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歷 史 旅 行 2/中央博物館

國立中央博物館/어느蒐集家의 招待

국립중앙박물관

 (國立中央博物館)

 

故 이건희 會長 寄贈 1 周年 記念展

어느蒐集家招待

 

根本的으로 人間의 손으로 만든것이라면

모두 아름답거나 醜한 形態를 지닙니다.

自然과 照應하며 도음이되면 아름다운것이 되고

自然과 어긋나며 妨害가 되면 醜한것이 됩니다.

 

월리엄 모리스 아름다움을 만드는 일에서.

 

황 소

 

소는 忍耐와 끈기의 象徵으로 日帝强占期 韓國人에 곧 잘比喩 되었다. 이중섭의 소 그림은 作家의 自畵像과도 같았다. 그림속 때로는 힘차고 때로는 힘겹고,때로는 슬프게 피 흘리는 소는  變化無常한 삶을 살았던 이중섭의 모습이다. 소의 주름과 근육의 결을 드러내듯 그은 힘찬선은 그림에 生命力을 불어넣고 있다.

 

 

 

굳게 닫힌 門은 보는 이에게 그 뒤에 存在하는 未知의 世界에 대한 두려움과 好奇心을 同時에 불러 일으킨다. 이 門을 지나 蒐集家의 집으로  그리고 收集品이 만들어진 過去의 時間으로 들어간다는 意味를 담아 展示 했다.

 

 

생각하는女人

 

自然은 人間에게 경이로움과 막연한 恐怖의 對象 이었다. 그러나 自然에 대한 知識이 늘면서 人間은 삶을 根本的으로 事由하기 始作했다. 이 作品처럼 人間은 有限한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고 죽음뒤에 무엇이 있을지 苦悶 하면서 宗敎의 次元이 높아졌다. 군더더기 없는 簡潔한 線과 節制된 形態, 素朴한 材料의 性質이 돋보이는 作品 이다.

 

 

金氏 年代記

 

現代史의 屈曲속에 金氏 家族을 지켜낸 기와집 주름진 老 夫婦 象徵性 으로 表現 했다. 線 으로 그려진 老 夫婦의 身體가 붉은 흙과 하나되어 따듯하고 튼튼한 가와집의 土臺가 되었다. 어려움 속에서도 家族을 지키기위해 국건하게 터전을 가꾸고  살아간 윗 世代들의 삶이 느껴지는 作品 이다.

 

 

 

人間이 自然에서 이루어낸것은 結局 손으로 해낸 것이다. 人間은 精巧하고 힘찬 손 動作으로 文明을 만들어 냈다. 손과 팔뚝을 精巧하게 再現한 이 作品에서 무엇이든 해내겠다는 强한 意志가 느껴진다. 권진규는 힘을 잔뜩 준 筋肉의 微妙한 變化를 잘 捕捉했다.

 

 

월인석보 권 11

 

1447년 完成된 釋譜詳節과 世宗이 1447년 무렵 노래 形式으로 지은 月印千江之曲을  合本한 冊이다. 月印千江之曲 노랫말을 本文으로 쓰고 釋譜詳節 句節로 이를 解說 한뒤 작은 글씨로 補充說明을 넣는 體制로 編輯했다.

 

 

家 族

 

아이 키우는 일은 힘들지만, 아이 모습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幸福해진다. 父母는 아이와 살과 살을 맞대며 끈끈한 紐帶感을 가지게 된다. 두 아이와 엄마의 정겹고 平和로운 한때에서 原初的 生命에 대한 讚美가 느껴진다.

 

 

백자청화구름.용무늬항아리

(白磁靑畵雲龍文壺)

 

龍은 구름을 몰고 비를 부르는 神領한 動物로 東Asia 에서 最高 權力者가 獨占한 象徵物 이었다. 이 항아리는 王室 宴會에서 술을 담거나 종이와 비단으로 만든 꽃나무를 꽃는데 使用했다. 王室 權威를 象徵하는 奇物 이어서 靑華를 사치스럽다고 여겨 禁止했을 때도 繼續 만들어졌다.

