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중앙박물관
(國立中央博物館)
145년
외규장각의궤의귀환
(外奎章閣儀軌145年歸還)
※ 의궤(儀軌)는 『"國家 典禮의 따라야할 基本"』 意味로 國家와 王室이 開催하는 行事의 全過程을 記錄하여 冊으로 編纂 하므로서 훗날 行事때 참고한 代表的인 國家 記錄物 이다.
1866년 프랑스는 天主敎 彈壓事件을 口實로 병인양요 (丙寅洋擾)를 일으키고 江華島를 占領 하였다. 그러나 朝鮮軍의 奮戰으로 手勢에 몰린 프랑스軍은 大量의 銀塊와 外奎章閣에 保管되어있던 儀軌를 비롯한 189종 340여冊 기타 資料등을 掠奪하고 江華島 長寧殿,外奎章閣등 모든 官野에 불을 지르고 退却 하였다. 過去속에 묻혀졌던 外奎章閣 儀軌는 在佛學者 박병선 博士에 의해 그 存在와 行方이 알려졌다. 以後 國內 學術團體와 政府가 中心이되어 儀軌의 返還을 推進하였고 1993년에는 1권이 먼저 돌아오게 되었다. 2010년 서울에서 開催된 G20 頂上會義中 大韓民國,프랑스 兩國 頂上의 合意와 以後 後續措置에 따라 外奎章閣 儀軌가 돌아오게 되었다. 이에 따라 프랑스 國立圖書館에 保管되어 있던 外奎章閣 儀軌 297권은 145년 만에 모두 故國의 品으로 돌아왔다. 外奎章閣 儀軌는 大部分 國王의 閱覽을 위해 製作된 어람용 (御覽用)이다. 高級 종이에 해서채 (楷書體)로 精誠껏 內容을 쓰고 顔料로 곱게 彩色한후 高級 비단과 놋쇠물림으로 裝幀하여 그 藝術的 品格이 매우 높다 특히 外奎章閣儀軌 中에는 世上에 단 한점뿐인 唯一本 30책이 包含되어 重要性이 매우 크다.
儀軌非但行之一時實萬世通行之制也
儀軌는 短智 한 때만 行해지도록 하는것이 아니라실로 晩歲에 걸쳐 行해지도록 만든것이다.
世宗實錄에서
외규장각
(外奎章閣)
朝鮮 貞祖때 王室 관련 書籍을 保管할 目的으로 江華島에 設治한 圖書館으로 王立圖書館인 奎章閣의 附屬圖書館 役割을 하였다. 設治 以後 王室이나 國家 主要行事의 內用을 整理한 儀軌를 비롯한 王室關係 書籍을 保管 하였으나 1866년 (高宗3년) 丙寅洋擾 때 프랑스軍이 江華都를 襲擊하면서 儀軌를 포함한 書籍등을 掠奪하였으며 나머지는 불타 없어졌다. 大韓民國 政府와 民間團體에서 프랑스政府에 계속해서 外奎章閣 圖書의 回收를 要求해왔으나 返還協商이 延期되거나 프랑스측에서 繼續協商을 遲延시키는등 消極的 姿勢를 보이다 2010년 11월 12일 G 20 頂上會議에서 兩國의 大統領간에 外奎章閣 圖書를 5年마다 更新하는 賃貸形式으로 貸與하기로 合意 하여 145년만에 우리나라로 돌아왔다.
규장각
(奎章閣)
世祖때에 梁誠之가 임금의 詩文을 保管할 奎章閣을 두기를 請하였으나, 實施하지는 않았다. 以後 肅宗 때에는 작은 全閣을 마련하여 ‘奎章閣’이라 이름하였으나, 職制는 갓추지 않았다. 正祖가 卽位한 뒤 1776년(正祖 1년) 陰曆 9월 25일에 昌德宮 錦園의 北쪽에 奎章閣을 세우고, 提學·直提學·직각(直閣)·대교(待敎)·검서관(檢書官) 등의 管理를 두었다 ‘규장’(奎章)은 임금의 詩文이나 글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때 奎章閣은 그 이름대로 歷代 王의 글과 冊을 收集 保管하기 위한 王室 圖書館의 役割을 하였다. 正祖는 여기에 秘書室의 技能과 문한(文翰) 技能을 統合的으로 附與하고 科擧試驗의 主觀과 文臣 敎育의 任務까지 賦與하였다. 奎章閣은 朝鮮 後期의 文運을 불러일으킨 中心機關으로 많은 冊을 編纂했으며, 여기에는 實學者와 庶孼 出身의 學者들도 採用되었다. 甲午改革 때 廢止되었으며, 奎章閣은 1910년 日帝 强占期에 廢止되었다가, 解放 以後에 一部 남아 있는 圖書가 서울大學校 奎章閣(現 서울大學校 奎章閣 韓國學 硏究員)으로 移管되었다.
