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歷 史 旅 行 2/中央博物館

國立中央博物館 (百濟.伽倻)

국립중앙박물관

(國立中央博物館)

 

 (百 濟)

 

 

삼국사기(三國史記)記錄에 의하면 百濟는 高句麗 주몽(朱蒙)의 아들인 온조왕(溫祚王)에 의해 建國되었다. 溫祚는 兄인 비류(沸流)와 함께 高句麗에서 南쪽으로 내려와 比類는 미주홀에 溫祚는 하남(河南)위례성(慰禮城)에 定着 하였다. 나라 이름은 십제 (十濟)라 하였으며 그 後 百濟(百濟)로 고쳐 불렀다. 溫祚王 13년 한산(漢山)아래로 慰禮城의 住民을 옮겼는데 한성(漢城)의 位置는 風納土城.夢天土城 등으로 보기도 한다. 특히 風納土城에서는 大型 집자리,祭祀關聯 建物地圖로 등이 確認되어 初期 百濟都城의 모습을 確認시켜 준다.

 

기와

(瓦)

 

百濟의 기와는 甕津 기와 泗沘期를 거치면서 연꽃무늬를 주로 하는 百濟 特有의 樣式이 確立된다. 甕津期에는 傳統的으로 傳해오던 技術의 바탕위에 새로이 남조 양(梁)의 기와 製作技術을 받아들여 以前 과는 다른 기와를 製作하였다. 泗沘로 都邑을 옮긴 以後에는 都城 안팎에 많은 寺刹이 세워짐에 따라 기와 製作도 活潑해 졌으며 樣式도 多樣해졌다. 百濟의 기와 製作技術은 新羅와 倭에도 傳해졌는데 倭에 派遣된 와박사(瓦博士)는  아스카(飛鳥)기와 發展에 影響을 주었다.

 

굽다리항아리

(組合式牛角形手附壺)

 

쇠뿔模樣 손잡이가 달린 굽다리 항아리

 

항아리

(大夫銘壺)

 

風納土城에서는 대부(大夫)가 새겨진 항아리와 정(井)이 새겨진 항아리가 出土되었는데 高句麗 阿遮山 堡壘에서 出土된 대부정(大夫井)이 새겨진 吐器와 關聯이 있음을 알수있다. 大府는 中國에서 管理를 일컫는 말이며 정(井)碧紗의 意味가 있는데 祈雨祭와 같은 祭儀에 使用된 것으로 보인다.

 

금동관모

(金銅冠帽)

 

금동관모(金銅冠帽)는  身分을 象徵하는 꾸미개로 優越한 地位를 가진 사람의 무덤에서 주로 出土된다. 形態는 둥근고깔 模樣으로 모자의 뒷部分에 大籠 模樣의 粧飾을 달거나 앞 또는 둿部分에 大籠 模樣의 粧飾을 달거나 앞, 또는 둿부분에 華櫚한 粧飾을 세우기도 하였다. 이러한 形態의 金銅冠帽는 公州 水村里,瑞山副章里,天安容顔里,益山임점리,羅州新村里,高興碣斗里등 百濟의 領域뿐만 아니라 伽倻와 日本 地域에서도 發見되고 있어 注目된다. 金銅冠帽는 金銅신발,中國陶瓷器등의 高級 物品과 함께 副葬되는 境遇가 많다. 이러힌 것들은 百濟가 馬韓의勢力을 統合해 나가는 始期의 遺跡에서 주로 確認되고 있다.

 

관료의 성장과 꾸미개

 

꾸미개는 身體를 아름답게 粧飾하는 技能 외에도 身分을 나타내기도 한다. 百濟의 支配層은 各種 꾸미개를 使用하였는데 代表的인 것이 銀製 棺 꾸미개와 허리띠粧飾 등이다. 銀製 棺 꾸미개는 銀板을 길게 오려즐기를 만들고 꽃봉오리를 粧飾한 것으로 扶餘의 陵山里 古墳을 비롯하여 論山,南原,羅州등지에서 發見된다. 이것은 三國事記 百濟本紀의 王은 검은비단으로 만든 모자에 금꽃으로 粧飾하였고 6품 나솔 以上의 官吏들은 은꽃으로 粧飾하였다. 는 記錄과도 一致한다. 이와 같이 百濟는 官僚의 等級에 따라  棺 과 허리띠 粧飾을 달리하여 官職 體系를 表示 하였다.

