山 子坐  移葬

在位三十二年 壽齡  五十四 明 莊憲 諡號 王妃 宣仁齊聖昭憲王后沈氏 는 洪武 二十八年 (乙亥年 1395) 九 月  誕生

 永樂 十六 年 (戊戌年 1418) 敬嬪 冊封 恭妃 進封 宣德 七 年 (壬子年 1432)  王妃 呼稱

宣德 七 年 (壬子年 1432) 에 王妃로 呼稱  正統 11년 (丙寅年 1446) 三 月 二十 日에 昇遐

七 月 獻陵  葬事  己丑年 (1469) 三 月 六 日에  大王陵  移葬   壽齡 은 五十二 崇禎 紀元後 118 년(乙丑年 1745)

 

 

世宗  世宗莊憲英文睿武仁聖明孝大王은 洪武 三十年 (丁丑年 1397) 四月十日誕生하여, 永樂六年 (戊戌年 1418)에 王位를 물려 받았다 景泰 元年(庚午年 1450) 二月十七日에 昇遐하여 (같은해) 六 月 廣州 獻陵 西쪽 언덕에 葬事 지냈다. 成化 5년(己丑年 1469) 三 月 六 日에  驪州  西北聖山 子坐(北)언덕으로 移葬 하였다. 在位三十二年 壽齡 은 五十四 세 이다. 明나라에서 莊憲의 諡號를 내렸다. 王妃 宣仁齊聖昭憲王后沈氏는 洪武 二十八年 (乙亥年 1395) 九 月 에 誕生 하여 永樂 十六 年 (戊戌年 1418)에 敬嬪에 冊封 되었고 얼마 있다가 恭妃로 進封 되었다. 宣德 七 年 (壬子年 1432) 에 王妃로 呼稱을 고쳐서 奉 해졌고 正統 11년 (丙寅年 1446) 三 月 二十 日에 昇遐 하였다. (같은해) 七 月 獻陵 西쪽 언덕에 葬事 지냈다가 己丑年 (1469) 三 月 六 日에  大王陵과 같은 언덕에 移葬 하였다. 壽齡 은 五十二 세 이다. 崇禎 紀元後 118 년(乙丑年 1745)에 세우다. 

 

 

세종대왕릉(英陵)은 元來 廣州 顯陵(지금의 서울 內谷洞)에 있었는데 1469년 (睿宗元年)에 이곳으로 移葬하였으며 王后 昭顯王后와 合葬되어 있다. 英陵碑는 世宗大王과 昭憲王后의 略歷 그리고 英陵을 옮긴 事實을 記錄한 碑石 으로 1745년(英祖 21년)에 세웠고 碑閣도 이 때에 建造되었다 碑文에는 朝鮮國 世宗大王 英陵 昭憲王后祔左라고 새겨 王妃가 大王의 왼편에 묻혔음을 記錄하고 있다.

 

 

세 종

(世宗)

 

在位其間 동안 儒敎政治의 기틀을 確立하고, 공법(貢法)을 施行하는 등 各種 制度를 整備해 朝鮮王祖의 基盤을 굳건히 했다. 또한 한글의 創製를 비롯하여 朝鮮時代 文化의 隆盛에 이바지하고 科學技術을 크게 發展시키는 한편, 蓄積된 國力을 바탕으로 國土를 넓혔다. 이름은 도(). 자는 원정(元正). 太宗의 셋째 아들이며, 어머니는 원경황후(元敬王后) 閔氏이다. 비(妃)는 청천부원군(靑川府院君) 심온(沈溫)의 딸 소헌왕후(昭憲王后)이다.

 

 

世宗大王歷史文化館

 

世宗大王 御眞

세종의 생애

(世宗의生涯)

 

世宗大王은 太宗과 元敬王后 사이에서  4 男 4 女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이름은 , 자는 元正 이다 1418 년에 王世子로  冊封 돠었고 같은해 8 月 10 일 朝鮮 제 4 대 임금으로 卽位 하였다.  世宗大王은 在位 32년 동안 政治. 社會. 經濟. 등에서 쌓아올린 눈부신 業績을 바탕으로  朝鮮의 기틀을 마련하고  文化의 全盛期를 이루었다.  그중에서도 한글의 創製는  世宗大王의  가장 偉大한 業績으로 손꼽는다. 

