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歷 史 旅 行 2/國內博物館

國立公州博物館

(國立公州博物館)

 

 

百濟文化를 保存하고자 하는 住民들이 듯을 모아 設立된 公州古跡保存會 와 公州史蹟軒敞會 를 母胎로 出發하였읍니다. 1940년 公州市 中洞에 公州博物館을 開館하였고 1945년 國立博物館이 되었읍니다. 2004년 熊津洞으로 新築 移轉 하였읍니다. 1971년  公州市 宋山里 古墳群에서 發掘助事된 武寧王陵 과 大田.忠南地域에서 出土된 國寶 19점 寶物 4점을 包含한 20,000여점의 文化財를 收集 保管하고 있으며 學術的 價値가 높은 重要有無은 常設展示와 特別展示를 通해 觀覽客이 感想할수 있도록 하고 있읍니다.

 

 

 

국립공주박물관

(國立公州博物館)

 

百濟文化를 保存하고자 하는 住民들이 듯을 모아 設立된 公州古跡保存會 와 公州史蹟軒敞會 를 母胎로 出發하였읍니다. 1940년 公州市 中洞에 公州博物館을 開館하였고 1945년 國立博物館이 되었읍니다. 2004년 熊津洞으로 新築 移轉 하였읍니다. 1971년 公州市 宋山里 古墳群에서 發掘助事된 武寧王陵 과 大田.忠南地域에서 出土된 國寶 19점 寶物 4점을 包含한 20,000여점의 文化財를 收集 保管하고 있으며 學術的 價値가 높은 重要有無은 常設展示와 特別展示를 通해 觀覽客이 感想할수 있도록 하고 있읍니다.

 

 

야외전시장

(野外展示場)

 

舊石器時代부터 新石器時代를 거쳐 馬韓과 百濟의 雄鎭사비時代 中心地로 役割을 한뒤 統一新羅로 이어지는 歷史와 文化를 보여주는 空間이다.

 

 

무령왕

(武寧王)

 

무령왕 (武寧王,  461년 혹은 462 ~ 523년, 재위: 501년~523년)은 百濟의 제25대 王 이다. 武寧王陵에서 發見된 地石에 따르면 462년 태어났고 이름은 사마(斯麻) 또는 융(隆)이다. 아버지에 대해서는 異見이 많다. 《日本書紀》에서는  蓋鹵王의 同生인 昆支王子의 아들이고, 東城王의 異服兄으로 記錄되어 있다.

 

 

진묘수

(鎭墓獸)

 

무덤을 지키는 想像의 動物 國寶 162호.

 

 

금동신발

(金銅)

 

王妃用

 

 

관장식

(金製冠裝飾)

 

國寶 154호 임금의 棺 粧飾用.

 

 

왕비의어금니

 

武寧王陵에는 王과 나란히 王妃가 누워있었다. 王妃의 墓誌石에는 王妃가 死後 3년이 지난 병오년 (丙午年)526 11월 천명(天命)대로 살다 돌아가셨다고 傳하고 있다. 그런데 武寧王陵 發掘  당시 어금니(大白齒)한개가 發見되었고 이 齒牙는 치의학 (齒醫學) 專門家들의 分析結果 10대와 20대 時節에 建康하게 자란 30대 女性의 것으로 推定되었다. 天明을 다했다는 墓誌石의 記錄과 分析 結果가 사뭇 동떨어진 內容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最近 이 齒牙는 사랑니로서 齒牙가 摩耗되는 程度만으로 나이를 推定하는 것은 힘들다는 硏究結果가 提示되기도 했다. 武寧王과 함께 묻힌 王妃는 武寧王의 아들로 王位를 이은 설왕 (聖王)의 어머니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王妃는 내세 (來世)에서는 安息을 비는 極盡한 葬禮속에 무덤에 묻혔을것이다.

 

 

귀걸이 

國寶 157호 王妃用 .

 

 

은팔찌

 

글자있는 龍 粧飾 國寶 160호.

 

 

오수전

(五銖錢)

 

양나라 무제 (武帝)때 만든것으로 523년 무령왕 (武寧王)의  죽음(死亡)에 즈음하여 양나라로 부터 百濟에 傳해진 것이다.