어수문
(漁水門)
높은 언덕위에 있는 宙合樓로 오르는 正門이 漁水門 이다. 물고기가 물을 떠나서 살수없다.는 格言과 같이 統治者는 恒常 百姓을 生角하는 敎訓이 담긴 門으로 正祖의 美本政治 哲學을 보여준다. 큰 門 하나와 左右로 작은 門 두개로 나누어진 모습도 獨特하다.
주합루
(宙合樓)
宙合樓는 正祖가 卽位한 1778년에 創刊한 2층 樓閣이다. 아래층에는 王室直屬 圖書館인 奎章閣을 위층에는 閱覽室겸 누마루를 만들었다. 奎章閣이란 文章을 擔當하는 하늘의 별인규숙 (奎宿)은 빛나는 집이란 뜻이고 宙合樓란 天池宇宙와 通하는 집이란 뜻이다.
효장세자책례도감의궤
(孝章世子冊禮都監儀軌)
同一한 內用의 粉狀用 儀軌다 종이는 御覽本의 輕愚 高級 초주지 (草注紙)를 粉狀用은 草注紙 보다 질이낮은 저주지 (楮注紙)를 使用하였다. 인찰선(印札線)은 御覽本의 境遇 붉은 선을 直接 그었는데 粉狀用에서는 檢定線이 版으로 찍혀 區劃되었다. 御覽用은 붓으로 直接形態를 그린후 多樣한 顔料로 칠하였으나 粉狀用은 도장을 찍어 人物을 排置하고 色相도 單調롭다.
풍정도감의궤
(豊呈都監儀軌)
인목대비 (仁穆大妃)의 長壽를 祈願하기 위해서 인경궁 (仁慶宮)에서 열린잔치 行事를 記錄한 粉狀用 儀軌다. 당시 후금 (後金)과의 關係가 긴박하고 凶年이들어 財政 常態가 좋지 않았으나 仁祖는 自身의 반정 (反正)을 合法的으로 認定해준 對備에 대한 고마움으로 풍정(잔치)을 올렸다. 한책만 남아 있는 唯一本으로 外奎章閣 儀軌중 그製作 時期가 가장 빠른 것이다.
강화부외규장각형지안
(江華府外奎章閣形止案)
江華府 外奎章閣에 保管된 책보 (冊寶)王室族譜 王의글과 글씨 및 書跡의 數量과 位置를 적은 형지안 (形止案)이다 形止案 이란 現在의 狀況을 밝힌 壯夫란 뜻으로 儀軌는 아니다. 1875년 9월에 作成한 것으로 儀軌는 주로 北쪽과 西쪽의 壁面에 있는 書家에 保管되었다.
강도부지도
(江都府地圖)
江華島 北쪽에 位置한 江華府 내에 행궁 (行宮)이 그려있지 않아 프랑스 軍隊가 行宮을 破壞한 1866년의 丙寅洋擾 以後에 製作된 地圖로 生角된다. 江華島海岸에 設置한 포대 (砲臺)와 혈수 (穴數) 돈 (墩)의 위치를 詳細히 記錄하였으며 오른쪽에는 漢江入口로 오르는 海岸을 따라 산성 (山城)이 세워져 있는 것을 볼수있다.
강화부궁전도
(江華府宮殿圖)
4 면의 建物圖가 收錄된 畵帖중 外奎章閣 模樣이다. 西쪽의 建物부터 次例로 제1면에는 江華府 行宮 제2면 에는 外奎章閣 제3면 에는 肅宗의 御眞을 奉安한 장녕전 (長寧殿) 제4면 에는 萬寧殿 과 봉선전 (奉先殿)이 그려져 있다. 丙寅洋擾로 燒失된 建物들을 復元하기 위해 高宗이 1881년에 그리도록 하였다는 意見과 1858년에 奉先殿을 복건 (復建)한後 丙寅洋擾로 燒失되기 殿의 모습을 그린것이라는 見解가 있다.
정종정안왕후시호도감의궤
(定宗定安王后諡號都監儀軌)
朝鮮時代에는 王室의 各種 意識 및 行事를 執行하기 위해서 우선 臨時 機構인 도감 (都監)을 設置 하였다. 圖鑑은 여러官廳의 管理들을 망라하여 組織 하였으며 總責任者인 도제조 (都提調) 1인은 政丞級 에서 任命하였다. 朝鮮의 제2대 오아에게 정종 (定宗)의 묘호 (廟號)를 올리는 儀軌로 당시 領議政이었던 김수향 (金壽恒)이 都提調를 맡았다.
헌종경릉산릉도감의궤
(憲宗景陵山陵都監儀軌)
헌종 (憲宗)이 昇遐한후 6월부터 11월까지 경릉 (景陵)의 造成 課程을 整理한 御覽用 儀軌다 元標地를 維持하고 있어서 御覽本 儀軌 標紙의 材料와 장정 方法을 알수있다. 草綠色 비단으로 表紙를 싸고 놋쇠로 變鐵을 대고 5개의 박을못 (朴乙釘)으로 固定시키고 박을못 밑에 둥근 菊花무늬판을 對語 製本을 했다. 變鐵의 中央에는 둥근 고리를 달았다.