 

 

訓民正音

 

(訓民正音)

 

쉬운文字로 百姓과 疏通하다

 

1443 년  10월 世宗大王은 百姓을 가르치는  바른소리라는  뜻의 訓民正音을 創製 하였다. 그리고 訓民正音으로 表記된 農書나 醫書 등 實生活에 必要한 冊 들을 다수 編纂 하였다. 오늘날 한글은 世界에서 가장 科學的이고 優秀한 文字이다. 世宗大王의 最高 業績으로 評價받고 있다. 당시에 刊行 되었던  龍飛御天歌. 月印千江之曲, 月印釋譜 등의 書冊을 展示하고 있으며 터치스크린을 通해 冊의 內容을 볼수 있다.

 

 

황자총통

(黃字銃筒)

 

世宗 年間에 大形 火砲가 開發되었다. 大形 火砲는 海戰에서 배를 攻擊하기 위해 船에 실어 使用하였다.  크기에 따라 天 止 玄 黃 으로 區分하여 命名 하였다.  黃字銃筒은 약  50 ~ 70 cm 가량 길이로 가장 작다. 피형차충전 한발을 發射하면 약 1,100보 (약 1,386m)를 날아가고 彈丸은  鐵丸 40개를 裝塡하여 同時에 發射 하였다.

 

 

해동지도

(海東地圖)

 

英祖 때인 1759년 初에 製作된 繪畵式 郡縣地圖集 으로 8 冊이다. 朝鮮全圖. 都別圖. 郡縣全圖 뿐만 아니라 世界地圖 . 中國. 倭國. 유구지도 등이 망라되어 있다.  海東地圖 내에 平安道와 강계부 地圖가 각각 收錄되어 폐사군이 그려져 있고 폐사군地圖도 別途로 收錄되어 있다.

 

 

혼천의

(渾天儀)

 

하늘을열어 百姓에게 傳하다.

 

世宗大王은 科學技術을 硏究하고 科學機構를 發明하는데 있는 힘을 다하였다. 젊은 科學者를 養成하여 渾天儀 등 天文觀測機構. 時間을 測定하는  해時計인 仰釜日晷, 물時計인 自擊漏를  등을 만들었다. 

 

 

서운관도

(書雲觀圖)

 

書雲觀은 朝鮮時代 氣象觀測을 擔當하던 官廳으로 世宗大王은 天文曆法을 硏究하게 하였고 蔣英實 이천 등이 仰釜日晷를  渾天儀 簡儀 등의 天文 科學機器를 製作하게 하였다. 그림은  世宗大王이 王世子 李珦 (훗날 文宗)과 함께 獨創的인 朝鮮의 天文 機器인 大簡儀를 通해 北極星을 觀察하는 모습이다.

 

 

세종대왕 어보

(世宗大王御寶)

 

世宗이 昇遐한 1450 년의 功積을 稱頌하는 呼稱인 諡號를  英文譽武仁聖明孝大王之寶 로하고 廟號를 世宗 으로 올리면서 만든 御寶 이다.

 

 

소헌왕후 어보

(昭憲王后御寶)

 

世宗 妃 昭憲王后의 御寶로 1446 년 (世宗  28)에 昭憲 이라는 諡號를 올리면서 만든것이다. 朝鮮 初期의 寫實的인 御寶 形態를 나타내고 있으며 粧飾이 거의 없고 얇은 목각선 으로 表現 했다.

 

 

휴대용해시계

(携帶用仰釜日晷)

 

姜潤과 姜建 兄弟가 製作한 다른 仰釜日晷와 類似한 形態로 뒷면에 製作年度가 大韓光武 5년 (1901) 으로 表記 되어있고  姜建의 또 다른 이름으로 여겨지는 姜益秀가 새겨져 있다. 또한 당시 漢陽을 標準으로 한 해시계로 漢陽의 北剋高도도(緯度의槪念)인 北剋高 37도 39분 15초가 標示 되어 있다.