 

 

청동거울

(銅鏡)

 

武寧王陵의 靑銅거울은 널방 안에서 發見되었는데 王 쪽에서는 방격규구신수문경과 의자손수대경이 王妃쪽에서는 수문경이 나왔다. 이러한 形態 거울은 慶州 皇南大塚이나 武寧王陵릉 一部 遺跡 에서만 發掘되고 있으며 特權의 權威를 지닌 王이나 그에 버금가는 身分의 사람들만이 所有하고 있었던 位勢品이 었다. 또 같은 틀에서 똑같은 模樣을 하고있는 거울들이 우리나라와 日本의 古墳에서 함께 發掘되는 것으로보아 靑銅技術이 國家간의 交流를 通해 傳播되었음을 알수있다.

 

 

은 잔

 

王妃의 머리부근 南쪽 가까이에 놓여 있었던 銀으로 만든 盞은 盞과 뚜껑 그리고 盞을 받치는 盞받침의 細部分으로 이루어져 있다. 겉면에는 華櫚한 紋樣이 가득 粧飾되어 있는데 山과 山골짜기에 노니는 짐승.나무.연꽃잎.구름.龍과같은 그림들로 채워져 있어 마치 극락정토 (極樂淨土)의 모습을 담아낸듯하다. 

 

 

굽다리접시

(高杯)

 

武寧王陵을 덮고있는 흙의 東南쪽 保護樹 아래 부분에서 發見된 것으로 祭祀用으로 使用했던 土器이다. 그 位置로 보아 무덤內部에서 나온 遺物과 直接的인 關係는 없다고 推定하고 있다.

 

 

세형동검

(細形銅劍)

 

紀元前 3세기부터는 中國으로부터 鐵器 製作技術이 傳來되어 鐵材 道具들을 使用하는 鐵器時代가 始作된다. 이 時代는 鐵材 武器와 工具 農器具 등이 製作되고 細形銅劍 이라고도 불리는 韓國式 銅劍과 손잡이粧飾 잔무늬거움 靑銅방울 등 매우 細漣되고 多樣한 形態의 靑銅器들이 製作되어 使用된다. 土器의 아가리부분에 점토띠를 두르거나 검은색으로 마연 (磨硏)한 토기가 製作되기 始作하여 무덤의 形態도 木棺을 安置한 主位에 돌을 쌓는 形態가 나타난다.

 

 

금동관모

(金銅冠帽)

 

公州 수촌리 出土.

 

 

닭모양단지

 

닭모양 단지는 이름 그대로 닭머리를 한 酒煎子의 모습을 하고있다. 옛 中國의 說話에 道人들이 丹藥을 먹고 神仙이 될때 닭과 개도 이를 쪼아먹고 하늘로 올라같다는 이야기가 傳 한다. 닭모양 단지는 神仙思想이 風味하던 中國서진 부터 남조 때까지 많이 使用되다가 그 以後에는 점차 줄어들고 있다. 동진때 까지 몸통이 둥근 구형이 中心을 이루다가 남조에 들어서면서는 목이 길어지는등 實用的인 模樣으로 變해간다.

 

 

연꽃무늬수막새

 

百濟기와를 代表하는 연꽃무늬수막새는 운진천도 以後 남조의 影響을 받아 登場하였다. 百濟의 기와製作은 漢城時期부터 始作되지만 웅진 ~ 사비기에 걸쳐 많은 官衙와 寺刹이 新築되면서 多樣한 種類와 華櫚한 무늬를 가진 막새기와들이 製作되어 百濟의 獨自的인 기와 文化로 發展하였다. 7세기 以後 태극무늬와 민무늬 막새기와가 登場하고 연꽃무늬 수막새도 더욱 華櫚하게 粧飾되었다. 百濟는 기와를 만드는 와박사 (瓦博士)를 日本에 派遣하여 日本 古代의 아스카 文化의 形成에도 큰 影向을 미치게 되었다. 

 

 

도제불상대좌

(陶製佛像臺座)

 

1986년 靑陽郡 본의리에 있는 百濟時代 가마터에서 破片으로 修習되었으며 復元 結果  超大型 佛像 받치으로 밝혀졌다. 左右 對稱의 옷자락이 가지런한 아름다움을  보이며 自然스럽고 부드러운 주름처리를 하고있다. 이러한 樣式은 法隆寺 금당석가삼존 (法隆寺金堂釋迦三尊)등 일본의 佛像받침에 傳承되고 있어 당시 百濟 佛敎美術의 國際的 位相을 살펴볼수 있다. 製作時期는 百濟末期인 7世紀경으로 推定된다. 