 

 

(粉靑砂器)

 

朝鮮을 代表하는 陶瓷器는 粉靑沙器와 白瓷이다. 高麗末의 象嵌靑瓷에서 變化.發展한 것으로 15世紀에서 16世紀 中葉까지 만들어졌으며 貴族的인 高麗靑瓷와는 달리 活潑함과 生動感이 돋보인다. 그런데 1467 ~ 1468년 무렵 京畿道 廣州에 官窯가 設置되어 國家가 주로 白瓷를 生産하면서 그 影響으로 地方 가마들도 점차 粉靑沙器 대신 白瓷를 만들게 되었다. 朝鮮時代 全 期間에 걸쳐 製作된 白瓷는 純白色의 節製된 아름다움으로 朝鮮陶瓷 文化를 이끌었다.

 

 

仁王齊色圖

 

긴 장맛비가 갠 後 仁王山은 사뭇 다르다. 장맛비로 바위들은 물기를 머금어 묵직해 보이고 수성동과 철룡계에 瀑布가 생겨났다 溪谷을 따라 피어오르는 물안개는 촉촉하고 淸晨한 여름날의 情感을 드러낸다. 仁王山 자락에서 태어난 謙齋 정선은 季節과 날씨에 따라 달라지는 仁王山을 늘 보고 자랐다. 일흔여섯의 老大家 정선은 自身의 눈길과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는 仁王山 구석구석을  自信感 있는 筆致로 담아내 最高의 力作을 남겼다.

 

 

피리

 

나무둥치에 걸터 앉아 피리를 부는 少年의 모습은 한가롭기 그지없다. 구불거리며 뻗어나가는 나뭇가지가 피리 소리에 맞추어 흔들리는 듯하다. 이 처럼 한가로운 그림을 그린 박래현은 實際로는 時間을 쪼개가며 집안일 育兒와 그림 그리기를 竝行 했다. 그 女는 自身의 時間과 싸우면서 大作을 남겼다. 

 

 

섶섬이 보이는 風景

 

힘든 時期 自然의 아름다움은 우리에게 慰勞가 된다. 韓國戰爭기 濟州道 西歸浦로 避難을 간 李仲燮은 섶섬이 보이는 바다를 보며 避難 살이의 苦難을 잊었을 것이다. 가난했지만 온 家族이 함께모여 幸福한 나날을 보내서인지  그의 다른 作品에 비해 매우 平穩한 雰圍氣가 느껴진다.

 

 

여인과고양이

 

不安한 現實과 이를 包容하듯 묵묵히 받아들이는 女人의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女人의 다리 사이에 웅크리고 있는 검은 고양이 女人 뒤쪽의 검은 그림자 날카로운 可視化 나뭇가지 그리고 거꾸로 메달린 새는 女人 周圍에 存在하는 不安을 象徵한다. 여러 不安 要素에 둘러싸여 있으면서도 女人은 默想하고 있다.

 

 

노란옷을 입은여인

 

20 世紀 全般 人間을 向한 視線과 表現이 多樣해지면서 近代 知識과 文物을 體現한 新女性이 그림에 登場한다. 畵家가 이인성이 戀人이자 훗날 아내가 되는 김옥순을 主體的으로 생각하는 人間으로 表現했다. 그녀는 大邱 維持의 딸로 당시 日本 도쿄에서 衣裳 design을 工夫하고 있던 新女性 이었다.

 

 

인 물

 

不安함은 人間에게 종종 찿아오는 感情이다. 이 裸體의 男性은 얼굴과 얼굴을 감싼 손이 어둡게 處理되어 있어 괴롭고 葛藤하는 狀況임을 알수 있다. 양손에 붓 을들고 있는 이 男性은 畵家 自身이 model인 것으로 보인다.

 

 

한일

(閑日)

 

1950 년대 서울에 살던 朴壽根은 날마다 길을 오가며 마주치는 사람들을 즐겨 그렸다. 당시 서울에는 趣味生活을 할 空間이 마땅치 않아 사람들은 길가에서 三三五五 모여 時間을 보냈다. 國民畵家 朴壽根의 愚直한 손길을 거쳐 特有의 色感 偸薄한 質感으로 誕生 했다.