 

 

훈민정음

(訓民正音)

 

새로 創製된 訓民正音을 1446 년 (世宗 28) 鄭麟趾등 集賢殿 學士들이 著述한 漢文 解說書 이다. 解例가 붙어 있어서 (訓民正音解例本)또는 (訓民正音 原本)이라고도 하며 例儀 解例, 鄭麟趾 序文으로 構成되어 있다. 특히 序文에는 訓民正音을 만든 理由, 創製者, 편천자. 編年月日. 優秀性을 記錄하고 있다. 1997년 유네스코 世界記錄遺産으로 登錄 되어 있다.

 

 

용비어천가

(龍飛御天歌)

 

1445년  (世宗  27)에 鄭麟趾, 安止, 權題 등이 朝鮮王朝의 創業을 稱頌하기 위해 지은 樂章 敍事詩로 訓民正音을 創製한 後 한글로 지은 最初의 冊 이다. 構成은 125장 이며 構成가 하늘의 뜻에 따라 이루어졌음을 읇은 노래 歌詞와 說明 이 있다.

 

 

음 악

(音樂)

 

百姓과 더불어 우리音樂을 즐기다.

 

音樂에 造詣가 깊었던 世宗大王은 우리만의 音樂을  만들고자 努力 하였다. 國家 祭禮에 使用하는 雅樂을 整理하고 朝鮮建國의 偉大함을  알리기 위해 先王들의 業績을  기리는  定大業. 保太平등 新樂을 作曲하였다. 編磬등 당시에 만들어진 樂器를 展示하고 있으며  宗廟祭禮樂에 쓰이는 傳統樂器 들의 特徵과 소리를 直接 들어볼수도 있다.

  

 

편 경

(編磬)

 

百姓과 더불어 우리의 音樂을 즐기다. 音樂에 造詣가 깊었던 世宗大王은 우리만의 音樂을 만들고자 努力 하였다. 國家 祭禮에 使用하는 雅樂을 整理하고 朝鮮建國의 偉大함을  알리기 위해 先王들의 業績을 기리는 정대업, 보태평등  新樂을 作曲 하였다.  編磬등 당시에 만들어진 樂器를 展示하고 있으며 宗廟祭禮樂에 쓰이는 傳統樂器 의 特徵과 소리를  直接 들어볼수 있다. 

 

 

건 고

(建鼓)

 

세계유산조선왕릉

(世界遺産朝鮮王陵)

 

朝鮮王陵은 王과 王妃의 무덤 이다. 儒敎를  統治 理念으로 삼았던 朝鮮 王朝는 王陵의 造成과 管理에 禮를 갖추어 精誠을  다하였다. 現在 남아있는  朝鮮王陵은  총 42 기이며 北韓에 所在한 2기를 除外한 40 기는  2009 년 6 월에 UNESCO 世界遺産으로 登載 되었다. 

 

 

석 인

(石 人)

 

朝鮮王陵은 王과 王妃(大韓帝國 皇帝와 皇后함)의무덤 이다.  儒敎를 統治 理念으로 삼았던 朝鮮 王朝는 王陵의 造成과 管理에 禮를 갖추어 精誠을 다하였다.  現在 남아 있는 朝鮮王陵은  총 42기 이며 北韓에 所在한 2 기를 除外한 40기는 2009년 6월에 유네스코 世界遺産으로 登載 되었다.  展示室에 世宗大王 英陵의 陵寢空間이 再現되어 있어 王陵의 空間構成에 대해 알수있다.  또한 朝鮮王陵 造成課程을 說明하는 映像을 通해 王陵에 대한 理解를 높일수 있다.

 

 

국장도감 의궤

(國葬都監儀軌)

 

우리 나라에서 큰일을 치를때 後世에 參考 하도록 그일의 처음부터 끝까지 經過를 姿勢하게 적은 冊을 말한다.  지난 2011년 返還된 外奎章閣儀軌 중 孝宗大王의 妃인 仁宣王后國葬都監儀軌를 展示하고 있으며 國葬行列을 立體的으로 構成한 映像을 通해 당시行列의 規模의 配置등을 確認 할수있다.

 

 

세종대왕동상

(世宗大王銅像)

 

혼 상

(渾象)

 

아쉽게도 世宗때 仁孝 婚喪은 現存하지 않지만 文獻資料를 根據하여 野外에 展示할 目的으로 (實題 71.6cm )보다 크게(지름 120cm) 靑銅으로 製作하여 1.464개 별을 새겨 復元한 것이다.