의궤사목
(儀軌事目)
儀軌編纂에 관한規則.
1.儀軌는 堂上 세명과 도청 두명이 이어서 管理監督한다.
1.낭청 두명은 戶曹淨光 임세집 부사과 이수보가 이어서 管理監督한다.
1.堂上 도청 낭청은 本事에 宿直하는 것을 制外하고는 모든 共和에 參席하지 않으며 祭禮에도 差出하지 않는다.
1.堂上 도청의 도장 각1 과는 그대로 使用한다.
1.儀軌 5件中 御覽用은 1件이고 春秋館에 1건 議政府에1건 禮曹에 1건 江華府에 1건씩 나누어 保管한다.
인조장릉천릉도감의궤
(仁祖長陵遷陵都監儀軌)
1731년 3월 16일 에서 9월 初까지 朝鮮제 16대 王 仁祖와 그의 碑 인열왕후 한씨 (仁烈王后韓氏)의 장릉 (長陵)을 옮겨 새로 무덤을 造成한 課程을 記錄한 儀軌다 總 7책이나 되는 方臺한 儀軌의 제 1.2책으로서 도청 이하 여러府署에서 業務를 細密하게 粉粧한 사항과 儀軌의 具體的인 體制와 構成을 알수있다.
종묘영녕전증수도감의궤
(宗廟永寧殿增修都監儀軌)
1835년 (憲宗1년)10월부터 1836년 3월까지 宗廟의 正殿 과 永寧殿을 擴張하는 課程을 記錄한 粉狀儀軌다. 이 工事를 위해 1836년 1월에 宗廟와 永寧殿에 모셔져 있던 神位를 慶熙宮으로 옮겼고 3월 27일 제자리로 移安했다. 이 工事로 宗廟의 正殿과 永寧殿이 擴張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어진도사도감의궤
(御眞圖寫都監儀軌)
高宗 皇帝 御眞 과 皇太子 예진의 製作科程을 記錄한 皇太子용 즉 睿覽用 儀軌로서 붉은 비단을 表紙로 하였다. 이 行事는 高宗이 平壤에 지은 皇室 離宮인 風景宮의 太極殿과 中和殿에 御眞과 睿眞을 鳳眼하기 위해 열린것이었다.
현종명성왕후가례도감의궤
(顯宗明聖王后嘉禮都監儀軌)
顯宗이 王世子시 세자빈(후의明聖王后)을 맞이한 婚禮式 課程을 記錄한 儀軌로 동뢰연을 치르기 위해 別宮에서 宮闕로 가는 世子嬪의 연 (輦)과 이를 護衛하는 行列을 그린 班次圖이다. 王世子가 使臣을 보내 新婦를 모셔오도록 하였기 때문에 行列에 王世子는 그려지지 않았다.
순조순원왕후가례도감의궤
(純祖純元王后嘉禮都監儀軌)
純祖와 純元王后 金氏의 婚禮式 課程을 記錄한 儀軌로 친영 (親營)儀式을 마친後 國王이 친히 王妃를 宮闕로 모셔오는 場面을 담은 班次圖로 王의 연 (輦)이 그려졌다. 純元王后는 19세기 安東金氏 勢道政治의 形成에 重要한 役割을 한 人物로서 顯宗.哲宗代까지 垂簾聽政을 하였다.
납체의
(納采儀)
王이 婚姻을 請하는 儀式
헌종효헌왕후혼예가례도감의궤
(憲宗孝憲王后婚禮嘉禮都監儀軌)
憲宗이 孝憲王后를 맞이한 婚禮式 課程을 記錄한 儀軌다. 王과 大闕로 들어온 王妃가 서로 절하는 자리와 술과 飮食을 나누는 器物 配置圖가 그려져 있다.
인선왕후책례도감의궤
(仁宣王后冊禮都監儀軌)
孝宗妃인 仁宣王后 張氏를 世子嬪에서 王妃 즉 中宮殿으로 冊奉한 課程을 記錄한 儀軌로 金寶와 普通의 規格과 製作에든 材料를 記錄하였다. 조제조는 領議政 김육이 擔當하고 一方에서는 玉色을 製作하고 二方에서는 金寶를 三方에서는 玉冊과 金寶를 싣고 갈 어련의 製作을 擔當하였다.
영조왕세제책례도감의궤
(英祖王世第冊禮都監儀軌)
영인군 (英祖)을 王世弟로 冊奉한 課程을 記錄한 儀軌다. 당시 후사가 없었던 景宗 임금은 母后인 인원왕후 金氏의 뜻을 받들어 당시 28세인 異腹 兒憂 영잉군을 世弟로 冊奉하였다.