 

기와

(瓦)

 

百濟의 기와는 甕津 기와 泗沘期를 거치면서 연꽃무늬를 주로 하는 百濟 特有의 樣式이 確立된다. 甕津期에는 傳統的으로 傳해오던 技術의 바탕위에 새로이 남조 양(梁)의 기와 製作技術을 받아들여 以前 과는 다른 기와를 製作하였다. 泗沘로 都邑을 옮긴 以後에는 都城 안팎에 많은 寺刹이 세워짐에 따라 기와 製作도 活潑해 졌으며 樣式도 多樣해졌다. 百濟의 기와 製作技術은 新羅와 倭에도 傳해졌는데 倭에 派遣된 와박사(瓦博士)는  아스카(飛鳥)기와 發展에 影響을 주었다.

 

가야의갑옷

 

伽倻 地域에서 널리 使用된 갑옷은 큰 철판 20 ~ 30매를 이어서 만든 판갑옷(板甲)으로 가야무사의 象徵이기도 하다. 판갑옷은 오른쪽 앞 몸통(右前眮)왼쪽앞 몸통(左前眮)과 뒷몸통(後眮)세 部分으로 이루어졌는데 뒷 몸통과 앞 몸통은 分離할수 있도록 하거나 가죽,경첩등으로 連結하여 갑옷을 쉽게 입고 벗을수 있도록 하였다.

 

청동그릇

 

三國時代 (百濟 3 ~ 4世紀) 液體를 데우는 그릇

 

상형토기

 

象形土器는 사람이나 動物 또는 物件의 模樣을 본떠서 만든 土器를 말한다. 이 중에 속이 비어 있거나 뿔잔등이 붙어 있어 酒煎子나 盞과 같은 役割을 하도록 만든것도 있다. 또 배,수레,집,신발,방울등의 模樣을 지닌 土器가 많은데 당시 사람들이 生活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사슴이나 말,돼지등 動物模樣의 定式을 土器에 붙인것도 있다. 伽倻地域의  象形土器는 大部分이  무덤에서 出土되어 葬送 儀禮에 使用 된것으로 보인다. 죽은사람의 安息과 靈魂의 救援처럼 死後世界의 安樂에 대해 象徵的 祈願을 表現한 것이다.

 

백제의불교문화

 

百濟의 佛敎는 枕流王 元年(384) 中國 동진(東晉)에서 傳來되었다. 泗沘期에는 정림사(定林寺)왕흥사(王興寺)등 많은 寺刹이 지금의 扶餘地域을 中心으로 세워져 佛敎文化가 隆盛 하였음을 알수있다. 百濟의 寺刹은 중문(中門) 탑(塔). 금당(金堂) 강당(講堂)이 南北 一直線上에 配置되는 1塔 1金堂式 一塔一金堂式의 伽藍配置를 特徵으로 한다. 그러나 泗沘期에 이르면 3 塔 3 金堂式의 伽藍配置를 갖춘 彌勒寺가 建立된다. 百濟의 佛像은 洗鍊되고 穩和한 모습이 特徵이다. 瑞山 磨崖三尊佛.泰安 磨崖三尊佛등은 우리나라 磨崖佛의 寺院이 되며 軍需里 石造如來像 및 金銅 菩薩立像은 百濟를 代表하는 佛像이다. 百濟金銅大香爐를 비롯하여 많은 金屬工藝들은 百濟 佛敎文化의 優秀性과 獨創性을 보여준다. 이러한 百濟의 佛敎文化는 倭에 傳해져 日本 佛敎文化 形成에 影響을 주었다. 