 

 

관천대

(觀天臺)

 

觀天臺는 朝鮮時代 天文觀測臺로 一名 簡儀臺 또는 瞻星臺라고 부르기도 했다. 朝鮮 初期에는 王立 天門氣象臺인 書雲觀을 2곳에 두었는데 특히 世宗大王은 景福宮 안 書雲觀에 大簡儀臺,北部光華房 書雲觀에 小簡儀臺를 設置하고 官員들로 하여금 하늘에서 일어나는 모든 現想을 끊임없이 觀測토록 하였다. 그러나 不幸하게도 壬辰倭亂 때 모든 觀測施設이 불타버려 肅宗 14년(1688년)에 다시 觀測臺 2개를 세웠는데 그중 하나가 昌慶宮 觀天臺(寶物제851호)이며 이것은 그 觀天臺를 그대로 본떠 만든것이다.

 

 

간 의

(簡儀)

 

天體의 位置를 測定하는 東洋의 傳統的인 天門器具.  中國에서 원(元)의 곽수경(郭守敬)이 前부터 使用해오던 渾天儀의 缺陷을 補充하기 위해 아라비아의 天門器具 등을 參考하여 새로 高眼해 낸 것이다. 從前의 器具에 비해 크고 幹略하여 觀測값의 精密度를 높였기 때문에 그후 東洋에서는 主管測裝置로 使用되었다. 簡儀는 高度와 防衛 낮과 밤의 時刻을 精密하게 測定할수 있는 朝鮮時代의 가장 代表的인 天門 觀測 기기 이다. 世宗大王 在位期間 (1418 -  1450년) 은 天體를 觀測하고 正確한 時刻을 測定하기위한  王立 天文臺인 簡儀臺를 設置하고 많은 天門器具들을 만들게 하였는데 世宗 14년 (1432년)에 먼저 天體의 位置를 測定 하기위해 목(목)簡儀를 試驗製作 하여 漢陽(서울)의 北極고도(緯度)를 測定 한후 靑銅으로 簡儀를 製作하여 簡儀臺 위에 設置 하였다. 원래 簡儀는 1276년 中國 원(元)나라의 天文學者 곽 수경(郭守敬)이 처음 만든 天門儀器로서 오늘날의 天體望遠鏡 式으로 해.달 5행성과 별의 位置를 精密하게 測定하였다.

 

 

소간의

(小簡儀)

 

가지고 다닐수 있도록 작게 만든 간의 우리나라에서는 1432년(世宗 14)에 이천(李蕆)·장영실(蔣英實) 등에게 命하여 나무로 이를 만들어 보게 한 다음 이를 根據로 구리로 簡儀를 鑄造해서 使用하기 始作했다. 이것이 흔히 大簡儀라고 불리는 것인데, 이것 이외에도 여러 차례 작은 規模의 小簡儀도 製作하여 使用했다. 小簡儀는 天體를의 位置를 觀測하고 낮과밤의 時刻을 測定할수있게 만든 天體觀測機기 이다 世宗 16년(1434년) 에 이천(李천),정초(鄭招),정인지(鄭麟趾)가 製作하여 景福宮 천추전(天秋殿)과 서운관(書雲觀)에 設置 하였다 小簡儀는 簡儀보다 크기가 작고 移動이 便利하도록 더욱 簡便하게 만든것으로 눈금이 새겨진 둥근고리 모양의환(環), 즉 사유환(四游環),적도환(赤道環),백각환(百刻環).규형(窺衡),기둥과 밑받침으로 構成되어 있으며 赤道座標系와 紙片座標系로 變形하여 使用할수 있도록 多目的 天體觀測機具로 해 달 5行星과 별의 位置,高度와 防衛를 測定할수 있다, 小簡儀는 世宗時代에 독특하게 創製한 世界唯一한 天體觀測機기이나 現存하는 唯物이 없어 世宗實錄에 根據하여 國內 最初로 復元 하게 된것이다.

