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歷 史 旅 行 2/中央博物館

國立中央博物館 (高句麗)

국립중앙박물관

(國立中央博物館)

 

 (高句麗)

 

 

高句麗는 鴨綠江 流域에서 일어나 點差周邊 地域을 아우르면서 三國중 가장먼저 古代國家 體制를 갖추었다. 313년 平壤地域의 樂浪郡을 몰아내고 北으로는 中國 랴오허강 에서 지린성(吉林省) 쑹화강(松花江)에 이르고 南으로는 韓半島 中部까지 領域을 넓혀 東아시아의 强者가 되었다. 高句麗는 固有文化를 維持 하면서도 中國과 西域,北方의 外來文化를 積極的으로 받아들여 力動的이고 實用的인 文化를 만들어냈다. 高句麗 文化의 國際性과 先進性은 天文,地理,文化,音樂,舞踊,工藝등 여러 分野에서 두드러진다. 이런 高句麗 文化의 特長은 滿洲의 환런,지안 일태와 평양등 高句麗 옛 都邑地를 中心으로 남아있는 城, 무덤, 宮闕터,절터 그리고 여기에서 出土된 吐器,鐵器,꾸미개등의 遺物에 잘나타나 있다. 高句麗 文化는 百濟,新羅, 伽倻와 바다건너 왜 (倭) 에도 影響을 미쳤으며 統一新羅의 渤海로 이어진다.

 

현무

(玄武)

 

청룡(靑龍)백호(白虎)주작(朱爵)현무(玄武)로 이루어진 사신(四神)은 대표적인 상상속 신수(神獸)이다. 四神은 東西南北의 내 方響 봄,여름,가을,겨울의 네 季節 하늘 四方의 28별자리와 關聯있는 存在이며 벽사(薜卸) 음양조화(陰陽調和)를 뜻하는 神鈴스러운 動物이다. 本格的으로 四神이 表現되기 始作한 것은 中國 한(漢)대 부터인데 時期別 地域別로 認識과 表現 技法에서 變化와 發展을 繼續하였으며 우리나라 에서는 高句麗 무덤壁畵에 가장먼저 나타난다. 高句麗 무덤 壁畵에서 四神은 해와달 별자리 祥瑞로운 動物 연꽃등과 함께 내세를 이루는 한 要所로 무덤간 천장에 表現되기 始作하였다.

 

청룡 (靑龍)                                    백호 (白虎)

 

광배

(光背)

 

영강7년이 새겨진 佛像의 神性함을 나타내기 위해 不祥의 뒤에 부처의 몸에서 나오는 빛을 表現한 光背이다. 연꽃과 넝쿨무늬로 粧飾 하였고 全面에 꽃무늬를 새겼다. 光背 뒷면에 영강 7년 (永康七年)으로 始作 되는 7행 58자의 名分이 새겨져 있는데 영강 은 高句麗 陽原王 때의 年號로 551년에 該當된다. 名文內容은 돌아가신 어머니가 彌勒法會에 參席하여 깨달음을 알고자 彌勒佛像을 만들었다. 는 內容이다. 이를 通해 이 光背의 本尊이 彌勒像 이었음을 알수있다.

 

못신

(金銅飾)

 

高句麗의 金銅신발은 바닥에 박힌못의 개수가 많고 바닥판만 金屬으로 만든점이 特徵이다. 지안(지안)三室塚과 톡구 12호분의 壁畵에 이러한 신발을 신고있는 高句麗 武士가 描寫되어 있다. 이 신발은 바닥판만이 남아있는데 四角錐 形態에 金銅못 40여개가 촘촘히 박혀있다. 바닥판 가장자리에 작은구멍이 짝을 이루어 뚫려있는 점으로 보아 신발의 위쪽은 가죽이나 천으로 만들어 連結했던 것으로 生角된다. 이 신발은 實題 使用된 것이라기 보다는 儀禮用이나 껴묻거리(副葬品)로 보인다.