정조왕세손책봉교명
(正祖王世孫冊封敎命)
英祖가 正祖를 王世孫으로 冊奉 할때 내린 敎命이다. 敎命은 任命받는 地位의 尊貴함을 强調하고 責任을 다할것을 訓育하는 글로서 直招하여 華櫚하게 만들었다. 王室의 權威와 尊嚴을 드러내는 象徵物로서 賀詞되었으며 이것은 나중에 神位와 함께 宗廟에 모셔 保管되었다.
정조왕세손책봉옥인
(正祖王世孫冊封玉印)
英祖가 正祖를 王世孫으로 冊奉할때 내린 玉印이다. 玉印의 人面에는 왕세손인 (王世孫印)이아고 새겨져 있다. 王世子,王世子嬪,王世孫의 冊奉래가 擧行될때 교명 (敎命)과 함께 죽책 (竹冊),옥인 (玉印)이 내려졌다.
서궐영건도감의궤
(西闕營建都監儀軌)
火災로 折半가량 燒失된 경희궁 (慶熙宮)을 重建한 課程을 記錄한 儀軌다. 서궐(西闕)은 慶熙宮의 別稱이다. 傭僕全圖,和尙全圖등 建物圖形이 收錄되어 있어 지금은 大部分 사라진 慶熙宮의 모습을 確認할수 있다. 和尙殿은 정면 7칸의 팔작지붕 建物로서 지붕에 龍마루를 두지않은 建物이었고 執耕堂은 정면 5칸으로 높은 階段을 갖추었다.
이삼초상화
(李森肖像畵)
正裝 冠帽와 官服을 입은 이삼의 모습을 細密하게 描寫한 半身 肖像畵 이다.
보사복훈도감의궤
(保社復勳都監儀軌)
1699년 南人이 執權하면서 삭재되었던 保社功臣을 1604년 西人이 再執權하면서 다시回復시킨 課程에 대한 儀軌다, 6월29일 復勳을 命하였고 10월 12일에는 仁政殿에서 保社功臣을 回復시키는 敎書를 發表하였다. 그 課程에서 일부 功臣의 名單은 調整되기도 했다.
은 잔
(銀盃)
1734년 9월 18일 英祖가 부무공신을 불러 映花堂에서 잔치를 베풀고 어필시 (御筆詩)와 함께 하사한 銀盞이다. 잔 바닥 밑면에 물고기가 새겨져 있다.
소현세자예장도감의궤
(昭顯世子禮莊都監儀軌)
仁祖의 아들 昭顯世子의 葬禮에 관한 儀軌다. 儀軌의 構成은 道廳儀軌,異方儀軌,三方儀軌,순으로 構成되었으며 총 12면인 班次圖는 現存하는 世子의 葬禮 관련 班次圖 중 가장 이른 時期의 것이다. 白澤旗,玄鶴旗,표골타,金銅등 儀仗物이 行列左右로 늘어섰는데 王의 發靷 行列에 비해 그 種類와 規模가 적다.
인조장열왕후존숭도감의궤
(仁祖莊烈王后尊崇都監儀軌)
仁祖의 繼妃 莊烈王后에게 尊號를 올릴때의 意識 節次를 記錄한 儀軌다. 원 表紙를 維持하고 있어서 御覽本 儀軌 表紙의 材料와 章程方法을 알수있다. 草綠色 구름무늬 飛湍으로 表紙를 싸고 놋쇠로 變漆을 대고 5개의 박을못으로 固定시켰다. 變鐵의 中央에는 둥근고리를 달았다.
현빈예장도감의궤
(賢嬪禮莊都監儀軌)
英祖의 長男 효장세자의 빈인 賢嬪 趙氏의 葬禮節次에 관한 儀軌이다. 賢嬪은 1727년 嘉禮를 올렸으나 이듬해 효장세자가 腰絶하여 홀로지내다가 世上을 떠났다. 齋宮을 실은 對與의 뒤로는 배왕대,從事官2명,豫章圖鑑 一放 김조관 2명에 이어 곡 (哭)을 擔當하는 宮人 14명이 너울을 쓰고 말을타고 따라가는데 곡궁인의 周圍에는 흰배로 만든 帳幕으로 둘러 막았다.
순강원상시봉도감의궤
(順康園上諡封都監儀軌)
원종(元宗)仁祖의 父親의 生母인 仁嬪에게 경해(敬惠)라는 詩號를 올리고 그 墓所를 順康園으로 奉하고 祠堂과 墓所를 整備하는 過程을 記錄한 儀軌다. 그 중 廟宇造成所儀軌는 神主를 모시는 장인 신장을 비롯해 신탑,신의의 製作方法,材料 등이 記錄되어있다.
영조정순왕후가례도감의궤
(英祖貞純王后嘉禮都監儀軌)
正妃인 貞純王后가 死別한 英祖가 3년 喪을 마친 1759년에 15 세된 貞純王后 金氏를 繼妃로 맞이하는 婚禮時을 記錄한 儀軌이다. 六禮의 각 節次에서 備置 해야할 各種 器物들을 詳細히 記錄하였다. 英祖가 貞純王后를 데리고 宮으로 가는 50 면에 달하는 親迎班次圖가 실려 있는데 379필의 말과 1,299명의 人物이 登場한다.