 

 

규 표

(圭表)

 

世宗時代에는 많은 天文의機들을 製作하여 하늘의 現像과 별들의 運行을 觀測 하였다. 圭表는 일 년의 길이가 正確히 몇날인가 (365 1/4날)와 24 節氣를 알아내기 위해 使用하던 道具였다. 垂直으로 세운 막대 표(表)가 正午에만드는 해의 그림자 길이를 水平으로 눕힌 눈금이 있는 규(圭)로 재서 가장긴 때를 冬至 가장 짧은 때를 夏至로 定했다 冬至와 夏至의 가운데에 該當하는 날을 봄에는 春分 가을에는 秋分이라 하고 이 4節氣를 뺀 나머지 20節氣를 그 사이에 약 15일 間隔으로 配列 한것이다. 하루중 그림자가의 길이가 가장 짧은 때는 正午이며. 규를 設置한 方向응 精確하게 그 地点의 南北方向이다. 이 圭表는 世宗 19년 (1437년)에 만든것을 1/10로 縮小 復元 製作한것이다.

 

 

일구대

(日晷臺)

 

日晷臺는 우리나라에서 널리 使用되던 앙부일구(仰釜日晷:해시계)를 올려놓는 받침대로 아름다운 彫刻을 한것이 많다. 世宗大王은 서울의 혜정교(惠政僑)와 종묘(宗廟)앞에 돌로 日晷臺를 쌓고 그위에 극 모르는 百姓을 위하여 12지 動物 模樣으로 시신(時神)을 그려넣은 仰釜日晷를 製作設置 하였다. 이는 우리나라 最初의 공중시계(公衆時計)였다는네 그 의의가 크며 世宗大王의 百姓을 극진히 사랑하는 御眞 治德을 알기쉽게 한다. 이 日晷臺는 王室에서 쓰다가 지금은 國立中央博物館에 保存되어 있는 仰釜日晷臺를 그대로 본떠 製作한 것이다.

 

 

천평일구

(天平日晷)

 

天平日晷는 世宗 19년 (1437년)에 創製한 해時計 중의 하나이다. 容器둥으로 부터 南쪽못까지 連結된 실은 하늘의 赤道면과 一致하도록 設置되어있는 시반면(時盤面) 中央을 守直으로 通過하여 태양 빛에 의해 時半面 위에 맺힌 실 그림자로 그 때의 時間을 알수있다 時半에는 하루를 12시로 매 時를 초,정 눈금(2등분)으로 나누어 使用하였는데, 時半 앞면은 夏節期에 ,용주,南北을 잇는 가는줄,받침대,南,北쪽의 못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天平日晷는 文獻과 현주일구(顯珠日晷) 遺物을 參考하여 野外 展示를 위해서 그대로 擴大하여 復元한 것이다. 朝鮮 傳記에 만들어진 携帶用 해時計. 해時計의 製作에 대한 公式的인 記錄은 《世宗實錄》에 처음 나타난다. 天平日晷는 1437년(世宗 19) 4월에 정초, 蔣英實, 김빈, 이천, 김돈 등에 의하여 만들어졌다. 

 

 

일성정시의

(日星定時仗)

 

日星定時仗는 世宗 19년 (1437)에 해時計와 별時計의 技能을 하나로 모아 낮과 밤 언제던지 時間을 測定할수 있도록 만든 天文機器 이다. 낮에는 해時計의 原理로 밤에는 별時計의 原理로 時間을 測定할수 있다. 世宗時代에 만들어졌던것은  現在 남아 있지 않아 文獻을 바탕으로 1998 년 2월에 復元 했다.  

 

 

일구대

(日晷台)

 

日晷台는 世宗때 만들어진 해時計인 仰釜日晷를 올려놓는 받침대 이다. 世宗大王은 서울의 惠政橋와 宗廟앞에 日晷台를 만들고 仰釜日晷를 設置했다. 이것은 現在 景福宮 交泰殿 아미산에 있는 仰釜日晷台를 본떠 1988년 11월에 만들었다.

 

 

자격루

(自擊漏)

 

朝鮮 時代 王의 重要한 任務 가운데 하나는 百姓들에게 正確한 時刻을 알려 주는 것이었습니다. 王은 百姓들의 日常生活 리듬을 規制하고 統制함으로써 社會生活의 秩序를 維持하고자 하였으므로 時計는 權威와 秩序의 象徵이었고 統治의 手段이었습니다. 自擊漏室에서는 朝鮮의 科學水準을 가늠해볼 수 있는 물時計, 自擊漏(復元)을 通해 본 朝鮮時計의 歷史를 볼 수 있습니다.

