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중앙박물관
(國立中央博物館)
금관총과이사지왕
(金冠塚尒斯智王)
1921년 무덤 밖으로 모습을 드러낸 金冠은 黃金의나라 新羅의 存在를 알리는 重要한 發見이었읍니다. 金冠塚 이라 이름 붙여진 이 무덤이 調査된 이래 92년이 지난 2013년, 國立中央博物館은 金冠과 함께 發見된 고리자루 큰칼을 保存處理하는 科程에서 이자지왕(尒斯智王)이라는 王의 이름을 確認 하였읍니다. 지금까지 古 新羅무덤에서 王의 이름이 確認된적은 한번도 없었기 때문에 이것은 매우 重要한 意味를 갖읍니다. 이번 展示는 그 동안 알려지지않았던 金冠의 發見 및 調査科程을 紹介하고 王의 이름이 새겨진 고리자루 큰칼을 發掘 이래 最初로 公開하는 자리 입니다. 이 展示를 通해 金冠塚의 主人公이 누구인가를 다시한번 想像해 보시기 바랍니다.
금 관
(金冠)
金冠塚 金冠은 新羅金冠 중 가장먼저 發見된 것이다. 金冠에는 띠 模樣의 관태에 나뭇가지 某樣과 사슴뿔 模樣의 粧飾이 세워져 있는데 粧飾의 앞면에는 133가지의 달개와 57개의 곱은玉이 달려 있다. 세움粧飾의 가장자리에는 한 줄의 連續 점무늬 관태에는 파도무늬가 새겨져 있다. 貫太에는 한 쌍의 드리개가 달렸을 것으로 생각된다.
굵은고리귀걸이
(太環耳飾 )
最高支配者인 麻立干 즉 王일까?
尒斯智王이라는 王은 現在 까지 確認된 金石文이나 三國史記 三國遺事 등 歷史 記錄에서는 確認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尒斯智王은 신라 냉수리비(443년 ~ 503建立립)에 나오는 차칠왕등(此七王等)을 이 7명의 王들로 解釋하여 당시 新羅에 여러명의 王이 있었다고 하는 見解를 뒷받침하는 것일까? 아니면 新羅 最高 支配者인 王(麻立干)의 다른 이름일까?
네귀달린항아리
(靑銅四耳壺)
金冠塚 遺物중 독특한 形態를 하고 있는 容器중 하나가 바로 손잡이가 네개달린 靑銅항아리다. 이 항아리는 형태나 特徵으로 보아 高句麗 항아리임이 分明하다. 金冠塚의 主人公이 死亡한 시점에 高句麗에서 新羅로 보내온 物品이 있었을 것이다. 金冠塚의 主人公은 高句麗와 어떤 關係에 있던 人物이었고 高句麗에서는 이 항아리에 무엇을 담아 보냈을까?
日本列島산 고동으로 만든 말띠꾸미게
金冠塚 遺物중 現 日本 규슈地方 南部와 더 남쪽바다에 棲息하는 "이모가이"라는 亞熱帶 고동껍데기를 加工해 만든 말띠 꾸미게가 있다. 원뿔처럼 생긴 "이모가이"의 구멍周邊은 扁平하고 소용돌이 처럼 둥굴게 말려 있는데 이 部分을 다듬어서 말띠꾸미게에 끼워넣어 粧飾하는데 使用하였다. 金冠塚 이외에도 皇南大塚 覆盆과 天馬塚등 新羅 무덤에서 自主 出土대는 "이모가이"는 文獻 記錄에 나오지 않은 新羅와 日本列島 왜(倭)의 交流를 알려주는 重要한 遺物이다.
비갑
(臂甲)
金冠 곱은玉의 原産地
翡翠라고도 하는 鏡玉으로 만들어진 곱은 玉은 아직까지 韓半島에서 原産地가 確認된적이 없다. 金冠塚 調査를 擔當한 하마다고사쿠 敎授는 鏡玉製 䯩은玉을 日本 遺物로 判斷했다. 곱은玉이 처음 만들어진것은 韓半島 新石器 時代지만 4세기부터 나오는 鏡玉製 곱은玉은 鏡玉을 韓半島에서 採掘할 곳이 確認되지 않은 만큼 輸入되었을 可能性이 높다. 그렇다면 新羅金冠의 鏡玉製 곱은玉은 모두 日本列島에서 온것일까? 앞으로 鏡玉製 곱은玉에 대한 硏究가 期待된다.