문효세자묘명등록
(文嚆世子廟名登錄)
文嚆世子의 祠堂인 文嚆墓를 세우고 神主를 모신 課程을 記錄한 登錄이다. 登錄은 備邊司謄錄과 같이 각 官廳別로 論意된 主要事項을 날마다 記錄한 日誌를 뜻하는 경우가 많은데 문효묘명긴철등록(文嚆廟名緊徹登錄)을 題目은 登錄이지만 色滯나 內容은 儀軌와 同一하다.
효명세자책례도감의궤
(孝明世子冊禮都監儀軌)
純祖와 純元王后 金氏의 첫째아들 孝明世子 (翼宗)를 王世子로 冊奉한 課程을 記錄한 儀軌다. 敎命은 任命하는 地位의 尊貴함을 强調하고 責任을 다할것을 訓有하는 글이다 王世子에게는 竹冊과 玉印을 내려 任命하였다.
정해진찬
(丁亥進饌)
1887년 (高宗 24)에 열린 大王大妃 神貞王后의 八旬잔치중 景福宮 만경전에서 內進饌 場面의 一部를 縮小하여 製作 한것이다. 전시중인 (丁亥進饌圖) 內進饌을 參考 하였다. 당시에 高宗임금,王妃,王世子,王世子嬪,佐命府의 代表가 차례로 술잔을 올리고 音樂과 舞踊을 公演 하였다.
王室의葬禮
王과 王妃의 葬禮는 나라 全體의 哀悼속에서 嚴肅하게 치러졌다.
王 이승하하면 당일로 葬禮節次를 擔當할 臨時 關西인 殯殿都監,山陵都監,國葬都監등이 設置되어 일을 主觀하였다.
國王의 昇遐가 宣言되면 5일간 그 魂이 돌아오기를 기다린후 入棺 하였다. 禮法에따라 入棺後 5個月 同案 殯殿에 屍身을 모신 齋宮을 安置하였는데 殯殿都監에서 擔當하였다
山陵都監에서는 무덤인 山陵의 造成을 擔當하였다.
殯殿에 모신 齋宮을 葬地인 山陵까지 모시는 儀式은 王이 臨終 한지 5個月이 되는달에서 길일을 골라 치렀다
國葬都監이 主觀하는 國葬行列은 齋宮을 대여에 옮겨 실은 後 路祭를 거쳐 葬地로 向하였다.
王陵造成이 끝나면 虞祭를 지내 魂을 慰勞하고 神主를 모시고 宮闕에 돌아와 魂殿에 모셨다.
復:內侍가 宮闕지붕에 올라가 王의 옷을 흔들며 상위복(上位服)이라고 세차례 외친다. 이는 죽은王의 魂을 부르는것이다
殮襲:습은 王의 屍身을 沐浴시키고 狩衣를 입히는것 염은 옷과 이불로 屍身을 감싸는 것이다
成殯:염습이 끝난 屍身은 葬禮때까지 殯殿에 모셔졌다. 王衣冠은 齋宮이라 하였으며 이를 다시 찬궁이라는 큰 상자에 넣어 殯殿에 모셨다.
成服:昇遐 6일째 되는날 事主가 喪報으로 갈아입는다.
嗣位:王世子가 王位를 繼承하는것을 말한다.
上諡冊寶儀:죽은王에게 施策과 時報를 올리는 儀式이다.
殯殿都監에서 擧行하는儀式
國王이 昇遐하면 國葬을 치르기 위해
各種都鑑들이 設置되는데
國王의 屍身을 修習하고
殯所를 차리는것은 殯殿都監의 일이었다.
葬禮後 神主를 魂殿에 모시고 三年喪을 치르기위해
魂殿都監이 따로 設置되기도 했지만
대부분 殯殿都監에서 함께 主觀하였다.
國政都監에서 擧行하는儀式
發靭:王의 喪輿가 宮을 떠나 陵으로 감
路祭:葬地로가는 中間에 길에서 지내는 祭祀
下玄宮:임금의 관(齋宮)을 구덩이(현궁)에 묻음
題主:장사후 첫 제사(虞祭)에 쓰이는 神主인 宇宙에 글자를 씀
返虞:宇宙를 모시고 宮闕로 돌아옴
효종빈전혼전도감의궤
(孝宗嬪殿魂殿都監儀軌)
孝宗의 屍身 염습과 安置를 담당한 殯殿都監과 葬禮後 神主를 모시고 三年喪을 擔當한 魂殿都監의 일을 記錄한 儀軌다. 책머리에 소선,명정,영좌,찬궁,영침,등 殯殿都監에서 擔當한 12종 器物의 圖說이 收錄되어 있다. 이 儀軌는 殯殿都監儀軌와 魂殿都監儀軌가 1冊으로 합쳐져 있다.