 

 

정남일구

(正南日晷)

 

朝鮮時代의 해시계이다 매우 精密한 時計로 현주.天平日晷의 特徵과 간구(簡구)의 特徵을 함께지닌 優秀한 것이었다 부(趺)에는 원지(圓池)와 수거(水渠)가 있어 精確한 水平을 有志하도록 되어 있었고 東西로 運轉되는 사유환(四遊環)에는 北으로부터 16도에서 16.7도에 이르는 반추천도(半周天度)가 새겨져으며 전환(全環)규형(窺衡)이 南北으로 오르내리고 지평환(地平環)아래에 지자出入 시각(志自出入時刻)에 준하여 반환(半環)이 水平으로 가로 놓였다, 窺衡을 써서 每日의 태양거극분도(太陽去極分度)에 맞추어 방공(方孔)에 의하여 투입(透入)되는 해그림자를 반환(半環)에 새겨진 눈금으로 보면 자연히 남(南)이 定해지고 함께 時刻도 알수 있게 되어있다.

 

 

현주일구

(懸珠日晷)

 

<世宗實錄>에 의하면 懸珠日晷는 朝鮮時代에 만들어진 携帶用 해時計로 정초·蔣英實·김빈·이천·김돈 등이 만들었다.  懸珠日晷는 世宗19년 (1437년)에 創製한 해時計 중 하나이다. 南北을 잇는 가는 줄을 地球儀 自轉側 方向과 一致하도록 추를달아 팽팽하게 당기도록 設置하여 이 줄의 그림자를 둥근 시반(時盤)에 나타나게 하여 그 가르키는 눈금을 보고 하루의 時間을 測定하는 것이다. 時半은 兩面의 눈금이 새겨져 있다. 時半에 나타나는 가는줄의 그림자가 여름철에는 時半의 윗면에 나타나고 겨울철에는 時半의 밑면에 나타나게된다. 따라서 윗면의 눈금은 春分에서 秋分까지 使用하고 밑면은 秋分에서 春分까지 使用한다. 懸珠日晷는 世宗당시에는 携帶用 해時計로 使用하였기 때문에 그 크기가 손바닥만 한것어었지만 野外展示를 위해서 文獻에 記錄된 置數의 7배로 擴大하여 復元한것이다.

 

 

혼천의

(渾天儀)

 

渾天의 渾의 또는 선기옥형(선기玉衡)이라고도 불리는 一種의 天體位置測定器로서 일월오행성(日月五行星)의 位置를 測定하는데 쓰였던 天體觀測機기이다. 渾天의는 오래전 부터 天文學觀測에 使用하여 왔으나 文獻上으로는 世宗實錄(世宗15년 1433년)에 정초(鄭超)박연(朴堧) 김진(金鎭)등에 의하여 만들어진 것이 처음이다. 그 後 改良을 거듭하여 불레바퀴를 動力으로 하는 時計와 連結하여 渾天時計로 使用하였다. 壬辰倭亂과 丙子胡亂때 불타버린 것을 이민철(李敏哲) 송이영(宋苡嶺)등이 이를 改良하여 慶熙宮에 設置하엿으나 大部分 燒失되었다.   이 渾天의(渾天儀)는 國寶 제230호(高麗大學校博物館所藏) 송이영의 渾天時計(顯宗10년 1669년)중 渾天의 部分을 2.5배 程度 擴大하여 復元한 것이다. 構造는 눈금이 새겨진 둥근 고리 模樣의 환(環) 즉 지명환(地平環) 황도환(黃道環)적도환(赤道環) 백도환(白道環) 받침대등으로 構成 되어있다.