 

 

금동관음보살입상

(金銅觀音普薩立像)

국보 제 247호

 

 

계유명천불비상

(癸酉銘千佛碑像)

 

지붕모양을 한 덮개돌과 연꽃무늬받침 몸체를 각각 따로 만든  碑石模樣이며 앞면 에 작은 佛像들이 수없이 새겨져 있다하여 천불비상 (千佛碑像) 이라한다. 佛碑像의 아래쪽에 있는 三尊佛의 左右에는 계유(癸酉) 673년 4월 15일에 百濟 遊民 250명이 國王大臣 7歲父母 法戒衆生을 (國王大臣 7歲父母 法界衆生) 위하여 이 佛像을 만들었다고 記錄되어있다. 統一新羅 初期 百濟 옛땅에 百濟佛敎와 美術의 傳統이 繼承되고 있었음을 알려준다. 國寶 제 108호

 

 

서혈사지석불좌상

(西穴寺址石佛坐像)

 

公州市 雄鎭洞 서혈사터에서 發見된 부처상이다. 왼손은 손바닥이 위로 向 하도록하여 다리위에 얹었고 오른손은 무릎위에 올리고 손가락을 살짝들어 올린 향마촉지인 (降魔觸地印)을 취하고 있다. 대좌는 여덟 잎의 연꽃을 表現하였으며 對座를 받치는 地臺石에는 極樂의 天使인 천인 (天人)과 人間의 얼굴을 한 想像의 새 가릉빈가 (迦陵頻伽)를 새겼다. 全體的인 姿勢와 細部彫刻守法으로 보아 統一新羅時代인 8世紀경에 製作된 것으로 推定된다. (寶物 제979호)

 

 

통일신라토기

(統一新羅土器)

 

忠南地域 곳곳에서 發掘 助士된 統一新羅時代 遺跡에서는 당시의 모습을 보여주는 많은 遺物들이 出土되고 있다. 특히 이  무덤에서는 百濟의 무덤에 많이 副葬되었던 항아리 바리 개배 대신 당시 流行하던 塗裝무늬로 粧飾된 합,병,완 등 多樣한 新羅土器들이 出土되었다. 또한 保寧 진죽리와 公州 架橋里에서는 塗裝무늬로 粧飾된 吐器를 만들었던 統一新羅時代 가마터가 發見되어 百濟地域에서도 本格的인 新羅 文化가 자리 잡았음을 보여주고있다.

 

 

돌사자

(石獅子)

 

公州 반죽동 대동사터에서 出土되었다고 傳하는 돌師子 두마리로 分利된 것을 石燈의 間柱石으로 推定하여 復元하였다. 八角의  蓮花臺石 위에 師子 2구 가 가슴을 맞대고 고개를 든채 앞다리와 입으로 힘껏 上代石을 받치는 姿勢를 取하고 있다. 이처럼 石燈의 間柱石에 該當하는 部分에 師子 2마리를 마주보게 세워 燈불을 넣는 화사석을 받치는 모습은 우리나라에서만 流行한 독특한 型式이라고 한다. 代表的인 統一新羅시대 雙獅子 石燈으로는 報恩 法住寺像師子,石燈 光陽 中興山城 雙獅子石燈,陜川 靈岩터 雙獅子 石燈이 있다.

 

 

대통사석조

(大通寺石槽)

 

석조 (石槽)란 돌을 파서 물을담아 쓰도록 만든 큰 물통으로 절에서 물을 담가두거나 큰 行事가 끝난후 그릇을 씻을때 또는 연 을 기르기 위해 使用한다. 이들 石造는 代動詞 의 강당터 앞족에 나란히 있던 것이다. 統一新羅時代의 四角形 서조와는 달리 연곷무늬가 彫刻된 둥근 받침돌 위에 올려져 있고 石造의 가장자리에 한가닥 띠를 돌리고 몸 中央에는 약간가는 두줄의 띠가 새겨져 있다. 百濟文化 特有의 우아한 造形美를 지닌 이 石造는 發見된 場所의 이름을 따서 각각 반죽동 石造 (寶物 제 149호)中動石造 (寶物 제 148호)로 불리고 있다.

 

 

귀걸이

國寶 156호 王의 귀걸이

 

(刀)

 

龍,鳳凰을  粧飾식한 큰 칼은 주로 三國時代 王陵급 무덤에서 出土 되는데 무덤의 主人公이 最高의 身分을 가진 사람이었음을 나타내는 象徵物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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