인선왕후빈전도감의궤
(仁宣王后嬪殿都監儀軌)
孝宗妃 仁宣王后의 嬪殿 設置와 運營에 관한 儀軌다. 昇遐 5일째인 2월 28일 大廉을 마친 屍身을 齋宮과 贊宮에 넣어 戎服殿에 마련된 殯殿에 모셨다가 5월 28일 發靷하여 葬禮를 치렀다. 인선왕후혼전도감 (仁宣王后嬪殿都監儀軌) 儀軌와 짝을 이루는 儀軌다.
헌종빈전혼전도감의궤
(憲宗嬪殿魂殿都監儀軌)
憲宗의 嬪殿 殯殿과 魂殿을 設置하고 儀禮를 擧行한 科程에 관한 儀軌다. 國王의 嬪殿魂殿都監儀軌는 後繼 王이 王位를 이어받는 儀式인 사우가 포함되어 있다. 이 儀軌는 讓渡監이 嬪殿魂殿都監 으로 一元化된 한편 目次가 생기고 項目이 細分化되고 3책으로 분랸이 늘어나는등 英祖대 後半以後 變化가 생긴 19세기 儀軌의 體制를 보여준다,
헌종효현헌왕후가례도감의궤
(憲宗孝顯王后嘉禮都監儀軌)
憲宗이 孝顯王后를 맞이한 婚禮式 課程을 記錄한 儀軌이다. 同牢宴도에는 王과 大闕로 들어온 王妃가 서로 절하는 자리와 술과 飮食을 나누는 同牢宴의 器物 配置圖가 그려져 있다.
정순왕후가상존호도감의궤
(貞純王后加上尊號都監儀軌)
英祖의 繼妃인 王大妃 貞純王后에게 尊號을 가상하는 儀式 節次를 記錄한 儀軌로 玉寶를 채어에 싣고 옮기는 賓次圖가 그려졌다. 이때 올린 尊號는 명선 (明宣)으로 여섯번째 尊號에 該當한다.
사도세자휘지
(思悼世子徽旨)
朝鮮時代 王에게 대리청정 (代理聽政)을 委任받은 王世子가 命令을 내릴때 使用한 證票이다. 1749년 (英祖25)英祖가 사도세자 (思悼世子)에게 政治를 가르치기 위해 代理聽政을 시키자 世子는 이 徽旨로 署務를 處決했다. 徽旨에는 營造의 署名이 陰刻되어 있다.
영우원천봉도감의궤
(永祐園遷奉都監儀軌)
揚州 배봉산에 있던 思悼世子의 墓所인 永祐園을 水原府 華山으로 옮기는 課程을 記錄한 7책의 儀軌중 一方과 二方儀軌가 受祿된 제4책이다. 개 무덤인 顯陵院을 向해가는 發靷班次圖를 보면 棺을 모신 대여를 中心으로 左右에 三仙,진탁,護軍 오색촉룸,화첩촉룸을 든사람들이 나누어섰다.
현륭원원소도감의궤
(顯隆園園所都監儀軌)
水原府 華山에 思悼世子의 새 묘소인 顯陵을 造成한 內容을 整理한 儀軌이다. 元來 상,하 2책으로 構成되었는데 본 儀軌는 尙冊만 남아있다. 冊머리에는 原象閣을 비롯한 建物,녹로.各種 石物등 29개의 圖說과 靑龍,白虎,朱雀,玄武를 그린 四獸圖가 收錄되어 있다.
현빈묘소도감의궤
(賢嬪廟所都監儀軌)
英祖의 첫째아들 효장세자의 賓인 趙氏의 墓所造成 課程을 記錄한 儀軌이다. 正祖 卽位와 함께 효장세자와 孝順賢嬪이 眞宗과 孝順王后로 追尊되면서 英陵으로 格上되었다. 下級官廳에서 上級官廳으로 墓所를 造成하는 것에 관해 文義한 內容을 모은 品目集이다.
헌종국장도감의궤
(憲宗國葬都監儀軌)
의소세손예장도감의궤
(懿昭世孫禮葬都監儀軌)
1752년에 있었던懿昭世孫 의 禮裝에 관한 諸般事項을 記錄한 儀軌이다. 懿昭世孫은 思悼世子와 惠嬪洪氏 사이에 난 첫째아들로 正祖의 兄이다. 1751년 5월 王世孫으로 冊奉되었으나 이듬해 3월4일 3살의 나이에 生을 磨勘하였다. 이에 英祖는 무슨일로 國運이 沈滯의 運數를 當하여 내孫子를 죽게 하였더란 말인가? 임금이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기를 "세살짜리가 무엇을 알겠는가?"