 

 

천상열차분야지도

(天象列次分野之圖)

 

天象列次分野之圖는 하늘의 形體를 본떠 황도(黃道) 附近을 12地域으로 나눈 12차(次)와 이에 對應하는 地上의 地域인 분야(分野)에 맞추어 별자리의 位置와 크기를 事實的으로 그린 천문도(天文圖)이다  앞면은 太祖 4년 (1395년)에 뒷면은 世宗 15년(1433년)에 製作되었으며 검은색 돌(鳥石)兩面에 새겨져있다. 天文圖의 맨 윗부분에는 해와 달에 대한 記錄이 있고 가운데에는 1.467개의 별이 커다란 원 안에 標示되어 있으며, 아래부분에는 (天象列次分野之圖)라는 天文圖의  이름과 天文圖 作成의 歷史的 背景,製作者,製作年月日이 記錄 되어있다. 이것은 故宮博物館에 展示되어있는것을 본떠 (보물제228호) 만든것이다.

 

 

측우기

(測雨器)

 

잦은 홀수와 가뭄으로 인한 被害 및 벼農事를 中心으로 한 農業生産構造는 일찍부터 干羽現想에 注目하고 雨量을 측정(測定)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傳統的認江雨量 測定方法은  매우 不正確 한것이었으므로 보다 科學的인 測定의 必要性이 대두대어 1441년 (世宗23년) 8월에書雲觀(書雲觀)에서 측우기(測雨器)를 製作하게 되었다.

 

 

앙부일구

(仰釜日晷)

 

앙부일영(仰釜日影)이라고도 한다. 네발달린 반구형(半球形)의 솥처럼 생겼기 때문에 仰釜라는 이름이 붙었다. 이것은 (원사 元史) 천문지(天文志)양의(仰儀)에 있는 곽수경법(郭守敬法)에 의해 만들었다고 하나 양의 와는 다르다. 우리나라에서는 世宗때 처음 만들었으며 以後 朝鮮말까지 繼續해서 만든 代表的인 해時計로 公衆用으로 設置해놓은 것과 작게 만들어 携帶할수 있는것이 있었다.

 

 

수 표

(水標)

 

水標는 朝鮮 世宗 23년(1441년)에서 24년(1442년)에 걸쳐 製作 서울 淸溪川과 漢江에 設置된 하천수위(河川水位) 측정계(測定計)이다 手標의 發明은 측우기(測雨器) 와 함께 강우시기(降雨時期)가 7 -8월에 치우쳐 있는 우리나라의 自然條件을  統計的으로 把握하여 치수(治水)에 利用하고자 애쓴 勞力의 結實이었다. 世宗때 처음 에는 나무기둥에 척(尺).치(치),푼(分)의 길이를 표시하고 돌기둥 사이에 묶어 세운 목재(木材)였으나 구 後 석재(石材)로 改良 하였다.이 水標는 元來 淸溪川 수표교(水標橋)옆에 있던것을 世宗大王記念館(서울東大門區淸凉里동)에 옮겨 保存하고 있는 수표(水標)(보물 제838호)를 본떠 만든것이다..

 

 

풍기대

(風旗臺)

 

風旗臺는 바람의 方向과 世紀를 測定하는 바람 깃발을 세웅 世雄臺(臺)이다 世宗時代에는 農業氣象學이 發達하여 氣象觀測이 活潑 이루어졌다 특히 降雨量의 測定과함께 風向과 風速의 觀測은 重要시 되었는데 風旗臺는 우리손으로 만든 독특한 氣象觀測기의 하나이다, 이 風向旗 石臺(石臺)는 맨 위에 깃대틀 꽃을수 있는 깊이 33cm ,직경 11cm의 구멍이 파여있고 여기에 좁고긴 깃발이 달린 깃대를 세워 깃발이 날리는  方向과 世紀를 觀測하기 위한 것이다. 이 風旗臺는 世宗時代의 傳統을 이어 받아 18세기 에 만든 창경궁(昌慶宮)의 풍기대(風旗臺)寶物제846호  를 본떠 만든것이다.

 

 

재 실

(齋室)

 

洪殺門 밖 능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세워 제관(祭官)이 머물며 祭祀를 準備하던 집이다. 국장(國葬)후 脫喪 때까지 대군(大君)등 子孫과 문무백관(文武百官)이 每年 祭祀에 參與 하였는데 이 때 祭祀를 準備하던 집이다. 이 再室은 영릉 안산(案山 陵 앞에 있는 山)인 北城山 東南쪽에 建立되어 있었으나 後에 없어진것을 1975년 이곳에 復元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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