 

 

하늘과땅

 

人間은 想像力을 發揮해서 보이지 않는 世界를 想像할수 있다. 妨害者의 作品은 흙, 石彩畵 같은 天然顔料를 종이에 칠했다가 지우거나 문지르고 材料를 구겼다가 펴는 技法을 써서 波長으로 퍼져나가고 은은하게 스며드는 빛을 表現 했다. 이 빛은 宇宙의 存在를 담고 있는 媒介體이자 깊은 冥想과 事由로 얻어지는 內面의 빛 이다. 

 

 

아기업은소녀

 

일터에 나간 엄마를 代身해서 동생을 돌보는 少女모습은 朴壽根이 즐겨 그린 素材이다. 畵家는 少女와 아기를 작은 畵面에 가득 차도록 그려 놓고 背景은 비워둔 채 黃土色 으로 칠했다. 거칠거칠한 그림의 表面은 아스팔트 鋪裝되지 않은 골목길 흙바닥의 色과 質感을 聯想 시킨다.

 

 

 

어머니에게 매달린 아이 아버지 뒤로 숨은 아이 形象에서 平凡하면서도 幸福한 삶이 傳 해진다. 이 作品이 作製된 1990 년대에는  4인 家族 比率이 30% 를 次知해 家族 形態의 標準이었다. 지금은 1인 家口 比率이 40.3 %에 이른다. 家族의 形態는 變化하지만 변치 않은 所望은 家族이 함께하고 그 時間이 幸福 하길 바라는 것이다.

 

 

키스

 

누군가를 사랑하는데는 군더더기의 說明이 必要없고 사랑하는 마음만 있으면 된다는 사랑의 要點을 洗練되게 傳達한 作品이다.  左右 對稱의 全體 부드러운 볼륨과 우아한 線을 形態안에 하나의 덩어리로 連結해 사랑의 本質을 表現했다. 김정숙은 韓國의 첫 女性 彫刻家이자 抽象 彫刻의 先驅者로 單純한 形象의 彫刻像을 製作 했다.

 

 

모자상

 

온 世上 風波에서 아이를 지켜내겠다는 엄마의 意志를 드러내듯, 女人의 視線과 입매. 그리고 아이를 두 다리로  받치고 탄탄한 양팔로 감싸안은 姿勢에서 緊張感이 傳 해진다. 엄마의 든든한 保護를 받고 있는 아기는 平穩하기만 하다. 권진규 特有의 寫實性과 精神性이 잘 드러난다.

 

 

채용신평생도屛風

(蔡龍臣平生圖)

 

理想的인 士大夫의 삶을 그린 平生圖 屛風 傳統을 이었지만 이 作品은 蔡龍臣의 個人史를 紹介한 점에서 以前과 달라진 面貌를 보여준다. 제 5 폭은 慶運宮 興德殿 에서 太祖 李成桂의 御眞을 그리는 場面이다. 西洋式 制服과 傳統이 婚材된 宮中 服飾 征東 언덕 위에 늘어선 外國 公使館들의 모습이 興味롭다.

 

 

기산 風俗圖帖

(제20면)

 

妓女와 賭博을 하다. 놀이에 몰두한 人間 群像들 生生하게 表現한 그림이다. 男子들이 妓生과 어울려 骨牌 노름을 하고 있다. 띠를 머리에 동여 매고 色眼鏡을 낀 모습이 興味롭다. 이 그림은 김준근이 開港場에서 外國人에게 팔기 위해 그린그림 중 하나도 19세기 末 朝鮮의 風俗을 알수있어 價値가 높다.

 

 

나부입상

 

韓國에 西洋畵가 들어오면서 nude畵도 傳해졌다. 韓國畵家들은 1910 年代부터 日本 留學中에  nude畵를 그렸다. 이 作品도 日本에서 製作 되었다. 1910 ~ 1920 年代  韓國畵家가 女體의 뒷모습을 捕捉했고 女體를 美化하지 않고 豊滿한 모습 그대로 表現했다.

 

 

비상

 

非常은 김정숙이 追求한 永遠을 向한 超越의 意志를 反映한 series이다. 作家는 裸線이나 부채꼴 같은 形態를 엄격한 均衡感과 表現 質感의 아름다움에 集中하여 作品의 完成度를 높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