백자청화사도세자묘지명
(白磁靑華思悼世子墓誌銘)
英祖가 죽은 아들인 思悼世子를 위해 直接지은 墓地로 늙은 아비로하여금 만고에 없이 子息을 죽이는 일을하게 했다.는 英祖의 깊은 歎息과 辯明이 적혀있다. 이 墓地는 思悼世子의 첫무덤인 永祐園터 에서 徽旨등과 함께 發見되었다. 水原 顯陵院으로 移葬할때 옮기지 않고 廢氣된것으로 推定된다.
文嚆世子를 孝昌墓에 葬事지냈다
이날 새벽에 發靷을 하였는데
임금이 弘化門 밖에 나와서 哭하고 餞別하였다.
葬事가 끝나자 임금이 親히 神主를 쓰고 初虞祭를 지내고
그대로 하룻밤을 지냈다.
문효세자예장도감의궤
(文孝世子禮葬都監儀軌)
文孝世子의 禮葬課程을 記錄한 儀軌이다. 文孝世子는 正祖와 正祖 의 後宮 儀賓 姓氏 사이에서 태어나 世子로 冊奉되었으나 5세가되던해 1786년 昌慶宮 別堂에서 짧은生을 磨勘하였다.
문효세자효창원부장품
(文孝世子孝昌園副莊品)
文孝世子는 正祖가 議賓姓氏에게 얻은 아들로 1782년 王世子에 冊奉되었으나 1786년 어린나이에 죽었다. 孝昌園에 安葬된 文孝世子의 名器類는 道器,靑銅,호.石材벼루와 함,그리고 白瓷로 만들어진 硯滴,함,소호 등으로 構成되었다. 靑華顔料로 粧飾된 萬壽晩福의 글귀가 눈에 띈다.
숙종인현왕후가례도감의궤
(肅宗仁顯王后嘉禮都監儀軌)
肅宗이 仁顯王后를 繼妃로 맞이한 婚禮式 課程을 記錄한 儀軌이다. 肅宗의 正妃인 隣境王后가 1680년 他界하자 다음해인 1681년 國葬을 끝낸후 바로 繼妃揀擇에 들어가 三揀擇에서 西人의 核心인 餘興 閔氏 閔維重의 딸이 揀擇되었다.
숙종인경왕후가례도감의궤
(肅宗仁敬王后嘉禮都監儀軌)
肅宗이 王世子때 세자빈(仁敬王后)을 맞이한 婚禮式課程을 記錄한 儀軌이다. 王世子에 冊奉된 肅宗은 그의나이 11세때 嘉禮를 올려 世子嬪을 맞이하였다. 世子嬪은 三揀擇 끝에 老論에 束하는 光山 金氏 金萬基의 딸로 決定되었다.
숙종국장도감의궤
(肅宗國葬都監儀軌)
朝鮮 19대왕 肅宗의 國葬에 관한 儀軌이다. 肅宗은 在位 46년 60세를 一紀로 敬德宮 傭僕澱에서 昇遐했다. 以後 發靷에 이르는 全體課程을 國葬都監에서 總括하였다. 屍身을 安置하는 殯殿을 設置하고 염습과 腹式準備하는 殯殿都監 무덤을 造成하는 山陵都監 葬禮를치른後 家臣主를 모시고 三年喪을 치르는 魂殿都監의 네도감의 일을 나누어 執行하였다. 殯殿都監의 擔當者가 魂殿都監의 일을 겸하였다.
숙종금보
(肅宗金寶)
肅宗의 昇遐後 肅宗의 廟號와 장문헌무 경명원효 (章文憲武 敬明元孝)의 詩號를 올리며 製作한 金보다. 尊號를 올릴때 王과 王妃가 살아있을때는 玉寶와 玉冊을 올리고 昇遐後에는 金寶와 玉冊을 올렸다.
숙종빈전도감의궤
(肅宗嬪殿都監儀軌)
肅宗이 死亡한 後 設置된 殯殿에서의 意識節次를 整理한 儀軌이다. 殯殿都監에서는 屍身을 安置하는 殯殿을 設置하고 염습과 복식을 準備하였는데 殯殿都監과 魂殿都監이 分離되어 儀軌가 編纂되기 始作한것은 1674년 (顯宗15)의 孝宗妃 人選王后의 國葬 때부터이다.
숙종산릉도감의궤
(肅宗山陵都監儀軌)
肅宗의 陵인 明陵을 造成하는 儀式節次를 記錄한 儀軌이다. 明陵은 1701년에 肅宗의 繼妃 仁顯王后의 陵所를 마련하면서 미리造成되었고 肅宗이 昇遐한후 이 곳에 나란히 묻혔다.
명성왕후부묘도감의궤
(明聖王后祔廟都監儀軌)
顯宗의妃 明聖王后의 三年喪이 끝난後 神主를 宗廟에 모시는 課程에 대한 儀軌다 부묘 行列의 主要構成을 살펴보면 前半部에는 白澤旗를 비롯한 倚仗들이 縱斑部에는 生前에 받았던 各種 矯命과 冊寶와 施策을 실은 가마가 차례로 이어지고 마지막으로 神主를 모시는 神輿와 神言이 配置되었다.