새모양관꾸미개(鳥翼形冠飾) 관모(冠帽) 국보87호
金冠塚의 主人公은 누구인가?
金冠塚 遺物을 定理하고 報告書를 쓴 하마다 고사쿠 敎授는 金冠塚을 現 日本 시가 현가모이나리야마 古墳(미즈오고분)과 出土 遺物이 비슷하다는 점을 根據로 6세기 初에 築造된 무덤으로 判斷하고 主人公은 慈悲王(在位 458 ~ 479)이거나 智證王(재위 500 ~ 514)일 것으로 推定했다. 오늘날 新羅古墳 硏究者는 金冠塚의 築造 年代를 大略 5세기 中葉부터 6世紀初로 生角하고 있다. 金冠塚의 主人公이 新羅의 王(마립간)이라면 慈悲王 炤知王(在位 479 ~ 500) 智證王중 한명일수 있다. 그러나 金冠塚은 비록 金冠이 出土되기는 하였으나 무덤의 規模나 立志등으로 볼때 王陵으로 보기는 어렵다는 見解도 있다. 金冠은 王뿐만 아니라 王妃나 王族들도 金冠을 썼을 可能性이 많아 金冠이 出土되었다고 해서 반드시 王(마립간)의 무덤이라고 말할수 없다. 尒斯智王이 누구인가 明確하지 않지만 金冠塚에서 出土된 遺物로 볼때 500년前後 死亡한 新羅의 有力者중 한사람이었음은 分明하다.
尒斯智王이 確認되다.
1921년 金冠塚의 發見이후 92년이 흐른 2013년 國立中央博物館 保存科學部는 金冠塚 出土 遺物을 整理하던 중 고리자루 큰칼의 칼집 끝에서 날카로운 道具로 새겨 쓴 글자를 確認 하였다. 判讀結果 尒斯智王이라는 글자였다. 또 칼 손잡이 부근에서 이 자와 尒斯智王이 새겨진 칼집 끝 뒷면에서도 十자가 드러났다. 金冠塚의 또다른 칼에서도 八. 十. 尒 라는 글자가 追加로 發見되었다. 新羅古墳에서 글자가 새겨진 遺物은 瑞鳳塚의 銀盒과 好友塚의 好友를 비롯하여 여러점 出土되었으나 王의 이름이 새겨진 遺物은 金冠塚 出土 고리자루 큰칼이 唯一하다 이 遺物은 金冠塚의 主人公을 찾는 硏究와 당시 新羅 社會를 硏究하는데 매우 重要한 資料라고 評價 할수있다.
고리자루큰칼
(環頭大刀)
가는고리귀걸이
(細環耳飾)
팔지 반지
(指環)
유리잔
(琉璃盞)
초두
(鐎斗)
방울
(金鈴)
金冠塚과 尔斯智王,여전이 남은 課題들?
男性인가? 女性인가?
金冠塚 報告書를 執筆한 하마다고사쿠 敎授는 主人公을 王(麻立干)으로 生角 했는데 男性으로 本 셈이다. 그런데 現在 新羅古墳 硏究에서는 가는고리 귀걸이를 하고 큰칼을 直接 허리에 찬사람은 男性 굵은고리 귀걸이를 하고 큰칼을 直接 차지 않은 사람은 女性으로 主張하는 見解가 많다. 報告書에 따르면 金冠塚의 主人公은 큰칼을 直接 차지 않고 굵은고리 귀걸이를 하고 있다. 그렇다면 무덤의 主人公은 女性일 可能性이 높다 과연 女性 일까?
발굴 당시금관과 금관총
朝鮮總督府는 金冠塚 報告書를 總 4券으로 企劃했다. 本文(上)은 1924년 5월 圖板(上)은 1924년 9월 圖板(下)는 1928년 3월 刊行되었다. 本文(下)는 여러 問題로 定式 刊行되지 못하고 慶州의 金冠塚 이라느 이름으로 하마다고사쿠에 의해 1932년이 되어서야 出版되었다. 이 冊들은 모두 日本 교토 지교도(以玉堂)에서 印刷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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