 

三國時代 (百濟3 ~ 4世紀)

 

백제의익산경영

 

百濟 무왕 (武王) 在位 600 ~ 642년 百濟 文化의 全盛期를 粧飾했던 王으로 益山地域에는 王宮里 遺跡. 雙龍.彌勒寺址.在席寺址등 武王과 관련된 遺跡이 많이 남아있다. 王宮里 遺跡은 武王의 天道說과 關聯 된곳으로 注目받고 있는데 이 遺跡은 처음에는 王宮으로 造成 되었다가 뒤에 寺刹로 바뀌었다. 雙陵은 7세기에 만들어진 突放무덤 으로 副葬된 나무널은 武寧王陵 나무널과 같은 日本産 金松으로 만들었으며 널 꾸미게도 華櫚하다. 彌勒寺는 彌勒信仰을 背景으로 세워진 寺刹로서 三國第一의 規模를 지닌 大伽藍이다. 百濟의 마지막 都邑은 泗沘址만 익산은 百濟 王室이 滅亡하기까지 매우 重要하게 認識되어 왔던 地域이다.

 

무늬벽돌

寶物 343호

 

扶餘 외리에서 出土된 여덟 種類의 무늬벽돌이다. 네모 模樣의 벽돌은 크기가 日程하고 네 귀의 側面에서 홈이 파여 있어서 서로 連結하여 固定시킬수 있다. 회화성이 뛰어난 百濟의 무늬벽돌은 당시의 藝術과 建築,宗敎와 思想的인 側面까지 볼수 있다.

 

가야의말갓춤

 

말갖춤은 말을 타고 부리는데 必要한 모든 道具를 이르는 말이다. 말갖춤은 크게 馬車用.乘馬用 으로 나뉘는데 伽倻의 말갖춤은 모두 乘馬用이다. 種類 로는 말을 制御하는 재갈,굴레,고삐,말 탄사람의 安定을 위한 발걸이 ,鞍裝,가슴걸이,뒤걸이,그리고 粧飾을 위한 띠구매기,말방울,기꽃이등이 있다. 이와 더불어 말 自體를 保護하기 위한 말머리가리개와 말갑옷도 있다. 伽倻의 말갖춤은 高句麗의 影響을 받았지만 차춤 伽倻 特有의 形態를 갖추게 된다.

 

가야토기의아름다움

 

伽倻 사람들은 日常生活에서 많은 生活用器들을 만들어 使用했는데 그중 一部는 무덤에 넣어 죽은 사람을 위로 하였다. 伽倻土器는 같은 時期 韓半島 다른地域에서 發見되는 어떤 土器보다 단단하며 形態的으로 아름답다. 伽倻土器의 種類로는 굽다리접시,항아리,그릇받침등이 있다. 新羅의 굽다리접시는 굽다리가 直線作이고 投槍은 四角形이며 上下가 서로 엇갈리게 配置되어 있다. 이에 비해 伽倻의 굽다리접시는 굽다리가 谷線的이며 投槍의 形態가 多樣해 불꽃 模樣이나 작은 圓形도 있다. 四角形의 投槍은 上下日別로 뚫어놓은것이 大部分이다. 이와 더불어 新羅나 百濟에 비해 多樣한 形態와 무늬를 가진 그릇받침은 伽倻 土器중 가장 獨創的이다.