 

벽돌

 

지린성 (吉林省) 지안(集安)의 태왕릉(太王陵)과 천추총(千秋塚)에서 出土된 벽돌이다. 이 무덤들은 大型 階段式 돌무지무덤으로 무덤 위쪽에 기와를 이은 建物을 세웠거나 무덤을 지키는 사람(守墓人)과 關聯된 建物이 있었던 것으로 推定된다. 이 벽돌은 무너진 돌무지 속에 기와와 함께 섞어 있었으며 한쪽 면에는 무덤이 오래도록 保存되기를 祈願 하는 글자(吉祥句)가 새겨져 있다.

 

벽화

(壁畵)

 

말탄사람이 그려진 三國時代 (5세기) 平南 南浦 雙楹塚에 發掘되었다.

 

꾸미개

(金銅鳳凰裝飾)

 

鳳凰模樣 꾸미개 三國時代 平北 雲山 龍虎洞 무덤 出土

 

꾸미개

(金銅邃彫裝飾)

 

三國時代 平壤 진파리 무덤 出土

 

말갖춤

 

말갖춤 (馬具)에는 말을 부리기위한 재갈과 고삐 말위에서 몸의 安定을 維持하기 위한 安葬과 발걸이 말을 粧飾하기 위한 말방울, 말띠드리게, 말띠꾸미개등이 있다. 말을 길들어 타는대에 가장 먼저 考案된 道具는 고삐일것이나 오늘날 거의 남아있지 않다. 재갈은 말의 입안에 단단한 물질을 넣고 이를 당기 말의 혀를 磁極하는 統制手段이다

 

고구려의무기

(高句麗武器)

 

高句麗 軍事力의 主要한 바탕은 優秀한 製鐵技術로 만든 强力한 武器에 있었다. 武器는 攻擊用 武器와 防禦用 武器로크게 나누어진다. 攻擊用 武器는 활,창,쇠뇌,칼,도끼등이 있고 防禦用 武器는 甲옷과 鬪具,防牌가 代表的이다. 高句麗의 활은 길이가 짧은 丹弓으로 性能이 優秀해서 당시 이미 中國에 까지 널리 알려져있으며 高句麗에서 활쏘기는 基本 武術種目 중의 하나였다. 高句麗의 甲옷은 작은 鐵板에 구멍을 뚫어 가죽끈으로 서로 連結한 비늘 갑옷이 주로 使用 되었다. 鬪具는 多樣한 形態로 壁畵에 描寫 되고 있지만 實弟 出土된 것들은 小數이다. 鐵材 武器들을 分析한 結果 오늘날의 鋼鐵과 같이 단단한 것으로 밝혀졌다. 

 

청동그릇

(壺杅銘靑銅盒)

 

三國時代 (高句麗 415) 호우 글자가 있는 靑銅그릇 慶北 慶州 壺杅塚 出土

 

고구려인의일상

 

高句麗의 城 內部에는 여러 建物과 整備된 道路등 多樣한 施設이 있었다. 貴族의 집은 사랑채와 안채로 이루어지며 마구간,차고,부엌,다락창고,방앗간,고깃간,등의 附屬 施設과 잘 꾸며진 庭園을 가지고 있었다. 主要建物은 기와로 지붕을 덮었고 暖房 施設로는 部分 온돌을 設置하였으며 日常生活에서 平常이나 坐床을 使用하였는데 방안에서는 신발을 벗는 習慣이 있었다.  디딜방아로 穀食을 찧었고 가루로 내어 시루에 쪄 먹었으며 아래층에 기둥만 있고 本體가 위에있는 固相式 構造의 다락倉庫에 穀食을 保管하였다. 부엌에서 調理한 飮食을 小盤에 받쳐들고 안채나 사랑채로 가서 상차림을 하였는데 主人과 손님의 상을 따로 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