태조신의왕후태종원경왕후시호도감의궤
(太祖神懿王后太宗元敬王后詩號都監儀軌)
어용도사도감의궤
(御容圖寫都監儀軌)
肅宗의 肖像畵를 製作한 課程을 記錄한 儀軌이다. 完成 御眞의 正本 1건은 江華府의 昌寧殿에 小本 1건은 腎元閣에 保管했다. 5월 22일 肅宗이 備忘記를 내려 主管華奢 進在解는 品階를 올려주고 同參花詞 김진어 장태흥,장득만과 수종화사 진재기 허숙에게는 상현궁 1장을 상으로 주었다.
현사궁별묘영건도감의궤
(顯思宮別廟營建都監儀軌)
純祖의 生母인 秀嬪의 神主를 모실 別廟인 景祐宮을 建築하고 神主를 모신課程을 記錄한 儀軌이다. 顯士宮은 葬禮期間동안 秀嬪朴氏의 神主를 모신 魂宮 이었다. 책머리에 장당을 비롯한 景祐宮 全體의 配置圖와 神主를 모시는 監室 魂靈이 앉는 神塔의 彩色 圖說과 說明이 실려 있다.
김수항초상
(金壽恒肖像)
金壽恒은 丙子胡亂때 靑과의 和解를 反對한 代表的인 人物인 金尙憲의 孫子로서 憲宗,肅宗,代의 論爭에서 西人의 政治的 學問的 見解를 이끌었던 學者이자 官僚이다. 南人이 失脚한 1680년 以後 8년동안 領議政으로 있다가 己巳換局으로 南人이 政權을 잡은後 宋時烈과 함께 死士되었다.
陵寢을 옮겨 모실때에는
대저 나라의 百年 가까이 된 陵寢을 옮겨 모실때에는
깆춤새가 매우 重代하니 最大한 精誠을 다하는 道理가 있어야 한다.
여러 擧行하는 일들도 미리 愼重하게 準備하도록 都監에 分付하라
(仁祖莊陵川陵都監儀軌)
헌종효현헌왕후가례도감의궤
(憲宗孝顯王后嘉禮都監儀軌)
憲宗이 孝顯王后를 맞이한 婚禮式 課程을 記錄한 儀軌이다. 同牢宴度에는 王과 大闕로 들어온 王妃가 서로 절하는 자리와 술과 飮食을 나누는 同牢宴의 器物 配置圖가 그려져 있다.
정순왕후가상존호도감의궤
(貞純王后加上尊號都監儀軌)
英祖의 繼妃인 王大妃 貞純王后에게 尊號을 가상하는 儀式 節次를 記錄한 儀軌로 玉寶를 채어에 싣고 옮기는 賓次圖가 그려졌다. 이때 올린 尊號는 명선 (明宣)으로 여섯번째 尊號에 該當한다.
수빈휘경원원소도감의궤
(綏嬪徽慶園園所都監儀軌)
가장먼저돌아온 外奎章閣儀軌 正祖의 後宮이자 純祖의 生母인 憲木綏嬪 朴氏의 墓所 徽慶院 造成事業에 관해 記錄한 儀軌이다. 上,下로 이루어진 이 儀軌의 上卷은 1993년 9월 韓國을 訪問한 프랑스의 프랑수와 미테랑 大統領이 直接 傳達하였고 下卷은 2011년에 外奎章閣 儀軌 296권과 함께 故國의 品으로 돌아왔다.
한국의왕실의궤
프랑스國立圖書館 所長儀軌에 대한 박병선 博士의 書誌學的 硏究書로 1992년 서울大學校 奎章閣에서 프랑스語로 出版하였다. 이 冊은 外奎章閣 儀軌 297책에 대한 槪要및 페이지別 情報가 실린 本文과 프랑스語로 彩色桃板으로 構成되었다. 모리스 쿠랑의 韓國書誌,韓國의奎章閣,藏書閣에서 所長하고 있는 同一儀軌의 서지사함을 함께 收錄하였다.
화보
丙寅洋擾 당시 프랑스軍의 侵略課程을 描寫한 週刊誌이다. 1834년에 創刊된 프랑스 最初의 週刊誌이다. 丙寅洋擾에 參戰했던 프랑스 海軍 쥐베르가 寄稿한 1867년 1월 19일 기사인 Expedition de Coree 에는 당시 프랑스軍의 侵略課程과 戰鬪事項을 詳細히 描寫되어 있다. 外奎章閣으로 推定되는 建物앞을 行軍하는 프랑스軍의 모습이 담긴 스케치가 눈길을 끈다.
漁水門과 宙合樓
이곳에서 感歎하면서 볼수밖에 없고
우리의 自尊心을 상하게 하는것은
아무리 가난한 집이라도 어디든지 冊이 있다는 事實이다
(丙寅洋擾에 參戰했던 프랑스海軍 쥐베르의 朝鮮원정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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