 

가 

(伽 倻)

 

삼국유사(三國遺事)가락국기(駕洛國記) 에 의하면 伽倻는 紀元後 42년 首露王에 의해 金海地方에서 建國되었다고 한다. 初期에는 이 地域의 豊富한 鐵을 基盤으로 金官伽倻와 阿羅伽倻가 强力한 勢力을 形成 하였다. 특히 金官伽倻는 바닷길을 通해 中國, 倭등과 鐵을 基盤으로 한 國際交易으로 富를 蓄積 하였다. 5 世紀와 6 世紀 에는 大伽倻 와 阿羅伽倻를 中心으로 큰 勢力을 形成 하였다. 大王 이란 글자 새겨진 吐器와 한 金製品 그리고 大型 封土墳이 確認 되는것으로 보아 新羅, 百濟와 힘을 겨룰만큼 强한 勢力이 있었음을 알고있다. 伽倻文化의 特徵은 부드러운 曲線美를 가진 多樣한 形態의 吐器 많은 量의 鐵材 武器와 華櫚한 말갓춤 등에서 찾을수있다. 특히 慶南 金海 大成洞 咸安 도항리, 陜川玉泉 高城 內山里와 慶北 高靈 지산리 등의 伽倻 무덤에서 出土된 遺物을은 水準 높은 伽倻文化를 잘 보여준다.

 

가야의장신구

 

伽倻사람들이 즐겨 着用한 裝身具로는 棺,귀걸이,목걸이,팔찌,반지등이 있다.이 중 棺은 관테와  풀꿏모양(草花形)세움 粧飾이 있는 形態이다. 관태의 위 아래에는 점줄무늬  (點列文)와 점줄문살무늬 (點列格子文)가 새겨져 있고 둥근  달개가 달리는것이 一般的인 形態이다. 귀걸이는 고리 하나로만 이루어진 것과 세부분으로 나누어지는 것이 있다. 목걸이는 주로 유리 수정,마노,호박,천하석등으로 만들어진것이 大部分이며 드물게 팔찌나 반지도 出土된다. 꾸미개는 아름다운뿐만 아니라 呪術的인 힘과 社會的 權威를 象徵的으로 나타내고 있어 呪術的인 힘과 社會的 權威를 象徵的으로 나타내고 있어 古代人의 精神 世界를 엿볼수 있는 資料이다.

 

웅진에서 사비로

 

武寧王의 뒤를 이어 卽位한 成王 (523 ~ 554년)은 588년에 泗沘로 都邑을 옮겨 國家繁榮의 土臺를 磨鍊하였다. 泗沘川도 以後에도 佛敎를 壯麗하고 中央과 地方의 統治體制를 整備하여 王權 中心의 政治運營 體制를 確立 하였다. 또한 新羅와 高句麗 사이에서 領土를 回復하고 勢力을 擴張하기 위해 勞力하였다.  泗沘期는 漢城期부터 蓄積되어 온 百濟의 文化가 絶頂期에 이르렀는데 藝術과 宗敎에서는 佛敎 文化가 華櫚하게 꽃피었다.

 

 

사택지적비명

(砂宅智積碑銘)

 

甲寅年正月九日奈秖城砂宅智積

慷身日之易往慨體月之難還穿金

以建珍堂鑿玉以立寶塔巍巍慈容

吐神光以送雲峩峩悲貌含聖明以

 

甲寅年 正月9일 내지성 에사는 사택지적은 몸아 나날이 늙어감을 한탄하여

금속을 다듬어 금당을 세우고 옥을 다듬어 탑을 쌓았다.

높다란 금당의 자비로운 모양은 신성한 빛을 내품어 구름을 보내는듯하고

우뚝한 탑의 자비로운 모습은 성스럽고 밝은 정기를 지니고 비상하는듯하다.

 

사택지적비

(砂宅智積碑)

 

扶餘 扶蘇山城에서 發見된 碑石으로 百濟 義子王 14년 (654)에 만들어진 것으로 把握된다. 글자는 花崗岩의 한 면을 다듬고 네모 모양으로 나누어진 칸에 새겨져 있다. 現在 4행만 남아있는데 覺行에는 세로로 14자씩 있다. 碑文은 中國 六朝時代의 사륙병려체(四六騈儢體)로 그 內用은 砂宅智積이 金堂을 세우고 塔을 쌓은 동기등이 記錄되어 있다. 당시의 碑文 樣式및 글씨체등을 알수 있는 좋은 資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